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2:21

 

본문의 문맥을 당신에게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나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 2:18-22).

 

성탄절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관심을 복되신 주님과 구세주의 인격에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날짜가 확실하지 않다고 주장하려는 학자인 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들은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지키는 것은 저들의 표현대로, 이교도적 습관으로 세례받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경미한 차이점도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전체적인 차이점을 만드는 것은 그 위대한 사실, 곧 그 위대한 사건 자체입니다. 정확한 날짜는 매우 불투명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역사의 전과정을 바꾸어 버린 그 유명한 사건 자체입니다.

그 어떤 다른 교훈보다는 여기에 나오는 그 인격이 중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고 또 많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 많은 부분이 어떤 특별한 분의 이름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저들에게 본질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들과 똑같이 같은 것들을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의 위대함에 조금도 빗나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인격 자신입니다. 그 가르침은 모두가 그분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우리의 기독교 신앙관과 구원관 그리고 세계관을 결정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에 관하여 무엇을 믿는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날 남녀들이 직면한 중요한 문제가 우리주님 자신에 의해서 제안되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마 22:42) 그 위대한 질문에 대해서 오직 두 가지 중요한 대답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그의 출생에 관하여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견해는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답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 그가 한 인간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들은 너그럽게 준비된 말로 위인, 특별한 사람 그리고 비범한 사람이지만 인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혹자는 그분이 선하시고 신실하시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순종하시는 삶의 결과로 그가 신성을 이루셨다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살아온 삶과 하나님께 보이셨던 순종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현현하셨던 그런 사람이 되셨고, 또 우리가 우리 모습 그대로 그분과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한 바로 그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돋보이는 경건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한 일들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그분을 사용하실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그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참으로 우리를 돕도록 하셨던 사람이란 점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모든 견해들 속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들어 있습니다. 저들이 주님을 단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정통한 여러분들은 이 같은 주장들 속에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는 점을 아실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그분에 대하여 말하던 그 어떤 것들이었습니다. 매우 정직하게, 신약성경에 나오는 복음서들은 이 모든 것들이 그의 탄생하심부터 그가 하늘로 올리워 가심까지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이고도 어리석은 세상은 언제나 그것에 흥분하고 있고 또 '학문'이라는 미명 아래 사람들은 그것을 논하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언제나 경고로 두려워 떨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소위 '학문'이라고 불리우는 이것에 대하여 말할 기회를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학문은 특별한 권위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주어진 선상에서 일정한 분량의 일을 하는 것 외에 자신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재능과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낼 뿐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그 학문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학문은 언제나 그 자체가 스스로 취소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문들이 복음을 반대하는 데 주제넘게 구는 자들에게 공표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저들은 언제나 그런 일을 해왔습니다. 바로 그것은 세상에서 언제나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지식은 어떤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 저들에게는 특별한 능력도 없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거나 아니면 저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인해 버리는 똑같은 입장에 서 있는 학자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의 믿음과 나의 믿음은 얕은 기초 위에 세워진 그 무엇이 아닙니다. 당신은 몇 년 후에 어떤 옛날 사본이 발견되거나 아니면 어떤 사람이 놀라운 발견을 할 것에 대해서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그것이 모두 요정이야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갑자기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만일에 당신이 이런 종류의 일들로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당신이 진정 성경을 배우고 또 우리 주님에 관한 일과 그가 어떻게 사셨고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에 대한 사실이 매우 확고하게 기초된 논증들을 깨달아야만 한다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우리는 어떤 불안한 입장에 놓여있지 않습니다.

저는 모든 논증들을 다 살펴보고자 제안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하나만 당신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자주 반복할 수 없는 논증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입장을 증명하는 것 이상으로 충분한 논증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예언 논증입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우리는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들을 수 있는 것에만 의존하지 않고 구약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장차 오시기로 예언된 그분에 관한 메시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들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세한 예언들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졌고 또 증명되었습니다.

사실 여부는 별도로 하고서라도, 어떤 사람이 이천 년 동안 세상이 하나의 거짓말을 믿어왔다고 믿을 수만 있다면-그것이 바로 대답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모든 역사는 학문이라는 미명아래 밀어붙여 왔던 이 모든 어리석은 부인행위들을 매우 무가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이에 대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세기 동안 이런 종류의 일들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탄생에 대한 설명에서 우리는 이것을 상기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특별한 때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확실한 사실들 위에 견고하게 기초하고 있다는 점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에 대한 한 견해는 그가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피력하셨는데 제자들이 많은 다른 것들을 상상하고 또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고자 하여 주님이 결코 행한 바 없는 것들을 조작하기도 하고 또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신약성경자체 속에 매우 충만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저들은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그 같은 반복적인 주장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그것들이 조금도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또 다른 견해는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이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 곧 그 복되신 성삼위 가운데 두 번째 위격이시라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가르침이며 또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받아들이지 않는 교훈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면, 우리가 사도들이나 다른 성경기록자들을 사기꾼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들에겐 '경건한 사기꾼들'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구분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 기록을 믿고 틀일에 이런 일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나는 기독교 교회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든지 아니면 우리가 소위 영리한 사람들과 동의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그 기록을 믿든지 아니면 그것을 거절하든지 택일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의 신성에 관한 교훈이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탄생 예고와 마굿간 탄생 등 많은 놀라운 이야기들을 가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목자들의 이야기와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동방박사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또 노래하며 찬송했다는 기록도 읽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덧붙여, 복음서들은 몇 가지의 분명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에 당신의 관심을 촉구하고 싶습니다. 특별히 그것이 요한복음 2:21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도로서의 우리의 임무는 단순히 이런 일들을 기록하고 또 그것들을 우리 자신들에게 상기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 나아가려고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이 같은 목적을 위하여 요한이 여기에서 인용하고 있는 본문이 가장 빛나고 있습니다.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요한은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성전을 청결케 하시고 또 그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반응하는 장면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또 요한은 저들이 주님께 매우 놀랍고도 충격적인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할 때 그가 어떤 말씀으로 답변하셨는가를 우리에게 설명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은 이에 당황하여 또다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한은 우리로 하여금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는 설명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복되신 주님 곧 구세주의 탄생에 관계된 가장 빛나는 구절입니다.

이제 '성전'이란 그 단어가 '신전'으로 번역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는 신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여기에서 우리 주님은 불가해한 방법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이중적인 의미로 말씀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가 지금 문자적이고도 물질적인 성전을 청결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동시에 자신의 몸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며 또 그렇게 하시면서 성육신 할 때에 일어났던 바에 관한 놀라운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교훈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바로 자신의 형체 혹은 몸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것을 생각하도록 저들에게 허용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저들에게 그 관계를 설명해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에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적 요소에 대한 말씀을 인용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신약성경과 그 역사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는다면,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일을 시작조차 시작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 주님 자신이 바로 모든 상징들의 실체이시며 구약성경에 기록된 그림자들의 본체시라는 그 방법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들이 그 중에 어떤 것들과는 이미 친숙해졌습니다. 어린양과 번제물과의 관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들이 어쩌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상징이 바로 성전 자체라는 점을 종종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처음에 성막을 건축하라고 어떻게 명령하셨는가를 읽게 됩니다. 하지만 성막은 예루살렘에 건축된 그 큰 성전의 전조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이 성전의 건물에 들어가는 재료들과 크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성전에 사용된 모든 금과 성전의 웅장함 그리고 그것의 영광을 살펴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모든 것이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되었을까요? 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 있습니다. 성전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들어가시게 될 몸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당신이 구약으로 돌아가서 성전 건물에 대한 어떤 설명을 읽게 된다면 당신은 그것들이 가장 밝게 조명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솔로몬의 성전 봉헌기도 시문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왕상 8:27) 여기에서 솔로몬이 성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는 일 년에 한 차례씩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라 불리우는 가장 깊은 곳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사 거하시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언약궤가 있고 시은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은소를 스랍이 두르고 있습니다. 또 거기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했습니다.(10-12절).

이제 솔로몬은 자신에게 주신 교훈을 따라 이 모든 것들을 준비했습니다. 그 위대한 봉헌일이 다가오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 8:27). 성전, 특별히 가장 깊이에 위치하고 있는 신전은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건축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우리 주님은 이 교훈을 확언하고 있고 또 설명하고 계십니다. 주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요한이 우리에게 설명한 대로 원래 그의 몸을 지칭하고 계십니다. 그는 '내 몸을 헐라 그리하면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생각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들이 옳으며 또 이 두 가지의 의미가 함께 병행함을 시사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이 성육신에 던져 주는 빛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의 몸은 저가 거하시는 집입니다. 유아 곧 구유에 누우신 그 아기의 몸은 아들의 인격 속에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 14에서 이와 똑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구절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라는 말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몸처럼 주님의 몸도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내는 일종의 천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사 거하시는 장소 이상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성막과 성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거처를 상징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그의 거처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골로새서 2:9에서 똑같은 사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가장 놀라운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육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마음속에 이것을 필히 새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 신성의 충만이 모든 성전 안에 곧 이 몸에 계셨습니다. 또 그 안에 거하시는 충만함이 아버지를 기쁘시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살펴보는 또 다른 방법은 우리 주님의 탄생을 예고해 주는 이사야서 7장의 예언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또 그 예언은 저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운다는 첨언으로 계속됩니다.(사 7:14). 마태가 바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했으며 또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일러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마 1:23),

그것이 바로 우리가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은 특별하신 형태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좀 더 구체적으로 고찰해 본다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옛날 성전, 특히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인간을 대표로 해서 그곳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은 영원하신 아들이 거하는 이 성전 안입니다. 만나는 장소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전은 바로 나다. 이 몸이 바로 성전이다. 내가 이 성전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다. "

그러므로 나중에 우리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고 말씀하신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영존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은 이 장막 곧 성막에 계시는 아들의 인격 안에 거처를 삼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었느니라'(딤전 3:16).

그것이 바로 성탄절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베들레헴에서 그 아기가 탄생하신다는 뜻입니다. 옛날의 성전에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혈과 육 곧 인간의 형체, 구유에 누우신 아기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어린아이들의 찬송은 매우 옳다고 믿습니다.

 

 

천사의 음성으로 들려 주는

그 이야기를 나는 듣고 싶네.

영광의 왕께서 어떻게

이 땅에 강림하셨는가를

-에밀리 헌칭톤 밀러 -

 

 

여기 요한복음 2장에서 불가해한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우리 주님은 일어난 그 위대한 사건에 빛을 던져 주고 있으며 또 성육신의 의미에 밝은 빛을 발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육신에 따른 신비의 요소를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신비는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바로 본 사건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고 또 그 의미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분이 이 땅에 계실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붙잡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결코 그를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주님이 말씀하실 때에 듣고, 기적을 행하실 때에 목격했으며 그에게 질문도 했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질문을 받으실 때에 답변 때문에 한 번도 당황해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저들은 목수 혹은 예수 외에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저들이 불량자라고 느꼈던 그분, 그리고 저들이 미워했던 그분은 결국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사도 바울이 우리들을 위하여 그것을 종합해 주신 바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8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니라."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단지 성전만 보고 그 안에 거하시는 그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외적인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영광과 경이와 신비를 보지 못합니다. 저는 당신과 제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에 요한이 이 구절을 청가했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요한이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이해했다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경이요 신비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며 기적적인 일입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것이요 또한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다면, 이렇게 영리한 현대인들이 그것에 익숙하지 못하여 실수하거늘 우리들이 더욱 실수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권세 잡은 자들은 결코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저들은 선입견 때문에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훌륭하고 지식이 많고 뛰어난 학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맹목적인 행위에 불과합니다. 세상은 이 신비와 경이 때문에 그분을 결코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를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을 위하여 만들어 주신 이유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 :18) .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불멸, 불가시적인 하나님만이 지혜로우십니다.

그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십니다.

-월처 찰머스 미스 -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리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딤전 6: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유에 누운 아기가 영윈하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증언을 듣습니다.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 말에 걸려 넘어집니까? 그 일이 자연적인 인간의 마음과 지성에서 믿기우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대 사도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딤전 3:16). 세상은 이 같은 일을 비웃습니다. 물론 그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저들의 이해를 전적으로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것을 자신의 연약하고 불완전한 이해력으로 측정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육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고찰해 보아야만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의 의미를 놓쳐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요한복음 2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의 견지에서 그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인격 안에서 일어났던 그 한계를 살펴보십시오.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땅에 거하시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것이 제한된 공간에서 가능하겠습니까? 그는 계속해저 말했습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 8:27) 솔로몬 성전과 헤롯 성전이 매우 큰 집이고 또 공간이 넓은 빌딩이라는 점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것은 매우 크고 세상에서 웅장한 건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잠깐만요!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한 작은 인간의 몸에 갇히는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정확하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성전입니다. 당신은 지금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 성전에 계심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도가 말씀합니다. "그 안에-그 아기 안에-모든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함이 육체적으로 거하시니라." 압축 혹은 축소가 여기에 나타난 경이와 신비의 한 부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한 아기 속에 두 본성이 들어 있습니다. 오직 한 인격 곧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두 가지의 속성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사람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십니다. 경이와 신비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저들이 한 인격 속에 머물기는 하지만 이 두 본성들이 서로 섞여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상호 혼합되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인간! 하나님! 둘은 완벽합니다. 둘은 절대적입니다. 둘은 사실적입니다. 그러나 둘은 혼합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놀랄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저들은 말합니다. "오, 나의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물론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스스로를 그 같은 바보인 것처럼 보여 주는 장소인 것은 그것을 이해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해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이 세상에서 일어났던 적이 있는 가장 부서지기 쉬운 것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세상이 창조될 때는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일 중에 가장 능력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강림하사 그렇게 작은 육체 속에 제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이시고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둘은 사실입니다. 둘은 서로 분리되어 있고 또한 독특합니다. 하지만 둘이 한 인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측면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것은 사람들을 혼돈시키는 그 무엇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에 우리는 어느 때에 그리고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있고 또한 숨겨지는 것이 있다는 사실 곧 계시와 은폐가 있음을 항상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이 한 사건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그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물질적인 성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께서 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안에 일으키리라."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여기에 하나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에 관계된 그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단순히 성전에 대해서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동시에 양쪽 측면을 모두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그의 일생을 어떻게 사셨는가를 보여 주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영광의 현현이 있었고 또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접촉할 때에 언제나 두 부류로 나누어지곤 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제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감지하고 느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거기에 어떤 영광의 그림자 같은 것이 있음을 보았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성전과 육체 그리고 외형적인 모습 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했습니다.(요1:18) 우리가 출애굽기를 읽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찰스 웨슬레가 그 유명한 찬송에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육체의 베일 속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 만일에 당신이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당신은 분출되어 나오는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당신은 육체와 베일 그리고 은폐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또 다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능력과 약함이 놀랍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갈릴리 가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는 그 기적의 능력을 보며 또 말씀의 권위로 성전을 청결케 하는 권세를 봅니다. 또 요한복음 2장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그의 지력이 얼마나 대단했었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왜냐하면 그가 사람 속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서에 보면 그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가 단순한 한 인간처럼 보일 메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권세와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가 성난 과도를 잔잔케 하시고 또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연약함 속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여기에 신비가 있습니다. 여기에 불가사의가 있습니다. 여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여기에 모든 기이함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단순한 중심적 신비의 표현현상에 불과합니다. "육체의 베일 속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느니라." 그것은 가장 위대한 경이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신비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여기에서 듣는 성육신의 메시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이것이 우리의 가장 진실한 관심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한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인가 혹은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를 알아볼 수 있는 시금석은 우리가 이런 사건들을 살펴보는 방법입니다. 성탄절이란 우리가 서로 성탄절카드를 보내고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는 것입니까? 세상은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저들은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더 많은 노래를 부를 뿐입니다. 하지만 당신과 저는 생각을 많이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매우 분명해졌습니다.

당신은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님 자신이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머무르도록 허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출생이란 단순히 끝이 있음을 뜻할 뿐입니다. 그가 자신의 사역 초기에 있을 때에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내 몸을 넘어뜨려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것은 분명한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입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신 것은 단순히 놀라운 것이나 교훈 혹은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 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가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는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으며 또 어린 아기로 마굿간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이게 된 것은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위대한 진술이 히브리서 2장에 나옵니다.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셨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는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8-9). 그는 천사보다 약간 못하도록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아기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천사들보다 약간 못한 아기로 말입니다. 그는 천사들을 지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 자신이 이제는 천사들보다 약간 못하신 분이 된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그가 지금은 그 성전이 파괴될 수 있도록 성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가 지금 장차 그 건물이 무너지고 파괴되어 돌 하나 돌위에 겹쳐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건물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언제나 살고 또 거주해야만 될 그 건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요정이야기를 들음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다른 사람을 취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이야기는 죽기 위해서 태어나신 분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나시고 또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정복하기 위해서 탄생하신 분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왜 그분이 이 모든 일들을 행하셨습니까? 왜 그가 오셨습니까? 요한복음 2:20에 보면 아주 놀라운 방법으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가 새로운 언약 곧 새로운 시대를 소개하려고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가 그렇게 되리라고 예언하신 대로 그의 몸은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전도 역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거기에서 이 두 가지 일들이 상호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결국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어버린다면, 너희는 동시에 저 성전도 헐게 될 것이다. " 그 일이 정확하게 현실적으로 발생하였습니다.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성전휘장이 둘로 찢어졌던 것입니다.(마 27:51). 이제 지성소로 구별되었던 장소의 막 곧 휘장이 모든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찢어진 것입니다. 지성소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주후 70년에 그 장엄한 건물인 성전과 모든 정원들이 다 무너져 엄청난 쓰레기 더미로 남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실 때에 사람들은 당황해 하고 성난 채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누구냐? 무슨 권리로 이렇게 하느냐?' 결국 주께서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지 못하고 또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도다. 내가 새 성전임을 너희가 깨닫지 못하는구나. 파괴됨이 있을 것이다. 너희가 나 곧 내 몸을 무너뜨릴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희는 너희가 아는 것보다 더 큰 일을 자행하고 있구나. 너희가 장차 한 시대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

바로 그 일 때문에 그가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는 구약시대를 종결짓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성전은 영원히 무너졌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모든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성전이 자신들의 것인 양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전이 일시적인 것임을 저들에게 가르치고 싶어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은 없을 것입니다. 의식이나 예전 그리고 구약시대의 예배는 이제 회복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것의 종말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신의 몸을 부수어 버리심으로 단번에 영원히 그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자신이 새로운 성전을 세우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성육신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장소를 공급받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는 더 이상 사람이 손으로 만든 성전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행 17:24). 우리는 이제 그의 아들의 인격 속에서 그를 만납니다. 그 아들은 자신의 몸인 성전으로 강림하시고 또 그의 몸이 일으킴을 받으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의 몸을 다시 취하셨습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계십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그는 화해자이십니다. 그는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는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우리는 더 이상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아버지께 가는 길을 발견하지 못합니다.(히 9:13).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길은 오직 이 한 분 그리스도 안에 있을 뿐입니다. 그 옛 성전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모든 옛성전의 지성소는 예표일 따름입니다. 이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는 길은 그분 안에만 있습니다. 그 안에서만 하나님과 인간이 화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은 전적으로 이 복되신 인격 속에 있습니다.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마지막으로, 그의 사역의 결과로 우리가 가서 당신과 내가 이제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바로 성전입니다. 기독교 교회가 옛날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성전이 재건되고 피의 제물과 희생제물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신약성경의 복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증거를 당신에게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바울의 증언을 들어보도록 합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사 육체로 거하셨습니다. 그가 다시 오사 이제는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린도전서 6:19을 읽어보십시오.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나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또 우리는 에베소서 1장 마지막 부분에서 똑같은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자의 충만이니라'(엡1:22- 23).

아니면 에베소서 2장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우리는 하나님의 거처 곧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참으로 당신도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내용을 매우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 14:23).

 

이런 것들이 바로 성육신의 결과들입니다. 더 이상 외적인 성전이 문제가 아닙니라. 그가 이것을 다 해결해 버리셨습니다. 여기 지상에 있을 동안에 그의 몸의 성전이 더 이상 있지도 않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그의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을 떠나서 당신과 저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주님이 영으로 거처를 삼으시는 성전입니다. 이와 관계된 우리 자신들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이보다 더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오, 경이와 놀라움 그리고 신비와 기적 또 모든 영광!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해를 도우사 이 모든 것들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의 한부분인 것과 또 개인적으로는 주님이 믿음으로 우리 안에 거하심을 깨닫도록 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베들레헴에서 아기로 탄생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들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