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에 관심 없으신 하나님 / 로이드존스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군대를 동원하여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숫자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정결함과 거룩함,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숫자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되며,
      ...
      교리와 거듭남과 거룩, 그
      리고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며

      하나님의 거하시는 장소임을 깨닫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로이드 존스 교리집

        제1권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제10강

        선한 천사들

         

         

        10.선한 천사들

        창조교리를 다루기 전에 다루어야할 교리가 하나더 있다. 바로 선한 천사들과, 마귀

        와 타락한 천사들의 교리이다. 우리는 일정한 순서를 따라 성경교리에 접근하고 있

        으며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에 자신에 대해 계시하시는것

        들 즉, 그분의 존재, 인격, 속성들에 대해 공부하였고 성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공부했다. 그리고 우리는 위대한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공부했으며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본성으로 인해 경외심 가운데 말하건데 '정해진 방식'으로 일하실 수밖에 없다는것을 배웠다.

         

        1)천사의 교리를 고찰하는 이유

        성경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전에 천사들이라고 하는 지적존재를 창조

        하셨다는 사실이 분명히 나와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 조차 구원의 교리에는

        흥미를 느끼지만 천사의 교리같은 부분은 간과한다. 이것은 성경의 풍성한 진리 를 깨닫는것을 스스로 막는것과 같다. 교리에 도달하지 못하는 성경공부는 아무

        런 유익이 없다. 이런식으로 공부하기 때문에 성경이 천사에 대해 말씀하시는것

        을 한번도 고려하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2)천사에 관한 일반적 사항들

        천사란 사자(messenger)란 의미이다. 이 말은 찬사들이 하나님의 사자로 보내심

        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말은 예수 그리스도에도 사용되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다

        시피 "언약의 사자"로 몇차례 언급한 적이 있다.

         

        (1)천사는 피조된 존재다.

        천사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처럼 영원전부터 존재하지 않았

        다. 히브리서 첫장은 하나님의 아들과 천사들을 구분한다. 천사들은 영적존재

        이나 피조물이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곧 알게 되겠지만 권세들이란 말은 천사를 의미하는 용어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

        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2)천사는 영적인 몸을 가지고 있고 때로 인간의 형태로 나타난다.

        천사는 영적상태에 적절한 영적인 몸을 가지고 있고 창세기 18장에 아브라함

        에게 천사가 세 사람의 사람형태로 나타났다. 또한 삼손의 부모와 천사의 이

        야기를 봐도 그렇다.

         

        (3)천사에게 성별이 있는가?

        성경에는 천사가 언제나 남성인것처럼 지칭되고 "그(he)"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4)천사는 죽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죽을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눅20:36)

        "천사들모다 잠시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뒤로 관을 쓰신" (히2:9) => 주님이 천사보다 못하게 되지 않았더면 죽음의 고난을 받으실수 없 었다. 그들은 불멸의 존재들이다.

         

        (5)천사는 사람보다 우월하다.(천사의 지위)

        천사는 분명 피조물로 성부, 성자, 성령님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들의 지위

        는 사람보다 우월하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8:4-6)

         

        (6)천사들의 이름과 칭호

        a)통치,권세,능력,주권

        그들은 "영"들로서 묘사되며 에베소서 1장 21절에는 그들이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이라고 묘사되어있다. 이런 용어들은 선한천사건 악한

        천사건 언제나 천사들에게만 사용된다.

        "혈과 육을 상대하는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

        들..."(에베소 6:12) => 사도바울은 여기서 타락한 악한 천사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b)거룩한 천사

        "거룩한 천사"(눅9:26), "택하심을 받은 천사"(딤전5:21)로도 표현된다.

         

        c)섬기는 천사

        그들은 종종 '섬기는 영'으로 묘사된다. 모든 천사는 섬기는 영이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1:14)

         

        d)그룹, 스랍, 생물

        "그룹"(시99:1,겔10:1-22), 스랍(사6:2), 생물(계 4:6) 이 용어들은 모두다

        동의어로 볼수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동물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모양에 있어서는 그들이 혼합된 존재인거 같다. 그들은 구속받고 영화된

        인류를 상징하는듯 하며 예표하는듯하다. 그들의 주된 기능이 우리를

        섬기는것에 있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7)천사들의 수

        성경에는 천사들의 수가 셀수 없을 만큼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가 탄생하셨을때 목자들은 "수 많은 천군"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예수님

        님은 십자가에 못밖히실 때 자신이 하려고만 하면 "열 두군단" 되는 천사들

        을 보내어 자신을 지키도록 하실수 있다고 하셨다. 요한계시록 5장엔

        천사들의 수가 무수히 많아 만만이요 천천의 크고 강력한 천사의 무리를

        묘사하고 있다.

         

        (8)천사들의 서열

        천사들이 그렇게 많다면 그들 사이엔 서열이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해

        볼수 있다. 성경을 보면 그들이 지위와 사역에 있어 모두 구분이 있다고 분

        명히 말하고 있다.

        '천사장'이란 단어는 살전 4장 16절과 유다서에 나타난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살전4:16)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유다서 9절)

        =>천사장은 미가엘이다.

        미가엘은 다니엘서 10장에서도 바사국 군대와 싸웠으며 이스라엘을 특별히 돌보는일이 할당되었다.

        =>다음은 가브리엘을 들수있다.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임재앞에서 전달해야 할 말씀을 기다리며 서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것이라 말하도록 보냄받은것은 가브리엘 이었다.(눅 1:26) 또한 스가랴에 메시지를 전한것도 역시 그였다.(눅1:19)

        분명 천사들 간에는 모종의 질서와 구분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에 나타나는 특성으로써

        심지어 타락한 악한 영들 사이에서 조차도 이러한 질서가 나타난다.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6:12)

        또한 그들은 능력의 존재라고 기록되어 있다.(시103:20) 그들의 능력은 분명 인간의 능력보다 크다.

        존엄성과 지위에서 분명 인간보다 우월하다.

         

         

        3)선한 천사들의 임무

        천사들은 분명히 두 집단으로 나뉜다. 택함받은 천사들 즉 선한 천사들과 버리움

        을 받은 천사들 즉 마귀와 그 사자들(마태25:41)로 나뉜다. 이번 장에서는 선한

        천사들을 우선 다루어야 한다.

        그들은 하늘에 살고 있으며-"하늘에 있는 천사들"(마22:30)- 주님은 또한 ".....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마22:30)라고 말씀하셨다. 이들의 거주지는 하나님의 보좌 주변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들의 임무는 무엇인가?

         

        (1)일반적인 임무

        a)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함

        요한계시록 5장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하며 지낸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예배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가장 그들에겐 우선적인 일이고 그들이 기뻐하는 일이고 존재하는

        목적이다.

        그들은 게으르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의 가장 사소한 지시라도 놓치지않게

        주의하고 있다. "그들은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그들은 마치

        가죽끈에 묶인 개가 놓이기를 기다리는것처럼 주님의 위대한일을 하려고

        노심초사하고 있다.

         

        b)우리의 구원을 탐구함

        우리는 이 사실을 읽을때마다 우리 구원의 영광스러운 면을 더 잘 이해할수

        있다. 베드로는 우리의 구원을 말하면서 "이것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것이라"(벧전1:12)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정말 놀랍고도 멋진일이기에 영원히 하나님 앞에 임재하도록 창조된 천사들 조차도

        이 일을 살펴보고 놀라고 있다. 이는 어떤일보다 천사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

        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10-11)

        =>그들은 이 구원을 보고 너무 놀라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라고 서로 묻습니다. 그들은 이 놀라운

        구원을 들여다보고 연구하고 조사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

         

        c)성도들 가운데에 임함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고전11:10)

        =>여자가 공예배시나 기도할 때 머리에 무엇을 쓰고 해야하는 이유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일때 그 자

        리에 천사들이 그 자리에 임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여자가 남자의 권위 아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천사들의 임재로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를

        "두렵고도 놀라운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d)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됨

        ㄱ)율법은 천사들의 중개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어졌다.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히2:2) 이와비슷한 구절이 갈3:19, 행7:53 에도 나운다.

        ㄴ)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한다.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천사를 통해 계시하였고 야곱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실때도

        천사를 통해 그리하셨다. 기드온도 천사를 통해 그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들었으며 신약에서 스가랴

        는 천사를 통해 자신의 아들 세례요한의 탄생에 대해 들었다. 동정녀 마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계시한것도 천사를 통해서 였다.

         

        (2)성도를 섬김-가장 큰 임무

        천사에 관한 교리중 가장 놀랍고 위로가 되는 측면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

        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을 돌보시기 위해 천사를 통해 우리를 섬기도록 하셨다

        는 사실이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것

        이 아니냐"(히1:14)

         

        a)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용받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시간동안 그들은 우리를 준비시킨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의 회심때 고넬료가 어느날 기도하고 있는대 한 천사가 와서 그에게 자신

        의 구원에 관한 예고편을 보여주고 구원이 실현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었다.

        이 사건을 보면 천사들이 우리가 구원받도록 준비시키는일에 있어 우리가 알고있는것보다 더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것을 추론할수 있다. ex) 예배의 장소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우연히 누군가 를 만나 예배의 장소에 가게 되거나 예수님을 만나 영접하게 되는일등등

         

        b)성도를 보호함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하

        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편91:10-11)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단 6:22)

         

        c)성도를 인도함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행8:26)

        =>이 사건의 결과로 빌립에 의해 에디오피아 내시가 회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d)성도를 위로함

        바울은 폭풍을 만나 파선상태에 있던 배에 탄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행27:23) 그 천사는 사도바울을 격려하기 위해 보내심

        을 받았다.

         

        e)성도를 구해냄

        사도행전 12장에 베드로가 감옥에 있을때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

        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베드로는 이렇게 감옥

        에서 풀려났다.

         

        f)성도가 죽을때 낙원으로 인도함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눅16:22-23)

        천사들은 처음에 우리를 준비시키고, 우리를 지켜보고, 보호하고, 호위해주고, 구해주는 모든일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죽을때 우리를 주님 계시는 낙원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이것이 종종 "수호천사"라 불리는 존재가 우리 모든 사람에게 존재

        다는 교리를 지지하는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성경에 천사가 이런일을

        한다는 내용은 기록되어 있으나 모든 사람에게 "수호천사"가 있다는 내용은

        성경에 근거가 없다.

         

         

        (3)심판

        a)하나님의 원수들에게 심판을 시행함.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이것은 백성들 앞에서 연설을 하던 헤롯

        왕에 대한 언급이다. 그는 주의 사자가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

         

        b)최후의 심판을 수행함

        "가라지를 거두어 불사르는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

        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저 넣으리니"(마 13:40-42)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

        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

        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24:30-31)

        천사들은 사람과 이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창조되었다. 유기된자를 택함받은자들로부터 갈라내어 파멸

        시키고 택함받은 자를 영광의 주께 인도하는 이 마지막 활동은 천사의 몫이다.

         

         

        4)천사의 교리를 탐구하여 얻는 유익

        당신이 보던 보지 못하던 천사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우리를 돌보고 있으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우리를 보호해주고 숨겨주며 종종 위험으로부터

        구해준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런식으로 우리를 돕도록 그들을 사용하신다.

        천사들은 하늘의 상속자인 우리들을 섬기도록 임명되고 보내심을 받은 존재들

        이다. 천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소홀히 하는일이 없도록 하자. 그러면 놀라

        우신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알아갈수록 더 큰 경이감으로 가득

        차게 될것이다.

        가져온 곳 : 
        카페 >양무리마을
        |
        글쓴이 : 요단강건너는사람
        영적 판단과 식별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1-6)

        6절은 7장 1-5의 결론이며 그에 관한 최종적인 진술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절이 앞의 내용과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지만 사실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균형을 갖추도록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일 예수님께서 5절에서 끝냈다면 반드시 잘못된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비판의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식별이나 판단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단이 교회 안에 침입해와도 수수방관하게 될 것이다.

        비판과 분별

        1 주님께서는 지나치게 비판적이어서는 안된다고 권면 하시지만 식별 혹 분별마저 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2 우리들이 피하여야 할 일은 사람들에게서 허물을 찾아내고 비판하며 자기만이 사람 위에 설 수 있는 최종 판결자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분별력을 일으키는 것과는 전연 별개의 문제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을 분별하고 시험하라고 권면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거룩한 것과 진주와 개와 돼지

        1 거룩한 것과 진주에 비견할 만한 것은 진리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천국의 기쁜 소식이다.

        2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진리를 불신자에게 주지 말라는 말인가? 아니다. 불신자를 회심시키는 데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며 구원의 복음이 필요하다. 주님은 제자들을 불신자들에게 파송하며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다.

        3 그러나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주지 못할 개와 돼지 같은 사람이 있는가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심해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한다. 예수님의 예를 들어보면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에게는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헤롯 앞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헤롯은 불건전한 호기심으로 이상한 기적을 보기 원했던 것이다. 바울의 경우에도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는데 저들이 시기와 질투의 반대를 일삼았다. 그러자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기로 영생을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주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개와 돼지와 같이 정면으로 대적하거나 저주하면서 진리를 발로 짓밟아 버렸던 것이다.

        다양한 전도 방법이 필요함

        1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 다양한 종류의 개성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식별하는 범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세일즈맨들이 물건 하나를 팔기 위하여 사람들의 심리를 파악하고 그 사람들에게 맞는 방법으로 세일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한다. 복음을 전하는데 천편일률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다. 어떤 전도회는 노방전도만이 유일한 복음증거의 수단이고 노방전도를 하지 않으면 잘못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이는 매우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2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율법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것처럼 되었다. 이것이 진리의 복음을 들고 나가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자세인 것이다.

        3 우리는 진리를 줄 때에 반드시 조심하고 주의해야 하며, 어떤 방법으로 주어야 좋을 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기본적으로 사단의 지배아래 있으며 사단에게 속아서 마음이 구부러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귀한 줄로 여길 줄 모르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저들의 이러한 심령 상태를 알아서 진리의 복음을 주의 깊게 증거해야 한다.

        4 예수님은 저들의 마음을 보시며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 하는 모습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우리가 복음을 들고 나아갈 때 바로 이러한 주님의 동정과 긍휼의 마음을 가질쁜만 아니라 지혜롭게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소망한다

        로이드존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잘못된 교리(신학)에서 잘못된 삶이 나온다

        오직은혜

        이글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1899 – 1981)의 글입니다. 성령이 보증하는 '진리'가 왜곡되고 부정되며 다른 거짓 것(인본주의, 영지주의, 율법주의, 번영신학, 뉴에이지,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혼합되어지고 대체되어지는 현대의 개신교 교회에 필요한 글인것 같아서 올립니다. 본 글은 Ken Silva 목사가 운영하는 Apprising Ministry 웹싸이트에서 퍼와서 번역한 것입니다. 싸이트의 주소는 www.Apprising.org 입니다. ================================================================================ People say, ‘Do not be negative; let us be positive; let us just preach the simple gospel’. But the Bible is full of negatives, full of warnings, ever showing us these terrible possibilities. If you find in yourself a dislike of the warnings of the Scripture and of this negative teaching, it is obvious that you have been duped by the wiles of the devil. You have not realized the situation in which you are placed. 사람들은 "우리 부정적이지말고 긍정적인 사람들이 됩시다. 우리 단순한 복음만을 설교합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부정적인 것과 경고들, 일어날 나쁜 일들로 가득 채워져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러한 성경의 경고들과 부정적인 가르침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면 여러분은 마귀의 꾀임에 속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금 어떤 위치에 서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The movements to which I am referring can be best classified and considered along the following lines. We start with Heresies within the Church, which have been caused and produced by the devil and his powers. I am not concerned to go into the detail of heresies; I am simply concerned to emphasize the fact of heresies, the fact of movements within the life of the Church that have so often led to terrible trouble and produced a state of chaos. 제가 언급하고 있는 이러한 풍조는 아래의 내용으로 잘 분류되고 검토되어 질 것입니다. 먼저 교회 안의 사탄과 그의 능력에 의해 생성된 이단들에서 부터 시작해보지요. 저는 각각의 이단들에 대한 세밀한 분석 보다는 이단들이 갖는 어떤 특정한 내용, 즉 교회 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혼란과 어려움을 초래하는 원인들에 대해 강조하려고 합니다. A heresy is ‘a denial of or a doubt concerning any defined, established Christian doctrine’.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heresy and apostasy. Apostasy means ‘a departure from the Christian truth’. It may be a total renunciation or denial of it, or it may be a misrepresentation of it to such an extent that it becomes a denial of the whole truth. But a heresy is more limited in its scope. To be guilty of heresy, and to be a heretic, means that in the main you hold to the doctrines of the Christian faith, but that you tend to go wrong on some particular doctrine or aspect of the faith. The New Testament itself shows us clearly that this tendency to heresy had already begun even in the days of the early Church. 이단은 이미 정의되어지고 수립되어진 기독교교리에 대해서 부정하거나 의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단과 배교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배교는 '기독교 진리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기독교 진리를 완전히 포기하거나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기독교 진리를 잘못 전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전체의 진리를 거부하는 것으로까지 변질된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은 그 영역에 있어서 좀 더제한적입니다. 이단으로 정죄되는 것과 이단이 되는 것의 의미는 기독교 신앙의 교리를 붙들고는 있으나 특정한 교리나 기독교 신앙의 한 측면에 있어서 잘못된 길로 치우치는 경향을 지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러한 이단의 경향이 초대교회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One of the first things you are to learn in this Christian life and warfare is that, if you go wrong in your doctrine, you will go wrong in all aspects of your life. You will probably go wrong in your practice and behaviour; and you will certainly go wrong in your experience… We read about these things constantly in the newspapers. Some are rejoicing because Protestantism and Roman Catholicism are drawing nearer together. ‘What does the past matter?’ they say, ‘Let us have the right spirit, let us come together, all of us, and not be concerned about these particularities.’ I have but one comment to make about this matter, and I regret to have to make it. To me, all such talk is just a denial of the plain teaching of the New Testament, a denial of the Creeds and the Confessions and the Protestant Reformation! It is carnal thinking, in addition to being a denial of the truth.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과 영적 전투에서 배우게 되는 여러가지 것들중 한가지는, 여러분이 교리적으로 잘못 되어지면 여러분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또한 잘못된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들과 행동들은 옳지 못한 결과들을 초래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분명히 옳지 못한 경험들을 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문에서 이런 것들을 계속해서 접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개신교와 카톨릭이 점점 더 가까와지고 있음을 기뻐합니다. 그들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은 것이 대수인가? 우리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우리 모두 하나가 되자. 여러 사소한 교리들에 대해서는 너무 신경 쓰지 말자"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비평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비평이 그리 기쁘지는 않습니다. 제게 저런 주장들은 신약의 가르침들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신조들 그리고 더 나아가 개신교의 개혁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된 생각이요, 진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the Bible, one thing only matters, and that is the truth. The Holy Spirit will honor nothing but the truth, His own truth. But that, He will honor. To me the most marvelous thing of all is that, the moment you come to such a conclusion, you realize that in a sense nothing else matters. … Nothing matters in the spiritual realm except truth, the truth given by the Holy Spirit, the truth that can be honored by the Holy Spirit. Is there anything more glorious in the whole of the ld Testament than the way in which this great principle stands out? God often used individual men, or but two or three, against hordes and masses. Is there anything more exhilarating than the doctrine of the remnant? While the majority had gone wrong, the ones and the twos saw the truth.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중요한 단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진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오직 이 진리만을 보증하시는데 바로 하나님 자신의 진리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리'만을 유효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에게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것은 여러분이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에,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 성령에 의해 보증되어지며 주어지는 그 진리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가치없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구약전체에 나타나는 내용들 중에서 그 어떤 것도 이 위대한 원칙이 나타나는 방법처럼 영광스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집단이나 많은 무리들을 사용하는 대신에 자주 한 사람 혹은 두 세 사람 소수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남은자 혹은 그루터기"의 교리만큼 고무적인 교리가 있겠습니까? 대부분이 잘못된 길을 갈 때, 몇 몇 소수의 무리들은 진리를 따랐습니다. Take a man like Jeremiah. All the false prophets were against him. There is a man who had to stand alone. Poor Jeremiah – how he hated it and disliked it! He did not like being unpopular, he did not like standing on his own, and being ridiculed and laughed at, and spat upon, as it were; but he had the truth of God, and so he endured it all. He decided at times to say nothing, but the word was like fire in his bones, and he had to go on speaking it. Obloquy and abuse were heaped upon him, but it did not matter; he was God’s spokesman and God’s representative. Similarly Moses had to stand alone when he came down from the Mount where he had met God. To stand in isolation from one’s fellows, but with God, is the great doctrine of the Old Testament in many ways. And it is emphasized in the New Testament also.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십시요, 모든 거짓 선지자들이 그를 대적하였습니다. 그는 혼자이어야 했습니다. 가여운 예레미야가 홀로인 것을 얼마나 싫어하고 경멸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유명해지지 못하는 것을, 홀로 그 모든 비웃음과 조롱, 침뱉음 당하는 것을 싫어 했습니다.그러나 그 모든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 먹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뼈에 불처럼 임함으로 나가서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방과 학대가 그를 짓눌렀지만 그런 것은 그를 막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였고 하나님의 이 보내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일한 일이 모세에게도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대면한 후 산을 내려왔을 때 그는 혼자 였습니다. 자신의 동족으로 부터 고립되어 홀로 있게 될 때 그때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 때라는 것은 구약성경이 여러 방법으로 보여주는 가장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에서도 여전히 강조되는 중요한 교리입니다. ================================================================================ 오늘날 교회 안에 여러 일들이 일어납니다. 신사도운동, 관상기도 운동, 에큐메니칼 운동, 알파코스, 이머징 처치 등등 교회는 복음전파와 급변하는 세대에 적응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방법들을 가리지 않고 수용하면서 진리가 왜곡되고 혼합되는 것은 반성을 커녕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수가 그것을 옳고 좋다고 따라갈 때에도 그것이 진리를 왜곡하고 부정하는 것이라면 외로이 혼자 남아야 하는 아픈 댓가를 치루어서라도 그 진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위의 글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특별히 언급하신 카톨릭과의 에큐메니칼 운동 대신에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다른 움직임들과 운동들을 대입해보면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될 것입니다.

        출처: USA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거짓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특징 / 로이드존스

         

         

        "거짓 선지자는 그의 복음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거짓 선지자는 좁은 문을 들어가며 좁을 길을 걸어가야 할 절대 필연성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나아가서 그는 거짓 선지자들이 설교 시에 침묵하는 진리들이 무엇인지를 폭로하였는데 그것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모양으로 정체를 드러내는가?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에는 말씀이 거의 없다.
        그의 메시지는 항상 모호하고 일반적인 성격을 띤다.
        그의 메시지는 교리를 특수화하여 하나하나 상세하게 열거하지 않는다.
        그는 교리적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설교는 항상 매우 모호하다."

        "성경 말씀은 귀에 걸면 귀걸이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의 일관성이 없고 모호한 설교 덕분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설혹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성경을 조화있게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하늘의 빛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뱀의 혀가 둘로 갈라져있는 것처럼 한 입으로 두 말을 합니다.
        어떤 때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설교하다가
        어떤 때는 "행함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혼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설교의 특징입니다.
        이와 같은 전제를 말한 후 로이드 존스는 짓 선지자의 메시지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았습니다.

         

        1)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와 진노에 대해서는 매우 드물게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말하나 그 밖의 것들은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들이 모두 관계를 맺고 있는 이 거룩하고 존귀한 분에 대해 설교할 때 아무도 두려워 떨게 하는 일이 없다.
        그는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 하나만을 강조하는데 곧 사랑이다." 

         

        2) 거짓 선지자는 심판과 지옥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가 결코 강조하지 않는 또 다른 교리는 후 심판과 버림받은 자들의 영원한 운명이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반세기동안 최후 심판에 대한 설교는 많지 않았다.
        그렇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와 같은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는다." 

         

        3) "거짓 선지자는 죄의 사악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죄가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암시한다.
        그는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4) 거짓 선지자는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회개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의 교훈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매우 큰문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매우 넓은 길이 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성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다.
        여러분의 마음이 검은 것을 심각하게 여길 필요가 없어진다.
        여러분은 그저 믿는다고 하기만 하면 다.

        하지만 청교도나 웨슬레나 조지 휫필드나 기타 위인들의 전도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전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심판을 두려워하게 했고, 가끔 영혼들로 하여금 며칠 , 몇 주, 몇 개월간이나 고뇌하게 했다."

         

        5) 거짓 선지자는 성결한 생활에 대해 침묵합니다.

        " 거짓 선지자는 산상수훈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실천하지 않고 이 설교에 귀만 기울인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성결, 성경적 성결에 관심이 없다. "

         

        6) 거짓 선지자는 자기 기만의 위험성에 대해 침묵합니다.

        " 거짓 선지자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생활 유형을 항상 제안한다. 그들은 자기 검토를 방해한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검토해 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항상 ' 예수를 바라봐야 ' 하고 여러분의 죄를 찾기 위해 자신을 보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검토하고 '자신을 시험해보고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라! (고후13:5)고 한 산상설교의 이 마지막 대목을 똑바로 보라는 권면을 훼방놓는다

        그들은 청교도들과 18세기의 위대한 지도자들 곧 웨슬리나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들이 가르친 가기 검토와 죄의 의제 과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기독교 생활을 추천한다. " 

        이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정통 교단에 속해있고 아무리 큰 교회를 목회 한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것을 빠트리고 설교하는 자는 누구든 거짓 선지자입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현재 고난은 장래에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6권4장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18-23)

         

        우리는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 고난과 시련과 환난과 고통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있다.

        첫째, 이미 알아본 바와 같이 ‘현세’와 ‘나타날’ 오는 세대로 바울이 구분하는 시간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였다. 현재의 고난과 고통과 난제들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전체 세계에 나타나게 될 이 영광스러운 상태에 비추어 살펴보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생각함’의 과정을 실천에 옮김으로써만이 기독교의 위안과 위로를 즐길 수 있다.

         

        둘째, “비교할 수 없도다” - 이 구절은 가치와 값을 가리키는 문구이다. 어떤 것은 다른 것과 비교할 때, 전혀 무게를 지니지 못한 것이 있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아무리 여러분이 지금 감당하고 있는 고난의 짐이 무겁다 할지라도 장차 여러분의 것이 될 영광의 무게와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기독교의 방식이다. 고난을 받을 때, 세상은 “힘내라 곧 잘 될꺼야”라고 말을 하나 그것은 하등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단들의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이단들은 마약과 같이 이 무게를 실제보다 가볍게 보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그 문제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다만 사실에 대한 자기의 반응을 변화시키는 데 불과하다. 일종의 어리석은 자의 낙원 속에 있는 것이다.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고난의 실제적인 성질이나 구체적인 성격을 극소화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난이 무서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볼 때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실제적으로 고통의 진상 그대로를 대처하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라. 그런 다음에 더 이상 그것이 참아낼 수 없이 무섭다고 느껴질 때, 다른 쪽을 보라. 나타날 영광을 보라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것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결국 오직 유일한 한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고난이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나게 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위안을 주는 기독교 방식의 진수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 고난을 받아야 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세우신 터를 가진 한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세의 비결은 ‘보상의 상급에 두었으며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더 좋게 여기는’ 그것이었다.

        우리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고뇌와 수치와 고난을 당하시도록 한 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우리들이 확신해야 하고 그리스도인들로서 주의를 집중시켜야 하는 것은 장차 올 영광의 지극히 큼에 대한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활을 좌우하는 교리이다. 삶 속에서 ‘넉넉히 이기게’ 되는 방식은 그것 밖에 없다.

         

        셋째, 주요한 교리는 우주의 현재 상태에 대한 설명이다. 진화를 말하던 사람들은 오늘날을 설명할 수 없다. 바울이 여기에서 그 해답을 주고 있다. 첫 번째 진술은 모든 피조 세계가 장차 올 이 영광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진술은 어째서 전체 피조물이 그런 식으로 고대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라” - ‘피조물’은 비이성적인 피조물인 동물, 식물, 땅, 하늘, 눈에 보는 것들을 의미하며, 사도는 이 비이성적인 피조물들을 의인화시켜 말하고 있다. 사도는 하나님의 이 창조의 부분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매우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영광은 너무나도 커서 모든 피조물들이 목을 길게 빼고 그것을 갈망하며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그것을 이렇게 고대하는 것은 피조물의 운명이 사람의 운명과 불가분해적인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가 피조물의 현재 상태를 가져왔다. 20절에서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한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람의 타락으로 피조물 전체가 무익하거나 쓸데없는 것, 허무한 데에 복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1절에서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말함으로써 더욱 잘 설명해 준다. 피조물은 썩어져 가고 있고 사망과 멸망에 굴복하여 있다. 바울은 피조물 그 자체로서는 부패와 자기 속에 있는 썩어지는 요소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를 구분하는 요점들 중에 하나를 대하게 된다. 비그리스도인은 인생을 바라보고 “인생은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피상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더 깊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세상에 나오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세상을 빠져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첫 번째 호흡이 마지막 호흡과 연관되어 있다. “너희 인생이 무엇이뇨? 그것은 안개와 같으니라”. 모든 것이 부패하여 가고 있다. 그것은 어느 시점에 “굴복케” 되었다.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땅과 피조물이 인간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창3:17-19) 피조물은 이러한 결과를 낼만한 하등의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가져 오게 한 것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였고 ‘만물의 주가 타락했을 때’ 그의 당하는 형벌의 일부가 그가 영장 노릇을 하던피조물에게 주어져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고 썩어짐에 종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살라고 조성해준 낙원을 누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사도는 이제 하나님의 계획 속에 긍정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열심히 기대하며, 열렬한 기대감을 가지고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

         

         

        출처: 청교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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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바르트는 신학자가 아니라 철학자 / 로이드존스

         

         

        칼 바르트의 허망한 사색을 따라가다가는 오직 멸망일 뿐이다. 그는 기독교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택하신 영혼을 꾀어내기 위한 사단의 도구이다. 그런데 수많은 목회자, 신학자, 교단과 교회가 그의 허울 좋은 말놀음에 속고 있다.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꾸며놓은 한 위장 신학자의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꾀나 유식하게 보이거나 좋아 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길은 필경 사망의 길이다! 

        다만 불쌍한 것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 목회자들을 따르는 양들이다. 어리석은 거짓 선생에 속지 말고, 깨어서 바른 진리를 따라가자! 정통 기독교 2천년사는 바르트와 같은 거짓 궤변을 따른 적이 없다! 성경은 정확무오하며,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다.(딤후3:16) 거짓 선생에게 속지 말라!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4장12절)

         

         

        - 학자의 혀.

         

         

        칼바르트는 신학자가 아니라 철학자

         

        마틴 로이드 존스

         

          

         

         

        전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현(1961년)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고 칭했던 칼 바르트가 바로 이 '만인 구원론'을 가르쳤다는 사실 자체가 이것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칼 바르트)가 성경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는 신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였기 때문입니다.

           

        -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6에서

         

         

        *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75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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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S. 루이스는 과연 그리스도인인가?

         

        제가 c.s루이스를 알게 된것은 여러해 전 "마귀의 지령"(스크루테입의 편지)라는 책을 읽으면서부터 입니다. 최근에는 제법 많은 독자들이 생겨나고 있고 앞 다투어 그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의 책은 펵이나 매력적이어서 그후로 "순전한 기독교","고통에 대하여","네가지 사랑' 등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좀 의아하게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어서 c.s루이스의 신학적인 사상이 어떠한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던 차였습니다.

         

        얼마전에 마틴 로이드 죤스 목사님께서 c.s루이스와의 만남을 가진 후 그에 대한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했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 저곳 찾다가 아래의 자료를 찾게 되었습니다.

        다른건 몰라도 20세기 복음에 대하여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되는 존경하는 로이드 죤스 목사님께서 평가하신 부분은 정당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용이 조금은 충격적 입니다. c.s루이스가 과연 그리스도인 이었을까요? 물론 하나님만 아시겠죠. 하지만 저는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의 내용이 사실이라면...)참된 신자라면 천주교로 개종하는 배교는 차마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국내의 많이 크리스챤들이 '헨리나우웬' 이나'c.s루이스'와 같은 사람들을 흠모하는 것은 무척이나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이 흥왕하던 시대에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이단시 되어) 사람들이 지금은 신실한 신앙의 선배로 추앙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본문은 미국 침례교에서 출간한 Fundermental Baptist Service라는데 기고된 내용 중 David Cloud라는 분이 2000년 7월에 쓴 글입니다.

         

         

        우선 로이드 죤스 목사님께서는 본문에 의하면, C.S.Lewis가 구원관에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속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교리에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Christianity Today 1963년 12월 20일 판 크리스차니티 투데이는 미국에서 발행되는 가장 저명한 복음주의 잡지중 하나입니다).

         

        그 이유를 David Cloud는 다각적인 면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David Cloud의 개인적인 판단은 차치하고 우선 사실만을 번역 정리하겠습니다 )

         

        1. C.S 루이스는 죽기 전에 천주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2. 망자를 위한 기도와 연옥을 믿었고,

        3. 사제에게 정기적으로 고해를 했으며

        4. 1963년 7월 16일 천주교에서 종부성자를 받았고

        5. 육체의 부활의 교리를 거부했고

        6.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7. 인간의 전적 타락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대속의 교리를 거부했으며

        8.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임을 믿지 않았고

        9. 지옥에서의 영벌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지옥은 마음의 상태라고 믿었습니다.( 영문판 / 천국과 지옥의 이혼, p65 )

        10. 교회관은 에큐메니칼적이었는데,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의 서문에서 루이스는 이 책을 쓰는 목적을 "동의되었고, 일반적이며, 중심이 되며, 순전한 기독교를 제시하려는 것이라고 했다."(그의 책 the Mere Christianity를 말하는 것인데, 앞의 단어 An Agreed or common or Central or Mere Chrsitianity라는 단어를 고려한다면, 그가 사용한 단어 Mere는 순전한의 의미보다는 "단순한 기독교" 즉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동의된 기독교, 다른 종류의 형태의 기독교인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유별난 교리를 제거한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루이스는 모든 형태의 기독교(천주교를 포함해서)에 일반적이라고 자신이 믿는 교리에 집중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비판하려는 종교지도자의 부류를 성공회 / 감리교 / 장로교/ 천주교 4가지로 구분한 것도 이 맥락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 그는 천주교 마져도 기독교의 형태중 하나로 인정하였다 )

         

        루이스는 그의 책"순전한 기독교"가 모든 기독교인들이 왜 하나가 되어야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c.s 루이스에게 있어서,교회란 많은 방이 있는 집과도 같은 것이었고, 그 방들은 하나의 전통과도 같은 것이었고, 한 사람이 기독교라는 집에 들어가면, 거실에 머무를 수 없고, 하나의 방을 선택해서 들어가야 하며, 어느 방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루이스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천주교"라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도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별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가장 적당한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과 들어간 다음에는 다른 방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들에게 대하여,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 글에는 c.s 루이스의 성찬에 관한 의견과, 그가 사후에도 왜 이렇게 인기가 좋은가 ( 심지어 천주교인들과 몰몬교도들에게도 )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간단히 정리하면, 루이스가 고인이 된 후에도 매해 200만권 이상의 책이 팔려나가는 이유를 DAVID CLOUD는 그가 관심을 가졌던 교리들이 현대 복음주의진영에서 피하고 싶어 하는 "교회의 분열"과 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봤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무엇을 먹는가가 그 사람을 결정한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기독교인은 무엇을 듣고 읽는가"라는 말도 사실일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그 읽고 듣는 것에서 영적인 양식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1998년 몰몬교도의 대학인 브리암 대학의 학장인 로버트 밀레의 말을 남긴다.

        "C.S LEWIS는 말일성도(몰몬교도)들에게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기독교의 광범위하며 포괄적인 비전 때문이다."

             

         

        * 출처: http://blog.naver.com/jcmlkr/19278753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양자 됨의 증거

         

        마틴 로이드 존스

         

        우리가 양자가 되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 또한 베드로전서 1장 3-6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상속자 즉 자녀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확신의 두 번째 근거는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롬8:15).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5).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이 양자 됨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성령은 우리 영으로 더블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양자 됨을 받았다는 절대적인 증거입니다.

         

        마지막 증거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논지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바울은 "무릇 화평하게 하는 자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자들, 또는 원수를 사랑하는 자들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사람" 즉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고 그 인도를 기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 양자 됨의 결과 -

         

        지금까지 증거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의 양자 됨의 결과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 양자의 영을 가진 사람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롬8:15)을 잃어버렸습니다.

        둘째로, 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자유의 영이 주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더 이상 율법과 율법의 정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또 셋째로,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이 양자의 영을 받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에 더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지닐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26:12)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옛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베드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벧전2:9-10).

         

        또 어떤 결과가 있습니까?

        다섯 번째 유익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현재의 보호와 위로,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자녀에게 주시는 공급하심을 누리는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눅12:7).

        하나님 없이는 아무 일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주어지고 우리의 경험을 통해 참되다는 것이 증명된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약속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보호와 위로 우리 모든 필요를 완벽하게 공급하시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유익은 첫눈에 보기에는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징계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12장 전반의 전체 논지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6절).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징계를 받지 않는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사생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1절).

        그러므로 징계는 우리가 양자 된 것의 매우 명확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에 이르게 하시기로 결심하시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와 가르침을 듣지 않으려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애정을 지니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자녀는 징계하시지만 자기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징계 하시지 않습니다.

         

        다음은 상속권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롬8:17).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자녀라고 선포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유업은 확실합니다.

         

        마지막 사항은 그 모든 것이 홧실하고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여러분이 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이하는 하늘에 간직하신 유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벧전1:4). 그러므로 안전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8-39절에서 똑같은 것을 말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양자 삼으셨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의 운명은 안전하고 확실합니다.

         

        미래의 것도, 현재의 것들도

        아래있는 모든 것도 위에 있는 모든 것도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취소시키지도

        내 영혼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도 못하리니

        - 아우구스투스 토플레디 -

         

        그것은 보증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가족으로 맞아 주셨다면 나는 자녀일 뿐 아니라 상속자이며 아무것도 그 누구도 나에게 유업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시작 부분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가장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를 소홀이 여기고 사람들이 죄사함이나 혹은 심지어 성화에서 더 나가지 못해 양자 됨이야말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상기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놀라운 유업 우리가 장차 받을 말 할 수 없는 영광을 깨닫게 해 주는 교리라는 사실을 알지 모하는 비극이 아닙니까?

         

        우리는 자녀로 입양되기 위해 구원받습니다.

        단지 죄사함만이 아닙니다.

        단지 의롭다고 선포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단지 새로운 본성을 받은 것만이 아닙니다.

        그 위에 거기에 더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상속자요

        하나님의 독생자와 함께한 상속자로 선포됩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거짓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특징 / 로이드존스

         

         

        "거짓 선지자는 그의 복음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거짓 선지자는 좁은 문을 들어가며 좁을 길을 걸어가야 할 절대 필연성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나아가서 그는 거짓 선지자들이 설교 시에 침묵하는 진리들이 무엇인지를 폭로하였는데 그것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모양으로 정체를 드러내는가?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에는 말씀이 거의 없다.
        그의 메시지는 항상 모호하고 일반적인 성격을 띤다.
        그의 메시지는 교리를 특수화하여 하나하나 상세하게 열거하지 않는다.
        그는 교리적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설교는 항상 매우 모호하다."

        "성경 말씀은 귀에 걸면 귀걸이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의 일관성이 없고 모호한 설교 덕분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설혹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성경을 조화있게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하늘의 빛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뱀의 혀가 둘로 갈라져있는 것처럼 한 입으로 두 말을 합니다.
        어떤 때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설교하다가
        어떤 때는 "행함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혼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설교의 특징입니다.
        이와 같은 전제를 말한 후 로이드 존스는 짓 선지자의 메시지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았습니다.

         

        1)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와 진노에 대해서는 매우 드물게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말하나 그 밖의 것들은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들이 모두 관계를 맺고 있는 이 거룩하고 존귀한 분에 대해 설교할 때 아무도 두려워 떨게 하는 일이 없다.
        그는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 하나만을 강조하는데 곧 사랑이다." 

         

        2) 거짓 선지자는 심판과 지옥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가 결코 강조하지 않는 또 다른 교리는 후 심판과 버림받은 자들의 영원한 운명이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반세기동안 최후 심판에 대한 설교는 많지 않았다.
        그렇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와 같은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는다." 

         

        3) "거짓 선지자는 죄의 사악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죄가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암시한다.
        그는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4) 거짓 선지자는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회개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의 교훈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매우 큰문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매우 넓은 길이 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성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다.
        여러분의 마음이 검은 것을 심각하게 여길 필요가 없어진다.
        여러분은 그저 믿는다고 하기만 하면 다.

        하지만 청교도나 웨슬레나 조지 휫필드나 기타 위인들의 전도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전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심판을 두려워하게 했고, 가끔 영혼들로 하여금 며칠 , 몇 주, 몇 개월간이나 고뇌하게 했다."

         

        5) 거짓 선지자는 성결한 생활에 대해 침묵합니다.

        " 거짓 선지자는 산상수훈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실천하지 않고 이 설교에 귀만 기울인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성결, 성경적 성결에 관심이 없다. "

         

        6) 거짓 선지자는 자기 기만의 위험성에 대해 침묵합니다.

        " 거짓 선지자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생활 유형을 항상 제안한다. 그들은 자기 검토를 방해한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검토해 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항상 ' 예수를 바라봐야 ' 하고 여러분의 죄를 찾기 위해 자신을 보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검토하고 '자신을 시험해보고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라! (고후13:5)고 한 산상설교의 이 마지막 대목을 똑바로 보라는 권면을 훼방놓는다

        그들은 청교도들과 18세기의 위대한 지도자들 곧 웨슬리나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들이 가르친 가기 검토와 죄의 의제 과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기독교 생활을 추천한다. " 

        이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정통 교단에 속해있고 아무리 큰 교회를 목회 한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것을 빠트리고 설교하는 자는 누구든 거짓 선지자입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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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된 신자의 모습 / 마틴 로이드존스

         

         

        참된 신자는 산상설교의 교훈 전체를 대면한다. 그는 이것이나 저것을 골라 그것만을 지키려는 자세를 가지지 않는다. 그는 성경의 모든 부분의 가르침을 들으려는 사람이다. 그는 인내심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성경의 모든 부분을 읽는 시간을 충분히 갖는다.

         

        몇 편의 시편을 읽어 치우는 것만으로 족하게 생각한다든지, 그런 것을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에 수면제로 사용하는 것 같은 일을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전체 말씀으로 자신을 재어보고 자신을 탐사해 본다. 이 탐사를 거절하기는커녕 환영한다.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함을 안다. 그래서 그런 탐사로 오는 고통을 반대하지 않는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말씀 아래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다. 성경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진리라고 인정한다. 실로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 말씀도 내 자신에 관해 다 말하지 않았다.’ 그는 말씀의 비난을 싫어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비난도 감수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내게 반도 말하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알지도 못한다.’ 그는 즉시 그를 향한 말씀이 감동 때문에 팔복을 따라 간다. 그 때문에 그는 자기에게 제시된 타입과 본을 따르고 싶은 소원을 가진다.

         

        여기에 매우 훌륭한 시금석이 있다. 당신은 산상설교대로 삶을 영위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매우 선하고 건전한 증표이다. 이러한 유의 삶을 영위할 것을 소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의를 추구하는 것이 그의 삶에 있어서 큰 일이다. 그는 자기의 현재 모습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 나는 내가 책에서 읽었던 성도들같이 되고 싶다. 허드슨테일러, 브레이너드, 칼빈 등과 같은 성도들처럼 되고 싶다. 만일 감옥과 굴에서 살며 희생을 당하며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당하였던 이 사람들처럼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바울과 같이 되기만 한다면, 오, 내가 나의 복되신 주님 자신과 같이 된다면” 이라는 소원의 말을 한다.

         

        그것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팔복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고 있는 사람이다. 시금석의 본질을 관찰해 보라. 그것은 네가 죄가 없거나 완전한 사람이냐를 따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네가 어떻게 되었으면 하느냐, 네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느냐를 묻고 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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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가 되어야 했던 이유 / 로이드존스

         

         

        “저는 제 개인적인 문제를 강단에서 언급하는 것을 되도록이면 삼갑니다. 그러나 오늘 이 아침에 저는 바로 이 주제와 연관되는 한 체험을 말씀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여기 올 때 사람들은 저더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째서 그 좋은 일 - 좋은 직업, 아니 모든 의학적인 전문직을 포기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만일 자네가 잠시 경마권을 파는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이해하였을 것이고, 참 장한 일을 한다고 말하였을 걸세, 그러나 의료계의 일 - 환자를 치료하고 고통을 멈추게 하는 일을 마다하고 가는 일에 대해서야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분은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만일 자네가 시무 변호사 일을 보다가 그 일을 포기하고 나섰다면 격려를 하겠네, 그러나 의사의 일을 버리고 나서다니!’ 저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네 좋습니다. 당신네들이 의사의 일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면, 저를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로 돌아가기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는데 우리의 거의 모든 시간을 써왔습니다!’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불멸의 영혼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거대한 일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아서 건강을 회복하자 그들은 옛 죄로 다시 돌아가 버렸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의 죄짓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임을 알고,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않을 작정을 하였습니다. 저는 영혼을 치료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몸의 질병을 가지고 있으면서 영혼이 잘되어 있으면 그는 정말 잘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몸이 건강하고 영혼이 병들어 있는 채 60여년을 지내다가 영원한 지옥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 그렇습니다! 때로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위하여 좋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 구원의 즐거움과 새 생명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의 설교 중에서>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기독교 연합의 기초 -2 / 로이드 존스

         

         

        2. 요한복음 17장의 가르침

         

        요한복음 17:21은 하나의 슬로건으로서 너무 빈번하게 사용되는 구절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구절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무엇보다 먼저 그 말씀을 문맥과 배경에 비추어서 그 말씀을 봄으로써 해석해 나갑니다. 언제나 성경을 해석하는 주도적인 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적인 사람들에게 자주 퍼부어지는 비난은, 복음주의자들은 “증거본문”을 사용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향해서 그러한 비평이 가해집니다. 그 신앙고백이야말로 신앙고백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은 증거본문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성경의 일반적인 흐름과 의미를 취해야지 우리의 입장을 어떤 특별한 본문 위에 올려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운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 구절에 대해서 바로 그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문맥에서 완전하게 떼어내어 그것을 하나의 슬로건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데 대하여 역설합니다. 한 본문을 따로 떼어놓는 것은 ‘언제나’ 잘못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경해석의 제1법칙은 본문을 언제나 문맥에 비추어 생각해야 하며, 첨가하여 다른 본문들과도 비교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성경해석의 규범이 중요하다면 바로 이 특별한 진술과 관련하여 그러합니다.

         

        (1) 문맥을 분석함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요한복음 17장을 보편적으로 분석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분명한 여러 대목으로 나누어집니다. 처음 다섯 구절로 이루어진 첫 번째 대목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주로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대목은 6-10절까지의 내용으로, 당신이 위하여 기도하시는 그 백성들에 대한 묘사를 하고 계시며 그들을 위한 보편적인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11-12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로 보전되기를 원하는 근본적인 기도를 드리십니다. 13-16절까지에서는 특별히 본질적인 연합을 무산시키려고 언제나 벼르고 있는 악한 자의 교활한 공격에 맛서서 하나로 보전되기를 원하는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17-19절에서는 그 백성들이 거룩하게 되기 원하는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다시 그들이 진리와 이 하나됨 안에 보전될 수 있기 위하여 말입니다. 20-23절까지에서는 11절에서 이미 기도하신 것을 들어 정교화 시켜 연합의 본질을 더 상세하게 규정해 나가십니다. 24-26절까지에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당신의 궁극적인 소원을 표현하십니다. 그들이 당신 계신 곳에 함께 있고,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셨던 영광을 보기를 원하시는 긍극적인 소원을 표현하십니다. 전체 대목에 대한 보편적인 분석이 그러합니다.

         

        (2) 연합의 원리들

        이 연합(하나됨)의 문제를 보다 더 상세하게 생각해 나감에 따라서 그 하나됨을 처음으로 특별하게 언급하시는 것은 11절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 본문이 근본적인 본문입니다. 그 한 진술 속에 모든 진수가 되는 원리들이 설파되어 있습니다.

         

        1) 그 본문이 제한적으로 지적하는 사람들

        먼저, 주님께서는 당신이 ‘저희’라고 지칭하신 특별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심을 주목하게 됩니다. 저희, 저희만이 이 하나됨의 주체들입니다. ‘저희’는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17장 자체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저희’는 막바로 처음에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근본 진술입니다. 그는 그 진술을 계속 반복해 나가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 주셨던 사람들이요, 그들을 위해서 주님은 세상에 오셨고, 그들을 위해서 당신이 하셨던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또 다른 요점으로, 그들은 세상에서 구별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9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진술은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아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사람들만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이 요한복음 17장에는 ‘보편구원론’(Universalism)이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암시가 전혀 없습니다. 또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에 거하면서도, 결국 그들에게 그 기도가 해당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는다는 암시를 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로 여전히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주님께서 세상에서 불러내신 사람들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지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6-8절에서 ‘저희’로 지칭된 사람들에 대한 더욱 흥미롭고 중요한 정의를 대하게 됩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오신 것인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이는 정말 중요ㅗ하기 그지없는 요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20절에서 다시 그 동일한 개념을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내고 계십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을 위함이 아니요 또한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인함이니.” 이 사람들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이 사람들이 말한 똑같은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믿게 될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강조점은 같습니다. 그는 25절에서 그 점을 다시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25절 말씀은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종국적으로 규정해 주고 있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이는 정말 중요한 진술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더욱 더 규정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다시 우리는 구분과 구별의 요소를 강조해야겠습니다. 우린 주님께서는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바 된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도하십니다. 실로 그는 19절에서 특별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로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물론 이 말씀은 당신 자신을 속죄와 화해의 사역을 위해서 죽음에 내어주실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그 일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특별히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이 사람들’만을 위해서 하십니다. 다시 이 진술은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됨을 이루는 이 사람들은 우연하게 어떤 나라에서 길리움 받거나 우연한 어떤 민족이나 어떤 종족이나 어떤 특별한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은’사람들이요, 주님의 교훈을 받은 사람입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누구시며, 주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셨고, 자기들을 위해서 이 일을 하러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믿었고’,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에 대한 주님 자신의 정의가 그러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하나됨(연합)은 당신의 말씀, 곧 우리가 복음의 메시지라 부르는 것을 받아드리는 믿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2) 하나됨의 기원

        주님께서 하나됨의 기원에 대해서 11절에서 설정해 놓으신 두 번째 원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보전하사’라는 말씀을 쓰고 계심을 여러분은 주목하실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개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7장 그 어느 곳에서도 이 하나됨을 산출하라고 권면하거나 호소하는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연합은 이미 존재하며, 이미 실존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연합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주님과 주님의 사역에 대한 진리를 믿는 사람들의 연합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을 떠나실 것과 그들이 악한 자의 공격과 죄와 악의 모든 세력에 노출될 것이라는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이미 존재하는 그 하나됨 안에서 그들을 보존해 주십사고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한 요점입니다. 원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목표하여 도달해야 하는 어떤 것을 다루고 계시지 않습니다. 실로 우리 주님께서는 이 요한복음 17장에서 조금이라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전도의 말씀을 통해서 이미 이 사람들 속에 존재케 된 그 하나님을 지켜 주십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 하나됨의 본질

        우리 주님께서 제기하시는 세 번째 요점은 연합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말하자면 그 주제에 대한 근본적인 분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20-23절에서 그 점을 정교하게 설명하고 계시니 그 구절들을 숙고해 나가기로 합시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은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진술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진슬 하나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번에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됨(연합)의 진수적인 성격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됨에 빗댈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 하나됨은 주님께서 위하여 기도하는 그 백성들과 아들 자신 사이의 하나됨에도 빗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의 몇 구절 속에서 이에 대한 이해를 주는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20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다시 21절에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런 다음 23절에서 이렇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 자, 우리가 다루고 있는 요한복음 17장의 몇 구절에 대해서 어떤 주장들을 한다 할지라도 이 진술은 마치 그 의미가 완벽하게 드러나고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생각하고 가볍게 취급하거나 입심 좋게 또 대충 취급될 진술이 아님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우리 주님은 여기서 복되신 성삼위간에 본체론 쪽으로 존재하는 신비한 연합을 다루고 계십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 중 가장 고차원적인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 이 용어를 마치 그 뜻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처럼 마구 취급하고들 있습니다. 실로 그것이 마치 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들을 합니다. 곧 어떤 외향적인 조직적 영합을 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진술에 대한 모든 것이 그 정반대의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체의 연합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전체 신비입니다. 세 인격이 존재하나 그러면서도 한 하나님이십니다. 본체는 위(位, 인격)들 간에 구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세 위(位)로 하여금 하나 되게 하는 것은 본체(진수, essence)의 연합입니다. 그 점을 배제시킬 수 없습니다. 물론 그에 더하여 사고방식, 사상, 목적, 서로간의 사랑, 또한 그 점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다른 모든 것의 연합이 존재합니다. 바로 그 방식을 우리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 속에 확보해 놓으신 이 하나됨을 규정하고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 하나됨을 보전하시고 주님이 영광으로 돌아가신 다음에도 지켜주십사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으로부터 유추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으켜야 하는 연합은 이 진수(본체), 또는 존재의 연합을 함축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너무나 명백하게 가르치는 교리를 또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이며, ‘성령으로 난’사람이며,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라는 교리입니다. 그 모든 것이 여기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주제가 어렵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신(神)이 되었다고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사용한 성경 어구는, 우리가 ‘신의 성품(divine nature)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벧후 1:4).

        우리 주님께서 뜻하는 바로 말하면 진리를 믿은 자들 속에서 이 새로운 성품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근본적인 작용이 없이는 연합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연합을 바꾸어 설명하여 같은 유추로 말한다면 관점, 목적, 사랑 등등의 본질성을 같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연합은 거듭난 또는 다시 난 사람들 중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연합이라는 것입니다. 규정상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결심하여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협동을 하거나, 어떤 공회를 형성하여 어떤 목적과 어떤 목표를 수행해 나가는 것 같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잘못된 어떤 것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제 관심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연합은 그런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우정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습니다. 그것은 가족관계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족관계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그 가족관계가 수반하는 것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한 가정에 태어납니다. 비록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정에 어떤 권속들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피와 본질의 문제입니다. 교회의 연합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어떤 자원하여 의지적으로 행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주어진 가족에 태어난 결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들입니다. 단순히 친구들의 연합이 아닙니다.

         

        (3) 요약

        우리가 다른 대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 대목의 가르침을 요약해 보면 이러합니다. 주님께서 존재케 하시고,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에 스스로 보전하셨던 그 연합이 계속될 수 있이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유다의 경우에는 특이하게 예외로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그 사람은 그 부류에 속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 연합에 ‘진정으로 속하지 아니한 것’을 매우 분명히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지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함이니이다.” 여러분이 그 연합에 속해 있는 것처럼 외모를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새 생명, 이 새로운 탄생이 없다면 진정한 연합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그 본모습을 들어내고야 맙니다.

        그와 같이 우리 주님의 진술 전체는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님을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아버지께 이미 존재하는 이 연합을 보전해 주십사고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연합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고, 거듭남의 역사를 통해서 성령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산출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가르침을 똑같이 믿고 받아드리는 데서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러한 특징이 모자란 ‘연합’은 그 어느 것이든지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말씀하시는 연합은 아닙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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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된 열심들의 특징

        열심 자체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고 참된 열심뿐만 아니라 거짓된 열심도 있기 때문에 '열심'을 검증해 보아야 하는데, 내 열심이 거짓인지 참인지 어떻게 테스트할 수 있습니까? 함께 사용되어야 할 몇 가지 시금석들 중 어느 한 가지도 그 자체만으로는 적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우리의 열심이 어떤 다른 사람을 보고 나온 것이고 그 다른 사람의 본을 좇아가는 형식이 되어 있다면, 항상 의문을 가지고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단들의 특징은 언제나 그런 식입니다. 어떤 한 경우가 사람들에게 제시됩니다. 그러면 그 경우에 설득을 당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취합니다. 그래서 그 경우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들과 정확히 똑같이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식으로 열심이 생겨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떤 열심이 일어나서 조직적으로 견지가 된다면, 그 열심은 거짓된 열심일 가능성이 아주 다분하다는 증거를 보이는 셈입니다. 특히 그 열심을 일으키는 자극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오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세 번째 시금석을 제시합니다. 이 시금석은 정말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요점입니다. 여러분이 '됨됨이' 보다도 '어떤 일을 행하는' 것에 더 큰 강조점을 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조심해야 할 표증입니다. 만일 성도가 되는 것보다 어떤 일을 하는 데 더 열심이라면, 다시 그 열심을 검증하는 것이 좋습니다. 거짓된 열심은 언제나 행하는 것에 강조점을 둡니다. 어떤 존재가 되느냐 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바로 거기에 위험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시금석을 소개합니다. 거짓된 열심 속에서는 진리보다 행동이 우선합니다. 언제나 그 점이 두드러져 나타납니다. 삶의 중심에 있어서 활동을 강조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여러분이 내내 설득을 당하고 충격을 받은 한 가지 요점은 힘이 넘쳐나 보이는 다른 사람이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그런 것에 자극을 받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거짓된 열심은 언제나 일들을 지나치게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나침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행동은 그 행동을 유발했던 가르침보다도 그 가르침의 증상을 보여 주는 더 큰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방식, 조직, 구조가 매우 탁월한 위치에 있다면 거짓된 열심일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섯 번째 시금석으로 '육적인 것(carnality)'이라는 제목 밑에 여러 가지를 함께 놓아 표현해 보겠습니다. 제가 말하는 '육체'라는 것은 육신적인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거짓된 열심에는 이러한 육신적인 요소가 상존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일종의 정신의 경박성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의 천박할 정도지요. 안타깝게도 그러한 모습이 기독교의 종교적 집회 속에서 가끔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일종의 경박함, 비상성, 명랑함의 모습이지요. 사도 바울이나 아니면 다른 사도들의 근처에서 그러한 것들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 가까이에서 감히 그러한 것들을 생각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집회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봅니다. 대단히 열심이 있습니다. -제가 그들의 열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그걸 인정합니다. 그들의 광신주의적인 열심을 정말 인정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일이 지나칩니다. 그들의 열심에 이 경박한 모습이 보입니다. 실로 어떤 경우들에서는 정말 내가 이 종교적인 집회에 와 있는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내가 그 집회에 참석해서 느낀 정신은 크리켓이나 축구팀의 정신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정말 세상적인 오락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진지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어린 지각이나 성결의식이나 경외심 어린 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밝고 명랑하였고 놀랍게 조립된 큰 세력과 기운으로 넘쳐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것들이 진지한 열심의 표증이라기 보다는 육신적 사고의 표증들 이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거기에다 덧붙여 말할 수 있습니다. 거짓된 열심은 대단한 흥분이 일어날 때마다 발견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흥분도 역시 육체성의 제목 밑에 집어 넣어야 합니다- 흥분은 보통 육체에 속한 것입니다. 자신하고 확신하고 상황을 장악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된 열심임이 틀림없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감에 넘쳐 있는 인상을 끼치고 있다면 그 사람이 정말 얼마나 진지하고 열심 있는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열심을 의심해 버립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어떤 흔적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것은 역시 더 나쁜 것이지요.

        일곱 번째 시금석으로 나아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거짓된 열심은 자신을 검증하려는 것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자신이 검증받는 것 자체를 분개합니다. "내가 열심이라는 것을 모르세요? 나는 아주 열광적입니다 나는 그것을 하기를 원해요"라고 열심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십시오. "자,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확인해 봅시다." 그러나 그 열심은 그 모든 가르침을 참아내지 못하고 일들을 계속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무엇인가를 계속하고 있어야 합니다. 검증을 계속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매우 나쁜 징표입니다.

        여덟 번째로, '열심'이 가르침을 참아내지 못하는 양상을 때게 될 때 그 상황은 더욱 나쁜 것이지요.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바울은 그들이 지식을 원치 않고 거부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지식에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계속 해 나가야 합니다. 가르침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된 열심의 정신입니다.

        아홉 번째 시금석은 환상주의입니다! (신비주의와 거의 같은 말로 쓰이고 있음-역자주) 정말 참을성이 없습니다! 거짓된 열심은 일차적으로 그것이 선전하고 있는 것이 진리냐보다는 그것이 성공하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 번째 시금석으로, 균형의 결핍을 지적하겠습니다. 거짓된 열심에 고양된 사람들이 한 가지만 보고 있음을 여러분은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한 국면만을 보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복음전도에만 관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칼빈주의에만 관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알미니안주의에만 생각이 가 있습니다. 또는 예언에만 생각이 가 있습니다. 바로 이 한 가지 요점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바로 이 한 가지에만 강조점을 둡니다.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치명적인 특징입니다. 이단들이 언제나 그와 같은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그 이단들은 균형을 상실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가지에 너무 빨려 들어간 나머지 다른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오직 한 가지에만 집착하여 균형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한 가지만'은 하나의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맹목적인 열심이 되는 것입니다. 열심이 맹목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균형이 결핍되었다는 어떤 증표가 있거나, 온전한 진리가 제시되지 않거나, 하나님의 전체 뜻이 다루어지지 않거나, 오직 한 가지에만 부단히 강조하는 것만 있다면, 그것은 거짓된 열심입니다. 거짓된 열심은 학식이나 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신학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로 구원받게 해야지"라는 데에만 관심있고 다른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 그 거짓된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그들이 주장하는 그 독특한 교리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습니다. 언제나 그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에 언제나 그 한가지 요점이 부상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발견할 것입니다. 그것 또한 거짓된 열심이요 균형을 상실한 것입니다. 물론 교리와 생활 속에 어떤 균형이 없거나, 사람들이 믿고 가르치는 바와 살아가는 삶의 방식 사이에 균형이 깨져 있는 것을 본다면, 필연적으로 그들이 거짓된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하나의 적극적인 증표입니다.

        마지막 열 한 번째 시금석은 이러합니다. 거짓된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계속 활동하고 힘이 넘쳐나고 열심이 항상 들끓어 오르고 진지하기 때문에 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 평안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 평안을 보이기는 합니다. 병들어 어떤 일을 할 수 없으면 그들은 침체되고 불행해집니다. 그들은 그때서야 자기들이 활동에 의지해서 살아왔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하나님도 아시지만 저는 여러분에게뿐만 아니라 제 자신에게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자기 자신이 설교하는 것만 의지하여 살아가는 설교자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어떤 비극들을 보았습니다. 평생목회를 했던 노(老) 목사님들이 더 이상 설교를 못하게 되자 불행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설교할 수 없기 때문에 불행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가 불행해 있었기 때문에 불행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그 진리에 의존해서 살아가지 않고 자기들의 설교사역에 의존해서 살아갔습니다. 목회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으로 무서운 위험요소가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에서 활동적인 어떤 사람에게도 그와 같은 위험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활동에 의지해서 살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그러고 있다면 거짓된 열심을 가지고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등의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끈질기고 집요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 우리가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될 때 안식도 없고 상실된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면 그 모든 열심이 다 그릇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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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롬 1:18~20) 로이드존스

        이제 우리는 죄가 전혀 핑계 댈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① 인류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몰랐다고 핑계를 늘어놓을 수 없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를 알고도 고의로 그것을 막고 끌어내렸기 때문입니다.

        ② 그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았을 때가 있었고 여전히 알고 있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았습니다.
        ...
        하나님께서 이 지식을 그들에게 내면적인 것을 통해서 이미 알려 주셨는데, ?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들 안에 나타내심으로서 알려 주셨습니다.(19절) [예 : 세계 중에 가장 원시적인 부족들을 만난다 할지라도 최고의 존재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을 전혀 만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들의 양심을 통해서, 즉 옳고 그름에 대한 의식, 그리고 죄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과 우주를 도덕적으로 통치하는 분은 의롭고 정의롭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③ 또한 하나님께서 외면적인 것을 통해서 이 지식을 주셨는데, 창조를 통해서 자연 속에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양과 달, 별과 짐승들, 우주의 질서와 체계, 계절 등,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증거들로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④ 그리고 세계와 열방들의 전체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처음 열한 장을 통해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성경 밖의 세상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곳에서나 언제나 같은 것이 작용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섭리나 창조계 자체를 통해서 자신을 보여 주셨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역사를 통해서도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⑤ 이제까지 증거했던 모든 것들이 이방적인 나라들에게 해당되어 그들이 핑계 댈 수 없다면 특별한 계시를 받고,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말씀해 주시는 은혜를 받았던 유대인들이야말로 얼마나 더 핑계 댈 수 없겠습니까!

        ⑥ 이제 현대에 와서는 자연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증거에 더하여 특별계시인 구약 성경과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그것에 더해 신약 성경까지 주어진 현대인에게는 핑계를 댈 수 있는 조건은 더욱더 희박해 진 것입니다

         

         

        출처: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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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회심의 증거(창32:24)

         

         

         

        이 부분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하고 극적인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위대한 이야기 중 하나는 됩니다. 여러분은 사실 이 사건의 배경을 모르고서는 이 장을 읽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형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가축들과 처자식들을 줄줄이 늘어 세우느라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야곱을 지켜보려면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그 일을 다 끝낸 다음 야곱은 마침내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 자리까지 오게 된 야곱의 생애 중 상세한 내용 몇 가지 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이삭의 두 아들이었습니다. 비록 쌍둥이였지만 에서가 장자였으며 두 사람은 아주 달랐습니다. 야곱은 어머니가 편애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이 잘되기를 너무 바란 나머지 그가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얻어 낼 수 있는 계책을 짜냈습니다. 야곱이 자기 형 에서처럼 꾸민 후 나이 많아 눈이 멀어 잘 보이지 않 는아버지 이삭 앞으로 들어간 일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늙은 아버지가 자기를 만져 보고 틀림없이 털 많은 에서라고 생각을 하게 될 만큼 털가죽으로 자기 팔을 쌋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마침내 아버지의 축복을 얻어냈고 그의 형 에서는 분노와 불만에 가득 차서 야곱을 죽이기로 작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머니 리브가가 이 사실을 알아채고 야곱에게 차라리 도망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야곱은 고향을 떠나 외삼촌 라반에게로 갑니다. 오늘의 본문 앞에 나온 장들을 보면 그가 외삼촌을 위해 어떻게 일했으며, 또 그의 두 딸을 어떻게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는지 나와 있습니다. 또 비록 그의 행동 가운데 정죄 받을 만한 일들도 몇 가지 있긴 하지만, 아무튼 어떻게 그가 그토록 번성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처자식을 거느리고 엄청난 재산을 갖게 된 이 야곱에게 라반을 떠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오늘의 본문 32 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미 라반을 떠났으며 이제 처자식과 소유물을 다 거느리고 고향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 에서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자기가 과거에 에서에게 어떻게 행했는지도 정확 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에서가 자기에 대해 품고 있을 그 감정들을 상상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자기 재산이 걱정이었습니다. 처자식이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계책과 묘안을 짜냅니다. 그래서 형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종들을 먼저 보냅니다. 여러분은 야곱이 짜낸 계책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영리한 계책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야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 야곱이 있습니다. 그는 과연 어떻게 형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아주 극적인 위력을 갖고 계속 진행됩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야곱은 안전을 위해 자신이 갖고 있던 소유물과 사람들을 여러 떼로 나누어 먼저 강을 건너게 합니다. 두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두 여종과 잠시 함께 있다가 그들을 모두 앞서 보냅니다. 그런 다음 얍복강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제 자기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이 특이한 일이 발생합니다.

         

        여기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하고 있는 야곱이 있습니다. 그는 비록 부자지만 다음날 자기 형 에서를 어떻게 만나야 좋을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형 에서가 무장한 남자 400명을 거느리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리도 이미 들었습니다. 자기는 그 공격에 대 해 전혀 손을 쓸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자신은 물론 처자식까지 분명히 살해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모두 다 얍복강을 건너갔으며 야곱 혼자 남아 있습니다. 왔다갔다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잠도 이루지 못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하며 불길한 예감으로 가득 차 있는 야곱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 장 마지막에 기록된 그 엄청난 결과들로 인도될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물론 야곱의 전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입니다. -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떤 의문도 제기될 수 없습니다. - 야곱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바로 이 시점입니다. 그때까지 야곱은 종교를 이용하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곤란에 빠지거나 어려움이 생기면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까지 그는 단지 종교를 가지고 놀았을 뿐입니다. 그것은 이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외적인 것으로 자기에게 편리할 때나 꽤 괜찮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가 맨 처음 자기 집을 떠날 때 하나님과 흥정했던 사실 -“당신이 저를 축복하시면 제가 이것을 하겠습니다” - 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이 시점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 사건이 야곱의 이상야릇하고 변화 무쌍한 인생사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시점부터 그는 종교를 참으로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는 형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에 이 체험을 한 이후로부터 그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야곱의 인생사에 나타난 전환점을 보여 주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 이야기에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데는 이것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가 기독교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체험하는 것, 회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완전히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기독교의 복음이 무엇이며 그것이 한 개인 속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많이 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주변에는 교회 바로 밖에 있는 세상에 대해서는 몹시 신경을 쓰면서 이 점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에 대해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부터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필요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기독교에 흥미를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진짜 체험, 이 중요한 체험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혹시 이 브니엘 환상을 체험하기 전의 야곱과 같습니까, 아니면 이 브니엘 환상을 체험한 후의 야곱과 같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이런 중요한 체험을 했습니까? 이 같은 결정적인 중대한 변화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즉 하나님을 만난 후로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그런 변화를 체험한 적이 있으십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실제로 체험한 성경의 고전적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을 보십시오. 이와 똑같은 체험들이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 중 어떤 것은 직접적인 서술 형식으로 또 어떤 것은 가르침과 설명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의 생활 속에 나타난 놀라운 예들 속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위대한 주제로서 한번의 설교로는 도저히 다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야곱이 겪었던 이 극적인 체험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 이 허락하신다면, 다음 주에 이 점에 대해 좀더 상세히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제를 다음과 같이 둘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전반적인 성격을 알아본 다음, 그 체험을 통과하게 되는 상세한 방법과 그것이 어떻게 효과를 발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 사건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거기에는 우리가 반드시 물어 보아야 할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질문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 깔려 있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했는가? 나는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사람이 체험한 것과 똑같은 체험을 했는가? 이렇게 말하면 제게 이런 질문을 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도 좋지만 대체 그런 체험의 특징들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제가 그 체험을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테스트해 볼 수 있습니까? 제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브니엘 체험 이전의 야곱 상태에 있는지 아니면 브니엘 체험 이후의 야곱 상태에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그럼 이제부터 이 지극히 중요한 체험의 특징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첫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특징은 회심은 항상 강렬한 개인적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이 체험에 관한 첫번째 사항은 그것이 항상 우리를 격리시킨다는 사실입니다. 그 체험은 우리를 따로 떼어 홀로 있게 만듭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개체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는 모두 이것이야말로 바로 현시대를 살면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라는 사실에 틀림없이 동의할 것입니다. 특히 지금 현재와 같은 세상에서는 아주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마치 인생의 모든 것들이 서로 짜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개체성과 독립된 정체성을 잊게 만들려고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이 자기 일에 파묻혀, 자신의 전문직에 파묻혀, 자신의 직업 속에 파묻혀 자신을 망각하기가 얼마나 쉬운 세상입니까? 자기 가족에 파묻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온 세계 속에 휩쓸려 자기를 잃어버리기는 또 얼마나 쉽습니까? 이 세상이 점점 더 대중과 군중 단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기정 사실화되었습니다. 그 것은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도 그랬지만 그 전쟁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수많은 대중, 수백만의 사람들에 대해 연구합니다. 세상은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개인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집단과 그룹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그 단위가 점점 더 커집니다.

         

        이런 현상은 실업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소자본을 가진 개인이 합병된 기업이나 체인점들에 의해 먹히는 세상입니다. 이런 현상은 정치계에서도 볼 수 있으며, 노조라는 조직 하에 노동자 개인이 사라지고 마는 산업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난이 아닙니다. 이제 고용주와 피고용자 사이의 개인적 관계가 이전 같지 않다는 것은 이미 기정 사실입니다. 이제는 그 관계가 좀더 기계적으로 조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부서의 전체 생활이 그 부서에 속한 개개인에 기초하기보다는 그 집단 전체에 기초해서 생각되고 있습니다.

         

        국제 관계나 원자 폭탄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할 때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개개인은 자신을 하찮은 존재 -지구상의 전쟁, 세계 대전, 원자 폭탄은 많은 사람들, 아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일 수 있습니다 - 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대체 개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 한 개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숫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 방식만큼 지금 우리가 함께 논하고 있는 이 중요한 체험에 역행하는 것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고 방식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갖게 되는 체험에 가장 역행하는 것입니다. 이 체험을 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항상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개체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그런 다음 “한 사람” 즉 하나님과 단둘이 남게 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오시는 데는 참으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동원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 속에서 보는 이 방법은 아마 가장 극적인 방법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야곱은 문자 그대로 자신의 처자식은 물론 자신의 모든 소유물로부터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야곱의 위험은 자신을 이것들과 동일시하는 데 있었습니다 -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그것들로부터 떼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해서 이 분리 작업을 하십니다. 때로는 질병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 일을 하십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사업이나 재산에 많은 흥미를 갖고 있으며,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이주 행복하고 단란하게 삽니다. 그는 이런 것들을 위해 삽니다. 그는 절대 잠시 멈춰 서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가? 이 인생이 다 지나간 후에는 내게 어떤 일이 생길까? 라는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다른 관심사들에 온통 빠져 자기 자신을 잊고 삽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병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하던 사업으로부터 그를 분리시켜 놓으십니다. 그의 소유물과 관심사들로부터 그를 떼어놓습니다. 어쩌면 가족들과 떨어져 병원에 입원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자기는 결국 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자기는 절대적으로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 침대 위에서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물론 자기 집 병상에 누워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다만 하나님이 이런 체험을 하게 해주시는 방법들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시어 실망을 안겨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의 돈을 앗아가고 우리 사업을 망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친구와의 우정에 금이 가거나 그보다 더 깊은 애정 관계에서 실망하여 이 지점에 도달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의 인생 에 대해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바로 이런 식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격리시키셔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자기 자신도 잃고 자기 영혼도 잃은 채 빠져 있는 것들로부터 그들을 단절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격리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은 개인이라는 것, 자기 혼자 문제들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 이런 사실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이것이 설교가 하는 일의 전부입니다. 설교가 하는 첫번째 일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 각자에게 우리는 개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강단에서 사회적 여건이라든가 경제 및 정치 상황 또는 국제적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다 어떤 의미에서 이 복음을 설교하는 것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선 지나칠 정도로 언제나 개인적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우리는 개개인이 따로 서 있다는 것, 이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 바로 복음의 첫번째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혼자 태어납니다. 죽을 때도 모두 혼자 죽습니다 - 무리를 지어 죽지 않습니다. 사망은 아주 개인적인 것입니다. 복음의 두번째 메시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한 개체라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책임을 물으실 거라는 것, 이런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떼를 지어 한꺼번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 서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각자 가서 심판 받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분과 제가 행한 모든 것, 심지어는 “무익한 모든 말”까지 적힌 개개인의 기록이 거기 다 있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고 행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며 우리 각자 그 점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여러분은 이렇게 격리된 상태에서 자신을 바라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신이 이 세상과 이생에서 하나님 앞에 선 한 개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제가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제발 군중과 대중들로부터 떨어져 나오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격리시켜, 지금 이 시간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홀로 서서 여러분에게는 개인적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이 복음의 첫번째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항상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산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는 사실, 그 외의 다른 어떤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 있다가 내일이면 없어질 것이요 각자 혼자서 심판대 앞에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제 두번째 특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심은 항상 우리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 주는 체험입니다 저는 특히 이 점을 강조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와 있는 이야기가 강조하고 있는 위대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극히 중요한 체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한 개인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나 기독교를 단순히 도덕과 행실의 문제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단순한 개념이나 원리의 문제로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기독교는 어떤 견해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평화와 전쟁, 교육이나 산업에 관한 어떤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를 위해 행해질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 한 인간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브니엘에서 이 일을 체험하기 전의 야곱은 이주 달랐습니다. 우리 중 아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야곱도 항상 하나님을 자기가 필요로 할 때 축복을 주는 일종의 힘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자기에게 힘과 능력이 필요할 때 돌아서서 그 힘과 능력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하늘 어딘가에 있는 위대한 능력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얻은 후에는 하나님에 대해 새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대면한 이 극적인 밤에 그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모든 회심 체험의 본질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제가 현재의 우리 기독교계, 특히 신학생들을 볼 때 가장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징조가 있다면, 바로 이런 개념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그 동안 너무 오랫동안 사회 복음에 관심을 쏟아 왔습니다.

         

        기독교를 단순히 윤리의 문제요, 사람을 정신적으로 고양시키고 소생시키는 것, 추상적인 신학의 문제로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관계가 기독교의 참 본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새로운 관심은 지금으로부터 l00년 전에 살았던 그 유명한 덴마크인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특별한 면을 아주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적인 개념을 갖고 노는 것이 아니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 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인간은 그 점에 대해 무언가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 이것이 소위 결정적인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나와 당신(I and Thou)라는 아주 의미심장하고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통해 최근 더욱 보편화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나와 당신”이라는 인격적 관계로 생각하는 대신 천국 어딘가에 있는 “그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진짜 인생은 인격간의 만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관념의 영역에서 살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지극히 중요한 체험의 두번째 표지로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 철학 속에 있는 단순한 추상적 부호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자신의 술책을 이루기 위해 가서 엎드려야 하는 어떤 개념 -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외딴 곳에 있는 어떤 개념 - 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이따금씩 우리를 축복해 주는 어떤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요, 하나님은 참이시며,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분이요 우리와 용무가 있는 분이요, 우리가 관계해야 할 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브니엘 체험을 하기 전에는 야곱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비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브니엘에서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 아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그 “사람”(그는 바로 하나남 자신이었습니다)이 야곱 과 이야기하고, 야곱과 씨름했습니다. 야곱은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챘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진짜입니까? 하나님이 이처럼 인격적인 존재입니까? 하나님이 실재입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까? 제가 말씀드리지만 이 체험의 두번째 특징은 그것이 항상 우리를 즉각적으로 하나님과 직접 만나게 해주는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무릎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정말 거기 계시다고 믿습니까? 여러분의 기도 생활은 어떻습니까? 단순히 몇 가지 경건한 소원과 소망 사항을 중얼거리는 정도입니까? 여러분 자신에 대해 말하고 어떤 가능성들에 대해 단순히 물어보는 정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 적이 있습니까? 거기 정말 살아 계신 거룩한 인격체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안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이 체험을 해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정말 그리스도 안에 살아 계신 참 하나님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체험의 세번째 특징은 이것입니다. 이 체험을 한 사람은 항상 그것을 그의 인생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것은 여기 이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간단히 끝맺는 말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여기 야곱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하며, 에서에 대해 그리고 자기 소유물에 닥칠 위험을 생각하며 불길한 예감에 가득 차서, 걱정 근심에 싸여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야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체험을 하기 시작하고 그 체험이 진행되는 동안 야곱은 에서에 대해 새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자신의 가축들, 소떼와 양떼들, 그 많은 재산, 심지어 처자식들에 대해서도 다 잊어버립니다. 이 분, 이 놀라운 체험, 그에게 제시된 이 축복의 가능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잊어버립니다. 그것은 너무 자명하고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체험이라 할 수 있는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항상 나타나게 되어 있는 현상 아닐까요? 야곱은 이 축복을 받기 위해 씨름했습니다. 그는 그 축복을 간청하며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날은 밝아 오고 에서가 올지도 모르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절대 당신을 가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설사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더라도 나는 이것을 반드시 갖고야 말겠습니다.” 이 말은 항상 그리스도인에게 지극히 중요한 체험을 할 때면 반드시 터져 나오게 되어 있는 말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는 하나님이 자기 인생 속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자기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과 자기가 그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영혼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일들에도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히 살지만 그 외 모든 것은 다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습니다.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 때문에 이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 -“나는 구원받아야 한다. 나는 용서받아야 한다. 나는 새 생명을 받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 - 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요? 아, 있습니다. 그는 그 리스도께로 돌아서서 “저는 당신을 절대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 축복을 반드시 갖고 말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는 이것을 간청하며, 이것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제 이것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다시 한번 간단한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여러분 인생 속에도 이것이 가장 큰 것이 됩니까? 제가 지금 강단에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꼭 붙잡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께 꼭 매달려 있으시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그는 자기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기에게 새 생명과 새로운 본성이 주어지며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설 수 있는 신분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압니다. 사망과 무덤을 이기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영광스러운 영원한 유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고 “비록 모든 것을 다 빼앗긴다 해도 내게 그리스도만 계신다면 아무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이처럼 그리스도가 최고입니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기서 야곱이 느끼고 있는 심정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든 참 그리스도인들의 심정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낙심시킬 수 있다. 나를 핍박할 수도 있으며 내게 뭐든지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만 나와 함께 계시다면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항상 영원한 변화가 뒤따르는 체험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 변화는 영원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체험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감정적인 체험을 하고 자기가 회심했다고 고백하지만 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령 심리적인 회심 같은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런 감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체험이 진짜라는 특징은 그로 인해 그 사람이 영원히 변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브니엘 체험 이후 다시는 전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 몸에 표지를 갖게 되었고 그 이름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이 시점에서부터 계속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야곱이 전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옛 야곱은 이제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는 어떤 의미에서 절름발이지만 새사람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체험에는 항상 영원한 변화가 수반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은 새사람입니다. 그는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 옛날의 그가 사라지고 그가 달라진 것을 세상이 압니다. 비록 남은 여생을 절름발이로 살긴 했지만, 누구든지 야곱을 보면 그가 이전의 야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와같은 중요한 체험을 한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이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는 자기 위에 표지들을 얻게 되었고 새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을 강하게 믿던 야곱, 그 야곱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불구의 야곱 - 이스라엘이 “다리를 절뚝거립니다.”

         

        그것이 마지막 특징입니다. 따라서 이 지극히 중요한 체험의 마지막 테스트는 그것이 영원한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이전의 그가 아닙니다. 그는 새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옛것이 모두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것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이 브니엘 체험을 하셨습니까? 혼자 격리되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보셨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 분으로 다가옵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이 현재의 여러분이 되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있는 새사람, 새 생명, 새로운 흥미, 새로운 능력, 새로운 존재를 의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여러분 자신을 뛰어 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과 같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혼자 격리되어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분을 발견하고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이 여러분에게 주실 수 있는 축복을 간청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이 순간까지 그런 적이 한번도 없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이 여러분의 브니엘이 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한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께 매달려 여러분을 축복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여러분에게도 이런 체험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믿음으로 구하면 하나님도 거절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브니엘 체험 이후의 사람으로서 앞으로 계속 전진하십시오.

        가져온 곳 : 
        카페 >양무리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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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장 설교의 형식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신도들을 감동시켜 생활영역 전체에 영향을 주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분명코 이 모든 원리를 밝히 드러내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고대역사나 고대문명 또는 그와 유사한 어떤 것에 대한 강좌를 하는 골동품 연구가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오늘날 생존하여 생의 문제에 직면한 신도들에게 대해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들에게 사활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이며,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존재를 걸고 들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가 그들이 사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98p) 

         

        제5장 설교행위

         

        설교를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점들이 있습니다.

        첫째, 설교자의 전인적 품격(Whole Personality)이 반드시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강조하려는 두 번째 요소는, 권위로서 청중을 압도하고 진행해 나가는 지각력(知覺力)입니다. 설교자는 결코 변명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설교자는 마치 회중들의 양해를 얻어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추측이나 생각을 실험삼아 말하는 것이 되어도 안됩니다. 그것은 정말로 설교자가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확실한 일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명을 띠고 권위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는 보냄받은 사자(使者)로서 회중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이것은 자기 확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설교자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입니다.....(108p)

        내가 중요성을 부여하고 싶은 또 다른 요소는 설교자가 말하는 동안 어느 의미에서는 회중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끌어내고 있어야 합니다. 회중 가운데는 영적인 사람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 기회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설교에는 상호 교환의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은 수필과 강좌가 설교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길입니다. 자기의 수필을 낭독하는 사람은 자기의 청중들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 사람 앞에 있는 것은 쓰여진 것이 전부입니다. 거기에는 새롭거나 창조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어떤 주고받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자가-비록 아주 조심스럽게 준비를 하였다 할지라도-

        이 영적 자유의 요소 때문에 아직 회중으로부터 어떤 것을 받을 수 있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상호작용과 행동, 반응이 있게 되고, 종종 이것은 아주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109p)

         

        비록 여러분이 설교를 아주 조심스럽고 철저하게 준비했다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강단에 서서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는 무엇이 일어날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발생한 것에 자기도 모르게 놀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요소들이 가입할 수도, 앞뒤 없는 얘기일 수도, 불완전한 문장일 수도 있습니다. 학자연(學者然)하는 자들이 비웃는 것들이 많을 수도 있고 문학 평론가들이 평론에서 신랄하게 비평할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점은 설교를 전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설교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심중에 그 점을 간직하고 있고 다른 요소들에게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가하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자유로움의 요소는 정말 중요합니다. 설교는 언제나 성령-그의 능력과 지배-아래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는 무엇이 일어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유로우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준비하라, 그것도 주의깊게 준비하라”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라고 말했다고 해서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거기에도 전혀 어떠한 모순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준비할 때 도우셨던 성령께서 설교를 행하는 동안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도우시며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열어 보여 주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의 요소는 진지함의 요소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진지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설교자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에 관해서 그들의 조건과 그들의 영혼상태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 사람들이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다른 이들처럼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과 그들이 영위하고 있는 생의 특징은 하나님에게 범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일러주며 그들 앞에 놓인 가공할 만한 영벌에 대한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에서든지 설교자는 이 생의 허무함을 모든 사람들보다 가장 잘 인식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일과 사업과 세상 열락과 허망한 자랑에 너무 깊이 빠져있어서 그들이 부단히 생각하는 일은 덧없는 생의 성격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설교자란 항상 그가 강단에 나타나는 순간에도 거기서 행하는 일에 대한 심각함의 인상을 창조하고 풍겨햐 합니다.....(111p)

         

        나는 ‘박력’의 요소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는 심각함이 진지한 체하는 것을 뜻하지도, 슬픈 기색을 뜻하지도, 침울한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생기에 넘쳐있어야 합니다. 박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진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을 다른 말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설교자는 결코 흐리멍텅하거나 지루해서는 안됩니다.....(112p)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십시다. 그 다음은 열심, 열정감입니다. 이들 진행의 요소들은 모두 친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내가 열심이라 말할 때 그 의미는 설교자는 반드시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자기 스스로 붙잡힘을 당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가 그것에 붙잡히지 못하였으면 아무도 그 진리에 붙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점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113p)

         

        그 점은 필연적으로 “뜨거움”의 요소에 우리를 인도합니다. 설교자는 결코 냉담해서는 안됩니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거의 옳고 정말 거의 완벽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상적이지 않고 살아있지 못하며 차갑고 감동이 없는 것은 자기 스스로 감동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만일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것으로 감동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안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뜨거움”을 유발합니다.....(116p)

         

        설교자는 이런 이유와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해서 그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과 접촉하는 사람입니다. 이탈되지 말고 일치되어야 합니다. 이는 그의 음성, 그의 태도, 그의 모든 접근방식에서 풍겨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친밀한 접촉 여부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나는 “긴박감”의 요소를 생각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저 단순히 지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영혼들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으로 가고 있는 순례자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 생에서의 생과 사의 문제 뿐 아니라 영원한 운명을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절실하고 급한 것이 없습니다....(118p)

         

        우리는 생의 한가운데서 죽음에 맞부딪혀 있습니다. 만일 설교자가 이 긴박감, 즉 자기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시간과 영원 사이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면 그는 설교단에 서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는 종요하고 냉정하고 과학적이고 초연한 척 여유를 부릴 수 없습니다. 철학자의 경우에는 그런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설교자에게는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전체적인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똑같은 이유로 해서 설교는 언제나 “설득력”에 의해 특징지어 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담대함으로 권하노니 하나님께 대해 화해하십시오.” 분명히 이 설교행위의 전체 목적은 청중들을 설득시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것을 취하라 또는 저것을 버리라“는 식의 태도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진리를 그들에게 설득시키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이 그것을 알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려고 노력하며 그들에게 감화를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한 본문에 대한 수준 높은 논문을 제시하고 있지 않으며 자기 자신이 아는 것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살아 있는 영혼들을 다루고 있고 그 영혼들을 움직여 진리로 그들을 이끌어 주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그의 모든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 요소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이 모든 요소들은 강의하는 것과 설교하는 것 사이의 차이 또는

        수필과 설교문 사이의 차이를 구분지어 줍니다.....(119p)

         

        우리는 순전히 지적이거나 논증적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 정념의 요소가 반드시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은 이 정념을 산출할 뿐 아니라 그 일 자체가 그 일을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닫는 것보다 더 감동적인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점을 숙고하고 이해하기 위해 어떤 사도도 우리들을 사무치도록 감동시켜 줍니다.....(120p)

         

        이 정념(情念)과 감격의 요소는 내게 있어서 아주 사활적으로 중대한 것입니다. 현세기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결핍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특별히 개혁파(Reformed)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균형을 잃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도하게 지적이 되어 정말 감정과 느낌의 요소를 거의 경멸하는 추세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배운 사람들이고, 진리를 너무 많이 포착하여 가지고 있다보니까 감정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대부분 감정적이고 감상적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이해를 못 가졌습니다!

         

        이는 위험한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거기 모아 놓은 사람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느낌을 혐오하다니 이것은 위험한 경향이 아닙니까? 우리는 도취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설교자로서의 우리에게 맡겨진 이 영광스런 진리들을 아무런 감동도 없이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영적 시안이 무엇인가로 가리워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말한 바처럼 이러한 것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감동되지 않고 지나치는 수가 결코 없었습니다. 나는 내 말을 입증하는 한 가지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로마서 9, 10, 11장에서 바울이 어떻게 유대인의 특정 문제를 다루어 나가는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차지할 곳은 어디인가.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나 기타 그가 말해온....(122p)

        끝으로 나는 말씀의 능력에 대해 언급해야겠습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한 가지만으로도 한 부분을 차지할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능력(권능)이 없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결국 참된 설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설교의 주요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존전에 있다는 생각을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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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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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정[D.M.로이드존스]

        글쓴이: 이종인   02.11.08   http://cafe.daum.net/CPI2002/7HFj/38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

        1. 예정론 연구의 필연성(필요성)

        창조의 교리를 상고하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상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지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우리에게 말씀하기 전에 하나님의 모든 활동의 특성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역사를 행하시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정확하게 상고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역사를 행하시는 방법을 먼저 상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기초가 되고 특징이 되는 몇 가지 중대한 원칙들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해서,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인간의 창조를 시작하기 전에 특정한 일들을 생각하셨고, 의도하셨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고 순서가 이른 곳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실제의 창조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의향과 계획 중에 특정한 일들이 결정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 이 교리는 우리의 지력의 범위를 초월하는 삼위일체의 교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삼위일체의 교리에서 본 바와 같이 단지 어렵다는 이유로 이 교리를 피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을 격려하기 위해 약속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약속은 이렇습니다: 즉 이 기본적이고 예비적인 교리들이 극히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영원자의 생각을 다루고 있고, 우리의 유한한 이해력과 우리의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지력의 범위를 넘는 일을 상고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인간에 대한 교리와 창조와 구원에 대한 교리는 당연히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1) 성경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임.
        이 교리에 여러분의 주의를 요구하는 나의 첫 번째 이유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교리가 성경에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분명히 우리는 이 교리를 상고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 전도의 진정한 문제가 하나님의 교리에 우리가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관적인 경험과 주관적인 구원에 너무 흥미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이 중대한 교리를 망각합니다. 그리고 이 점이 우리의 많은 불행과 문제들의 원인입니다.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경배하게 됩니다.

        2) 오류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임.
        우리가 이 교리를 상고해야 하는 또 한가지 이유는 이 교리가 우리를 많은 오류로부터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세월에 걸쳐 사람들을 타락시킨 대부분의 오류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마땅히 깨달아야 하는 만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 가장 큰 위로의 교리이기 때문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교리에 주의를 요구하는 마지막 이유는 이 특별한 교리보다 더 큰 위로를 주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시간의 세계를 지나가고 있는 보잘것없는 피조물에 불과한 나의 배우에 이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이라는 교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위안을 주는 것이 없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합니다.

        2. 이 교리에 접근하는 자세
        1) 편견과 모든 종류의 파벌 정신을 제거하는 일.
        2) 부정적인 명제 : 철학적으로 이 주제에 접근해서는 안됨.
        3) 긍정적인 명제 : 겸손하게 접근해야 함.
        우리는 이 주제에 겸손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또한 경외감을 가지고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주제에 믿음으로 그리고 우리의 한계를 기꺼이 인정함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찾고 탐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이와 같은 심령을 가지고 나아가서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을 받아 들어야 합니다. 덧붙여 말한다면, 성경의 계시를 넘는 질문들을 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성경에 계시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기꺼이 질문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주어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는 그 이상을 알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계시로 만족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 심원한 교리에 접근해야 합니다.

        3. 진술
        1. 첫 번째 원칙 :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자신의 피조물들에 대한 불변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부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어떤 일이든지 마음 내킴이 없이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활동에는 절대로 불확실한 일이 없습니다. 이 말을 다른 형태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뒷궁리 하시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전지하시고 편재하시다고 동의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뒷궁리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우발적이거나 우연적이거나 불확실거나 뜻밖의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에 대해, 인간들에 대해, 구원에 대해, 이 세상의 전체 생활에 대해,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 궁극적인 운명에 대해 명확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성취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일은 확고하고 확실하고 불변적이고 절대적입니다.

        2. 두 번째 원칙 : 하나님의 계획은 일어나는 모든 일과 모든 종류의 사건들을 포함하고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특정한 결과들을 결정하셨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그 결과에 이르게 하는 모든 일도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시점에 창조를 결정하셨고, 시간에 따라 어떤 시점에 세상의 종말이 일어나도록 결정하셨다고 믿는다면, 만일 종말이 확실히 결정되었다면, 그 종말로 인도하는 모든 일도 결정되어야 합니다.
        만일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 일들에는 필연적으로 자유로운 활동, 자유롭게 자발적인 행위자들의 자발적인 활동들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진술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0-11).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9:29).
        한 마리의 참새가 땅에 떨어져 죽습니다. 여러분은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는 말씀에 이어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10:30)라고 말씀하십니다. 전혀 우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들이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일들도 하나님의 예정안에 있는 것임.
        더 비범하고 인상적인 일이 있습니다. 성경은 심지어 죄악된 행동들도 하나님의 지배안에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예수살렘에서 한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 "그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행2:23). 그 다음에 베드로는 사도행전 4:27-28절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나타냅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이들의 무서운 죄도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 미리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예 :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45:8).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의 원인이 아니심.
        하나님께서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도 그리고 절대로 악의 원인이 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행위자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허용하시고, 그 다음에 자신의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그 악을 압도하십니다. 죄의 발생을 허용는 하나님의 결정은 죄를 제한하고 죄가 한정되는 정확한 방향과 죄가 지향하는 정확한 결과를 결정하여 죄의 결과들을 선으로 바꿉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명백하게 우리를 가르칩니다.
        요셉의 예 :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나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가룟유다의 예 : 유다의 해동은 자유롭고 자발적이었음에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의 일부분이었던 것입니다.

        3. 세 번째 원칙 : 하나님의 모든 결정들은 무조건적이고 주권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결정들은 결코 인간의 행동들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결정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행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지식에 비추어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결정들은 완전히 무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의 결정들은 하나님 자신의 뜻과 하나님 자신의 거룩하심 외에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습니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 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4:35).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2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나는 여러분에게 에베소서의 첫 장 상반부를 주의 깊게 공부하라고 추천합니다. 그곳에서 말씀하는 바를 자세히 관찰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항상 "그 기쁘신 뜻대로" 이루어 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완전히 은혜입니다.
        이 교리가 로마서 중에서도 심원하고 중대한 9장에서 가장 명확하게 진술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특별히 11절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바울의 논증은 하나님께서 형이 동생을 섬기도록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 중 아무도 아직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롬9:1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질문1 : 하나님의 결정은 사람의 행위에 의존하는가?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할지 모릅니다 :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셨을까요? 그들이 행한 일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들이 임신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는 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행위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으로 주권적입니다. 바울의 말을 다시 들어봅시다.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9:14).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금하십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었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사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9:15-18).

        4. 네 번째 원칙 : 하나님의 결정들은 효과적이라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인 주님이시고 전지전증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들은 절대로 실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심하시고 결정하신 일은 무오하게 성취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께서 결심하시고 정하신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 무엇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결정들은 모든 일들에서 하나님의 가장 지혜로우시고, 인자하시고, 거룩하신 본성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나는 이점에 대해 논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해서 하나님에게는 모순이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질문2 : 하나님께서는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
        서론에서 내가 여러분에게 경고한 바와 같이, 이 땅에서 유한하고 죄악된 심령을 가지고 살고 있는 여러분과 나는 문제들에 봉착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죄를 허용하기로 결정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 가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를 허용하기로 결정하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허용하지 않으셨다고 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모릅니다. 그러나 영광중에 하나님을 마주 뵈올 때, 우리는 그 모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 것입니다.

        두가지 단언
        두가지 우리가 확신할 수 있고 단언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죄의 원인이 아니십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합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둘째로, 하나님의 목적은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의 피조물들의 행동방식 및 본성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 해서 비록 우리는 조화시킬 수 없지만 궁극적인 조화가 있습니다.

        질문3 : 하나님께서 정하신다면 우리의 행위에는 책임이 없지않은가?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결정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하는 일에 우리가 책임이 있다고 하실 수 있을까요? 여기 대답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해서는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 지라도 무슨 말하리요"(롬9:20-23).
        여러분은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떻게 이 두가지 사실을 조화시킵니까?" 나는 조화시킬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내가 아는 것은 성경이 이 두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어떤 의미에 있어 자유로운 행위자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들이 모든 일을 지배한다는 사실입니다.

        5. 마지막 원칙 : 인간들과 천사들의 구원, 그리고 특별히 인간과 천사들 중 일부의 구원이 창세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어?지 아니하리라" (요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질문4 : 예정하심은 불공평이 아니냐?
        "나는 이해 못하겠다. 그 말은 내가 보기에 모순되고 불공정한 것 같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이 결정들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한 것같다"라고 질문한다면, . 질문자에게 바울은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롬9:19)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어서 "이 사람이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해서는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 지라도 무슨 말하리요"(롬9:20-23). 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대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의 대답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생각에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지, 얼마나 유한한지, 타락의 결과로 얼마나 죄악되었는지 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광에 이를 때까지 궁극적인 깨달음을 유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일관되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결정에 대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결심하시고 결정하신 바에 대해 명백하고 명확하게 여러분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간에 속한 이곳에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의 전부입니다.
        특히 무엇보다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은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렇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결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 대해 결정하신 것은 정확하고 안전하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누구라고 하나님의 손에서 여러분을 빼앗거나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보류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 허리를 굽힙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 낮아 집시다.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주시기를 기뻐하신 계시에 복종합시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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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명에 대한 조언 - 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D. M. LLoyd Jones)박사가 딸에게 소명에
        관해 조언 한 것>

        ... 1948년 5월 엘리자베스는 해외 선교사역을 위해 준비하
        고 있음을 부모님께 편지로 알렸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하
        나님의 뜻을 확신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로이드존스
        박사는 CIM(중국내지선교회, 지금은 OMF:역자주) 연례회
        (conference)에서 설교하기 위해 집을 막 나서기 전에 쓴
        편지를 통해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엄마와 나는 해외선교 사역에 대한 너의 생각과 감정을 네
        가 지난주에 보내온 편지를 통해 보았고, 이것에 깊은 감동
        을 받았단다. 우리는너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만족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너를 하나님의 뜻에 맡
        길 만한 충분한 은혜를 받았음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나는 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단지 나그네와 이방인이라는
        걸 다른 이와 나스스로에게 자주 말하려고 노력했다. 우리
        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우리는 청지기
        의 자격으로 모든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다.

        이것을 우
        리 자신을만을 위해 유지하거나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으로부터 온 것으로써 향유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 아
        이들에게도 마땅히 적용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삶과 인생
        에 있어서 부모인 우리의 일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녀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준비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
        리손에 맡기신 것들중에 자녀가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특
        권중의 하나라고 여긴다...

        먼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모든 것을 전혀 사심없이(disi
        nterested)말하는 것이며, 나에게 너와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말했던 것을 동일하게 전달하는 것임을
        네가 깨닫기를 바란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
        는 것이다. 그것은 때때로 들리는 것만큼 쉬운 것이 아니란
        다. 나는 목회를 위해 의대를 떠나기 전 거의 2년 동안을 불
        확실함과 망설임의 상태로 보냈다. 그러나 결국에 하나님
        께서 하신 일에 의해서 절대적이고 완전하게 그리고 명확
        해졌다.

        다음은 네가 지켰으면 하는 원리들이다.

        1. 그것에 대해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로 말하지 말아라. 네
        가 느끼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지도 토론하지도 조
        언을 구하지도 말아라. 그렇게 하는 것은 언제나 더욱 불확
        실하고 더욱 혼동스러운 상황을 만든단다.. 어떤 값을 치루
        더라도 이걸 절대적인 규칙으로 삼아라. 네가 온전히 확신
        하게 될 때까지 아무 것도 말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자기 암시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2. 그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말아라. 네 스스로 장점과 단
        점을 논하지 말아라. 이렇게 하는 것은 더욱 자기암시와 혼
        란을 가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3. 여러 모임 중에라도 너의 마음에 있는 생각 - ‘나는 이 일
        이 나의 의문에 대해 빛을 던져 주는지 어떻게 도움이 되는
        지 궁금해.' - 을 가지고 시작하지 말아라.

        4. 다른 말로 하면, 너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는 시도
        조차 하지 말아라. 나는 하나님께서 매우 명확하게 부르시
        고(call) - 이것은 소명에 대한 명확하고 정확한 교리 안에
        있으며 - 소명은 ‘필요가 소명이다'라는 생각과는 별개라는
        걸 믿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과 길을 언제나 단
        순하고 명백하게 하실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경외하는 마
        음으로 나는 목적과 시간 다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확신한다.

        네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주님의 뜻을 행할
        것이며, 이것에 더해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
        라고 하나남께 고백'하는 것이다. 너는 네 자신의 삶과 미
        래를 전적으로 그분께 의지해라(surrender). 그리고 그러
        한 상태를 지속하거라. 하나님께 너를 향한 그분의 길을 보
        여달라고 계속해서 요청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그분께 맡
        겨라(leave it to Him). 그리고 네가 그렇게 행하는 것을 그
        분께서 불가능케 할 때까지 그것을 생각하는 걸 거절해라.

        그리고 특히 네가 속해 있는 OICCU(Oxford Inter-Collegi
        ate Christian Union)(엘리자베스는 옥스퍼드 대학에 다
        녔다:역자주) 나 IVF 단체 안에서는 활동가가 되는 것이 쉽
        고 사역에 큰 강조점을 두는 분위기일수 있으니 더욱 명심
        해야 한다.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무엇을 하는 것보다 우
        선한다(‘to be' comes before ‘to do'). 여기에서 우리 모
        두 실패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인이 쓰시기에 적절하
        고 충족되는 그런 도구가 되도록 우리를 만드는 것이다. 하
        나님은 언제나 그들을 사용하기 원하시는 방법과 장소와
        때를 그런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너 자신을 위
        해서 그리고 더욱 사역을 위해서 이러한 원리들을 지켜 나
        가기를 바란다.

        <출처 http://missionnetwork.org/blog/mission/trackback/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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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병을 이길 힘 인간의 질병들을 위한 치료책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에게만 있다. 내가 만족을 얻을 것도 언제나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 로이드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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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권 5장 '복음'이란 말의 의미 pp77-86
        (각 장에 붙은 제목은 한글판 편집자에 의해 붙여진 듯 합니다. 영문판에는 제목이 없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1955년 1장을 서두로 1968년 14장 17절까지 13년간 로마서를 강해하였습니다. 출판은 3:20-4:25 부분부터 시작하였기 때문에 로마서 1장은 한글판 제7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제5장에서는 1장 1절의 <하나님의 복음>이란 말에 대하여 강해합니다.
        pp77-80 까지는 요약하여 번역하였고, pp80-86까지는 전체를 번역하였습니다.
        ------------------------------------------------------------------------------------------------------------------------


        우리가 알듯이 '복음 gospel'은 언어학적으로 '기쁜 소식(喜消息) good news'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정말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다가옵니까? 우리가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알고 있다면, 그 말의 문자적 의미 뿐만 아니라 복음 그 자체를(1) 실제로 이해하는 겁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이란 말을 1절에 곧바로 도입한 것은 율법과 대조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듯합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 교사였지만 지금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자(使者)(2)입니다. 율법에는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율법은 범죄 때문에 '끼여 들어 왔습니다'(3). 율법은 죄를 집어내려고 우리에게 들어왔습니다. 율법은 구원의 도구나 방법으로 주어진 적이 결코 없습니다. 율법에 은혜의 요소가 있는건 사실이지만, 율법이 기쁜 소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점을 이해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스스로 구원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고 합니다. 사도는 율법에 관한 이런 몰이해(沒理解)가 비극적임을 보여주려고 애씁니다. 율법이 실패하고 나서야 복음이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4)으로 왔다는 발상은 율법과 복음을 둘 다 오해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는 단순한 발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건 율법시대(5)에도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구양성서에는 매우 위대하고 훌륭한 죄사함의 교리가 있습니다.

        또한,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행하도록 호소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선하게 살면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라고 호소하는 메시지로 복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건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앞으로 복음이 무엇인가 자세히 밝히겠지만, 여기 서두에서 복음이 하나님의 아들과 관련된 어떤 일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 당신과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은 일에 관한 어떤 것입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호소문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을 선포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의 공표(公表)입니다. 사도는 1장 16절 17절에서 이를 장엄하게 기록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 그렇습니까? <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더러 스스로 구원하라는 권고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방도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이것이 구약성서에서 발견하지 못하는새로움입니다! 죄사함이 여기도 있지만, 하나님의 의 완전한 현시(顯示)는 새롭고 유일무이하며 특별하여서 복음을 복음되게 만듭니다.

        친구들이여! 복음이 참으로 우리에게 이런 의미로 다가옵니까? 복음이 가장 위대한 최고의 기쁜 소식이라고 지금-여기에서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그리스도人인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이 지금까지 이 세상에 도달한, 또는 인간이 받은 최대의 기쁜 소식이란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면, 이는 당신이 죄에 대해 부적절한 감각을 가졌거나 자기의 죄인됨을 충분하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자기의 현재상태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선한 사람이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그들은 도움을 필요로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 스릴을 느끼지 못하며 복음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데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을 들자면 우리의 죄인됨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일 것입니다. 만일 당신에게 기쁨이 부족하다면 성서를 펼치고 율법을 읽으며 당신의 죄인됨을 보십시오. 기쁨을 향한 순전한[궁극적인] 길은 항상 죄의 심연(深淵)을 경유합니다 (The positive road to joy is always via the depth of sin).(6)

        기뻐함이 결여되는 또다른 이유는 우리가 죄의 결과[대가]를 깨닫는 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옥과 영원한 형벌을 믿지 않는 현대 철학이나 사고 방식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으로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다 괜찮을 것이라고 한다거나, 사는 동안의 제한적인 고통이 마침내 은혜롭게 종결되는 죽음 후에는, 우리 영혼이 소멸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어서 모든 일이 상대적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죄를 응징하는 믿음에서 떨어져 복음의 기쁜 소식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원의 위대함 자체를 깨닫는 데 실패하기 때문에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원을 단순한 용서만으로 보는 경향을 말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지옥 형벌을 벗어나기 위해 용서를 구하지만, 용서를 받았다고 느낀 다음에는 그걸로 만족합니다. 우리는 그 기쁜 소식의 높이와 깊이, 그리고 광대하고 심오한 구원의 모든 위대함을 놓쳐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복음의 위대함과 영광스러움을 강조하려는 게 분명합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도는 그들이 복음의 위대함을 알기 원합니다. 사도는 그들이 이미 신도임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복음을 움켜잡아 터득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팬을 들어 사도의 권위로서 영감을 받아 복음의 충만함과 웅대함을 들어내어 그들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복음! 우리가 얼마나 손쉽게 사용하는 말입니까! 경박하게 청산유수로 얼마나 자주 입에 담는지!

        복음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 행하신 일입니다. 구원에 관한 하나임의 일입니다. 사도는 "내가 인간의 철학에 대해 논하려는 게 아니다. 당신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의 의견을 피력하려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걸 알려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이미 행하셨는가 선포하기 위함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기쁜 소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신약성서에는 복음에 대한 여러 표현이 있습니다. ‘평안의 복음’(7)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8) ‘구원의 복음’(9) ‘영원한 복음’(10)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 만큼이나 사도 바울에 의해 지속적으로 쓰여진 복음의 정의(定義)는 없습니다. 사도는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특별히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근본적이며 절대적 핵심인 복음의 정수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길 간구합니다. 사도는 성삼위(the blessed Holy Trinity)의 위대한 핵심 교리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들어 보십시오. <바울은... 택정함을 입었으니 Paul... separated (KJV)> 그는 계속 말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괄호로 묶을 수 있는 2절을 넘어 3절로 가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성령님]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11) 이것이 사도가 <택정함을 입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복음은 일(the work)입니다. 특별한 일입니다. 세 위격(the three Persons)이 행하신 영광스런 일입니다. 복음에는 세 위격의 한분 한분이 참여하여 함께 일하셨습니다.

        사도는 성령님의 감화와 인도와 영감 아래에서 로마서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렇게 쓴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도는 뭔가 빠뜨리지 않으려고 의례적으로 성삼위의 교리를 쓴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성삼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관점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므로 강조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성부 하나님만이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대화해 보면 그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하고 복음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복음이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어보면 그들의 대답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빠졌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죄의 용서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언급 없이 대화를 끝맺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깁니다. 그들은 성자 하나님을 떠난 어떤 부류의 기독교를 가진 듯합니다.

        타고난 신비주의자들(12)에게는 특이한 위험이 존재해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 전부를 가질 수 있음을 믿는다고 하며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려고 합니다. 거기까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런게 가능하다며 신비주의자들이 갖는 그 '생각'의 문제점은,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 그걸 추구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신비주의 안내서를 가지고 관상(觀想)(13)의 최종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영혼의 암울한 밤'을 통과하는 수행을 한다고 합니다. 이는 신비주의자들이 지속적으로 당면하는 위험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안으로 기울여서(turn in) 스스로를 고찰하여(examine) 자아를 관조(look)함으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 즉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걸 가르치는 책들이 많습니다. 어떤 책은 아주 유명합니다. 40여년 전에 In Tune with the Infinite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유행했습니다. 그 책은 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 당신에게 하나님을 직접 체험시켜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성부 하나님만 있는 복음은 위험합니다.

        한편, 성부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성자 하나님에게만 전적인 강조점을 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일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는 인상을 주려는 정도에 까지 나아갑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께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탄원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성자께서 하나님 존전에 나아가 "제가 인간들을 위해 죽었고 그들을 값주고 샀습니다"라고 말하며 인간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아들로 묘사합니다. 그들에게는 기독교가 성자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성부께서는 간여하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의 탄원을 마지못해 들어주시는 듯한 하나님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이 두번째 위험입니다.

        셋째 위험은 전체의 강조점을 성령님께만 두려는 경향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길을 잃고 정도에서 벗어나 오류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14)이고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15)신다니얼마나 위안이 되는지요! 만일 그가 우리 안에서 일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미혹되어 길을 잃어서, 어떤 사람은 성부만, 어떤 사람은 성자만, 어떤 사람은 성령만에 빠져버릴 것입니다. 성령 제일주의 무리들은 체험과 능력(power)을 구합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성령님에 관한 교리에 몰두합니다. 여기에는 아주 미묘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예전에 제가 그곳에 한동안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위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속죄(贖罪 the atonement)의 절대적 필요를 숙지하는 일이 없이도 중생(重生 regeneration)의 교리에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영국에는 그런 사례들이 여럿 있습니다. 거듭남(re-birth), 거듭난 존재(being born again), 중생,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에 대하여 상당히 바르고 건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속죄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새 생명과 새 능력의 필요에 대해서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제공되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를 우회하여 체험과 능력에 직접 달려갑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갈보리 십자가를 그냥 지나쳐 갑니다. 대속(代贖)(16)의 필요를 보지 않습니다. 여기엔 아주 미묘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매우 조심하지 않는 한 우리가 길을 잃고 빠지기 쉬운 세가지 오류와 위험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 하나 하나가 잘못 되었지만, 아시다시피, 각각이 약간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이 위험한 이유는 바로 거기 있습니다. 부분적 진리를 부풀려서 진리의 전부인 마냥 떠들어대는 일 보다 더 위험스런 일이 없습니다. 그들 세 부류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그들이 말하는 데까지는 꽤 타당합니다. 그러나 동등하게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을 말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구원은 성삼위(the blessed Holy Trinity) 안의 세 격(the three Persons)이 행하신 일입니다.

        구원은 성부께서 주도적으로 행하신 일로서 그의 아들에 관한 <하나님의 복음> 입니다. 성부가 첫째입니다. 복음은 성부께서 계획하셨고 성부께서 작정하셨으며 성부께서 시작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복음에 관하여 처음 언약하신 분도 성부이십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성부께서 주도하신 일에 대하여 명확하게 하기 전까지는 성자께서 행하신 일과 성령께서 행하신 일과 그가 지금도 여전히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고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걸 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구절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성부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씀의 순서에 유의하십시오. 구원은 하나님이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걸 시작하셨습니다. 그가 장본인으로서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1) thing itself; Ding an sich 物자체 - 칸트
        (2) 使者 herald; ‘선포하는 자’ 단3:4
        (3) 롬5:20 came in by the side <새번역>; 로이드존스가 원문 παρεισηλθεν을 풀이해 사용했다. ‘들어온’ <개정>
        (4) afterthought
        (5) the old dispensation 
        (6) [철학] positive 실증적인; opp. negative - Positive and Negative Liberty: Negative liberty is the absence of obstacles, barriers or constraints. - 칸트
        (7) the gospel of peace 엡6:15; 롬10:15 ‘좋은 소식’ <개정> ‘기쁜 소식’ <새번역>
        (8)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God 막1:14; the gospel of the kingdom ‘천국 복음’ 마4:23; 9:35; 24:14
        (9) the gospel of the salvation 엡1:13
        (10) the everlasting gospel 계14:6
        (11) KJV을 보면 God - Son of God - the spirit of holiness [the Holy Spirit] 순서가 분명하다. 그리고 [the Holy Spirit]은 로이드존스가 써 넣은 것이다.
        (12) natural mystics
        (13) contemplation
        (14) his workmanship 엡2:10 <새번역>
        (15) 빌1:6
        (16) substitutionary atonement
        출처: 바른 번역/하윌라 님

        다음은 로마서 강해 한글판 제 7 (서문강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07 2월 초판 3) 8장을 새로 번역한 내용입니다. 흠정역(KJV) 로마서 1 3절의 ‘made of the seed of David’라는 말씀에 대한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강해입니다.

         

        pp126-130 요약

        '하나님의 복음'(1)'아들에 관한 것 (concerning his Son)'입니다. 그를 떠나서는 복음이 없고 기쁜 소식도 없습니다. 기쁜 소식은 그 위격(Person) 안에 있습니다. 복음은 그가 와서 하려고 했던 일로서 실행되었으며 완수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포하는 그 위격에 관한 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분이 영원하고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강력히 주장해야 합니다. 그는 신격(神格 divinity)에 도달한 인간이 아닙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었고 아들입니다. 그는 어느 누구도 호칭될 수 없는 방식으로 '그의 아들 (His Son)'이라고 불립니다. '아버지의 독생자'(2)는 신약성서에 쓰인 그에 대한 다른 호칭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낳은 바'(3) 되었습니다. '독생'(4)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그만이 속하는(class) 범주(category) 안에 존재합니다. 마가복음에서의 마가와 같이(5) 사도 바울은 성부와 하나이고 영존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에 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압축된 교리로 로마서를 시작합니다. 물론 사도 요한은 그만의 스타일로 시작하지만 내용은 같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1)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에 관한 일은 다른 모든 것들과 차별되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pp130-131 완역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시작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우리에게 아들에 관한 두개의 상반된 진술을 제시하며 그의 주장을 증명합니다. 이 진술은 기독교 메시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로서 모든 교리를 추론해 내는 사실과 계시의 기독교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진술을 매우 주의하여 관찰해야 합니다. 사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중요한 의미를 나타냅니다. 사도는 그가 말하려는 모든 것에 어떤 특정한 의미를 덧붙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두개의 진술에서 아주 상반된 대조를 발견합니다. 자 보십시오! 복음이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어떻습니까? 사도는 3절에서 그 아들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6)에서 나셨다 He was made of the seed of David, according to the flesh' 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그분이 다윗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declared to be the Son of God'라고 합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는 말씀은 '육신으로는'과 대비됩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선포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완벽하게 요약된 기독교 교리의 개요를 아주 눈부시고 놀라운 방식으로 대하게 됩니다. 복음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복음은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난제나 체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과 관련하여 행하신 일의 위대한 선포요 공표입니다. 그 아들은 성부 하나님과 거기 함께 있었고, 영원에서부터 '아버지 품 속에 있는',(7) 시초가 없는, 아버지와 같이 영존하는 분입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말입니까? 첫번째로 일어난 일은, 사도에 따르면, 그 아들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다(was made)'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나오는 단어 하나 하나가 대단히 중요하고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임을 여러분께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이 구절은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습니다.' 그 아들이 영원에서부터 아버지 품 속에 항상 계셨다는 논쟁점을(8) 사도가 어떻게 증명하는지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사도는 '나셨다(was made)'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것을 부분적으로 증명합니다.

        그러면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 말을 '~되셨다(became)'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가 되셨다.' 그는 ~이셨다. 그는 ~이 되셨다.(9) 특별한 차이가 있습니까? 원하신다면 또 다른 방식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나셨다 made'로 헬라어에서 한글[영어]로 번역된 말은 '~이기 시작했다 began to be' 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다윗의 씨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윗의 씨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10)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습니다.' 사실 이 말을 '존재(存在)로 출현(出現)하였다 to come into existence' 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존재로 출현하셨습니다. 사도는 이제 동일한  표현으로 앞서 말한 논쟁점을 단번에 증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토록 계셨(was)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그 전에 있던 무엇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11) 그가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아니고, 또는 그가 그때서야 존재로 출현(出現)하게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He began to be something that He was not before -- not that He has begun to be, or that He has now come into existence.(12)
        <!--[if !supportLineBreakNewLine]-->
        <!--[endif]-->

        (1) 1:1

        (2) [the] only begotten of [the] Father(1:14)

        (3) begotten (3:22 난외 주; 1:5에서 시2:7 칠십인역을 인용했음)

        (4) the only begotten (μονογενησ) 신양성서에서 1:14; 1:18; 3:16; 3:18; 요일4:9 다섯 번 사용. 11:17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를 표현. H.C.G. Moule "begetting은 시간과 관계 없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아들이 되어진(become)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영원한 아들(Son)이다. 그 위격(Person)은 모든 신성을 가졌다. 필연적으로 영존하는 존재로서 그 분은 아버지(Father) (after)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또한 '아버지 품 속에 있는' (1:18)과 관련하여, 구약성서에 쓰인 'only son (?????? yachid)' (22:2,12)는 성부와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밀함을 나타낸다.

        (5)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1)

        (6) seed는 로이드존스가 사용하는 KJV의 용어이다. 한글 개정역 난외주에 헬라어로 ''라고 한다고 밝혀있다. 개정역에는 '혈통'으로, 새번역과 NRSV에는후손으로 옮겨졌다.

        (7) 1:18

        (8) 초대교회 당시 Ebionites (Jewish Christian Adoptionist)의 주장으로서, 누가복음 난외주에 나온 You are my Son. Today I have begotten you.를 근거로,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양자로 입적하셔서 비로서 성자 하나님이 되셨다는 설이다. 니케아 공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9) He was.-He became.

        (10) He was not that. He began to be that.

        (11) 현재완료가 아니라 과거형으로 쓰였음. 어떤 시점에서 일어난 일.

        (12) 기존 한글판에는 "다윗의 씨가 되셨다"라고 번역했는데, 문제는 ''가 아니라 made of의 시제(時制)이로이드 존스는 made of를 설명하기 위해 became began to be came into existence를 소개하는데기존 한글판은 각각 되셨다양태로 존재하기(취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존재케 되셨다'로 번역하였다. '양태로 취하기 시작했다'는 번역은 특히 부적절하다.

        로이드 존스의 made of에 대한 해석의 중심은 그 동사의 시제에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시점이 다윗의 후손인 요셉과 정혼한 동정녀 마리아에게 (실제로 이 지구상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나신 기원전 4년 쯤의 그때가 아니라,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영원에서부터 영존하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는, ,  예수님은 그 전에 있었던 무엇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아니고, 또는 그가 그때서야 존재로 출현하게 되기 시작한다는 것도 아니다. 로이드존스는 시제를 병렬로 대비하여, 그러니까 과거형과 현재완료형을 대비시켜 이점을 지적했다.

        출처: 바른 번역/하윌라 님


        무엇보다도 ‘주님’을 구하십시오! - 로이드 존스

        사도 바울에 따르면 무엇보다 좋은 방식은 그
        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개괄적으로 말한 방식입니다.
        12장의 마지막
        절을 살펴보십시요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성경의 어떤 구절
        도 바로 이것만큼 더 자주 오용되고 잘못 해석된 것은 없습
        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을 소멸하는 자들은 이것을 사용하
        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
        게 보이리라 너희는 은사에 대해 말하거나 관심을 갖지 말
        라. 은사는 괜찮은 것이다. 그러나 별로 필요가 없다. 은혜
        ... 에 충만하라.” 그들은 이 구절의 흠정역 성경에 그들의 가
        르침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올바르지 못합니다. 흠정역 성경은 “그러나
        내가 제일 좋은 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하나, 그렇게
        번역해야 할 아무런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원문에
        는 비교급은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번역되어
        야 할 방식은 “또한 내가 한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것이 전부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
        다. “게다가 내가 좋은 것을 따라 한 길을 보이리라.”

        이것을 통해 바울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요? 저는 찰스
        핫지(Charles Hodge)가 이것을 이렇게 해석한 것에 동의
        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은사
        들을 얻기 위하여 지극히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것은 은사들을 멸시하고 약화시키
        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정확히 반대됩니다. 이것은
        그것을 의미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14장 서두
        에서 주제를 다시 채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랑을 따라
        구하라 그리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는
        영적인 은사와 은혜를 대조하지 않습니다. 아니오. 절대로!
        그는 “만일 여러분이 진정으로 은사를 원한다면, 은혜를 구
        하라”고 말합니다. 은사를 얻는 최상의 방식은 주님의 사랑
        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사랑을 주님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사랑
        으로 충만하면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
        이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를 얻는 지극히 좋은 길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신약성경의 가르침이며 수세기를
        통하여 온 성도들의 방식이었습니다. 은사를 직접적으로
        구하지 말며 간접적으로 구하십시오. 그를 구하십시오! 그
        의 사랑을 구하십시오! 그의 영광을 구하십시오! 그에 대한
        지식을 구하십시오! 그를 입증하고 증거하기위한 권능을
        구하십시오! 그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십시오. 그러면 여
        러분은 은사를 얻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것은 이렇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수도 있으나, 여러
        분이 사람이 없으므로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방언을 말할 수 있으나, 아
        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여러분은 이것을 직접적으로 구해왔습니다.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
        도 아니요.” 이것은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처방은 - 그를 구하십시오! 그의 사랑을, 그
        의 생명을, 여러분의 존재의 근원인 그를 알기를, 그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은사를
        받을 것입니다. 은사들에 관하여 항상 말하지 마십시오. 은
        사들에 관한 집회를 갖지 마십시오. 절대로! 주님에 관한
        집회를 가지십시오. 그에 관해서 선포하십시오! 그의 신격
        의 영광과 신적인 구원과 그가 행하신 모든 것을 선포하십
        시오. 그를 선포하십시오! 그를 구하십시오! 그를 사랑하십
        시오! 그러면 그는 여러분에게 은사를 주어 그의 증인이 되
        게 하며 그의 영광을 찬양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주권적 사역 - 로이드 존스

        성령은 여러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 로이드 존스

        사도는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라
        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에 대적자는 더욱 기습을
        가하여 쳐들어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에 관해 분명히
        해봅시다. 우리는 매우 열정적으로 은사를 구하고 사모하
        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
        는 것입니다. 은사를 구하는데 잘못된 의도도 있습니다. 저
        는 이제 이것들 중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은사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만일 우리
        ... 가 이것을 교회의 덕을 세우기보다는 이기적인 동기나 단
        순히 우리 자신을 놓이려는 욕망으로 구한다면 우리는 이
        미 잘못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 첫 번째 질문을 함으로써 시작해
        야만 합니다. “나는 왜 이 은사를 사모하는가? 나의 동기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러면 여러분은 이것이 여러분에게 도
        움을 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흥분되는 체험이나 스릴을 맛보기 위하여 구합니까? 여러
        분은 이미 잘못되었습니다. 성령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
        화롭게 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동기는 주를 더욱 알아가는 것
        과 그에게 영광과 찬양을 돌리도록 사역하기 위한 것이어
        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동기를 담사했으므로 저는, 최근에 제가 읽은 어
        떤 가르침을 들고자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는 가장 빠른 방
        식은 방언을 받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들은 “만일 여러분이 성령세례를 원한다면 방언부터 시
        작하십시오. 그러면 분명히 여러분을 성령세례로 인도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방언의 은사도 성령의 나타남의 하나이
        라는 신약성경의 전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방언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을 여러분이 소유했다면
        방언의 은사는 그것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됩니다. 이것은
        물론, 지나친 열심이며 사람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끌어드
        리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습니까? 사도와 120여
        성도는 다락방에 함께 모여 기도했으며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그들이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먼
        저 성령세례를 받았고 그 후에 방언을 시작했습니다. 그리
        고 이것은 성경의 다른 예들도 모두 동일합니다. 그러나 새
        로운 가르침은 방언부터 시작한다고 말하며 방언은 가장
        쉽고 간단한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방언을 통하여 여러분
        이 성령의 세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더 이
        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이해의 부족
        이요, 육신이 개입하여 우리가 성령 자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제시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있
        어서는, 우리 스스로 성령의 은사를 산출하거나 유발시키
        는 것보다 더 위험하고 잘못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
        시 한번,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벗어난다는 사실을 믿
        고 싶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것은 현재에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성령이 자신의 사역을 할 수 있
        도록 도와주려는 시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이 우리
        에게 주어졌으며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
        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이도 아닌 주님 홀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협력을 필요로 하지 않고 성령 또한 우리의 어
        떠한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도우
        려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어려움을 자처하고 있는 것입니
        다.

        예를 들어,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는 방식에 관하여,
        현재에 잘 알려진 가르침을 취해보십시오. 여기 우리네 그
        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증거 하기 위하여 하
        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야만 하는 최상의 것과 성령세례
        를 받기를 열망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받지 못했다
        고 느낄 때 우리는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아주 간
        단합니다. 성령세례를 받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에게 필요
        한 모든 것은 집회 후에 남아 있으면 됩니다”라는 말을 듣
        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의자에 앉아 할 수 있는 한 긴장
        을 풀고 여러분의 몸을 편안하게 합니다. 그 후에 우리는
        우리 주님이 다락방에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제자들에게
        불어 넣으셨다는 것과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
        들 듣습니다. 이제 이 가르침의 다음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
        다. “이제 주님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불어 넣으신 것을 기
        억하십시오. 성령세례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자 이것이 여
        러분이 해야하는 모든 것입니다. - 이렇게 이완된 상태에
        서, 깊게 호흡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동안
        여러분은 성령의 세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쉬고, 깊게 들이 마시고 ... 계속해서 그렇게 하십시오. 여러
        분이 그렇게 하는 동안 여러분은 성령을 여러분 속에 호흡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가르쳐졌습니다! 신약성경의 어디에서 이것
        과 일치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형
        제들이여, 이것은 단순한 심리학적 가르침이며 암시작용일
        뿐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심리학적인 방식이며, 여러분
        도 심리학자들이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텔레비전에서
        인도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세상이 조롱하는 가
        운데, 비난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공격을 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러한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의 가르침에 있습
        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이 가르침이 단순히 비성경적
        일 뿐 아니라,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순전
        히 육신적인 것임을 밝히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긴장을 풀
        고 깊게 호흡하라거나 어떤 것을 행하라는 것을 들었던 사
        람을 신약성경 어디에서 발견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발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하나
        님께 기도할 때, 갑자기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는 것입
        니다. 고넬료의 집안 사람들이 앉아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
        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에게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심리학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따르는 순진한 사
        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있는 것
        이라는 분별없이 추측합니다. 그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
        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최면에 걸리거나 자신들을 최면
        을 시키고 있고 혹은, 정신착란의 상태에 빠져있는 것입니
        다. 제가 이미 일렀듯이 강신술이 할 수 있는 것처럼, 심리
        학적 조건은 이런 현상들을 산출해 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성령을 돕기 위하여 어떤 것을 행하기 시작하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기독교인의 삶에서 열 수 있는 어떤 것보다
        가장 위험한 문을 열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또다른 동일한 예증을 들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저
        에게 찾아와 그가 기도하는 동안 성령이 갑자기 임해서 그
        가 자신 밖으로 들어 올려져서 자신이 이상한 방언을 말하
        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그의 삶에서 특별한 경험에 관하
        여 말했을 때, 만일 그가 이것은 그에게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거나, 이것은 매우 희귀하게만 일어났다고 말한다면
        , 저는 기꺼이 그를 믿고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진실한 체험으로써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와 같은 어떤 것에 대해 읽을 때(저는 가끔
        여러 저널들에서 그러한 것을 읽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다
        른 입장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입니다. 방언
        을 말하고자 합니까? “좋아요.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은 이것
        입니다. 여러분의 턱과 혀를 맡기고 움직여 보십시오.” 형
        제들이여, 이것은 웃기는 문제가 아니라 매우 진지한 것입
        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러면 소리를 내기 시작하십시오.
        어떤 종류의 소리든지 지각이나 의미가 그 안에 있듣지 없
        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서 그 자체로 주어진 어
        떠한 소리든지 내십시오. 그리고 이것을 계속 하십시오. 만
        일 여러분이 이것을 계속해서 하신다면 여러분은 스스로가
        방언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에 대한 단순한 답변은 여러분은 아마 그러할 수 있을 것입
        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과 결코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
        야만 한다는 어떤 암시라도 신약성경에 있습니까? 신약성
        경에서 일어난 것은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고서, 자신이 방
        언을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방언은 분명
        히 성령의 은사이며, 성령은 능력이 충만한 분입니다. 그는
        여러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에
        서는 필요로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최면에 걸리기를 원한
        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포기하고 내던지며, 자율적인 방식
        으로 움직이도록 하고, 여러분이 하라고 들은 것처럼 해야
        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정확히 이 사람들이 가르치고 있
        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동기에 관해서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들은 정직하고 그들의 동기는 선하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은 단순히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아
        마도 그들 자신을 심리학자들의 손 외에도 심지어 악령들
        의 손에 맡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어떤 것도
        행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은 이 은사들을 “그 뜻대로 각 사
        람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사도는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
        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
        전 12“1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누군가에게 선
        물을 주려 한다면, 저는 그에게 어떤 도움도 원하지 않습니
        다. 그런데 이것을 - 마치 성령은 결정할 수도 본질적으로
        그리고, 그 스스로 행할 수도 없다는 듯이-사람들이 행하도
        록 가르침을 받고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없습니다!

        성령의 주권적 사역 - 로이드 존스
        개혁주의마을/Grace 님

        우리 모두가 기뻐해야 하고 하나님을찬양할 이유가 되는 연합의 결과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끝없는 주제입니까? 이것이 언제나 신자들을 향한 설교의 주제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자와 주님의 연합의 결과에 대한 설교를 들어 보기가 얼마나 힘든지요.

        이 주제는 두 가지 주요 항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여러분은 이 위대한 주제에 대해 객관적으로 또는 주관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사한 용어들을 말씀드겠습니다. 객관적이라는 말 옆에는 ´언약적´이라는 말을 주관적이라는 말 옆에는 ´영적´이라는 말을 놓아 보십시오. 지금은 몇 가지 제목만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화 교리를 다룰 때 그 중 일부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필연적으로 어떤 의미기 있는 것인지 조금만 알아보도록 합시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언약적이고 객관적인 면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저는 심지어 계속해서 객관적인 면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싶은 생각까지 듭니다. 언제나 주관적인 것보다 객관적인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관적인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의 느낌을 원하며 그런 느낌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 근거들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감정이 사라지면 우리도 불행해지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우리가 객관적인 진리에 근거해서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연합으로 인해 우리의 경험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는 몇 가지 일이 생겨나고 이 일들은 우리의 지위 상태 신분에 영향을 줍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로마서 5장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용어입니다 본질상 우리 모두는 아담에게 언약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만드셨습니다. 그는 언약의 머리입니다.

        미합중국의 예를 들어 봅시다 그 나라는 여러 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주는 자신들의 주 의회-어떤 의미에서는 주 정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하여 이 모든 주를 포함하는 연방 정부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모든 주는 연방적 연합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는 모든 인류가 아담과 이와 같은 언약적 연합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이미 알고 있듯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담에게 언약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법적인 의미에서 그가 행한 것은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아담이 범죄했기에 우리도 범죄했습니다. 그가 타락했기에 우리도 타락했습니다 이것이 원죄와 원죄책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한 편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똑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가르침 사이의 대응관계를 인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6장 6절을 주관적으로 혹은 경험적 의미에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객관적 의미입니다.

        내가 언약적으로 그리스도와 결합했기 때문에 그가 못박혔을 때 나도 못박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을 진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기십니다.

        로마서 6장 5절에는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6장 8절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6: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 11절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 모든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 해당됩니다. 이 언약적 관계로 인해 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믿어야 합니다. 아담이 죄를 범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나도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엇고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을 보십시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말하는 바는 비록 우리가 여전히 땅 위에 있지만 언약적으로 그리고 이 관계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2:10)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 역시 분명히 언약적 진술 법적 혹은 법정적 진술입니다. 이 모든 일이 당황스럽게 여겨지는 분이 아무도 없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지금 여러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들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저는 여러분과 나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용어들로 인해 주저앉지 마십시오. 이것들은 성경의 진술입니다. 물론 이 용어들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가치 있는 것은 모두 어려운 법입니다. 어렵다고 해서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앉아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집니다. 다시 한 번 들어 보십시오 바울은 고리도전서 1장 3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이 일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물론 이 일이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면에서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칭의에서 바로 영화로 넘어가 부르심 받은 사람들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합은 파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습니다. 이 가르침이 정말로 말해 주고 있는 사실은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우리의 연합으로 인해 나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으로 강조해야 할 사항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연합은 인치심을 통해 발생하지만 둘은 분리되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결합되었기 때문에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에 나는 그분이 한량없이 받으신 성령을 받습니다.

        이 연합의 그 다음 결과는 우리가 양자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별도의 교리이며 나중에 다룰 것입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양자 됨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양자 됨은 연합의 결과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지막 사항입니다. 바울이 또다시 로마서 8장에서 논증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가 상속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 상속자들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영광을 받는 공동 상속자들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들이 우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인한 언약적이고 객관적인 결과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주관적이고 영적인 결과들 중 중대한 것들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교제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7장과 요한일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러라" 이것은 또한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나와 있듯이 우리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이기고 합니다. 얼마나 엄청난 개념압나까!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됩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롬8:29)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수건을 벗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물론 그리스도의 인성을 닮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이 세상에 살고 계셨을 때의 모습처럼 변화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처럼 됩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 중 맏아들입니다.

        그 결과 우리도 당연히 열매를 맺게 되고 주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5장의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마지막 사항은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그리고 심지어 그의 죽으심까지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얼마나 위대한 사상입니까! 우리는 이 일을 성취하고 곰곰히 생각하며 이 일에 대해 기도해야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감히 이 말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신자와 주님과의 연합의 교리에 대해 이보다 더 훌륭한 진술이 없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가운데 있는 자신의 고난을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과 역경의 남은 것을 채우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이것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신비적 연합의 결과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이와 같이 신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의 어떤 사람들은 주님과 주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일을 너무 깊이 묵상한 나머지 그들의 손에 못자국, 즉 성혼이 나타나기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잘 모르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와 주님 간의 이 연합에 대한 진리를 더 깊이 깨달을수록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더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사53:3)이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보시고 마음이 상하셨으며 슬픔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 및 연합을 가장 민감하게 측정핳 수 있는 기준은 우리가 이 고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영혼들´에 대해 상투적인 말을 늘어 놓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그런 말은 순전히 육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고통을 안다는 것은 언제나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죄와 그들의 상실된 상태 때문에 정말로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연합 때문에 우리는 주님처럼 영혼의 탄식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 깊은 관심과 고통 영혼의 고뇌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복되신 주님이자 구세주와 우리가 연합한 것의 주관적 결과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 성령을 통해 우리가 신자와 주님 간의 연합이라는 이 놀라운 교리에 눈을 뜨게 하소서 우리가 힘을 다해 이 연합을 상세히 연구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며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나는 그의 죽으심을 닮도록 심어졌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았습니다. 그것이 나의 상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와 연합했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입니다."라고 말하게 하소서.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교회를 위한 교훈들 [로이드존스-로마서 강해]

         

        * 교회를 위한 교훈들 (부록)


        우리는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실제적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순전히 이론적으로, 또는 이지적이고 학문적인 관심만을 가지고 성경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치명적으로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① 구약 성경의 가치의 위대함을 알아야 합니다. 

        ❶ 구약을 배척하고, 우리는 유대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여, 이제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옛 구약의 문헌과 합치시켜야 합니다. 

        ❷ 구약 성경이 우리 믿음을 받쳐주는 참으로 큰 버팀목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❸ 하나님의 뜻은 하나로서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의 뜻은 동일합니다. 

        ❹ 하나님의 방식도 언제나 동일합니다. 

        ❺ 믿음이나 교회의 교리의 영역에 있어서 어떤 난제에 부딪히게 될 때에 언제나 성령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난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② 성경은 개인적으로 적용해야 할 교훈들입니다. 

        ❶ 우리 자신의 믿음 자체를 의뢰하지 않아야 하는데, 심지어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 자체도 의뢰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 자신을 신뢰한다는 소리가 되며, 그것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으로부터 어떤 믿을 만한 요점도 없음을 강조합니다. 

        ❷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❸ 구원은 그리스도로만 말미암습니다. 

        ❹ 그 믿음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그리스도께로 연결시켜주는 하나의 통로입니다. 

        ❺ 그러나 그 믿음마저도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❻ 그리스도께로 향한 믿음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❼ 만약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의지한다면, 그것은 내 이지와 신념을 의지하는 것일 뿐 그것이 성령님께서 주시는 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❽ 만일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가 있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에 으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❾ 왜냐하면 사람의 의지나 신념은 한계가 있어서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수시로 변하며, 그것은 영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③ 우리는 각자의 선입견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기도 없이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❶ 로마서 9장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기독교회의 지체들 모두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부단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❷ 교회는 오직 하나뿐이며,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듭난” 사람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의 신령한 공동체입니다. 

        ❸ 만일 교회가 배고의 상태에 처하는 것을 보더라도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 전체가 다 잘못되어 나갈 수도 있지만, 우리는 교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판단 아래 자신을 항상 놓아야 합니다. 

        ❹ 그러나 기독교회의 장래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❺ 많은 세력이 배교의 상태에 빠져 있고 남은 자가 너무나 연약하고 작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❻ 우리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교회의 순결성만을 추구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향하여 “개”로 취급했던 것과 똑 같은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❼ 우리는 하나님의 부흥이 예기치 않은 장소와 예기치 않는 사람에 의해서 임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거짓선지자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장21절).

        주님은 15-16절에서와 본 장 말미에까지 한 가지 큰 원리, 한 가지 큰 메시지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주님은 단 한 가지, 좁은 문으로 들어감의 중요성과 우리가 참으로 좁은 길을 따라 걷고 있는가를 확실히 할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13-14절 말씀에 대한 일종의 강화인 것입니다. 13-14절에서는 초대 또는 권면의 형식으로, 우리가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계속해서 걸어 가야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것을 정교화(精巧化)하여 세부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 일을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주쳐 오는 위험과 장애와 방해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내 중요한 이 원리, 즉 복음은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 끝나거나, 찬양을 받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적용되어야 할 것임을 계속 강조하고 계십니다. 야고보가 표현한 대로, 저 완전한 율법의 거울을 끈기 있게 바라보고 그것을 기억하고 실천에 옮기는 대신, 그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서 우리가 본 바를 즉시 잊어버리는 것에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께서 산상설교 말미까지 줄곧 강조하신 주제입니다. 우선 주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마주쳐 오는 두 가지 특정 위험의 형태로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은 이 위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으며, 이 위험들을 알아본 후에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를 처리하시고 나서 주님은 논증의 끝을 맺으시며, 두 집(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의 관점에서 명료하고 단도직입적이며, 꾸미지 않은 그대로의 진실로 나타내시고 산상설교를 끝맺으셨습니다. 그러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주제요, 포괄적 진술 속에 들어 있는 공통점은, 심판의 사실에 관한 무서운 경고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7장을 일관하는 주제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일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난제와 문제의 대부분의 원인은 이것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너무나 일반화된 경박하고 피상적인 복음전도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들 대다수에게 있어 성결과 성화된 삶이 부족함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이 우리 위에 계심과 우리 모두 최후 심판의 방향으로 착실하고 확실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이것을 계속 반복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이것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긴 하셨지만, 내내 심판의 사실과 심판의 성격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피상적인 검토나 단순히 외부적인 것들을 검토하는 것이 아니요, 마음을 탐사하고 전 성품을 검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은 심판의 최종성과 심판에 이어올 결과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미 13절과 14절에서 어째서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인즉, 다른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이요, 이 멸망은 최종 심판 후에 불경건인에게 따라오는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에 너무 심려하신 나머지 계속해서 반복하고 계십니다. 이 점은 다시 교사로서의 그분의 방법의 완벽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반복의 중요성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둔하며, 얼마나 더딘가를 아십니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는데, 우리가 어떤 일을 안다고 생각하기가 얼마나 쉬우며,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실을 변함없이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 사활적으로 중요한 원리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가 어려운 것을 우리 모두 아는 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일들을 다시 상기시켜 주고 계신데, 무엇보다 두 특수경고를 우리 앞에 제시함으로서 그렇게 하십니다. 첫째 경고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우리 마음속에 그려보아야 할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말하자면, 이 좁은 문 밖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산상설교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권면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 중입니다. 우리 주님은 결국 ‘자, 이 지점에서 너희가 가장 주의해야 할 것 한 가지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위험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거기에 항상 있다. 그들은 항상 저 좁은 문 바로 밖에 서 있다. 그곳이 그들이 애용하는 장소이다. 만일 그들에게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면 너희는 전적으로 파멸이다. 그들은 너희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좁은 길을 걷지 못하게 설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하도록 너희를 단념시키려 애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그 특유의 교활한 유혹을 가지고 오는 거짓 선지자의 위험을 항상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즉각 이런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정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언뜻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해석은 흥미와 매혹으로 가득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에 관한 본문을 놓고 교회사상 두 해석학파로 갈라져 있습니다. 각 학파에는 교회사상 위대한 인물들이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학파는 본문이 거짓 선지자들의 교훈만을 언급하는 것이라 말하는 학파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열매는 교훈과 교리를 가리킨다. 열매는 오직 이것만을 가리킨다.’는 말을 우리는 듣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의미를 이것에만 제한시켜 풀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부류에 속하는 프로테스탄트 해석가들은 대체로 이것의 최고의 실례를 로마교회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부류는 이것과 전적으로 의견이 달랐습니다. 이 부류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 교훈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이 사람들이 어떤 유의 삶을 사는가 하는, 순전히 ‘그들의 삶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알렉산더 맥클라렌 박사와 같은 잘 알려진 해석가는 ‘본문은 이단들을 탐색해 내는 시금석이 아니요, 위선자들 특히 무의식적 위선자들의 가면을 벗겨내는 시금석’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해석을 따르는 사람이 많거니와 그의 논증인즉, 본문은 교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온통 문제되는 것은, 그들의 가르침은 옳으나 그들의 생활은 잘못되어 있고, 자기네가 위선자들임을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해석학파가 있습니다. 본문에 대하여 그들의 상이한 두 가지 해석에 마주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둘 중 어느 해석을 믿을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두 해석은 둘 다 옳은 동시에 둘 다 잘못되었으며, 잘못은 둘 중의 어느 한 해석이 바르다고 말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타협한다는 말이 아니요, 두 요소를 포함하지 않고는 본문을 만족스럽게 해석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만 교훈이 문제요, 이단적 교훈만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단의 가르침을 탐색해 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분별력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단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강단에 올라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설교를 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이적을 부인한다면, 여러분은 그가 이단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어려울 것도, 미묘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묘사하신 말씀을 보면 이것에 어려움이 있고, 이것에 미묘한 것이 있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주께서 양의 가죽을 묘사하실 때 사용하신 용어를 주목해 보십시오. 주님은 이런 유의 거짓 선지자에게 문제되는 것은, 처음에는 그가 그런 자라고 결코 상상할 수도 없다는 점을 암시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극히 미묘하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것에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서 이것을 어떻게 나타냈는지 주목하실 것입니다. “이 자들은 이단을 가만히 몰래 끌어들인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른 사람들 같아 보입니다. 그들은 양의 가죽을 입고 옵니다. 아무도 거짓된 것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런데 신구약 성경은 거짓 선지자의 이런 성격을 늘 나타내고 있습니다.

        위험한 것은 실로 그의 미묘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을 바로 해석하려면 이 특정 요소를 참작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것을 이단과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경고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편 해석에도 역시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에 어떤 극악 무도한 것이 있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행위로 나타난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미묘하지도 어렵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우리에게 오는 사람이요, 처음에는 바람직한 것을 모두 갖춘 외모로 오는 사람입니다. 그는 마음에 들고, 붙임성 있고 유쾌합니다. 그는 철저한 기독교인으로 보이며, 옳은 것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대체로 아주 옳고 참된 기독교인 교사가 마땅히 사용해야 하고, 또 사용하는 용어들을 구사합니다. 하나님을 논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논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등, 기독교인이 마땅히 해야할 말을 모두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활방식도 일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잘못된 곳이 있음을 여러분은 눈치채지 못합니다. 즉각 여러분의 주목을 끌거나 혐의를 일으키거나 눈에 거슬리게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런 사람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으며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이 사람은 가르침에서나 생활에서나 모두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뒤에 가서 보겠거니와 이 두 가지는 항상 불가분리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란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가르침과 생활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어떤 모양 어떤 형태로든 잘못이 있는 곳에는 어느 점에선가 잘못된 생활 유형으로 인도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서술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가르침에 잘못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을 대답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그 속에 ‘좁은 문’이, 그 속에 ‘좁은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그런 대로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이며, 그 거짓됨은 그들이 ‘논하는 것’에 있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황의 미묘함을 자각하는 것도 바로 이 점에서 인 것입니다. 오늘날 대다수 기독교인이 옳은 것들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활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제외시키는 사람을 색출할 수 없노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고 냉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과오란 크게 잘못된 것만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라는 관념을 우리는 아무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사람은 옳은 것들을 강조하지 않는 사람들임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본문의 거짓 선지자들을 바로 이해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그의 복음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갖고 있지를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연인에게 거슬리는 것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그는 양의 가죽을 입고 옵니다. 보기에 너무나 매력적이요, 너무나 붙임성 있고,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그는 너무나 멋지고 기분 좋게 위로가 되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며, 모든 사람이 그를 좋게 말합니다. 그는 결코 설교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이 없으며, 호되게 비판을 받는 일도 결코 없습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에게도 현대주의자들에게도 찬양을 받으며, 복음주의자들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이른바 약방의 감초 격입니다. 그에게는 ’좁은 문‘이 없으며, 그의 메시지는 ‘좁은 길’이 없으며,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없습니다.


        이상이 거짓 선지자에 대한 대략적 서술이라면 이런 질문을 던져 볼만합니다. ‘이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설교에 거슬리는 것이 조금도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고 말입니다. 그 대답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베드로후서 2장에서 어떻게 논증하고 있는가 기억하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러나 민간(구약 이스라엘 백성)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벧후2:1)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으로 돌아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기록을 읽어봐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유형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기에 항상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나 그와 같은 참 선지자가 올 때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거기 있어서 그를 문제삼고, 그를 적대하고 탄핵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무엇과 같았습니까? 그들에 대한 서술을 보기로 합시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가볍게, 피상적으로)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8:11). 거짓 선지자는 항상 매우 위로 적인, 기분 좋은 설교자입니다. 그에게 귀를 기울이면 그는 여러분에게 항상 잘못된 것이 별로 없다는 인상을 줍니다. 물론 그도 잘못이 약간은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잘못이 조금도 없다고 말할 정도로 바보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만사가 괜찮으며 잘 되어 나갈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는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말하며,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의 말을 듣지 말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는 편협된 사람이요, 이단을 추적하는 사냥꾼이요, 그는 비협조적이다. 그의 말을 듣지 말아라. 모든 것이 잘 돼 나간다.’고 말합니다.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고치며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적인 사람들에 대한 무서운 진상으로써 놀랍게도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렘5:31)란 말씀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결코 불안케 하거나 언짢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전과 같이 계속합니다. 여러분은 만사가 괜찮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좁은 문과 좁은 길이나 이런 저런 것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이렇게 양의 가죽을 쓰고 있는 거짓 선지자는 항상 속 편하게 하며, 매우 안심을 줍니다. 그는 항상 악의가 없고 기분 좋고, 항상 변함없이 매혹적이어서 마음을 끄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모양으로 정체를 들어냅니까? 전체로써 그 메시지에 교리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고 저는 말씀드립니다. 그의 메지시는 항상 모호하고 일반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교리를 특수화하여 하나 하나 상세히 열거하지를 않습니다. 그는 교리적 설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의 설교는 항상 매우 모호합니다. 그러나 ‘교리를 특수화하여 자세히 열거한다는 말은 무슨 소리이며,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어디서 들어갑니까?’라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답은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와 진노에 대해서는 매우 드물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말하나 그 밖의 일들은 말하지를 않습니다. 그는 우리들이 모두 관계를 맺고 있는 이 거룩하고 존귀한 분에 대해 설교할 때, 그 아무도 두려워 떨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가 이 진리들을 믿지 않는다고 입밖에 내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말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썽인 것은 그가 이것들을 조금도 말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그는 이런 것을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 하나만을 강조하는 데 곧 사랑입니다. 그는 성경에 두드러진 기타 진리들은 말하지를 않습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그는 분명히 잘못된 것들을 말하지 않으며, 분명히 옳고 참된 것들을 말하지 않고 피합니다. 그가 거짓 선지자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진리를 감추는 것은 철저한 이단을 전파하는 것만큼이나 괘심하고 저주받을 일입니다. 그런 가르침의 결과를 ‘노략질하는 이리’의 결과로 비유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기분 좋게 하고 붙임성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를 직면케 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결코 강조하지 않는 또 다른 교리는, 최후 심판과 버림받은 자들의 영원한 운명입니다. 지난 50-60년 동안 최후심판에 대한 설교는 많지 않았습니다. 지옥과 악한 자들의 ‘영원한 파멸’에 대한 설교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베드로후서와 같은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베드로후서의 정경성을 부정하려고 애썼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교리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장(章)은 성경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는 그토록 강하고, 그토록 폭발적입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는 거기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 산상설교에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양의 가죽을 입었으나 노략질하는 이리들인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말씀하신 이는 주님이십니다. 그들을 썩고 악한 나무로 서술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바울이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을 설교했을 때(행24:24-25)와 꼭 같이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동시에 거짓 선지자의 교훈은, 죄의 사악성과 인간 스스로의 구원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실로 죄가 있음을 믿지도 않으며, 그 사악성을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완전하다고 말하지는 않으나 죄가 그리 중대한 문제는 아니라고 암시합니다. 그는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만 개별적이거나 어떤 특정 죄에 대해서만 말할 뿐입니다. 그는 타락한 인생에 대해서나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버림받고 부패했다고 말하지를 않습니다. 그는 전 인류가 죄의 연대책임을 지게 된 것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바 ‘죄의 사악성’(롬7:13)의 교리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허물과 죄로 죽었고’, 철저히 무력하고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렇게 할 필요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런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말을 듣는 순수한 신자들이 그가 이런 것을 믿고 있는 것이라 착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런 거짓 선생들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문제는, ‘그들이 이런 것을 믿고 있는가?’입니다. 그 대답은 물론 ‘아니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것을 설교하며 가르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될 것입니다.

        그런데 속죄에는 보상적인 면이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도 ‘예수’에 대해서 말은 합니다. 그도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이 죽음에 대한 그의 견해가 어떤 것인가? 십자가에 대한 견해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이단적이며,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견해가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시험하는 시금석 하나를 소개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이것만이 죄를 위한 보상이요, 화해의 유일한 방법임을 그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 대속물로서 거기 십자가에 달리신 것, 그가 ‘나무에 달리시므로’ 그의 죄책과 죄책에 대한 형벌을 떠맡으신 것을 그가 진정 믿고 있는가?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의 죄를 처형하시지 않았다면, 존경하는 생각을 품고 말씀드리거니와 하나님이 그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라 함을 그가 믿고 있는가?

        하나님이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롬3:25-26) 하실 수 있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내심으로만 가능했던 것을 그가 믿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대속적 속죄론인가? 하고 묻는 것이 거짓 선지자를 시험하는 방법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이런 것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대해 말은 합니다. 십자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하며, 우리 주님에 대해 감상에 젖기는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십자가의 거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의 십자가 설교는 “헬라인들에게 어리석음”이 아니요, ‘유대인들에게 거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십자가를 ’그의 철학을 통해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는 십자가를 아름다운 것으로 경이로운 사랑의 철학으로, 무관심한 세상 때문에 애끓는 마음을 자아내는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는 십자가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거대하고 성스러운 계약으로 본 일이 없습니다. 이 계약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죄’가 되게 하셨고, 우리의 죄를 아들에게 지우셨던 것입니다. 그의 설교와 가르침에는 이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의 가르침이 거짓된 것도 이 때문인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어떤 의미에서든 회개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의 교훈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매우 큰문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매우 넓은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성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검은 것을 대수롭게 여길 필요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 결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무리들과 함께 달려나가고, 여러분의 이름이 기입되고 신문에 보도되는 많은 ‘결정’한 사람 중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청교도나 조지 휫필드나 기타 인물들의 전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 사람들의 전도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했고, 가끔 영혼들로 하여금 며칠, 몇 주, 몇 개월간이나 고뇌하게 했습니다. 요한 번연은 그의 「은혜가 넘치다」란 책에서 자기가 18개월 간 회개의 고통을 당한 것을 말했습니다. 오늘에는 이를 위한 여지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회개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죄책이 있고, 악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받아야 할 것과 지옥가게 되어 있는 것을 자각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죄라 불리는 이것이 여러분 속에 있음과 여러분이 그것을 제거하려 갈망하며, 어느 모양, 어느 형태로든 그것에 등을 돌릴 것을 자각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세상을 버리되, 실제생활에서는 물론 생각과 전망으로도 세상을 버리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갑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온 세상은 여러분을 바보라고 하거나 여러분이 종교광이 되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관없으며,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치료하며, 모두 괜찮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와서, 예수를 따르고, 또는 기독교인이 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좁은 문을 들어가며, 좁은 길은 걸어가야 할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는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산상설교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실천하지 않고 이 설교에 귀만 기울인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비평만 하고 실천이 없다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일어나서 심판을 선고하며 우리를 정죄할 것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성결, 성경적 성결에 관심이 없습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바리새인이 가졌던 것과 같은 성결관에 집착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네가 짓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어떤 죄들을 끄집어 내가지고 여러분이 이 죄들을 짓지 않는 한 모두 괜찮다고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오늘에도 얼마나 많습니까! 성결은 서너 가지 무엇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문제로 격하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성결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5-16)의 관점에서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이생의 자랑은 교회의 가장 큰 저주거리의 하나입니다. 거짓 가르침은 바리새적인 성결을 소원합니다. 거짓 가르침은 우리들 자신이 행하지 않기로 동의한 어떤 조목들의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조목들은 특별한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성결을 안이한 그 무엇으로 격하시켜 버렸습니다. 우리는 넓은 길로 밀려들어가 넓은 길을 실천하려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양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오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의 일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생활 유형을 항상 제의합니다. 그들은 자기 검토를 훼방놓습니다. 자기 검토에 거의 이단이라는 느낌마저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검토해 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항상 ‘예수를 바라봐야’하고, 여러분의 죄를 찾기 위해 여러분 자신을 보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검토하고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고, 우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고 한 산상설교의 이 마지막 대목을 똑바로 보라는 권면을 훼방놓습니다.

        그들은 청교도들과 18세기의 위대한 지도자들 곧 휫필드나 웨슬레나 요나단 에드워즈뿐 아니라, 잠자리에 들기 전 매일 밤 열두 가지 질문을 자문해본 성도, 요한 플렛쳐와 같은 사람들이 가르친 자기 검토와 죄의 억제 과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유쾌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이한 구원이요, 안이한 기독교 생활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지고 탄식하는 것은”(고후5:4)이라 말할 때의 기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바울이 “우리가 싸우는 것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악마의 지배와 권력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이것의 진의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필요를 보지 못하는 것은 이 문제를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온통 안이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공격하는 이런 유의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는 한 그를 형제로 여기고, 함께 교제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대답인즉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무섭게 쏘아보는 이 경고들이 신약성경에 들어있는 까닭은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려 온 바와 같습니다. 물론 우리가 비판적이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렇다고 친절과 정중함을 성도다움으로 오인해서도 안되겠습니다. 그것은 인격이나 개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을 멸시해서도 안되겠습니다. 사실, 알렉산더 맥클라렌 박사가 그들이 무의식적 위선자들이라고 한말은 옳습니다.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고, 붙임성 없고 유쾌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대하기가 기분 좋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그들의 가장 위험한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을 위험의 근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주님에 의하면 우리는 이것에 항상 직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는데도 거짓 선지자는 멸망을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고찰해 온 바로 이것이 오늘의 교회상태라 말한다면 지나친 말이겠습니까? 교회가 어째서 이처럼 허약하고, 무능하며 무력해졌습니까? 그 원인은 지난 세기의 고등비평운동의 결과로 온 설교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에 저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정죄 받은 설교인 것입니다. 그 옹호자들은 도덕과 일반적인 정신앙양을 설교했습니다. 그들은 설교의 실례를 문학과 시에서 끄집어 내왔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을 운운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운운합니다. 그래도 그들이 명백한 이단으로 인정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는 데 절대 중요한 기타의 사항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막연한 메시지만 전했습니다. 그들은 인기감식력에 딱 들어맞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너무나도 많이 보고 있는 텅 빈 교회들과 저질의 기독교 생활이 온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우리들 대다수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입맛 떨어지고 불쾌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나는 정직히 고백합니다.

        만일 내가 이처럼 산상설교를 설교하기로 서약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말씀들을 설교 본문으로 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전에는 이것에 대해 설교한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그렇게 한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이 설교를 좋아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설교는 비위에 거슬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만을 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말씀하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을 심판과 멸망의 문맥 속에 집어넣으신 이는 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 이단 사냥꾼으로 알려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또는 자기 형제들과 다른 모든 사람 위에 심판자로 앉아있는 괴짜요, 괴팍한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을 무릅쓰고, 정직하게 성경을 풀이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불멸의 영혼과 이 영원한 운명을 평가하고 값을 매길 때, 여러분은 하나님 존전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기를 간곡히 권면하는 바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장21절).

        http://cafe.daum.net/ciak/6KEc/543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변하지 않는 성도는 가짜이다"라고 소리높여 외치던 로이드 존스 목사의 마지막 설교중에서 입니다.

        기독교는 여러분과저의 작은 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무엇을 행하느냐와 행하지 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다른사람보다 얼마나 더 나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이전 보다 얼마나 더 나아졌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절대 그런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요.
        그러면 그분의 흠없고 완전한 의가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믿으면 그분의 의가 여러분에게 주어지고 여러분은 그분의 의를 덧입게 될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나 저것을 행하려 하고 있습니까?
        그 모든것은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모든것은 여러분에게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중단하십시요.
        이것들은 절대로 여러분을 그어디로도 인도하지 못할것입니다.
        더 멀리가기전에 멈추십시요.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나가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해 보십시요.
        그러나 그순간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가엽고 비참한 사람이 될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거기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가장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될것입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을 뿐입니다.
        그 은혜의 십자가,영광의 십자가를 만인이 본받아야 하는 아름다운것으로 변질시키지 마십시요.

        성경어디에서도 언급하지 않는 인간의 가능성이나 하나님의 위한 사역이라는 말로 포장된 거짓복음에 대하여 가르치기를 중단하고 성경에서 계시되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의한 값없고 완전,완벽한 은혜에 대하여서 만이 선포되어지기를 바란다.


        아멘넷/게시판

        성경교리를 절대적으로 알아야만 하는 이유(마틴 로이드존스)

         

        왜 우리는 성경교리를 공부해야 하는가?

         

        지금까지의 내용이 우리가 앞으로 교리를 고찰해 나가려는 방법의 대략적인 정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요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왜 우리는 이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믿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제가 제시하려는 몇 가지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성경 자체가 교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관심은 특정한 진리들을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하는 것인데, 그 진리들이란 교리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다는 말은 교리에 대해 숙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 자신이 그 교리를 이해하기 원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성경을 대단히 잘 알 수 있으나, 그 교리들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한다면, 성경에 대한 내 지식은 내게 전혀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해볼까요. 그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한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에 대해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던가요? 선지자들은 교리를, 특히 율법에 대한 교리를 붙잡고 있었으며 그 교리들을 역설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민족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백성아! 너희는 율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율법이 너희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 사실을 너희는 이해하고 깨달아야만 한다.” 선지자들은 백성에게 교리를 설교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 스스로도 이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산상설교에서 정말로 하셨던 일이 바로 이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27~28)

        주님은 율법을 취하사 그것을 교리의 형태로 해설하셨습니다. 주님은 교리를 설명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저 율법을 일반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원리들을 뽑아내서는 그것을 적용하고 시행하셨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사도들이 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고 초대 그리스도인 설교자들의 설교를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들은 본문을 취해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그 본문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시하고 분석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설교하는 방식은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메시지가 있었고 그것을 백성에게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교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바로 설교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설교의 목적과 기능입니다. 설교는 단순히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기회가 아닙니다. 거듭 말하건대설교는 그저 성경 구절의 다른 번역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의 목적은 진리를 회중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설교의 본질적인 역할, 그것을 행했습니다.

         

        신약 서신서들을 예로 들어 봅시다. 서신서는 무엇입니까? 이 서신서들에서는 몇몇 위대한 교리를 강조하고 역설하고 있습니다.특정한 교회들에는 특별히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신서 저자들은 교리를 취해 그것을 실제적인 방식으로 적용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언제나 교리를 표현하고 설명하는 데 관심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일을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저는 성경이 그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 자체가 그렇게 하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 말하곤 합니다! 우리 주님 당시 유대인들의 진짜 문제는 그들이 문자에만 얽매여서 그 정신은 결코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교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을(words) 안다는 데 만족하여 말씀(word)은 결코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대인의 상황에 우리 모두도 처할 수 있다는 위험한 가능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문자에만 얽매인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자에 얽매이는 것은우리 영혼을 저주받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나서도 교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연구가 전혀 유익이 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연구가 대단히 지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성경교리를 연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수십 세기동안 교회가 언제나 성경 교리들을 강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해 왔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장 초창기부터 온갖 희생을 치르고 예수가 주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교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교리적 진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례형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를 받고자 하는 지망생들은 교리 문답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몇 가지 질문을 받았으며,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시지요? 금세 이단들이 일어나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상당히 진실하고 진지하긴 했으나, 옳지 않고 해로운 것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단 교사들과 거짓 교사들은 교회 내에 혼란을 야기했을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도 잘못 인도했습니다. 교회 내에 이교가 발흥함에 따라 초대 교회는 우리가 보통 신경이라고 부르는 것, 예를 들면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등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너무 많은 오류와 이단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그런 신경들은 필수적인 것이 되었으며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믿지 않는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성경을 펼쳐서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완벽하게 진지하고 진실한 사람들도 성경을 읽고 나서 상당히 잘못된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리를 규정해야 합니다..”

         

        교리들에 대한 정의들을 우리는 신경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어떤 의미에서 하나였던 교회가 동방 교회와 서방교회 둘로 나뉘어졌습니다.하지만 교리는 대체로 동일했습니다. 교회가 죽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세 개의 위대한 신경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개신교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새 생명, 새로운 활력, 새로운 이해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교회는 교리를 정리하는 것과 그것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진술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도 간에 흔히 위대한 신앙고백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 교리들을 함께 열거하고 해설해 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 지도자들은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성경을 펼쳐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들은 길을 잃기 쉽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믿지 않는지를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교회에 대해, 그 외 다른 것들에 대해 말해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교회에는 [39개 신조]라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또한 유럽 대륙에도 많은 유명한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모라비아 교회의 신조와 개혁 교회의 신조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17세기 웨스트민스터에서 작성되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교회와 전 세계 모든 곳에 있는 장로교회 신앙고백입니다.

         

        이 모든 신앙고백들 및 그에 수반되는 교리 문답들은 교회 안의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하고, 그 믿음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도록 하기 위해 성경 교리를 진술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를 믿음 안에서 든든히 세우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교회의 초기 시절에 이 모든 것이 필요했다면, 종교개혁 시절과 17세기에 이것이 필요했다면, 분명 그것은 지금 현재 이 순간에도 긴급하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 교회는 사이비 종교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러분의 문 앞에 와서, 그들 말로는 “성경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르치는 성경을 자기들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을 하는 순간, 여러분은 본능적으로 뭐가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만, 그들에게 대답을 제대로 하지는 못합니다.

         

        성경교리를 연구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함께 그런 가르침들에서 잘못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성경이 정말로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알게 되면 우리에게 제시되는 다른 모든 가르침을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 주변에만 이 모든 오류와 사이비 종교의식들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바로 교회 안에도 심각한 혼란이 있습니다. 교리가 존재하지 않고, 분명한 정의가 없으며, 누구든 자기 좋은 대로 말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교리를 함께 고찰해 보는 일이 지금보다 더 긴급하게 필요한 때는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토대에 서 있는지 알아야 하며,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오는 모든 원수, 모든 교활한 원수, 우리의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오는 마귀가 사용하는 모든 계략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 교리를 여러분과 함께 고찰해 보아야 할 더 고상한 이유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교리 공부는 하나님을 참으로 알며,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에 들어가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길이 얼마나 경이로운가를 어느 정도 알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속 성경을 읽고 연구하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세부적인 것들에 매여 헤매지 마십시오. 이 위대하고도 강력한, 교리의 최고봉들을 뽑아내어,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합시다. 우리는 하나님 아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배입니다. 성경에 고찰은 언제나 예배이며, 성경과 그 가르침에 대하여 다른 교과서들에 대해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말합니다. “신학 대학들이 대체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내가 아는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신학대학에 들어갈 때는 멀쩡했는데, 졸업하고 나올 때 모습을 좀 보세요!” 그것이 언제나 사실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 말이 간혹 사실이라면 제가 여러분에게 그렇게 된 이유를 말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의 사람들은 성경을 마치 하나의 교과서인 양 접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너무 자주 이 위대한 교리를 마치 그것이 인간의 사상과 아이디어인 것처럼 접근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예배와 경외하는 마음으로 교리를 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번역과 지적 지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교리는 연구 주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교리를 알기를 소망해야 하지만 그 이유는 그것을 배운 후 그 지식으로 교만해지거나 지적 흥분을 느끼려는 것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더 온전한 방식으로 바라보게 됨으로 인해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과 경배로 더 가까이 나아가자고 하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시고, 이 교리들로 인해 우리 모두가 소생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또한 우리 및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모든 교회가 소생하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다시 한 번 목도하기를 소망합니다.

         

        ‘로이드존스 교리강좌시리즈’(부흥과 개혁사 역간)

        1권‘1장 교리공부의 목적과 방법’중에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dpq2;7)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엡2/7) 로이드존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서론 : 우리는 삶을 살아나갈 때 이런 저런 일로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당할 때 너무나 쉽게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하고 원망하기가 쉽습니다. 사실 우리의 고통의 대부분은 너무나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가를 설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인식한다면 우리의 자세와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
        나님께서 왜 우리를 위하여 이 큰 일을 하셨습니까?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1.1 구원의 제일되는 목적과 의도와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만천하에 보여줍니다.

        1.2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에만 생각을 집중합니다. 그러나 이제 눈을 돌려 객관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보고 세계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인류에 죄라는 것이 들어와서 이 세상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변하였는지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하여, 또 우리 불쌍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1.3 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공할 일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훨씬 더 중대한 문제입니다. 거기에는 영생과 영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죄악의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2.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냄



        2.1 구원은 그 밖에 다른 것을 행할 수 없는 특수한 방식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성품을 변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우게 됩니다. 만일 이러한 일이 없었다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온유, 사랑, 자비, 긍휼)을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2.2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우리는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구원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그 놀라운 품성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에 대한 온갖 오해와 편견들을 말끔히 제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3.1 하나님은 이 위대한 이 장엄한 일을 우리를 방편으로 해서 우리를 통하셔 맨 먼저 행하십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기 위해서" 하셨습니다.

        3.2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구성원들 한 사람 한사람에게 놀랍고 풍성한 은혜를 베푸셔서 그것이 계계승승 이어지기를 소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불러모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3.3 요한계시록에 보면 요한이 환상 중에 어린 양 곁에 서 있는 흰옷 입은 무리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입니다. 이들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이렇게 큰 무리가 모이게 된데는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목적은 나를 구원하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본성을 나타내고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먼저 부름 받고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크시고 위대하신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구원받는 허다한 무리들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크게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로이드존스설교요약/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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