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은 은혜의 땅 12

김태훈 0 01.17 03:24
누님과 함께 고향에 내려와서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결핵 투병생활을 시작한 지 어느덧 2년째가 됐다. 나는 마음 한가운데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내가 왜 이렇게 젊은 나이에 병으로 고생을 하면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산송장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나. 아니 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반드시 회복해서 남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한번 잘 살아보자." 
  
꼭 병에서 낫겠다는 마음이 들면서 나는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잠시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들여다보았던 성경책을 찾아서 다시 읽으며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시고 나의 질병을 반드시 치유해 줄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었을까? 그렇게 어렵고 고통스런 가운데 하나님을 기억하고 창조자를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병에서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서 몸도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지고 치유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는 데 무엇엔가 이끌려 잠에서 깨어난 후 아무리 다시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 시간 가량을 이불 속에서 이리 저리 뒤척이다가 나는 한순간 이불을 박차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새벽 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고, 먼 동녘 하늘에서는 동이 틀 준비를 하는지 아주 희미한 빛이 밝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주위의 모든 것이 참으로 신선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상쾌한 기분을 느끼면서 깊은 심호흡을 했다. 바로 그때였다. 나는 깊은 심호흡을 하는 순간, 공기와 함께 어떤 액체 같은 것이 내 코로 들어와 폐부 깊은 곳까지 퍼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그 느낌이 드는 순간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황홀하던지…. 그렇게 오랫동안 새벽 공기를 즐기며 서성이다가 동이 환하게 틀 무렵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잠을 청했다. 잠깐 아침잠을 자고 눈을 떴는데 몸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 
  
"어, 이거 웬일이지, 역시 새벽 공기가 좋기는 좋은가 보다." 
  
나는 누님에게 새벽에 있던 일들을 잠깐 이야기하고 아침 식사를 하는데 식욕이 엄청나게 생기는 것이었다. 어제까지만해도 특히 아침에는 밥을 한 숟가락도 떠먹기 힘들었는데 그날 아침에는 벌써 두 공기째 밥그릇을 비우고도 더 먹고 싶을 정도로 입맛이 돌기 시작했다. 
  
"태훈아! 이제 네 병이 다 나았나 보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입맛이 다시 돌기 시작하는 것이 병이 나은 증거라고 하더라. 그동안 고생 많았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지겹도록 싸웠던 폐병이 그렇게 감기 떨어져 나가듯이 떨어져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내 몸의 확실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몸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고 그날 이후 누님이 밥을 해대기 힘들 정도로 밥을 많이 먹게 된 것이다. 새벽에 깊은 심호흡을 할 때 성령님의 치유 손길이 내 폐부 깊은 곳까지 어루만지시고 치유해 주셨다는 사실은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이었다. 아직 신앙이 자라기도 전이었고, 믿음이 마음 한 구석에 조그만 새싹처럼 싹트기 시작한 때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의 믿음과 마음의 기도를 들으시고 2년 동안 지겹게 나를 괴롭혔던 폐병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주셨던 것이었다. 할렐루야! 치유의 경험을 한 이후부터 하나님은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실존적인 존재였으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삶의 주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내 일상생활이 하나님을 향해서 성화되는 방향으로 변화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내 마음의 중심에 자리잡고 계셨지만 나는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당시에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도 않았고 성화 과정에 대해서 배울 방법도 없었으며 특별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가면서 자연히 나의 삶은 다시 옛날의 습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 후 서른 살이 넘어 강한 성령 체험을 한 후에야 비로소 성령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아 하는지 깨닫고 그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나의 폐병이 치유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치유의 기적으로 일어난 내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를 돌이켜 볼 때 누님의 희생이 없었으면 나는 이미 죽은 송장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누님은 자신을 철저히 희생하면서 남동생이 병에서 회복되기를 빌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 리 둘째 누님에게 그런 마음을 불어넣어 주셔서 자신도 병으로 아픈 상황 가운데 동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둘째 누님은 내가 완전히 치유되는 것을 본 얼마 후에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오! 하나님!" 
  
둘째 누님이 세상을 떠나던 날 나의 마음은 수백만 개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동안 유일하게 내게 사랑을 주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왜 하필이면 우리 둘째 누님을 먼저 데려가신 것일까. 하나님은 왜 내 병만 치유해 주시고 우리 둘째 누님은 치유해 주시지 않았을까? 아! 그토록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왔던 둘째 누님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다니…. 싸늘하게 식은 누님의 시신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나는 누님이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길고 긴 통곡의 시간을 보냈다. 세월이 흐른 후 내가 주의 종이 되고 난 후, 기도할 때마다 내 마음 속에 가장 큰 부담으로 다가온 것은 둘째 누님의 구원 문제였다. 누님은 남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살다가 병에서 치유되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도 갖지 못하고 죽었다. 우리 누님이 지옥에 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하나님! 어떻게 우리 누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당신의 구원 계획은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 우리 둘째 누님도 당신의 자비와 은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그런 확신을 좀 주실 수 없을까요. 누님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 볼 기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불쌍한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닙니까."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제 22 장 몸의 부활


부활의 성경적 증거


1. 구약에 나타난 부활의 증거

구원에 대한 전체 교리가 구약에는 신약처럼 분명하게 나오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구약 성경에도 부활에 대한 분명한 믿음에 증거가 나와 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욥19:25-27)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여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라”(시16:9-10)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17:150)

2. 신약에 나타난 부활의 증거

마태복음에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한 여인과 결혼한 일곱 형제의 사례를 제시하며 질문을 한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 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마22:23-32)라고 말씀하신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14:12-14)


요한복음에는 주님께서 영적 부활과 몸의 부활을 구분하고 계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 25절은 첫째 부활 즉 중생을 말하며, 28절은 육체적이며 물리적인 부활을 말한다. 계속해서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또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복음서에는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강력한 증거들이 나와 있고 제자들은 모두 “예수와 부활”을 전파했다.

바울은 행24:15, 행17:31, 빌3:20-21, 살전4:13-16 고전15:에서 위대하고도 강력한 문장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싶도록 만든다.

3. 부활의 본질

부활의 교리는 인간의 영뿐만 아니라 육체 역시 지속된다는 교리이다. 누가복음 24장에는 우리 주님의 부활하신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부활 후 첫 번째 주일 저녁 주님이 다락방에 있는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님은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의심하는 도마의 이야기도 마찬가지 논증이다.

몸의 물리적 부활을 왜 강력하게 주장해야 하는가?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지독한 이단이며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몸의 부활 없이는 구원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도가 고린도전서 15장을 기록한 이유이다. 기독교는 몸의 부활을 전제한다. 죄는 육체적인 것이어서 오직 몸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구원이란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치는 이단이 있다. 이것이 힌두교와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들은 중요한 것은 몸을 벗어나 육신을 제거하는 것이며 그 순간 죄는 뒤에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구속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구원과는 정반대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죄의 결과 그들의 영과 혼과 몸, 전인이 영향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해지려면 구원은 영과 혼뿐 아니라 몸 역시 포함한 것이어야 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주님 자신이 부활하신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이다. 그것이 완전한 구원이다.

4. 부활체의 본질

이 부활체의 본질은 무엇인가?

첫째, 성경이 우리의 정체성은 보존될 것이라고 매우 분명하게 말한다. 내 몸은 언제나 나의 몸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눅24:39)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땅에 묻힌 몸과 부활한 몸 사이에 유기적인 연관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땅에 뿌려진 씨와 거둬들인 곡식 사이에는 유기적인 연관이 있다. 우리는 몸의 세포들이 끊임없이 파괴되고 분해된다는 것을 안다. 이십년 전에 가지고 있었던 입자는 이제 내 몸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똑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그것을 “혈과 육”이라고 표현했다. 부활체의 실제 구조에 대해서는 성경에 말해 주지 않아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불신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이 멸망의 못에 던져지게 되리라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신자들의 부활체에 대해서는 대단히 많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둘째, 부활체가 썩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고전15:42) 부활체를 받게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병에 걸리지 않고 나이도 먹지 않으며, 죽지 않을 것이다.

셋째, 부활체가 영광스러운 것이 되리라는 것이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43) 그분의 영화된 몸과 같이 놀라운 영광스러운 몸을 갖게 될 것이다.

넷째, 부활체는 대단히 강력한 몸이 될 것이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43) 권능으로 가득하고 연약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몸이 될 것이다.

다섯째, 부활체가 영적인 몸이 되리라는 것이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니 육의 몸이 있는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44) 육의 몸은 동물적 본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우리 주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동물적인 것과 신령한 것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셨다. 하늘에서는 우리는 신령한 영역에 살며 당연히 동물적 본성은 필요하지 않다.

여섯째, 부활체는 하늘에 속한 몸이 되리라는 것이다.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48-49) 우리는 주님과 같이 될 것이다. 놀라운 기적에 의해 여러분은 완전히 변화될 것이지만, 여러분의 정체성은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 자신이 부활체가 되어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 여러분의 영혼은 이미 구원받았다. 그 때에는 몸도 완전하게 구속받을 것이다.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강대식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