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타인을 위한 기도 (2) 만일 기도한다면 / 챔버스의 글들

타인을 위한 기도의 능력과 제한 

 

요한일서 5:16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어떤 사람이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었는지 안지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오직 중보기도를 통해 알 수 있다. 만일 우리 스스로 이 문제를 판단하려 한다면 우리는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 종종 이러한 실수를 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관련 없는 추상적인 진리에 따라 행동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그분보다 그분이 하신 일에 우리의 믿음을 두려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일이 잘못되는 것처럼 보이면 중보 기도를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불평한다 

 

          자기 생각에 도취되어 맹신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나는 반드시 이 일을 해야 한다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보좌를 시끄럽게 할 뿐이다. 이러한 기도는 중보 기도가 아니다. 이러한 기도는 천사가 지나가면서 기도의 대접에 담기를 두려워하는 기도이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려는 자세는 없고 오직 자신의 뜻을 관찰시키려는 비정상적인 정열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를 몰아 세우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도를 듣고 행하셔야 한다고 믿는 기도이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떤 일을 행하셨다고 해서 항상 똑 같은 패턴으로 일할 것이라고 제한하지 말라. 주님께서 과거에 어떤 일을 하셨기 때문에 다시 반드시 그 일을 하실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러한 제한은 종종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망각하고 과거에 그 일을 하셨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또 그렇게 하시라고 강요하는 기도를 하는 경우이다. 우리는 아무런 잘못된 느낌도 얼마나 열심히 이러한 잘못된 기도를 드리는지! 열광적인 기도! 그러나 아무런 능력과 절제가 없는 기도! 이들은 자신의 열정에 너무나 사로잡힌 나머지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도 보이지 않더니 마침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통해 이루신 구속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 따라서 죄와 병마와 인간의 한계와 죽음 등은 구속 안에서 다 해결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속죄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주님의 때에  역사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지금 세대에서 사람이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문제를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을 주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자명하신 뜻은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다. 그러나 병마 및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들의 발생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즉 속죄의 효력이 지금 우리에게 닥친 문제에 나타나는 것은 주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의 결정은 내 뜻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있다.

  

          속죄의 효력을 오해한 사람 중에는 이제 속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으니 나는 아프지 않겠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근본적으로 혼돈하고 있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치유는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주께서 친히 간섭하시며 만져 주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주께서 만져 주셔야 한다. 한편 죄로부터의 구원은 이러한 구체적인 주님의 간섭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속죄를 받아들였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이러한 진리를 잊은 경우, 우리는 영혼 구원의 문제와 현실의 문제를 혼돈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바리새인적인 부담을 안겨주게 된다. (역자 주 - 챔버스가 살던 시대는 전세계적으로 전쟁이 많은 때였다. 일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쓰여진 글들이 많다. 그 당시 흔하였던 가르침 중에는 믿음이 있다는 사람이 왜 저렇게 고통을 당하는 것일까? 아마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라는 바리새인적인 깨달음들이 있었다. 그래서 믿음이 좋아 보이는 사람은 아파도 아픈 척을 못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재난을 당하면 그가 왜 재난을 당하는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구원 받은 자가 어떻게 저렇게 가난할 수 있고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식의 사고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바리새인적인 사고는 완벽하게 맞다. 즉 속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완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 말대로 속죄 안에서는 병마가 없어야 한다. 죽음도 없어야 한다. 죽을 필요도 없어야 한다. 인간적으로 제한 받는 일도 더 이상 없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도 완벽해야 한다. 속죄를 받은 사람에게는 건강한 몸도 보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현재 부활체를 가르치는 자들의 사고와 매우 잘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현재 부활체라는 가르침이 얼마나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키는지! 이 가르침은 온 땅을 돼지 우리로 만들고 있으며 모든 기독교를 익살 또는 장난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신에 자신들이 유추한 추상적인 진리를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생각에 도취된 맹신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러한 맹신이 없었다. 그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추상적인 진리로 만들어 맹신한 일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삭을 바치라.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안된다. 만일 맹신자라면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전에 말씀하신대로 그냥 하겠습니다. 나중에 하신 말씀은 사탄의 음성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해 달라고 요구한 우리의 요구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배워야 할 매우 중요한 교훈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이 시대 속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그 섭리가 나타날 것인지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많은 기적들을 베푸셨다. 특히 병고침 같은 기적이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하셔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도를 할 경우 나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명령하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프면 기도하라. 기도하지 않으면서 구원 받았으니 아프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지 말라. 기도를 멈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대화가 차단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우리가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반드시 치유하셔야 한다고 주장하지 말라.  단지 간절히 기도를 드린 후에 주께서 주의 주권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맡겨라.

 

 

[출처] 40. 타인을 위한 기도 (2)|작성자 스데반 황/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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