새생명체로 거듭나고 성장하라

 

기독교 신앙은 거듭남이라는 기적을 통해 영원히 그 생명을 이어간다. 거듭남은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이 사역이다. 거듭남은 이성적인 추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사건이다. 거듭남의 체험을 설명할 수 있는 심리학자는 없다.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 날이 이르면, 자신이 거듭남의 기적이 없이 단지 기독교 신앙을 정신적으로 동의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충격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기계문명의 시대와 더불어 도래한 ‘인스턴트 기독교’는 기독교적인 삶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스턴트 기독교는 새 신자가 갓난아이와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발육을 위해 적절한 양분섭취와 운동이 필요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성장의 능력을 지닌 갓난아이와 같다. 따라서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성장이 둔화되거나 발육이 지체되기도 하고, 또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따라서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만 건강하고 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올바른 가르침이 없으면 신자의 영적 성장은 둔화될 수밖에 없다.

 

자기애를 믿음으로 위장하지 말라

 

우리는 죄를 제거하지 않고 세련되게 위장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한 가지 죄를 다른 죄로 바꿔치기 했을 뿐인데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예를 들어 회개를 장소의 변화와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한때 는 먼 타국의 돼지치기들과 어울리며 죄를 짓고 살다가 지금은 왼견상 훨씬 더 깨끗하고 존경할만한 경건한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더라도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불결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교만의 경우에도 종교적인 영향 아래 이른바 자긍심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하나님의 가증스럽게 여기는 자기애를 도모하면서도 겉으로는 성경말씀으로 위장해 교묘하게 그 실체를 숨기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럴 경우에는 문제가 깨끗이 청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으로 더욱 깊이 숨어든다.

험담을 일삼고 문제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사람이 회심을 하게 되면 ‘영적 조언자’로 변신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좀더 깊이 관찰해 보면 이전과 다름없이 강한 호기심과 불안정한 심리상태는 그대로인 것을 보게 된다. 즉 외양만 변했을 뿐 내면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태다. 사탄은 이런 식으로 교회 안에 침투해 중상과 분열을 조장하고 신자들을 연약하게 만든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기 행각으로 인정되는 사업수완도 그리스도인이 기도한 뒤에 적용한 경우에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자 하나님이 그일에 함께 동참하신다는 증거로 크게 선전된다.

지금까지 열거한 여러 사례는 죄가 그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얼마든지 외양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은 죄를 세련되게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무엇을 믿는가?

 

참 믿음은 마음을 거룩하게 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한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 하지만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아니다. 믿음이 요즘처럼 큰 인기를 누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믿음을 인간의 도덕적, 영적, 경제적 질병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으로 간주한다. 강한 믿음만 있다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신념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믿음의 가치를 부르짖는다. 무엇을 믿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믿으며 된다.

이런 현실의 배후에는 믿음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사용할 수 있는 우주의 절대적인 힘이라는 모호한 개념이 도사리고 있다. 믿음만 있으면 절망, 공포, 패배, 실패 등이 사라지고 희망, 자신감, 자기통제를 비롯해 전쟁과 사랑과 스포츠와 사업과 정치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모든 사람을 지배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진리를 믿을 때만 믿음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거짓을 믿으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단지 ale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리이신 하나님에 관한 진실을 믿어야만 한다.

참 믿음은 하나님이 그분 자신에 관해 말씀하신 것과 우리 인간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다. 먼저 우리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전에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을 수 없다.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종교는 바로 여기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분에 대해 말한 모든 증거를 믿는 것이다. 우리가 영접한 예수님은 우리의 상상에 의해 날조되거나 우리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참 믿음은 언제나 복종을 요구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신념에만 귀를 기울이는 감상적인 믿음의 청산가리만큼이나 치명적이다.

자기의 신념을 믿은 믿음은 거짓믿음이다. 그런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가기를 바라는 것은 어둠 속에서 두 동간난 다리를 건너겠다고 차를 몰고 질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믿음은 혁명이다

 

초창기 루터교 신자들은 “믿음은 사람을 동요하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교리가 요즘에는 이상하게 변질되었다.

바울과 루터가 말한 믿음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믿음은 개인의 삶을 온통 뒤흔들 뿐 아니라 그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믿음은 개인의 삶을 완전히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 믿음은 최종적인 권한을 지닌다.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삶의 우선순위를 올바로 결정하게 한 뒤 하나님이 뜻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오늘날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피종적인 동의를 표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소곳한 태도로 영혼 구원에 열중하는 전도자의 가르침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며 믿음을 갖게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믿음은 사람들을 동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편안하게 해준다. 그런 믿음은 자아의 표면을 깨끗이 닦아주고 자긍심을 회복시켜 준다.

기독교가 장난삼아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오직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된 사람만이 진정한 성경적 신앙의 소유자라고 자신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계획 가운데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믿음이 있어야만 그리스도의속죄사역이 가져다주는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믿음은 순종을 낳는다

 

나는 지난 수년 동안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전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교리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은 결코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사실로 알고 있는 진술문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에 근거한 믿음도 일종의 믿음이기는 하지만 결코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이성에 근거한 믿음은 확실한 증거를 받아들이는데 그칠 뿐 도덕적이거나 영적인 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맞춘다. 참 믿음은 거짓을 말할 수 없으신 하나님의 도적적인 완전함 위에 다른 증거를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한다. 믿음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것을 뜻한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믿음은 회개하는 영혼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선물일 뿐 감각이나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자료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믿음은 기적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실 때 믿음이 생겨난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는 행동은 믿음이 아니라, 믿음에 미치지 못하는 다른 어떤 것이다.

믿음과 도적적인 삶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믿음의 본질은 도덕적이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분을 주님으로 알고도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지극히 불완전하며 결국에는 거짓으로 드러날 뿐이다. 참 믿음을 지닌 사람은 순종한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만 믿음을 허락하신다. 참된 회개가 있는 곳에는 항상 순종이 뒤따른다.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에 이르는 그릇된 교리를 피하려다가 우리는 순종이 없는 구원을 말하는 극단에 치우쳤다.

 

믿음은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아홉 걸음을 다가오신다. 하지만 마지막 열 걸음을 떼어놓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지만 우리 대신 회개하실 수는 없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믿는 신종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다.

생명을 유지하려면 날숨과 들숨이 조화를 이루어야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면 반드시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친구를 우리의 친구로, 그분의 원수를 우리의 원수로, 그분의 길을 우리의 길로, 그분의 고난을 우리의 고난으로, 그분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그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그분의 미래를 우리의 미래로 받아들여야 한다.

온 세상에 새 생명을 얻지 못하게 속이는 마귀의 책략이 설치되어 있다. 맡기는 믿음으로 포장해 겉으로는 아무런 위험도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생명을 노리는 계책이 설치되어 곳을 하나 예로 들자면, 바로 기도다.

하나님이 항상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승낙’은 물론 ‘거절’도 응답이고, 또 구하는 것과 다른 것을 허락하실 수도 있다는 논리를 종종 듣는다. 하지만 그런 논리는 불순종 때문에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데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함으로써 기도하는 자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려면 다음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반드시 하나님이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둘째,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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