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주의 / 마이클 호튼

 율법주의(또는 신율법주의)는 (1) 성경의 명령에 대해 완전하고 완벽한 순종을 요구하거나 (2) 불완전한 순종이나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더 다가가기 쉬운 규칙으로 대체하여 요구 수준을 낮춤으로써 오류를 범한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전자에 찬성하면서 특히 대중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은 '할 수 있다'는 말을 함축한다."라고 알려진 칸트 윤리학의 특징이 된 원리를 도입했다. 이 원리는 19세기의 부흥주의자 찰스 피니도 호소했다. 피니는 하나님은 우리가 성취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실 수 없기 때문에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보편적이고 완벽하며 연속적인 율법에 대한 순종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법적 내지 법정적인 의미에서의 칭의란 있을 수 없다." 앞에서 이미 살편본 것처럼 이 원리는 자연적 능력과 도덕적 능력을 혼동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완벽하게 성취할 수 있지만 인간의 본성 전체는 도덕적으로 죄에 속박되어 있다. 바울과 더불어 우리는 펠라기우스주의의 이단을 배격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반펠라기우스주의와 관련된] 더 흔한 오류는 율법의 요구를 느슨하게 하고 그 결과 은혜에 대한 개념의 수준도 낮추는 것이다. 중세 후기 유명론자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들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이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은혜를 부정하시지 않을 것이다." 엄밀한 공의(적정 공로)에 따르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겠지만 우리의 선한 노력을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이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재량 공로)에 따라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에 표현된 하나님의 의의 요구 기준을 낮추는 한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행하면 하나님의 재량으로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아우구스부르크 산앙고백서의 변증 부분이 표적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런 오류였다. "그러나 양심이 그 죄와 비참을 올바로 인식할 때 모든 농담과 모든 명랑한 생각은 사라지고 상황은 극도로 무거워진다.....그러나 그와 같은 놀란 양심은 적정 공로로나 재량 공로로나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분명히 느끼고 그래서 금세 두려움과 절망 속으로 가라 앉는다."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진영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역사에서도 복음을 새로운 법으로 다루는 많은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 오류를 지칭하기 위해서 영국 청교도주의에 의해 '신율법주의'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실제로 가톨릭교회 교리문답(1994년)에서는 복음을 '새로운 법'이라고 부른다. "복음은 사랑을 통해 역사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기 위해 산상 설교를 사용하고 우리에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주기 위해 성례를 이용한다. "복음의 법은 율법의 계명을 성취한다. 이와 유사하게 재세례파, 소키누스주의자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및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정도는 서로 다르지만) 구약은 수많은 율법들에 대한 엄격한 준수를 요구하는 반면, 신약은 율법을 사랑으로 대체한다는 가정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적하셨듯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실제로 온 율법의 요약이다.(마22:36~40) 사실 모세는 바울이 예수님을 따라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레19:18만 언급하면서. 참조, 롬13:9) 그랬던 것처럼 이미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에서 이런 정확한 요약을 제시했다. 사실 바울은 계속해서 이것을 성령의 열매 대 육체의 열매라는 관점에서 추론하면서 이를 갈라디아 신자들의 일상생활에 직접적으로 적용한다(갈5:15~6:10). 계명들은 단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이 무엇을 수반하는지를 규정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의 명령들(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거나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라는 것과 같은 권면들)을 구약의 도덕법과 대조할 수 없다. 성경의 모든 명령은 우리에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주는 일종의 법이다. 반면 복음은 새로운 법, 도덕적 엄격성의 이완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용서와 칭의에 대한 자유로운 선언이다. 더 나아가 율법을(예수님이 판단하신 종교 자도자들의 율법 준수와 같이) 단순한 외적 준수로 전락시키는 일은 실제로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내적인 사랑보다 더 쉽다. 내적인 부패를 위장하는 외적인 거룩함은 얻을 수 있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새 마음을 줄 수는 없다.(마23:25~28).....

 

 

율법주의의 한 형태는 완전주의 이론이다. 이 이론에서는 신자들은 죄를 초월하여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이론의 옹호자들은 요한일서 3장 3~4절, 9절에 호소한다. "주[그리스도]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펠라기우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되기 위해 절대적으로 완전한 거룩함에 도달할 수 있다(실은, 도달해야 한다)고 가정하는 반면, 존 웨슬리가 가르친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형태의 완전주의에서는 신자들이 알려진 모든 죄를 초월하여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 신자들은 여전히 실수를 저지를 수 있지만 사랑 안에서 완전해졌다. 웨슬리의 견해는 웨슬리가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의 교리를 고수했으면서도 성화는 뒤이은 믿음의 행위, 보통은 위기의 경험을 통해 주어지며 그런 경험 속에서 '완전 성화'를 얻는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로 인해 구별된다. 찰스 피니는 웨슬리주의의 견해를 넘어서서 원죄와 대속적 속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 거듭남을 초자연적인 은혜의 선물로 보는 이해를 거부했다.

 

바로 이런 전통에서 '고차원적인 삶' 운동이 특별히 케직 사경회를 통해 출현했다. 이 운동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을 날카롭게 구별하는 신비주의적 경건을 도입했다. 그 주요 옹호자들에 따르면 신자들은 첫 회심에 뒤이은 두 번째 신앙 행위(보통은 위기의 경험)를 통해 (때때로 '완전한 항복'으로 묘사되는) 더 높은 차원의 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 '두 번째 복'에 대한 이 독특한 가르침은 비록 이 경험의 필연적인 증거들에 대해서는 종종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지만 웨슬리주의자(감리교인), 케직 운동 추종자, 오순절파를 하나로 묶는다.

 

칭의와 성화의 분리(그리고 그 결과 의롭다 함 받은 자와 완전히 성화된 자의 분리) 외에도 이런 유형의 완전주의는 일부 신자들(즉, 육신적이라 묘사된 사람들)과 관련해서는 과소 실현 종말론으로, 다른 일부 신자들(즉,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해서는 과다 실현 종말론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전통은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보다 신자의 내적인 삶과 경험과 도덕성에 더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아니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성경이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다(벧전1:16; 마5:48; 약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또다시 "'해야 한다'가 '~할 수 있다'를 내포"하는가 하는 점이다. 거듭난 사람들은 거룩함에 전념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몸을 의에 내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일을 완벽하고 일관성 있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거룩해진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다. 성경은 죄의 지배가 깨어졌다고 가르치며 이를 바탕으로 죄가 우리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롬6:12). 그러나 성경은 또한 신자의 끊임없는 죄와의 싸움(히12:4)에 대해 말하며 우리에게 "[우리] 죄를 서로 고백"할 것을 명한다(약5:16).

 

요한일서 3장의 완전주의적인 해석에 대한 가장 분명한 도전은 바로 그 서신에서 나온다. 요한은 1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1:8~2:2).

 

더 나아가 요한일서 3장 9절은 두 번째 복을 받은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모든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앞선 구절들에서 요한이 특별히 그리스도에 관한 원시적 영지주의의 가르침(즉, 그리스도는 인간처럼 보였을 뿐이며 실제로 우리의 육신을 취하시지는 않았다는 가현설적인 관점)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몸 안에서 저질러진 죄들 또한 단지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그 다음 세기의 더 명시적인 영지주의에서 볼 수 있는 도덕률 폐기론적인 관점이 이런 가르침에 수반되었을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 안에서 행하신 일이 단지 겉모습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가 육체 안에서 저지르는 죄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요한이 겨냥한 표적이라면, 가장 적절한 해석은 육신적인 방종에 빠진 삶을 사는 이들은 내적으로 거듭나지 않았다 해석이다. 어떤 경우든 1장의 가르침은 "우리가 죄가" 없고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전적으로 확신한 나머지 "우리 죄를 자백"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명시적으로 반박한다.

 

칭의가 성화 속에 합쳐지든 성화에서 분리되든 간에 그 결과는 똑같다. 다시 말해 그 결과는 약속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어떤 진정한 변화 - 즉, 두 시대 사이의 갈등 - 도 일으킬 수 없는 도덕주의다. 베르카우어가 "삶의 갱신의 문제가 도덕주의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라고 썼을 때 이 말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바울은 성화, 윤리의 문제, 교회의 조화 등을 포함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및 부활과 관련 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에서 성화에 대한 논의로 넘어갈 때 "믿음의 영역에서 물러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론에서 실제로의 이행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칭의 속에서의 믿음에서 성화의 실제로 나아가야 할 것 같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칭의의 실제와 성화 속에서의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칭의를 성화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그 둘을 혼동하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화가 "칭의에서 끊어지거나 추출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칭의와 성화의 구별로 인해 각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인지 인간인지를 추적할 수 있게 된다. 그럴 경우 그와 같은 분명한 분리가 일어났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의롭다 하도록 요청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정결하게 하도록 요청받았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 될 것이다. 성경이 이런 분리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라고 베르카우어는 말한다. 바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졌다고 가르친다(고전1:2, 30, 6:11; 살전5:23. 참조, 행20:32, 26:18). 바빙크가 표현하듯이 "많은 이들이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자기 자신이 얻은 거룩함으로 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 최소한 그런 것처럼 행동하는 - 것으로 보인다.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던 바울의 대적자들은 이런 오류와 가까운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갈3:1~9).

 

구원의 서정 어느 시점에서도, 칭의와 마찬가지로 성화에 있어서도 자연을 초자연적 능력으로 고양시키는, 영혼에 주입된 원리라는 개념을 도입할 여지는 없다. 은혜는 우리가 하등한 자아에 의해 끌어내려지는 연약함에서 회복되어 거룩한 길로 되돌아가도록 우리 안에 주입된 약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은혜는 자연을 해방시켜 진정으로 다시 자연으로 되게 하는 -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모습대로 되게 하는 - 하나님의 은총이며 선물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는 자연을 해방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생명에 참여하게 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죄에 물든 세상에서 하나의 새로운 차원으로서 로마 가톨릭이 말하는 '추가적 선물'에 대해 언제나 맹렬히 반대해 왔다." 개혁신학은 칭의뿐만 아니라 성화에 있어서도 '영광의 신학'보다 '십자가의 신학'을 변호하려는 루터파의 관심에 공감한다.

 

갱신은 단순히 칭의 속에서 구원에 대한 첨가물, 부속물이 아니다. 성화의 핵심은 이 칭의를 양식으로 삼는 삶이다.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칭의와 인간의 행위로서의 성화 사이에는 아무런 현저한 차이가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성화라는 사실은 삶 전체에서 오직 그리스도만 붙드는 믿음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한다. 믿음은 모든 것이 그 주위로 회전하는 중심축이다. 믿음은 그 차제로서는 창조적이지 않지만 우리를 자율적인 자기 성화와 도덕주의에서 보존해 준다.(Berkouwer, Studies in Dogmatics: Faith and Sanctification)

 

따라서 우리는 성화의 지점에서조차 주입된 성향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 (개혁파 신앙고백서의 진술들이 특별히 마3:1~9; 요6:63; 롬10:8~17; 약1:18; 벧전1:23을 따라 주장하는 바대로) 믿음을 창조하는 것은 복음이며 효력 있는 부르심을 통해 생겨난 이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 성화 및 다른 모든 복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복음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은 믿음, 생산적인 회개, 사랑, 성령의 열매 등 그 모든 것을 주신다. 내적인 거듭남과 점진적인 갱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오직 성령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새로운 삶의 원천은 결코 주입된 원리가 아니라 한 살아 계신 인격이다.

 

"오직 믿음(sola-fide)은 칭의의 핵심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성화의 핵심이기도 하다."라고 베르카우어는 말한다. 웨슬리의 교리에 있어서 "오직 믿음은 출발점이 될 뿐 믿음과 성화의 관계는 단절된다. 웨슬리가 오직 믿음을 고수하면서도 신인협력설로 기우는 경향이 있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는 "두 번째 복을 위해 일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이 아니라 "첫 번째 복인 죄 용서를 양식으로 삼도록" 부르심 받았다.

 

완전주의는 장차 있을 영광을 너무 서둘러 취하는 것이며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율법주의로 귀결되는 기대다. '두 번째 복'은 그 연결고리를 구성한다.....베드로는 놀라운 어획량에 경악하여 자기 스승의 선하심에 직면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스승의 광채에 휩싸인 베드로는 단지 머리만 조아릴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다른 말들이 밤공기를 가를 참이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이 말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충성심과 사랑으로 감싸려 했다. 여기서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베드로의 영광에 잠겨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결과를 알고 있다. 이 말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나게 잡힌 물고기를 두고 한 말이 그리스도인의 싸움에 속하는 말이다.(Berkouwer, Studies in Dogmatics: Faith and Sanctification)

 

실질적인 질문은 "칭의가 신비적 연합으로 전달되는 모든 복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한가?라는 질문이라고 베르카우어는 말한다. "우리 자신의 것이라면 부분적인 의조차도 부정하는 바로 그 교리문답[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24주일]에서 신자들은 진지한 목적을 가지고" 모든 계명에 따라 "살기 시작한다는 점을 언급한다."

 

오직 이신칭의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시작이다..... 성화는 단지 칭의의 뒤를 이을 뿐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천국의 열쇠를 논하는 31주일 문답에서는 천국은 "신자들이 참된 믿음으로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마다 그들의 모든 죄가 실제로 용서받는다는 것을 신자 각 사람에게 모두" 선포함으로써 열리고 닫힌다고 가르친다. 이 "때마다"라는 말은 믿음과 칭의의 상호 관계가 지닌 계속적인 적절성을 설명해 준다.....십계명을 설교하는 목적도 신자들이 "죄 사람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더 진지하게 구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15문].....따라서 구원의 길에서 칭의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진로는 결코 없다.(Berkouwer, Studies in Dogmatics: Faith and Sanctification)

 

"진정한 성화는 반복해서 말하지만 칭의와 죄사함을 향한 이 지속적인 방향 설정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그러므로 성화를 하나님의 칭의의 사역에 뒤이은 인간의 사역으로 보는 "이런 관점의 희생자는 하나의 인과적 과정인 성화에만 도달할 수 있을 뿐이며 그는 결국 가톨릭처럼 주입된 은혜와 양적인 성화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 칭의에서 비롯되는 성화에 대한 - 따라서 우리의 모든 복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온다는 인식에 대한 - 대안은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 가는 과정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아닌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동일시하는 도덕주의적인 행동주의다.

 

그러나 신약에서 '제자'는 본받음을 포함하지만 본받음으로 환원되기는 어렵다. 신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본받음조차 그리스도와 고난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은 우리의 고난은 속죄의 고난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복음의 진보에 기여한다(벧전2:21, 24). 베르카우어가 인식하듯이 "따라서 따르는 이들은 어느 것이든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고침 받았다." 이런 도식에서 본받음이란 "속죄에 상응하게, 속죄를 기초로 삼아 사는 것이다.....그리고 그들[양 떼]은 결국 그들을 그리스도와 교제로 이끌 길이 아니라 그들이 끊임없이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교제 때문에 앞에 펼쳐진 길을 걸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제자도가 본받음을 포함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단 그리스도가 무엇보다도 우리 대신 들으시고 순종하신 분임을 인식한 다음에는 우리도 그리스도와의 법적 연합뿐만 아니라 유기적이고 신비적인 연합 속에서 더 이상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4:4). 영웅을 닮아 가는 숭배자와 형을 닮아 가는 아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신자들과 그리스도와의 결속은 우리의 맏형을 우리 자신의 성화의 선구자로 삼으시는 성령께서 창조하시고 붙드시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더 친밀하다.

조지 린드벡은 우리에게 제자도와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올바른 범주는 속죄나 칭의가 아니라 율법의 세 번째 용도임을 일깨워 준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실재를 근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범에 부합되게 살아 가려는 도덕주의적인 시도로 전락한다. 그런 신학에서는 "계시가 구원론을 포괄할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이 아마도 그렇게 말하겠지만 율법이 복음을 흡수한다."고 린드벡은 말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무엇보다 먼저 본보기가 되시고 그 다음에 구주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그와 정 반대다." 말하자면 본받음이라는 주제를 제자리에 갖다 놓으면 우리는 다시 율법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킨 이들로 판결한 후에 (율법의 제3용도 속에서) 이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베르카우어는 이렇게 지적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고후 9:21) 있다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교회 역사 내내 수많은 방식으로" 칭의는 물론 성화에 있어서도 "복음과 율법의 참된 관계가 희미해졌다."는 점을 베르카우어는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두 반대되는 경향이 분명히 나타난다. 복음을 새로운 율법으로 만드는 경향과 복음을 율법에서 단절시키는 경향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로지 율법주의와 도덕률 폐기론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둘 다 하나님의 은혜와는 반대된다. "어떤 이들, 그 중에서도 특히 바르트는 율법을 그 내용이 은혜인 복음의 형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베르카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율법을 이런 지위로 환원시키는데 반대한다. 그로 인해 율법은 실제로 복음 속에서 용해된다."

 

참된 믿음 속에서 삶의 내적인 측면과 외적인 측면은 조화롭게 계발된다. 율법은 신자를 세상 속으로 - 그의 이웃, 그의 가난한 형제자매(약2:15), 그의 원수, 감옥에 갇힌 그의 형제, 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로 - 인도하며 좋든 나쁘든 이 땅의 신들, 결혼, 행정 당국과 접촉하게 한다.

 

베르카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사도 바울은 반복적인 열정으로 거룩함을 설파하지만 다음과 같은 자신의 명백한 선언은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IV.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활동 中에서 A. 율법주의)에서 발췌, 665~6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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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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