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지금이

마지막 세대라고 믿고 있다.


우리 세대에는 기독교외에도

이슬람, 힌두교, 불교, 무신론자들이 있지만
성경은 특히 계시록에서 이들에 대한 심판을

특별히 기록하지는 않고 있다.


성경에는 한 곳만 예외적으로

심판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는데 바로 음녀 바벨론이다.


도대체 음녀 바벨론이 누구이기에

계시록 16장, 17장, 18장, 19장까지 

무려 4개의 장에서 언급하고 있을까?


심지어 구약의 이사야, 나흠, 예레미야에서도

음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종교를 초월하여 무신론자를 포함하여

모든 인류가 음녀 바벨론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다.


음녀 바벨론은

마지막 때의 전 인류가 추구하는 시대정신이다.


최초 바벨탑을 쌓은 니므롯으로부터

고대 바빌로니아, 신바빌로니아를 거쳐

음녀 바벨론의 성을 쌓으면서 도도한 역사로 계승해 왔다.


이 종교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음녀 바벨론은

모든 제국과 인류의 정신과 삶의 지표로

자리잡아 온 번영과 풍요의 신의 대명사다.


음녀바벨론은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다.
음녀의 음행에 가담한 인류가

약 70억의 신도를 가진 가장 큰 종교로 부상했다.


가상화폐 비트코인 열풍과

아파트 한 채에 수십억씩 하고 수백억달러를 가진 부자들도 많다.

부자 클럽에 가입하려는 열망과 열풍은 엄청난 기세로 폭증한다.


이 종교가 추구하는 교리는

사치와 부귀, 부의 축적, 쾌락인데

이것이 왜 그렇게 큰 죄의 목록에 들어가는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니면 재물이라는 지적에서 알 수 있다.


강력한 두 신, 하나님인가 or 재물의 신인가?

돈의 속성은

사탄의 영역 아래에 맡겨진 하나의 권세다.


최신 유행하는 이 신흥종교의 교주가 음녀이고

배후에는 붉은 용 사탄이 있으며
이 음녀가 사는 성을 바벨론이라 하는 미스테리의 성이다.


모든 인류가 시대의 여왕이자 음녀가 주는

포도주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노아의 때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고 사고 팔면서'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음녀 바벨론의 포도주에 취한 모습이다.


과연 종교에 관계없이

무신론자는 물론이고 모든 인류는

돈과 사치부귀를 삶의 가장 가치있는 목표로 추구한다.



물론 음녀 바벨론의 포도주가 사치부귀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상의 악한 아젠다가 다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 포도주에 만국이 미혹되었으며
세상정부, 유엔, 상인, 자유인, 종교인이 모두
큰 성 바벨론에 다스리는 진영에 가담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저지른
음행과 가증한 일과 불의한 일을 기억하시고
이들을 심판한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게 하실 것이다.

우리 시대에 바벨론이 등장했고 번성했다는 것은
이 때가 최종세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조차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며 이 시험을 받았다.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

예수님은 이 시험에서 승리하셨지만 현대인류는 다 넘어갔다.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겨라"

만약 예수님께서 시험 받으신
그 세 가지(정치,경제,종교권력)를 가지고
메시아로 오셨다면 세상은 예수님을 환영했을 것이다.

세상방식은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많이 재물에 대해 언급하셨다.

1. 하나님과 재물의 두 주인 중 하나를 선택하라 (마 6:24)
2. 은밀하게 구제하라 (마 6:2~4)
3.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마 6:19~21)
4. 오병이어로 가난한 자들을 먹이셨다 (마 14장)
5. 부자청년의 실패 (마 19:16~30)
6. 구제로 양과 염소가 분리 (마 25:31~46)
7. 부자와 나사로 (눅 16:19~31)
8. 불의한 청지기 비유 (눅 16:1~13)
9. 가난한 과부의 헌금 (눅 21:1~4)
10. 어리석은 부자 (눅 12:116~21)
11. 형의 유산을 나누어 달라는 요청 (눅 12:13~15)

재물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

1. 돈을 하나님보다 더 간절히 추구하는가?
2. 내 소득의 일부분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구제하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의 재물에 대한 애착은 매우 크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소득의 몇%를 구제로 내놓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재물은 마음이고 내 추구가 어디에 있는지 가늠하는 측정지표다.

만약 측정할 수 없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닌 재물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어느 종교보다 교회는 구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더 많이 흘려 보내야 하고
탐심을 버리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자기의를 내려놓아야 한다.

바울도 초대교회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온 인류가 음녀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부자는 과도하게 통장의 잔고를 쌓아놓으면서
가난한 자들에게 흘려보내지 않는다.

한쪽에서는 끼니가 없어 굶어죽는데
통장에 수십억의 잔고를 쌓아놓고
"노후 준비가 되었어" 말하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다.
그 통장의 잔고들이 마지막 날에 증인이 될 것이다.



출처: 카이로스 / 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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