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보라! 빌립의 전도?(펌글)

지혜자


본문읽기, 요한복음 1장 35-51
참조구절,
1.요한복음 6장 1-9(오병이어의 표적과 관련해서)
1.요한복음12장 20-36(헬라인 몇이 빌립에게 예수님을 뵙고자 요청한 일)
1.요한복음14장 1-11(주님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한 빌립의 요구)

요한복음(개역성경)에는 세 번의 "와 보라"가 나옵니다. 1장에서 두 번,4장에서 한 번입니다. 이 세 번의 "와 보라"의 의미를 각각 살펴봄에 있어서 먼저 빌립이란 인물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려면 위 '본문읽기'를 해야 합니다. 본문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세례 요한이 제자들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님의 거니심(다니심)을 보고 말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의 거니심!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 (이하 생략)"-창세기3장-

'예수님의 거니심'은 대언의 영(말씀)인 세례 요한의 증언을 증업답게 하는 '행동계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창세기 3장 전체를 이 '거니심'을 통하여 함축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셈이지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앞 날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한 그 증언을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예수님의 다니심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의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말하는 여인의 후손으로 오셔서 죄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세레요한의 증언(대언의 영)을 통해 부르고 있음이지요. '바람이 불 때'- 바람은 신(영),호흡 등으로도 번역됩니다. 필자는 창세기 3장,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제 2위 되시는 성자 하나님으로 규정합니다. 그 성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현현하신 걸로 보는 것이지요. 바람이 불었다는 것은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셨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사도행전 2장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등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인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습니다. 죄인찾아 구원하시는 일은 성 삼위 하나님의 역사(일)입니다. 실락원에 있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 후손 모두를 부르시는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선생님! 어디에 머무십니까?" "와 보라".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 쯤 되었더라. 그 날 함께 거하니; -함께 거한 시간이-전 날부터 다음 날 오전 10시 까지란 말입니다. 전 날의 시간대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35절의 그 이튿날이 낮시간대 임은 분명합니다(참고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시간은 무조건 로마시간으로 읽어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 시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두 제자는 전 날 어느 시각부터 다음 날 오전 10시 까지 머문 셈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드리느냐 하면,두 제자가 즉흥적으로 예수님을 안 것이 아니라, 가까이는 자기들 스승인 세례 요한의 증언, 그리고 구약 성경의 기록,또 예수님의 직접적인 증언 등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알아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누가 '카더라'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간증을 듣고 누구의 헛소리 같은-꿈이나 환상 예언 계시 입신의 말을 듣고 그 분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태도나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기록된 성경을 하나님의 영이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진리의 영,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과 조명하심으로 바르게 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안드레의 반응과 본문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이어서 드러나는 또 한 명의 제자의 반응을 통해서,똑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반응은 제 각각임을 알 게 됩니다. 안드레는 즉각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이심을 알아먹고서 자기 형제 시몬을 예수님께로 데려 옵니다. 반면에 안드레와 함께 있던 그 제자에 대한 기록은 행간을 통해서만 읽을 수 있도록 기록자 요한은 어떤 심오한(?) 의도를 가지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3절의 이튿날은 35절의 그 다음날로서의 이튿날이 아닙니다. 이틀 뒤의 그 이튿날입니다. 35절에서 39절 상반절 까지 하루,39절 하반절에서 42절 까지 안드레의 전도로 시몬이 예수님을 만나고 게바란 이름을 얻었던 그 하루, 이렇게 짧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이틀이 지나고 나서, 43절에서 "이튿날 예수께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 참석합니다.(요한복음 1:1-18 서론 단락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체의 서술에서 육일을 드러내고 있는 기록자 사도 요한의 의도는 지난 번 강설에서 말씀드린 바 대로 요한복음은 창조육일과 안식일 구조로 기록했기에 그렇습니다.(수가성 우물가에서-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참조)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우연히 빌립을 만난 게 아닙니다. "만나"-'찾아서' 입니다.
"나를 따르라"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빌립에 대한 인간탐구가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빌립하면 누가 떠오릅니까. 알락산더 대제의 아버지 마케도냐의 빌립이 이 이름의 효시입니다. 적어도 역사적으로는요. 그리고 이두레와 드라고닛 분봉왕 빌립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그외 자기 동생(이복 동생)의 아내를 취한 헤롯 안디바의 동생 빌립,사도행전에 나오는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예루살렘 교회의 봉사자(집사) 빌립 등등...

안드레나 빌립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벳새다는 갈릴리 가버나움 인근에 있는 작은 어촌입니다. 이방의 갈릴리라고 기록된 이 갈릴리 지역은 분봉왕 헤롯 안디바가 로마를 대신하여 다스리고 있는 지역입니다. 갈릴리는 유대지역보다 헬라문물을 더 빨리 더 많이 받아들인 지역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뒤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그 당시 팔레스틴 지역은 알렉산더 대제의 사후 그 휘하의 네 장군에 의해 분할통치할 때,시리아의 셀류커스 왕조와 에굽의 프톨레미 왕조 사이에 마치 완충지역처럼 놓이게 된 바벨론 포수 이후의 중간기 시대의 유대인의 삶의 터전이요 형편이었습니다. 그 기간을 거쳐 이제 로마의 식민지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방인 이두메 사람 헤롯의 통치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에 걸친 헬라세계의 문화와 문물의 영향으로 이제 유대인들조차 자식의 이름을 헬라식으로 지어 부르고 있었습니다. 사고의 체계도 아마 상당히 헬라화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待望)은 극에 달했습니다. 공관복음의 기록처럼 때가 찼습니다. 모든 면에서 때가 찼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왜 빌립을 찾아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까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서도,빌립은 곧장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대신에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모세가 그 율법에 기록하였고 그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이"라고 합니다. 구약 전체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를 지칭하는 유대식 표현입니다. 빌립은 메시야란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고 에둘러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났다"?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을 말하고 있음이지요. 그 분이 메시야라고 해서 만니봤더니 그냥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더라란 늬앙스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기록들을(신약성경 당시) 보면 '예수'란 이름이 20여명이나 나온다고 합니다. 그만큼 동명이인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출신지역이나 아비의 이름을 붙여서 부름으로써 동명이인들을 구별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빌립이 이를 두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 자기 스승 세례 요한은 분명하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건만', 빌립의 눈에는 사람 이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제 예수님이 기거하는 곳에 안드레와 함께 가서 하루 종일 있으면서 예수님의 됨됨이도 살펴보고 사는 모습도 눈여겨보고 이것 저것 물어도 봤습니다. 그래서 알게 된 정보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는 어디서 오는 지 알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이방의 갈릴리에서도 변방에 속하는 깡촌(?)과 다를 바 없는 나사렛 출신이었습니다. 메시야란 그 어떤 면모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같은 동네 친구(?) 안드레와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갈릴리로 가건만 빌립 자신은 언뜻 따라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갈릴리에 있을 때 "천국(메시야 왕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면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선지자 요한의 소문을 듣고 생업도 뒤로 한 채,유대까지 와서 세례를 받고 요한의 제자가 된 빌립이 아닙니까. 확신도 없이 그냥 예수님을 따라간다면 '친구따라 강남가는 것' 이상이 아니기에 예수님의 분부를 뒤로하고 먼저 나다나엘을 찾은 것이지요. 뱃사람 안드레나 그 형제 베드로의 사람됨과 인품,학식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안드레 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덥석(?) 믿고 따라간다고 해서 빕립 자신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헬라 물을 먹을만큼 먹고 이름까지도 빌립이라 지은 가문이 이니던가! 상당히 주도면밀하고 계산적이고 합리적인 성품의 소유자 빌립!

나다나엘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나다나엘의 돌처럼 굳은 선입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오라 보라"-오라와 보라는 명령형입니다. 그런데 앞의 오라는 현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금 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보라는 과연 그 분이 맞는 지 알아봐달라는 요구를 담고있는 단어입니다. 모세의 그 율법과 그 선지자들의 기록대로 그 분이 메시야가 맞는 지를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살펴봐달라는 요구를 담고 있는 명령형이지요. 평소에 빌립은 나다나엘이 어떤 성품의 소유자 인지 잘 알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그 이름 나다나엘이 의미하는 바 대로요. (공관복음에 나오는 바돌로메-돌로메의 아들-이 바로 나다나엘입니다. 바돌로메는 별호처럼 불리던 호칭이고 히브리식 정식 이름은 나다나엘입니다.)

예수님은 47절 이하 51절 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 증언하고 계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홀로,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나다나엘! 하나님이 언약하신 대로 메시야(이스라엘의 왕)를 보내주셔서 이방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주기를 기도한 나다나엘! 그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 마음의 소원을 들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지금 나다나엘의 존전에 서 계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 그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너를 보았노라" 빌립이 부르기 전에 '그 무화과나무'-특정한 지역에 있는-아래 있었던 나다나엘을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이 보셨다는 말입니다. 그 장소는 나다나엘 밖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거기서 무슨 생각을 했는 지 무슨 기도를 했는 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는 분이 있다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그렇게 고백한 것이지요. "하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로소이다"라고요. 옆에서 듣고 있던 빌립도 덩달아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고백했을까요?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그리고서는 결정적으로 "....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창세기 28장 10절로 22절 말씀이 '인자'를 통해서 성취될 것임을 밝히 증언하심으로써 참으로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의 아들로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언약하신 그 언약을 성취할 바로 그 후손(씨)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름부음받으신 '산 돌'이신 그 분 예수로 말미암아 창28:22 상반절 기록(야곱의 예언적 행동계시)가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할 유일한 하나님의 집-성전-입니다.(위에 적시한 창세기 관련 본문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요한복음 6장으로 갑니다. 6:1-15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빌립이 처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첫 유월절 전입니다. 6장의 기록은 두 번째 유월절을 앞두고 일어난 표적이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이 가까이 왔을 때,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시고 그 의미를 유월절과 연관시켜 풀어주십니다. 5절에서 빌립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빌립을 시험코자함이었습니다. 무슨 시험이냐고요?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기적,성전정화사건,예루살렘에서의 표적행하심,니고데모와의 거듭남에 관한 담화,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사마리아 여인과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일,그리고 말씀으로 왕의 신하를 고치신 일,5장에서는 그 유명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역시 말씀으로 고치시고 그 표적의 의미를 풀어주시되 예수님이 인자됨을 인하여 구원과 심판의 주가 되셨음과 성경의 기록이 자신에 대한 기록임을 밝히 증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6장에 와서 빌립을 시험하신 것이지요.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표적도 보고 예수님의 말씀도 직접 들은 빌립이 과연 믿음이 있는 지, 이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임을 알고 믿는 지를 알아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빌립의 반응은 빨랐습니다. 그러나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계산에 빨랐을 뿐이었습니다. 어린아이 같이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믿은 안드레의 손길을 통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참으로 더디 믿는,아직도 예수님을 바로 믿지 못하는 빌립의 모습을 요한은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장 20절부터 봅니다. 36절까지 차분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헬라식 이름을 쓰면서 헬라말로 소통하기에 조금도 불편함이 없는 빌립에게 헬라인 몇이 접근해 옵니다. 이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아닌 유대교로 개종한 뼛속까지 순수한 헬라인임을 원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세 번째 유월절 며칠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로 앞에 나오는 기록이 '예수님의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세계 각처에서 온 수많은 유월절 순례객들이 예루살렘에 운집해 있는 상황에서 예루살렘 입성사건이 있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로 인해서 환영인파는 더욱 대단했습니다. "....볼지어다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한 내용입니다. 이런 차에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뵙기를 청한 것이지요. 요청을 받은 빌립은 안드레를 찾습니다. 같은 제자라고는 하지만 결코 같은 제자일 수는 없습니다. 결이 다릅니다. 안드레의 위상을 빌릴 수밖에 없는 빕립의 현재의 처지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요12장 23-36의 기록을 통해 말씀하심으로써(답변하심으로써),빌립과 안드레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또한 따르는 무리들 그리고 일차독자는 물론이요 지금 요한복음을 읽고 있는 우리들까지 교훈코자 하신 것입니다. 헬라인 몇은 메시야에 대한 일반적인 대망은 있었을지라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성경적으로 정확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분위기나 무리들의 행동,유대인들의 말을 들어봤을 때 예수님이 이제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실 것으로 알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빨리 줄을 잡고 줄을 서야 합니다. 메시야 왕국에서도 권력서열은 참으로 중요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요구를 듣고 '우리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기는커녕 대뜸 안드레를 찾아 함께 예수님께 여쭌 빌립의 메시야관과 헬라인 몇의 메시야관이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안드레도 그런 분위기에 휘둘린 모습입니다. 아! 이제 헬라인들 조차도 예수님을 찾는구나! 분위기에 덜떴을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바라는 그런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를 섬기려는 것을 누가 마다하겠냐마는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33절-.  메시야 왕국의 영광에 참여코자 예수님을 뵙고자 했던 헬라인 몇의 실상은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빌립도 마찬가지고요. 예수님의 답변과 이어지는 기록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빌립은 여전히 아직까지도 육적인 안목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마지막입니다. 요14:1-11의 내용입니다. 도마와 빌립의 질문과 요구가 함께 나오는 기록입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은 지금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해 달라는 주문입니다. 9절 이하를 읽어보십시오. 이 본문의 결론은, '이제 믿을 때도 되지 않았냐?' "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1절-.  빌립의 믿음없음을 우리는 생생히 목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세 번의 "와 보라"의 기록 중 예수님이 친히 하신 그 말씀의 의미는 '오라 볼 것이다(너희들이 구하는 바를 알게 될 것이다)' 입니다. 반면에 빌립의 와 보라는 이미 위에서 상술한 것과 같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의 와 보라는 '지금 빨리 와서 내 말이 맞는 지 틀리는 지 살펴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확신에 찬 요청입니다. 왜냐하면 4장29절 상반절에 콜론(;)이 있고. 이어서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행사 때 빌립의 말을 전도용 구호로 쓰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전도자 빌립 운운하는 설교도 있습니다. 다 좋습니다. 어떤 방도가 되었던 지 간에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와야 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와 보라"고 요청함으로 해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제자 삼으셨습니다. 빌립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전도하면서 우리는,우리 교회는 참 좋은 교회입니다. 이러 이러 해서! 우리 목사님은 참 훌룽한 분입니다. 학력과 이력을 전도지에 기재합니다. 물론 다 좋습니다. 수가성 여인처럼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함으로써 사람들을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교회 오면 복받습니다. 병고침 받습니다. 문제해결됩니다. 자녀들도 좋은 대학 갑니다. 남편 사업도 잘 됩니다. 일반 신자들이 성경적 전도를 하기에는 역부족이라서 얼마든지 좋습니다. 데려오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교회 왔다가 잘 되면 다행인데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날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가면 잘 된다더니 다녀봐야 좋은 일도 없더라. 돈이나 많이 바치라고 눈치나 주고' 이렇게 되면 전도는 꽝이 되는 겁니다. 전도(傳道)의 독려를 통해서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로 인도(引導)함을 받아 나온 자들에게 참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듣는 자들에게는 이 설교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로 준비하여 성령을 힘입어 능력있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현금(現今)의 한국교회 강단에서 성경적인 복음선포와 가르침이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되고 있는 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과거에 교회 나갔다가 쉬거나 아예 발을 끊은 사람들이 주변에 이외로 많음을 보게 됩니다. 창세 전에 택한 자가 아니라서 그렇다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어처구니 없는 어떤 보수교단에 속한 교인들도 있습니다. 지들 교단과 교회가 최고인 줄 압니다. 말은 안 해도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예수님 자랑 복음 자랑은 뒷전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제가 정작 하고자 하는 말을 이제사 합니다. 목사든 직분자든 일반신자든 간에 믿음이 있다면 새겨들을만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초신자나 믿음이 없거나 연약한 자들을 대할 때 제발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이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없는 빌립과 여러 제자들을 끝까지 인내하면서 데리고 다녔습니다. 밥이나 축내는 자들이라는 시선으로 본 적이 결코 없으십니다. 사람들은 만인이 다 다릅니다. 자라온 환경이나 심성이나 학식이나 교양이나 사는 형편이 다 다릅니다. 천편일률적인 잣대로 잴 수가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보라고 붙여준 사람이 있습니까? 갓난아기처럼 조심해서 애지중지 잘 돌보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요? 믿음이 생겨 스스로 설 때까지요. 그 후로도 말씀으로 돌봄(케어)과 먹임이 필요한 한 마리 양임을 잊지말고 늘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서요.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이렇게 대미를 장식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어린양을 먹이라,내 양을 돌봐라,내 양을 먹이라'고요.

나는 먹일 양이 없는데요? 정말 그럴까요? 잃어버린 버린 양들이 지천입니다. 시셋말로 천지삐까립니다. 죄인 불러 회개케 하시는 주님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잃은 양들을 찾으십시오.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양이 저절로 생깁니까? 복음전도를 통해 낳아야지요. 안 그런가요?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믿는 이들이 목양자가 되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2015. 1.5 저녁 나절에
유목민(遊牧民) 올림


출처: USA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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