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암살

 

댈러스를 배회하는 케네디의 유령

 

▲ 19일 새로 공개된 케네디 암살 직전의 사진. 동영상은 케네디 암살 박물관 홈페이지(www.jfk.org/home.htm)에서 볼 수 있다.

ⓒ2007 Six Floor Museum 제공

 

지난 19일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암살 직전 상황을 보여주는 새 동영상이 공개됐다. 아마추어 사진작가 조지 제프리가 40년 넘게 보관해 온 동영상을 미국 대통령의 날에 맞추어 댈러스 케네디 암살 박물관(Six Floor Museum)이 공개한 것. 이 동영상에는 케네디가 암살된 댈러스시 다운타운 옛 텍사스 교과서 보관창고(Texas School Book Depository) 건물 앞을 지나기 직전 90여 초 간의 장면이 담겨 있다.

암살 진상조사 과정에서 아브라함 자프루더의 동영상 등 여러 편의 동영상이 공개됐으나 새롭게 공개된 동영상은 케네디의 부인이었던 재키 케네디의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났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가 암살된 이후 40년이 훌쩍 넘었지만 미국의 언론들은 이 동영상의 공개를 비중 있게 다루었다. 공식 언론 말고도 암살 장소 인근에는 아직도 케네디 암살 관련 음모론을 믿으며 관련 책자를 파는 사람들이 있고, 그 책자를 소중하게 구입하는 하루 수 천명의 관광객들이 있다.

이 관광객들은 암살 박물관 1층 공식 기념품점보다 음모론 관련 기념품만 모아 놓은 '음모론 박물관(Conspiracy Museum)'을 더 많이 찾는다. 미국인들은 '케네디'라는 이름이 주는 상징성에 흥분하고 그의 암살 이후 나타난 '집단 트라우마(trauma,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듯 하다.


결론이 다른 두 진상조사

케네디 암살 이후 진상조사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첫째는 암살 직후인 1964년 케네디에 이어 대통령이 된 린든 존슨에 의해 구성된 '워런 위원회(Warren Commission)'였다. 이 위원회는 케네디 암살 후 2시간 만에 붙잡힌 전 해병대 저격수 리 하베이 오스왈드에 의한 단순 범행으로 결론내렸다.

체포 직후 자신은 "희생양(patsy)"이라고 주장했던 오스왈드가 잡힌 지 이틀 만에 잭 루비에 의해 암살되고, 교도소에서 잭 루비마저 폐렴으로 죽어 사건의 진상이 묻힐 뻔 했다. 하지만 케네디 암살은 한 검사의 용기 때문에 다시 파헤쳐 지게 됐다.

1967년 뉴올리언스주 검사였던 짐 게리슨은 케네디 암살 음모 혐의로 지역 유지였던 클레이 쇼를 법정에 세웠다. 이 재판은 케네디 암살 진상조사를 다시 하라는 여론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미 연방 하원은 1976년 '암살특별위원회(HSCA, the House Select Committee on Assassinations)'를 구성해 케네디 암살 사건을 다시 조사했다.

HSCA는 워런 위원회와 달리 "음모의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내려 전 미국을 뒤흔들었다. HSCA의 결론은 91년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 JFK >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 케네디 암살 장소인 댈러스시 다운타운 엘름(Elm) 도로에 온 관광객들. 사진 오른편 도로 가운데 X표시(원 안)가 케네디 전 대통령이 두 번째 총알을 맞고 즉사한 장소.

ⓒ2007 신기해


단독범행 vs. 제2의 암살자


음모론의 핵심은 "오스왈드 외에 제2의 암살자가 있었다"는 것. 암살자가 2명 이상이라면 암살은 누군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계획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 '누군가'의 정체를 밝히는 게 사건의 핵심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오스왈드 단독 범행이냐, 제2의 암살자가 존재하는가라는 논쟁은 각각의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팽팽하게 진행됐다.

단독 범행의 증거는 오스왈드가 총을 쏘았던 텍사스 교과서 보관창고 6층 바로 아래층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위층에서 3발의 총성을 들었다"고 한 증언, 같은 장소에서 발견된 총에 오스왈드의 지문이 묻은 것, 케네디가 타고 있던 차와 그 인근에서 발견된 3발의 탄알이 모두 한 종류라는 것, 아브라함 자프루더의 동영상에는 뒤에서 총을 맞았기에 케네디의 피가 앞쪽으로만 터진다는 것 등이었다.

반면, 제2의 암살자가 존재한다는 측은 워런위원회 조사 당시 케네디 앞쪽에서도 총성이 들렸다고 한 35명의 증언, 총에 맞은 케네디를 보호하며 병원까지 호송한 경호원 클린트 힐과 병원 의사들이 "케네디 대통령의 오른쪽 뒤편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고 해 총알이 앞쪽에서 날아온 것으로 짐작케 한 증언, 전 해병대 저격수 훈련교관들이 "오스왈드가 가진 이탈리아제 '만리커 카르카노' 총으로는 워런위원회가 조사한 대로 2.3초 안에 2발의 총알을 발사할 수는 없다"고 한 증언 등을 근거로 들었다.


음모론, CIA에서 이스라엘까지

제2의 암살자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암살을 계획한 세력들의 정체에 대해 나름의 논리를 펴 왔다.

가장 유력한 것은 CIA 연루설. 케네디 이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쿠바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피그만 침공' 계획을 세웠다. 케네디 취임 직후인 61년 이 계획은 실행됐지만 실패로 돌아가면서 CIA에 대한 케네디의 신뢰가 추락했다. 이후 CIA의 해외 공작을 케네디가 자주 제지하면서 CIA는 대통령을 갈아치울 계획을 세웠다는 것.

케네디 당시 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이 뇌물 수수 등 자신의 정치적 스캔들을 책망하던 케네디를 죽이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려 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동서 냉전이 최고조를 이루던 당시 소련이 케네디 암살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물론, 가톨릭 신자였던 케네디가 아랍 정부를 옹호하고 자신의 핵개발을 저지하려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정보조직이 케네디를 죽였다는 음모론까지 대두됐다.

▲ 10년 이상 케네디 암살 장소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음모론 관련 책자를 팔고 있는 제임스씨와 그가 파는 '음모론 신문'.

ⓒ2007 신기해

 

음모론 전도사들 "이 사진을 보세요!"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는 케네디 암살. 미국 사람들은 공식 진상조사 결과 보다 음모론에 더 솔깃하다. 2003년 ABC 방송의 조사에서 70%의 미국인들은 아직도 "케네디가 음모에 의해 살해됐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1일 케네디 암살 장소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10년 이상 음모론을 소개하는 책자를 팔고 있는 제임스를 만났다. 그는 그 70%의 미국인들 중 한 명이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사진을 보세요. 케네디가 타고 있던 차가 지나가려던 저 앞쪽 다리 위에 정체 모를 한 사람이 급히 몸을 숨기는 게 보이죠. 그가 분명 제2의 암살자였을 겁니다. 그 동안 진상위원회는 이 사진을 전혀 조사하지 않았어요. 다리 위에는 분명 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하수구가 있어 이 암살자가 다른 곳으로 쉽게 피할 수 있었는데 위원회는 조사하지 않았죠."

곁에서 그의 설명을 듣는 서 너 명의 관광객들은 그의 말을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가 설명한 다리를 연신 카메라에 담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그 중 몇 명은 주머니를 털어 제임스가 건낸 잡지와 신문을 사 들었다.

같은 장소의 또 다른 음모론 전도사인 로버트는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 그림을 보세요. 진상조사 위원회는 오스왈드가 쏜 첫 번째 총알이 케네디의 목을 통과한 뒤 케네디 앞쪽에 타고 있던 당시 텍사스 주지사 코넬리의 오른쪽 어깨 부분을 통과했다고 밝혔죠. 하지만 왼쪽으로 날아가던 총알이 어떻게 방향을 갑자기 바꿔 코넬리의 오른쪽 어깨를 지날 수가 있죠?"

▲ 음모론 박물관

ⓒ2007 신기해

 

케네디 암살 공식박물관이 있는 곳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는 사설 '음모론 박물관'이 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 위해 잠시 문을 닫았으나 한창 음모론에 대한 전국적 관심이 일 때는 하루 수 백 명이 이곳을 들렀다. 공식 박물관보다 관광객 수가 더 많았던 것.

이 박물관에는 케네디 암살과 음모론을 보도한 당시 신문들, 오스왈드와 그를 암살한 잭 루비에 대한 기사와 소장품들, 음모론 관련 각종 책자들이 전시돼 있었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대통령

이런 음모론에 대한 끊이지 않는 관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암살 사건을 둘러싼 추리 자체가 매력이기도 하지만 케네디에 대한 미국인들의 진정한 추모에서 나온 관심이다.

재임 기간 3년이 채 안 되는 대통령에 대해 미국인들은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이나, 노예 해방의 영웅 에이브러햄 링컨만큼이나 케네디에 대해 존경심을 감추지 않는다. 그가 남긴 프론티어 정신, 우주 계획, 쿠바 미사일 위기 타개 등의 업적은 이런 존경의 부차적인 원인이다.

43세에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미국인들의 뇌리에 '희망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는 진정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외교관의 자녀로 태어나 프린스턴, 하버드대에서 수학한 그가 2차 대전에 형과 마찬가지로 해군으로 참전해 목숨을 무릅쓰고 부하를 구해냈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을 수 있었다.

신기해 기자

오마이뉴스 2007-02-24

 


 

케네디 암살 음모론 또 다시 '모락모락' 

케네디 암살은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 아니라는 주장이 또 다시 수면 위로 떠올라 케네디 암살과 관련한 의혹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전(前) 미 연방수사국(FBI) 소속 금속 전문연구원 윌리엄 토빈을 비롯한 탄환 전문가들은 '존 F 케네디 전(前) 대통령이 리 하비 오스왈드가 쏜 2발의 총탄을 맞고 암살됐다'는 미 정부의 결론을 반박,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총탄 파편 성분을 화학적·통계적으로 새롭게 분석한 결과 2발 이상의 총탄이 대통령을 관통한 것으로 보인다며 제2의 암살범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이어 탄환 전문가들은 이제껏 잘못된 증거에 근거해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이 단독범행에 의한 것이라 정당화해 왔다며 미 정부는 지난 1963년 대통령이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암살됐을 당시 몇 발의 총알을 맞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총알 파편들을 재수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워렌위원회로 알려진 케네디 암살 진상조사위원회는 지난 1964년 오스왈드의 총기에서는 3발의 탄환이 발사됐으며 이 가운데 1발은 빗나가고 2발만이 대통령을 관통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이 같은 결론에 의혹이 계속해서 제기되자 미 의회 하원은 오스왈드 이외에도 제2의 암살범이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제2의 암살범이 쏜 총탄은 케네디 대통령을 맞추는 데 실패했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하원의 근거는 총탄 파편을 분석한 결과 파편들의 성분이 2개 이상의 총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유사했다는 것.

하지만 토빈을 비롯한 탄환 전문가들은 오스왈드의 총에서 나온 다른 탄환들도 모두 유사한 성분으로 이뤄졌으며, 더 나아가 탄환 30개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암살 현장에서 발견된 파편 가운데 1개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이어 "이는 암살에 사용된 탄환이 3개 혹은 4개였음을 의미한다"며 "만약 암살에 사용된 총탄 파편들이 3개 혹은 4개에서 나온 것이라면, 제2의 암살범이 존재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배혜림기자 beh@newsis.com

워싱턴=로이터/뉴시스 2007-05-20

 


 

 마피아 두목 딸 "케네디 암살은 마피아 소행"

 (시카고 UPI=연합뉴스) 존 에프 케네디 미 대통령 암살 사건은 당시 시카고의 암흑가 거물이었던 샘 지앙카나가 부하들에게 시킨 일이라고 지앙카나의 딸이 주장했다.

1984년에 "마피아 공주"(Mafia Princess)라는 제목의 베스트셀러 회고록을 냈던 지앙카나의 딸 앙투아넷 지앙카나(70)는 곧 출간될 "JFK와 샘:지앙카나와 케네디 암살 커넥션"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 책은 1960년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던 대통령 선거에서 케네디가 일리노이주에서 승리해 대선에서 확실히 이길 수 있도록 마피아가 지원하면서 당선 후 마피아에 관대한 자세를 보일 것을 기대했으나 케네디는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를 법무장관에 앉히고 마피아를 단속했다고 암살 배경을 기술했다.

샘 지앙카나는 1975년 시카고 지역의 자택 지하 주방에서 총에 맞아 피살됐으며 이 책에는 당시 미중앙정보국(CIA)이 지앙카나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돼있다.

이달 중 출판될 217쪽 짜리 이 책은 신경과 의사 존 휴즈와 정신과 의사 토머스 조비가 앙투아넷 지앙카나와 공저한 형식으로 돼있으나 대부분의 자료 조사와 저술은 휴즈가 했다.

휴즈는 시카고 선타임즈지와의 회견에서 앙투아넷 지앙카나를 저술에 끌어들인 데 대해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2005-10-11

 


 

‘케네디 암살’ 음모론이 살아나고 있다


 ▲ 케네디 대통령이 1963년 11월 22일 저격 당하기 1분 전 카퍼레이드 하는 모습.


케네디 암살 음모론이 살아나고 있다
마피아 두목 지앙카나의 딸 "아버지의 지시" 주장한 책 출간··· 극우파 음모론도 확산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암살을 둘러싼 의혹이 요즘에도 끊이지 않고 있다. 케네디는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댈러스시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던 중 암살당했다. 범인은 오스왈드로 발표됐다. 오스왈드는 수사를 받던 도중 잭 루비라는 나이트클럽 지배인에 의해 살해됐다. 그리고 잭 루비는 수감 중에 사망했다. 이처럼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대통령을 암살한 범인과 그를 살해한 범인이 허탈하게 죽음을 당하게 되자 당연히 사람들은 뭔가 숨겨진 음모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케네디 암살사건 당시 시카고 암흑세계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마피아 두목 샘 지앙카나의 딸 앙투아네트(70)가 ‘JFK와 샘:지앙카나와 케네디 암살 커넥션’이라는 책을 통해 “케네디 암살은 지앙카나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케네디가 마피아의 지원으로 대통령에 당선됐음에도 불구하고 마피아를 단속했기 때문에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음모설은 이것만이 아니다. 미국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은 1991년 ‘케네디 암살은 미국 군산복합체 등 극우세력의 음모’라는 내용의 영화 ‘JFK’를 제작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처럼 케네디 암살을 음모론적인 시각에서 보는 출판물이나 영상물이 미국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미국인의 상당수가 ‘케네디 암살은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라는 정부의 발표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2003년 ABC방송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도 미국인의 70%는 음모론을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응답자의 51%는 ‘오스왈드말고도 제2의 암살범이 있다’고 답했다.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을 믿는 사람은 32%에 불과했다. 특히 음모론의 신봉자는 1960년대의 40%에서 세월이 흐를수록 증가하고 있다.


음모론이 나오는 정황

젊고 잘 생긴 영웅적인 인물이 뜻을 다 펴지못하고 죽으면 사람들은 못내 아쉬워하며 전설과 소문을 만들어내는 법이다. 그런 것말고도 케네디 암살의 경우는 음모론이 들어설 정황이 충분하다.

첫째, 당시는 미·소 냉전의 절정기였다. 많은 미국 사람은 ‘미국 대통령을 죽인 것은 소련의 공작원’이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소련이 본격적인 핵공격을 하기 전에 미국 대통령을 살해해 미국 전체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했다. 때문에 미국의 정치 지도부는 대중에 ‘소련이나 쿠바의 공격은 없다’는 점을 확인시켜야 했다. 미국의 정치 지도부가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에 대한 공포를 걷어 내기 위해 먼저 한 일은 ‘대통령 암살은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라는 점을 믿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같은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그 이전에 CIA가 시도했던 쿠바 지도자 카스트로 암살계획 등을 은폐했다. 카스트로 암살계획이 드러날 경우 케네디 암살과 관련, 모종의 음모가 있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살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나중에 카스트로 암살 계획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진짜 정부가 뭔가를 숨겼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음모론을 갖게 됐다.

둘째, ‘CIA가 자료를 지나치게 은폐함으로써 음모론에 불을 지피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케네디 암살을 조사한 암살기록 검토국(Assasination Records Review Board)이 수천 쪽의 민감한 기록들을 공개했지만 CIA에는 아직도 미공개 문서가 쌓여 있다. 1970년대에 CIA는 오스왈드가 암살을 행하기 이전에 멕시코시티에서 활동한 것에 관한 도청기록 등을 끊임없이 파괴했다는 사실이 미 하원조사위원회에 의해 드러났던 적이 있다. 이런 은폐 사례들이 끊임 없이 음모론을 유발하는 것이다.

암살사건 발생 당시의 정황도 의문투성이다. 하원 암살조사특별위원회를 자문했던 로버트 블레이키(Robert Blakey)는 “오스왈드를 포함해 2명의 암살자가 있다”고 주장했다.


마피아 음모설

케네디는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마피아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특히 루이지애나주에서는 카를로스 마르첼로, 일리노이주에서는 샘 지앙카나 등의 마피아 보스들이 유권자에 대한 협박과 매수를 통해 케네디의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케네디는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마피아들과 관계를 유지했다.

‘피그만(Bay of Pigs) 사건’으로 불리는 쿠바침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는 CIA에 대한 케네디의 불신은 극에 달했다. ‘피그만 사건’이란 CIA의 주도하에 쿠바 난민 등을 동원해 쿠바에 무력공격을 가한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케네디는 지앙카나의 마피아 조직을 이용해 카스트로를 제거하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지앙카나로서는 케네디의 대통령 당선에 공헌한 데 이어 카스트로 제거에도 협력함으로써 권력의 편의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은 지앙카나 등 마피아 조직에 대한 단속을 강화해 나갔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는 그 순간에도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은 조직범죄 소탕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은 ‘대통령 암살이 행정부의 조직범죄 소탕과 쿠바 카스트로의 암살 시도에 대한 보복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지앙카나로서는 당연히 케네디에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게 됐다. 마피아들의 배신에 대한 징벌은 죽음뿐이다. 마피아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암살범 오스왈드가 잭 루비라는 조직범죄와 관련된 인물에게 살해당한 것은 조직범죄의 전형적인 일처리 방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살인자를 살해해서 조직의 범죄 간여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 조직범죄 활동의 기본원칙이라는 것이다.

극우파 음모설

뉴올리언스의 지방검사인 짐 개리슨은 극우파 음모설을 제기하며 실제로 수사를 벌였던 인물이다. 개리슨 검사의 이야기는 영화 ‘JFK’의 바탕이 됐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한 이유는 단 하나다. 소련 및 쿠바의 카스트로와 화해를 꾀했기 때문이다. 그를 암살한 사람들은 케네디가 공산주의 세계와 평화적인 관계를 달성하는 것을 방해하려던 광적인 반공주의자들이다”라고 주장했다.

개리슨에 따르면 음모의 하위 실행 레벨에는 반(反)카스트로 성향의 쿠바 난민사회가 있다. 이들은 케네디를 절대 용서 못한다. 피그만 침공 당시 케네디가 쿠바 공산군에 대한 공중폭격을 거부해 자신들을 엄호하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은 1962년 10월의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해소된 이후 미국이 쿠바와 화해하는 것을 매우 우려했다. 이들은 케네디가 자신들을 공산주의자에게 팔아넘겼다고 믿었다.
음모의 상위 통제 레벨에는 극우파들이 있다. 이들은 케네디의 평화적인 외교정책에 반대했다. 이들은 케네디가 소련과의 핵무기금지 조약에 서명하자 일을 벌였다. CIA는 1963년 늦여름까지 데탕트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CIA 자체가 반카스트로 공작을 지도하고 지원했기 때문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 해소 이후 케네디는 쿠바를 겨냥한 CIA의 공작을 축소시키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63년 7월 31일 FBI는 쿠바 난민과 극우 민병대의 훈련소를 급습해 무기와 탄약을 몰수했다.

1963년 초가을에 이르러 케네디와 쿠바와의 화해무드는 급진전됐다.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과 카스트로의 대리인인 체 게바라가 만나 협상을 벌일 계획이 추진됐다. 미국의 아들라이 스티븐슨 유엔대사는 양국간 적대관계의 청산 가능성에 대해 연설했다. 케네디의 안보보좌관인 맥조지 번디는 “대통령이 댈러스 방문 직후 양국 관계의 정상화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케네디 암살 이후 번디 보좌관은 “쿠바계획은 동결됐다”고 말했다.

카스트로도 그 해 11월 23일 케네디 암살을 “미국 내에서 평화에 반대하는 세력이 꾸민 일”이라고 말했다. 쿠바 외무부는 “케네디 저격은 세계평화에 반대하는 미국 내 가장 반동적인 부문에 의해 완벽하게 계획된 도발”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케네디와 카스트로 간의 화해 시도는 2003년 사실로 확인됐다. 케네디가 암살되기 불과 17일 전 카스트로와의 비밀특사 교환을 승인한 사실이 2003년 11월 24일 비밀해제된 녹음테이프에서 드러난 것. 테이프에 따르면 케네디는 당시 미국 특사를 아바나로 보내 카스트로와 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에대해 번디 안보보좌관과 논의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테이프에는 카스트로가 양국간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기 위해 미국 외교관을 아바나로 초청해 비밀회담을 갖자고 제의한 것을 번디 보좌관이 케네디에게 설명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케네디는 “이 회담에 대한 미국의 공식개입을 그럴 듯하게 부인할 수 있을 경우 비밀회담을 추진해도 좋다”고 승인했다. 미 문서국의 한 분석관은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는 케네디가 적대적인 미·쿠바 간의 관계 변화를 원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며 “이런 구상이 결실을 얻으려는 순간 일어난 암살은 양국간의 끊임없는 반목의 역사에 ‘만일’이라는 큰 가정으로 남는다”고 평가했다.

극우파 음모론에 따르면 케네디의 암살범은 오스왈드가 아니다. 오스왈드의 역할은 암살범이 좌익이라는 점만 드러내는 한편 실제로 대통령을 살해한 사람들이 경찰의 주목을 받지 않고 댈러스를 빠져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케네디를 쏜 것은 7명으로 구성된 게릴라팀이었다는 것. 여기에는 반카스트로 모험주의자, 극우민병대 등이 포함돼 있다. 케네디를 향해서는 5~6발이 앞과 뒤에서 최소한 4명의 저격범에 의해 발사됐다. 그리고 증거인멸을 도운 자들이 있다. 두 사람은 탄피를 주웠으며 암살범들 주위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일을 했다. 오스왈드는 암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케네디 암살을 조사한 워런위원회는 ‘오스왈드가 순간적으로 미쳐서 대통령을 쏘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그가 체포되기 직전 경찰관을 살해한 것도 순간적인 광기에 의한 짓이고, 마지막으로 잭 루비가 오스왈드를 쏴죽인 것도 순간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사실 3건의 살인이 모두 우발적인 광기에 의한 충동으로 결론지어졌다는 점은 쉽게 수긍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스왈드 암살범 잭 루비

잭 루비가 오스왈드를 살해하자 당시 언론들은 환호했다. 루비의 변호인은 “루비가 의회메달을 받아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뉴욕 데일리 뉴스는 ‘좋은 살인범은 사망한 살인범뿐이고 좋은 공산주의자는 죽은 공산주의자일 뿐’이라고 썼다. 루비는 국가적으로 증오받는 인물을 죽이면 무죄로 나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감옥에서 썩게 됐다. 1년쯤 지나자 그는 댈러스 감옥에서 워런위원회에 증언을 할 수 있도록 불러달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내가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말하고 싶지만 여기서는 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위험에 처해 있다”고 했다.

잭 루비는 감옥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이에 대해 그의 동료인 데이비드 페리가 암세포를 주입했다는 설도 있다. 페리는 암에 관심이 많아서 한때 집에서 쥐를 2000마리나 키웠으며 쥐에 암세포를 주입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논문을 쓴 적도 있다. 그런데 잭 루비는 ‘댈러스 이외의 지역에서 재판하라’는 판결이 난 지 몇 주일 후, 즉 그가 바라던 대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된 판결을 받고 나서 암으로 사망했다.

루비의 동료인 페리는 CIA에 충원돼 반카스트로 운동에 가담했던 인물이었다. 케네디 암살 직후 페리는 CIA로부터 돈을 받지도 않았으며 반카스트로 운동에서도 떨어져 나갔다. 그는 다량의 진정제 등 약물을 복용하며 살았다. 그가 암살에 죄책감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의 마지막 몇 달 동안 그는 고문당하는 사람 같았다. 페리는 공식적으로는 자연사했다고 발표됐지만 당일 작성한 유서가 있다. 유서에는 “고통스런 삶을 끝내는 일이 얼마나 달콤한가”라고 써 있었다. 유서를 쓴 그 날 자연사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까.

우태영 조선일보 출판국 기획위원 (tywoo@chosun.com)

 


 

케네디 암살의 의혹-1

제3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존 F 케네디'는 1963년 11월22일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자동차 퍼레이드를 벌이던 중 '리 하비 오스왈드'의 총탄에 맞아 절명했다. 당시 사법당국은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했지만 배후를 둘러싼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 현대사의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인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사건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인가.

워싱턴 타임스 등 상당수 미 언론들은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 42주년을 맞은 22일 케네디 암살 사건을 주요 내용으로 다루며 "암살 논란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케네디 전 대통령은 지난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총격을 받고 숨졌다. 당초 리 하비 오스왈드의 단독 소행으로 알려졌으나 그가 갑자기 피살되면서 배후 음모설이 힘을 받게 됐다.

진상조사위원회는 단독범 소행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정확한 배후를 규명하는데는 역부족이었다.

올해들어 부쩍 케네디 암살사건과 관련한 뉴스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띈 것은 단연 당시 시카고 암흑가 거물이었던 샘 지앙카나 배후설이었다.

지난 1984년 베스트 셀러 회고록 "마피아 공주"(Mafia Princess)를 발간했던 지앙카나의 딸 앙투아넷 지앙카나(70)는 지난달 "JFK와 샘:지앙카나와 케네디 암살 커넥션"이라는 저서에서 자신의 부친이 부하들에게 시킨 일이라고 주장했다.

마피아가 1960년 박빙의 승부였던 대선에서 케네디가 일리노이주 승리의 여세를 몰아 확실히 승리할 수 있도록 지원했고, 케네디가 당선 후 관대함을 보일 것으로 기대했으나 오히려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를 법무장관에 앉혀 마피아를 단속하자 '거사'를 꾸몄다는게 핵심 논지다.

그녀는 또 1975년 시카고 지역의 자택 지하 주방에서 총에 맞아 피살된 샘 지앙카나의 암살 배후는 미 중앙정보국(CIA)이었다고 주장했다.

논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 19일부터 사흘 일정으로 이 사건의 수수께끼를 파헤치려는 회의가 메릴랜드주 베데스다의 한 호텔에서 열렸으나 별다른 성과없이 막을 내렸다.

회의에선 오스왈드 단독범행설에 대한 의혹과 케네디 암살 사건의 가장 정확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는 '자프루더 필름'의 조작 가능성, 댈러스 경찰 테이프에 녹음된 총성이 최대 5발이었다는 등 확인하기 힘든 설들만 난무했을 뿐 뚜렷한 결론이 없었다.

다만 이 회의를 후원한 암살기록보관 및 연구센터 소장인 짐 레서 변호사가 1964년 연방정부 공식조사기구인 워런위원회가 결론내린 '단독범행설'은 오류라고 지적한게 그나마 성과였다.

레서 변호사는 그 이유로 중앙정보국(CIA)이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암살 시도에 관련한 결정적인 정보들을 워런위원회에 주지 않았고 1970년대 말 구성된 하원 특별조사위원회에도 중요 정보들을 감추고 있었던 사실을 들었다.

이처럼 미 언론이 올해들어 부쩍 케네디 암살사건을 집중 조명하는 데는 이라크전과 허리케인 강타 등 잇단 국내외 악재로 안팎 곱사등이 신세가 된 미국의 현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물론 극적인 요소를 모두 갖춘 케네디가(家)의 비운, 이른바 '케네디가의 저주'에 대한 미국인들의 흥미도 한 요인임은 틀림없다.

그도 그럴 것이 케네디 형제들이 비운을 겪은 것은 물론 젊은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아들 존 F 케네디 2세가 부인 캐럴린과 함께 1999년 7월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고, 부인 재클린 여사가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하는 등 케네디가는 언제나 숱한 화제를 뿌리고 다녔다.

그러나 올해들어 유난히 케네디 추모 분위기가 강한 것은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반추하며 우울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려는 미국인들의 심리적 반작용이라는 해석이 오히려 설득력을 갖는 분위기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조그비(Zogby International)가 지난달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케네디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에 이어 두번째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대통령으로 이름을 올렸다.



 
케네디 저격의 현장. 범인 오스왈드가 오른쪽 창문을 통해 케네디에게 총구를 겨눴다고 한다.



 
왼편 건물이 케네디 암살 현장이었던  건물 

 


  오른쪽 건물의 6층 맨 오른쪽 방이 범행 현장

 


 
오스왈드가 케네디에게 쏜 저격용 소총

 


 
범인 오스왈드가 경찰들에 둘러싸여 가는 도중 방송국 리포터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리 하비 오스왈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JFK'에서 리 하비 오스월드가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하지 않았으며, 미 CIA와 군부가 짜놓은 함정에 빠져 암살범 누명을 쓴 것처럼 묘사돼 있다. 그러나 오늘날 오스월드가 암살범이라는 증거가 더 확실해진 것 같다.

제럴드 포스너의 신저 '사건 종결'(Case Closed)에 인용된 탄도실험 결과와 사건 당시 에이브러햄 자프루더가 찍은 가정용 영화를 재검토해 보면 발사된 총탄은 단지 세 발뿐이며, 모두 사건 현장 부근의 텍사스 교과서 창고에서 발견됐고, 오스월드에겐 세 발을 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는 믿을 만한 논거를 볼 수 있다. 또 오스월드가 24년의 세월을 비참하게 살아 왔다 는 점을 볼 때 그에겐 역사적 범죄를 저지를 만한 심리적 동기가 충분했다는 점도 명확한 것 같다.

오스월드는 냉전의 와중에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소련체제에도 환멸을 느끼고 귀국한 고질적인 불평분자였다. 지식인으로 자처했지만 한 직장에 오래 있지를 못했고, 암살 사건 전에도 폭력을 휘두른 적이 있었다. 9세때 이복형제를 식칼로 공격한 적이 있고, 아내를 구타했으며, 우편으로 주문한 소총으로 우익 과격파인 에드윈 워커 소장을 살해하려 했으며, 7개월 뒤 바로 그 소총으로 케네디를 저격했다. 63년 9월엔 장전된 권총을 갖고 멕시코 시티의 소련 대사관을 찾아간 적도 있다고 당시 그와 대화한 적이 있는 KGB 요원 올레크 네치포렌코의 신저 '살인 면허증'(Passport to Assassination)은 밝히고 있다.

오스월드의 소외감은 어릴 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1939년 부친 사망 2개월 후 뉴올리언스에서 출생했다. 생활이 불안정해지자 그의 모친은 오스월드 및 형제들을 한동안 고아원에 맡긴 적도 있고, 열 살이 될 때까지 그를 데리고 13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13세때 등교를 하지 않은 그를 관찰한 적이 있는 뉴욕의 한 정신과의사는 오스월드가 '폭발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으며, 전능함과 권력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고 말했다.

오스월드는 늘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했다. 16세 때엔 미국 사회당에 편지를 보낸 그 당시 '청년동맹'가입을 희망했다. 그 몇 주 후엔 해병대에 입대했다. 해병대에선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마르크스 관련서적을 읽었다. 1등 사수 자격을 얻었지만 일본의 한 공군기지에 근무도중 오발로 자기 자신을 쏜 적도 있다. 59년 11월 그는 모친의 지병악화를 이유로 조기 제대했다. 그러나 며칠 후 배를 타고 영국으로건너간 다음 모스크바로 떠났다.

소련 관리들은 미 해병대에서 배운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고 제안하는 20세의 거만한 오스월드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몰랐다(처음엔 그를 미국 첩자로 생각했다). 전직 KGB 간부인 블라디미르 세미차스티니는 최근 모스크바에서 뉴스위크에 이렇게 밝혔다. "당시 그에겐 우리가 관심을 가질 만한 접선책이 한 명도 없었고, 또 우리가 몰랐던 정보도 없었다"

소련 당국이 시민권을 주지 않자 오스월드는 자신의 손목을 칼로 긋기도 했다. 결국 소련 당국은 그를 민스크의 라디오 공장에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적은 액수의 급여를 현찰로 주었다. 그러나 소련체제가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타락시켰다고 본 것이다. 그는 수작 수류탄 두 개를 만들었는데, 소련인들에게 자신의 출국을 허용하도록 협박하기 위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11월 21일 오스월드는 근처 어빙에 있는 마리나를 찾아가 댈라스에 와서 함께 살자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했고,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의 저축 총액인 1백70달러와 그의 결혼반지가 옷장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신원미상의 30세 가량된 백인 남성, 야윈 몸매에 신장은 1m78cm, 체중은 74kg' 케네디 암살 직후 경찰 라디오로 급송신된 범인의 이 인상착의는 J.D. 티피트 순경이 오후 1시 15분에 본 한 남자와 일치했다. 티피트가 오스월드를 정지시키자 오스월드는 그에게 권총을 쏘고는 어느 영화관으로 도망쳤다. 오스월드는 체포됐을 때 그 권총을 지니고 있었다. 후에 경찰은 교과서 창고에 남겨진 소총에서 그의 지문을 발견했다. 그러나 구속 후 오스월드는 티피트순경에게 총을 쏜 것과 대통령을 저격한 것도 부인했다. 또 소총 소지 사실과 멕시코에 다녀온 사실도 부인했다.

오스월드의 단독 범행을 확신하는 사람들조차 그의 암살 동기에 대해선 정확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케네디 쿠바 정책과는 별도로 케네디를 존경했다고 말한다. 오스월드는 카스트로의 환심을 사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괴로웠던 결혼생활 속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프리실과 존슨 맥밀런의 77년도 전신 '마리나와 리'에 따르면 마리나는 침대 위에서도 오스월드를 조롱하며 민스크에 있는 자신의 옛 애인과 닮은 케네디 대통령에 매력을 느낀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곤 했다. 그러나 케네디 암살 음모설 신봉자들은 결코 질투심과 같은 평범한 동기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2주전 전 CIA는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1천5백 여 쪽의 관련 문서를 공개했다. 그러나 오스월드의 고통받은 심리상태를 고려할 때 아무리 사소한 자극도 그를 격분시켜 살인으로 몰아 넣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오스왈드의 군대생활하던 19세때



 존슨 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한뒤 기자회견장을 나서고 있다. 영부인 재클린의 비통해하는 모습이 보인다.

 


 

케네디 암살의 의혹-2

<사건 개요>

미국 대통령 J.F. 케네디 암살사건  

1963년 11월 22일 미국 대통령 J.F. 케네디가 유세지인 텍사스주  '댈러스' 에서 자동차 퍼레이드 중 저격범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사건.

 

언제 : 1963년 11월 22일

어디서 : 텍사스주 댈러스

누가 : 미국 대통령 J.F.케네디

무엇을 : 자동차 페레이드중 저격범의 총탄을 맞고

어떻게 : 사망하였다


사건 발생 약 2시간 후 현장 부근에서 L.H.오즈월드가 용의자로서 체포되었다.

이틀 후 오즈월드를 구치소로 수감하기 위하여 댈러스 경찰서의 지하실에서 나오는 순간 나이트클럽의 경영자이자 연방수사국(FBI)의 정보원인 J.루비에게 그도 사살되었다.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대법원장 E.워렌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10개월 후 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오즈월드의 단독범행이며, 배후에 국내외의 어느 기관도 관련된 사실이 없다. 

② 3발의 탄환이 발사되었는데, 그 중에서 2발이 대통령에게 명중되었다. 1발은 대통령의 등 윗부분에서 목을 관통하였고, 1발은 텍사스 주지사 J.B.코널리의 허리에서 오른쪽 손목을 뚫고 왼쪽 대퇴부에 도달하였다.

 


 
범인 오스왈드의 신분증



케네디 암살범 용의자 존 오스왈드는 체포된 이틀 뒤인 1963년 11월 24일 유태인 출신의 '잭 루비' 에게 경찰서 지하에서 권총으로 살해 되었다.


1963년 11월 22일 금요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리 하비 오스왈드' 라는 사람에 의해 암살당했다.

 

오스왈드 역시 교도소로 이송 도중 댈러스의 스트립쇼 클럽을 운영하던 유태인 '잭 루비' 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래서 케네디의 암살은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를 남기고 있다.

2005년, 올해로 케네디 대통령 사망 42주년을 맞는다. 

오스왈드의 숨겨진 연인인 '주디스 배리 베이커'가  오스왈드와 암살 사건에 얽힌 비밀은 대체 무엇일까.

케네디 암살 당시 많은 목격자들은 저격범인 오스왈드가 총을 쏘았던 곳과는 다른 각도에서 총알이 날아들었다고 말한다. 과연 제2의 범인이 존재하는 것일까.

 

당시 24세였던 오스왈드는 체포된 직후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사건 당일 아내와 커튼을 만들기 위해 커튼 재료를 사들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는 것. 또 그 자신이 러시아에 거주한 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범인으로 몰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경찰 역시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면서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다.

오스왈드의 연인이었던 주디스 배리 베이커는 자신의 가정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오스왈드에 얽힌 이야기를 40년 동안 비밀로 간직하며 살았다. 하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갔던 오스왈드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자신이 오스왈드의 여인이었음을 고백하게 됐다고 한다. 그녀의 증언을 들어보면 오스왈드가 평범한 시민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케네디 암살 사건 당시 미 경찰이 발표했던 것처럼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반대로 오스왈드는 쿠바 카스트로 정부의 전복을 계획하고 있던 한 단체에 몸담고 있었다는데. 그렇다면 오스왈드는 CIA와 같은 정보국 요원에 의해 역공작의 희생물이 된 것일까.




 


 

케네디 암살의 의혹-3



1963년 미국 달라스에서 리무진을 타고 가던 케네디 대통령이 2발의 총탄을 맞고 숨진다.

범인으로 근처 창고에 있던 오스왈드가 체포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무죄 라고 주장했고, 구식소총으로 비전문가가 멀리 떨어져 움직이는 표적을 나무에 가린 상태에서 저격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또 여러 증거로 볼 때 케네디의 뒤가 아닌 앞과 옆에서 쏜 총탄에 맞은 것 이 분명하다.

해병대 출신의 오스왈드는 호송되는 중 잭 루비에게 살해되고, 잭 루비는 감옥에서 사망함으로써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개리슨 검사가 범인으로 지목한 클래이 쇼는 CIA에서 근무했고, 이스라엘 모사드의 단원이었다.

모사드는 이스라엘의 해외 정보기관으로 각종 공작과 암살을 자행하는 단체다. 그러나 클래이 쇼는 결정적 증인이 죽고 정부의 보호를 받아 무죄로 석방된다.

케네디는 상원의원이었던 아버지 조세프 케네디의 아들로 대통령이 되기 위해 프리메이슨의 도움을 받았다. 때문에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에 프리메이슨 단체인 CFR과 빌드버그에서 추천한 사람을 주요 요직에 앉힌다. 이들은 일루미나티 단원들로 대부분 군수산업과 관련이 있었다.

일루미나티들은 방위산업체가 돈을 벌 수 있도록 일부러 전쟁을 만들어 돈을 쏟아 붓게 만든다.

그런데 점차 케네디가 이들의 노선을 따르지 않아 베트남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고, 쿠바침공에 반대했으며, 일루미나티 휘하에 있는 CIA도 해체 시키려 하였다.

케네디가 암살 당하자 대통령이 된 존슨 부통령은 이들의 의도대로 베트남전을 확대시키고, CIA도 되살려 놓았다.

케네디는 당시 유대인들이 재계를 주름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원자력 시설을 점검하겠다고 해 프리메이슨의 핵심인 유대인 들의 분노를 산다. 가장 큰 원인은 유대인들의 자금줄인 연방준비은행의 화폐발행권을 없애 고 정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화폐를 발행하려면 정부가 공채를 발행하고, 연방준비은행에서 공채를 인수해 화폐가 발행되는데 정부에서는 공채에 대한 이자를 꼬박 꼬박 내야 한다.

그러니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날 수 밖에 없고, 연방준비은행은 지폐에 대한 인쇄비용만 들이면 돈을 만들어 정부에 빌려주고 이자도 받고, 그 몇배에 해당하는 돈을 찍어내 유통시킬 수 있어 앉아서 불로소득을 챙긴다.

CIA는 미국 대통령도 터치할 수 없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일루미나티를 위해서 활동한다.

또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마약 밀매 사업까지도 서슴치 않는데 미국에서 유통하는 마약이 대부분이 CIA의 공작을 통해서 들어온다.

미국의 대형 범죄조직은 거의 모두 CIA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CIA 국장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마약 장사를 하면 은밀히 제거되거나 FBI의 수사를 받게 된다. 마약을 유통시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데

하나는 엄청난 돈을 벌 수 있고, 또 하나는 국민들을 타락시키고 바보로 만들어서 다루기 쉬워진다.

CIA와 연방준비은행에 손을 대려 했던 케네디는 결국 CIA와 모사드에 의해 암살 당한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이 탄 차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들 중 하나였던 문제의 피살 현장으로 서서히 들어서고 있다.




 


총에 맞은 직후 케네디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경호원이 차량 뒷편에 오르는 모습


 

당시 케네디 부처가 탔던 차량 모습. 정면으로 보이는 좌석이 케네디 대통령과 영부인 재클린이 앉았던 바로 그 자리다.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이 케네디. 앞 사람은 대통령 측근인 코넬리. 케네디 대통령의 어깨 뒷부분을 뚫고 들어간 총알은 케네디의 목 부위를 지나 계속해서 앞 자리에 앉은 코넬리의 옆구리를 뚫고 손목 관통하고 허벅지에 가서 박혔다.


 

피에 흥건히 젖은 케네디의 셔츠


 

암살현장 개념도




 

케네디 시신의 오른쪽 머리부분. 총알이 머리를 뚫고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총탄이 뚫고 들어간 케네디의 등 부분.


치명적인 두개골 상흔을 보여주는 개념도


 사망한 케네디 대통령의 모습

 


 

 케네디암살은 영국M1-6의 소행이였다
 

아래글은 들녘 출판사에서 출판된 - 음모의 지배계급 300인 위원회 - 란 책에 기술된 내용입니다. 저자는 전직 MI-6 요원이었다네요. 참고

로 MI-6는 007, 제임스본드로 유명해진 영국첩보기관입니다. 내용이 워낙 방대해서 제가 요약해서 틈틈히 올릴께요.

케네디 암살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존 F 케네디는 왜 암살되었을까? 그 계획은 왜 그렇게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행되었을까?  

2. 케네디 사형집행을 명령한 사람은 누구인가? 또 이 음모를 실행한 책임자는 누구인가?  

3. 계획자와 사형집행자는 수사망을 완전히 벗어날 수가 있었따. 이 은폐공작의 성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시다시피, 케니디는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댈러스 데일리 광장에서 세계 최고의 저격수 3명에 의해 저격당했으며, 이때 사용된 총은 1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도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춘다는 모제르 저격용 총이며, 이 암살은 2년이상 신중하게 계획되었다. 일단 이 암살의 직접적인 여파로 베트남 전이 확전되었다.

 

왜 케네디가 암살되었을까?

케네디 가문의 역사는 너무나 잘 알려져서 전부 이야기 할 필요는 없겠지만, 다만 케네디가는 아일랜드계의 반역자로 그 평판이 높았다는 점만 말해둔다. 존의 아버지 올드 조(Old Joe)가 주영 미대사관직에서 해임되었을때 케네디가가 공공연하게 독일의 전쟁준비를 지지하고 있따는 영국정부의 항의를 받은 뒤였다. 온갖 전쟁들을 유발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은 국제은행가들의 하수인인 루스벨트는 그들의 지시에 따랐따. 조지프 케네디는 그 일을 잊지도 용서하지도 않았고, 자식들가운데 누군가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 루스벨트같이 유약하고 비굴한 인간은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존 F.케네디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을때 그것을 자신의 실력이라 생각했다.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은 젊고 고집센 케네디에게 두려움을 안 겨주지 않으려고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300인 위원회로 알려진 엘리트 지배조직은 처음에는 부드럽게, 그러나 차츰 다급하게 케네디에 목에 보이지 않는 올가미를 걸었다. 케네디는 그 올가미의 실체를 알아차리고는 필사적으로 벗겨내려고 했다. 조사결과가 분명해지면서 결국 영국의 일개 기관인 왕립국제문제연구소가 자신의 대통령권한과 미국 전체에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때 케네디는 격노했다.

케네디는 " 선거에서 선출된 정부가 통치하는 일은 거의 없다"라는 디즈레일리의 말에 유념했ek. 그는 원스턴 처칠이 공 언했던 영국과 미국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도 알아차렸지만, 그것이 "특별한 관계"가 아닌 "특별한 지배"라는 사실은 이해하지 못했다. 대통령의 권한의 외세 지배를 물리치려는 케네디의 결의는 쿠바의 미사일 위기동안 더욱 견고해졌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흐루시초프를 원조했던 것은 영국의 왕립국제문제연구소와 백악관에 있던 케네디 자신의 측근이었다.

그 기만술은 다음과 같다. 흐리시초프는 쿠바에 있는 소련의 구식 단거리미사일을 이전하는데는 동의하였지만 그 조건으로 미국이 터키의 전선기지에 배치한 최신 핵로켓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 뒤의 조약에서는 미국이 잃은 것은 엄청났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대실패를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케네디는 재조사를 명령했다. 조사결과 원흉의 측근들, 특히 헨리 키신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뒤에 대통령은 키신저는 미치광이라 백악관에서 추방했다고 부인에게 고백했다.

키신저의 추방은 300인위원회의 계획에 큰 타격을 주었다. 키신저는 300인 위원회의 최고집행기관인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에서 지시적 조언을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주요통로였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키신저가 뒷날 리차드 닉슨대통령의 실각에 주역을 맡았던 일도 언급해볼 가치가 있다. 분명 키신저의 추방은 영국과 미국간의 특별한 관계에 균열을 가져오기 때문에 300인 위원회는 이를 허용할수가 없었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의 메신저인 키신저의 가면을 벗긴 사람은 소련에서 망명한 거물 스파이 올레그 펜코프스키였다. 대통령 최측근이자 MI-6가 배치한 첩보원이었던 맥조지 번디는 펜코프스키가 케네디 대통령과 직접 만나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이소련의 거물 스파이와 대통령의 직접회담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맥조지 번디의 방해를 물리친 사람들은 비밀리에 백아관에 문서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성공하여 케네디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하였다.

일단 문서를 검토할 기회를 가진 케네디는 자신의 추종자, 특히 키신저가 어떻게 배신을 했는가, 또 300인 위원회의 미국지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이해하였다. 이러한 발견으로 케네디는 미군의 귀환수송이 가능한 즉시 남베트남 참전을 끝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케네디가 300인 위원회 소유의 국제은행들, 특히 연방준비제도에 대한 그들의 지배를 타도하려고 결심한것도 이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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