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필요성(아더 핑크)



중생의 필요성(아더 핑크)


 인간은 본래 타락한 자들이기 때문에 중생이 필요하다.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선한 것에는 부적당하게 되었다. 

죄악 중에 출생하고 죄 중에 잉태되었기 때문에(시 51:5), 

인간은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사 48:8)이다. 

“그들은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한다.”(시 58:3) 

그리고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창 8:21) 

인간은 교양이 있고 교육받고 세련되었고 종교적이기조차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였다.(렘 17: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악하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 7:18) 

인간이 거듭나기 전에는 

그들은 모두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자들이다.(딛 1:16)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선한 것에는 부적당하게 되었다. 

죄악 중에 출생하고 죄 중에 잉태되었기 때문에(시 51:5), 

인간은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이다.(사 48:8) 

“그들은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한다”(시 58:3) 

그리고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창 8:21) 

인간은 교양이 있고 교육을 받았고 세련되었고 종교적이기 조차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였다.(렘 17:9)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악하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 7:18) 

인간이 거듭나기 전에는 

그들은 모두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이다.(딛 1:16)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선한 일을 자발적으로 할 수 없게 되었다. 

타락한 상태에서의 모든 의지의 동기는 

올바른 원리를 따르지 못하고 올바른 목적을 향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죄악일 뿐이다. 

인간을 제멋대로 놔두고 율법과 질서가 부여한 모든 제한을 풀어놓는다면, 

거의 모든 설교자들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급속히 짐승보다 못한 수준으로 타락하게 된다. 

그는 선한 일에는 부적당하고, 기꺼이 하려고 들지도 않을뿐더러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자신의 이상에 들어맞는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아래로 잡아끌고 악으로 향하게 하는, 

즉 그것을 이기려고 애써 대항한다 해도 

여러 형태를 취해, 다소간에 자신을 정복하고 마는 이상한 힘이 자신 안에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친구들의 친절한 경고와 하나님의 종들의 충성스러운 경고, 

고통과 슬픔에 대한 엄숙한 실례들, 여기저기 놓여 있는 질병과 죽음 

그리고 자신의 양심의 호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굴복해 버리고 만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8)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기 전에 

그 사람 안에는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이 땅에는 저주가 내려져 있기 때문에 

땅이 인간의 타락 이전의 상태와 같이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려면 

완전히 변화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일반적인 죄악에 붙잡혀 있는 인간도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기 위해서”는 새롭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롬 7:4) 

그는 다른 줄기에 접붙여지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그의 부활의 능력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도 그가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열매는 아니다. 

영적인 행동의 원리를 갖지 않은 이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겠는가? 

영적인 생명을 갖지 않은 이가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겠는가? 

잔인하고 악마같은 본성을 가진 이가 어떻게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할 수가 있겠는가? 

 

 

 인간의 전적 부패 때문에 중생이 필요하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다 타락한 자들이고 

인간의 존재의 모든 부분은 죄로 인해 오염되어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렘 17:9) 

그의 마음은 사탄에 의해 혼미케 되었고(고후 4:4) 

죄로 어두워졌으므로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다.(창 6:5) 

그의 성향은 변절되어 버려서 

그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한다. 

인간은 타락한 피조물이다. 

그것은 몇 개의 잎사귀가 시들어 버린 것이 아니라 

나무 전체와 뿌리와 가지까지 썩어 버린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 안에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다. 

근본적이라는 단어는 ‘뿌리’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왔으므로, 

우리가 인간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할 때, 

인간 안에는 그의 존재의 근원과 기질 안에

본래부터 부패되고 원래 악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그 열매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죄가 흘러나오는 뿌리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 안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당연히 더 높은 곳으로부터의 능력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만이 인간을 재창조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요 3:7)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고 무가치한 존재이지만 

전능하신 능력이 그를 살릴 수 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롬 5:12)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먹었던 날에 그는 영적으로 죽었다.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영적인 생명을 소유한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후손들은 

자연히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상태로 태어나게 되며(엡 4:18) 

“허물과 죄로 죽었다”(엡 2:1) 

이것은 단순한 말의 비유가 아니라 엄숙한 사실이다. 

모든 아이는 영적인 생명의 불꽃을 단 한 줄도 받지 못하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영적인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의 왕국(롬 14:17)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그곳에 맞는 상태로 태어나야 한다. 

만일 주님의 백성과 이 세상사람 사이에 아주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지니신 영광을 어떻게 상상이나 하며 

어떤 영광을 그리스도에게 드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두 집단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즉 양과 염소가 본성이 서로 다른 것처럼 

모든 차이가 생기게 하는 원천인 본성이나 기질의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그들을 구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모든 중보적인 사역은 이 한 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다. 

주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임무는 

그의 백성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또한 하나님께로 데려오는 것이다. 

그의 예언자로서의 임무는 

그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고 

그의 왕으로서의 임무는 

그들로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과 거룩한 대화와 교제를 나누기에 합당하게 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격들을 주고 

아름다움을 그들에게 나눠주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셨다.”(딛 2:14)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고전 6:9) 

그러나 많은 이들이 미혹받았고 

특히 바로 이점에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 문제에 있어서 미혹을 받았다. 

하나님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고 경고하셨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신에 신앙을 고백하는 수천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는 헛되고 거만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제멋대로의 그리고 자신만을 즐겁게 하는 삶을 계속하면서, 

자비를 기대하며 미혹당하고 있다. 

그들은 매일매일 지옥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천국에 합당한 자라는 환상에 빠진다. 

그가 자기 백성을 죄 가운데서(in)가 아니라 

그들의 죄로부터(from) 구원하실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마 1:21), 

이것은 그들을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과 오염에서도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시 36:2)라는 이 엄숙한 말씀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고 있는가? 

사단이 주로 사용하는 책략은, 

사람들이 세상과 하나님을 성공적으로 조화시킬 수 있고 

성령에 따르면서도 육적인 일을 허용하여 ‘두 세계를 잘 조화시킬’ 수 있다는 상상에 

사람들을 빠뜨려 미혹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다”(마 6:24)라고 

분명히 선언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찌르는 이 말씀의 참된 뜻을 오해한다. 

즉 정말로 강조된 점은 ‘둘’이 아니라 

‘섬긴다’는 데에, 즉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섬김을 받기를”, 즉 두려워하고 복종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생활의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도 감찰하신다.(삼상 12:24-25을 보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 

 

 

 인간이 하나님께 부적합하기 때문에 중생이 필요하다. 


인간이 영적인 본성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영적 세계에 참여할 수 없다. 

이 영적 본성만이 영적 세계에 속한 일들을 즐길 수 있는 적성과 자격을 부여해 준다. 

그런데 자연인은 이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깨닫지”도 못한다.(고전 2:14) 

그는 그것들을 사랑하지도 바라지도 않는다.(요 3:19) 

또한 의지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노예가 되었으므로(엡 2:2,3) 

그것들을 바랄수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이 영적 세계에 들어갈 수 있기 위해서는 

그의 지식이 초자연적으로 계몽되고 

그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그의 의지는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죄인이 중생하기 전까지는 

그 죄인과 함께 한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에는 접촉점이 있을 수 없다. 

어떤 중요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 않은 두 개의 집단은 법적으로 서로 연합할 수 없다. 

본성에 있어서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은 함께 연합되어질 수도 있지만 

서로 다른 본성은 연합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첫 번째 아담’과는 같은 본성을 가지고 서로 연합되어 있다. 

그런데 ‘마지막 아담’과는 새로운 본성이나 원리가 없이 

어찌 그와 연합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살아있는 혼으로 첫 번째 아담과 연합되어 있으므로 

살려주시는 성령에 의하여 마지막 아담과 연합되어야 한다. 

하늘의 형상이 없이는 하늘의 아담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전 15:48,49) 

우리 주님의 지체일 것 같으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머리에게 전하여진 것과 꼭 같은 

거룩의 본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눅 1:35) 

이 둘 속에는 한 ‘영’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쓰여 있다.(고전 6:17) 

그리고 다시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롬 8:9) 

생명이 없이는 그 어느 것도 다른 것과 생명의 연합을 이룰 수 없다. 

머리는 살아있는데 몸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새로워진 영이 없이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자신의 율법과 거룩함을 소유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과 같은 피조물과 교제를 나눌 수 없으며, 

인간도 자신의 타락한 본성에 뿌리박힌 반감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없다. 

그러면 인간이 본성의 철저한 변화를 겪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겠는가? 

빛과 어두움이, 그리고 살아있는 하나님과 죽은 심령이 어떻게 교제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이 의합치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는가?”(암 3:3)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나 인간은 죄를 사랑한다. 

하나님은 거룩함을 사랑하시나 인간은 그것을 미워한다. 

죄로 인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되었다.(엡 4:18)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생명이 회복되어져야 한다. 

이전 것은 지나가야 하고 이제 모두 새로워져야 한다.(고후 5:17) 

복음적 의무는 중생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첫째 내용은 자아를 부인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기”(딤후 3:2) 때문에 

타락한 인간본성으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영이 새로워지기 전까지는 자기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언약은 

“내가 그들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다”(겔 11:19)

모든 복음적 의무는 마음의 유연성과 부드러움을 요구한다. 

교만은 마귀를 정죄하는 정죄(딤전 3:6)이며 

우리의 첫 조상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창 3:5) 부푼 욕망 때문에 타락하였다. 

그 때 이후로 인간은 

더욱 높아지고 싶어 하고 너무나 고집이 세고 

복음이 요구하고 있는 요소들이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복음적 의무를 수행할 수 없다. 


복음이 주요 목표로 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영광되이 하는 것을 다 물리치고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하게 하는 것이다.(고전 1:29-31) 

그러나 이것은 은총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새롭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녹아지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다시 만들어질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새로운 본성이 없이는 우리는 복음이 요구하는 의무를 계속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롬 8:5) 

그런 마음은 영적인 일에 오랫동안 종사할 수 없다. 

양심의 가책, 지옥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시적으로는 영향을 끼칠 수 있으나 

그것들이 지속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돌밭도 싹을 낼 수는 있으나 뿌리가 없으므로 곧 말라 버린다.(마 13장) 

돌을 하늘 높이 던질 수도 있으나 결국 그것은 땅에 떨어진다. 
자연인은 한동안 종교적인 열정에서 높게까지 올라갈지도 모르지만 

이스라엘에 대해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이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시 78:37)라고 말한 바와 같이, 

그에 대해서도 조만간 그런 평가가 있게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성령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은 육으로 끝나고 만다.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에만 그 일은 지속될 것이다.(전 3:14, 빌1:6) 

중생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것과 같이 

하늘의 영광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도 반드시 중생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그들의 힘과 신선함은 바로 그 중생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노쇠하였거나 연약한 사람은 그 약속된 땅에 한 사람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즉 애굽의 본성을 가지고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과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고통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양파와 마늘을 그리워하는 자들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어버리고 말았다. 

오직 어려운 난관에 부딪쳤을 때 그들을 격려하던 두 첩자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옛사람을 보유하고 있고 종의 집에서 태어난 사람은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지만 

오직 새로 태어난 피조물만은 하늘의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다. 

하늘은 불결한 자가 아니라 거룩하게 된 자가 받을 기업이다. 

“그들이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되리라”(행 26:18) 

율법 아래 있었던 제사장은 자신을 성결케 하지 않고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고 

사람들 또한 성결케 되어지지 않고는 예배하는 무리 속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또한 예수님의 피로 뿌려지지 않고는 

그 어느 누구도 지성소에 접근할 수가 없다.(히 10:22) 

천국은 준비된 자에게 예비된 장소이다. 

그리스도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셨다.(요 14:2) 

누구를 위해서인가? 

주를 좇기 위해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을 위해서이다.(마 19:27)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고전 2:9)를 위해서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영적인 일들의 무한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깨닫는다. 

그리고 영적인 일들을 진실로 사랑하는 그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크게 여기지 않는다.(빌 3:8) 

하나님은 그의 가장 큰 행복이 되었고 

하나님의 뜻이 그 자신의 유일한 규칙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는 일이 그의 주요 목적이 된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는 영혼의 기질 그 자체가 변한 것이다. 

인간이 하늘나라를 준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 

중생한 자들에 대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고 쓰여 있다. 

어느 누구도 거룩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룩한 자들의 기업이기 때문이다. 

하늘은 빛 안에 있는 기업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둠의 권세 아래에 있는 한 그 기업에 적합하지 않다. 

그리스도 자신도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후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영광을 얻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고 

또한 우리도 죄에서 부활되지 않고서는 하늘에 들어갈 수가 없다.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생해야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와 아주 친밀한 교제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과 같이 우리의 허물을 없애는 것이다.(사 44:22) 

왜냐하면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사 58:2)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요한복음 3:36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기뻐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으려면 “청결한 마음”이 없어서는 안된다. 

이 ‘청결한 마음’은 죄로부터 깨끗하여지고 그 앞에 거룩한 목표를 가지게 된 마음이다. 

‘청결한’ 마음은 ‘거룩함의 아름다움’에 이끌리고 위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불완전한 거룩함을 참지 못하시며

그 불완전한 거룩함을 불필요한 “엄격함” 또는 청교도적 광신이라고 꾸짖으시는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얼굴은 의로운 중에만 볼 수 있다.(시 17:15)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어떤 사람도 그 자신 안에 근본적인 변화, 

즉 죄로부터 거룩함에로의 변화를 겪지 않고는 

하나님과 함께 살 수도 없고 

영원히 하나님의 존전에서 행복할 수도 없다. 

이 변화는 타락하게 되었을 때처럼, 
바로 우리 존재의 근원에까지 이르러 

우리 존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만 한다. 

즉 우리 마음의 어두움을 벗겨내고, 

양심을 일깨우고 

평화롭게 하며, 

우리의 감정을 영적이게 하고, 

의지를 변화시키며, 

우리의 전 삶을 개혁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 큰 변화는 바로 이 땅에서 일어나야 한다. 

영혼이 하늘로 옮겨진다고 해서 중생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장소가 하나님의 형상을 전해주는 것은 아니다. 

천사들이 타락하였을 때, 그들은 하늘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의 영광이 그들을 회복시키지는 않았다. 

사단은 하늘에 들어갔었지만(욥 2:1) 아무 변화도 겪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한 영혼이 하늘나라에 합당해지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그 영혼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셔야 한다. 

육체가 하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변화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도 변화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이든지 속된 것은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기”(계 21:27) 때문이다. 

그런데 사악한 자들은 주제넘게도 천국에 가기를 원하면서도 

이 땅에서는 그 거룩함을 멸시하고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주민들은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함을 분명히 보게 되며 

그와 지극히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들의 내적인 존재(외적인 생활 뿐만 아니라)가 

근본적이고 혁명적이며 초자연적인 변화를 겪지 않고는 

이것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에게 여기 이 지상에서 

자신의 삶의 최고의 자리를 내어주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거처를 준비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잠 1:26)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서 찬미의 가락을 울리기에 합당하도록 

이 지상에서도 찬미로 가득차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과 행복을 (마치 죄와 비참을 그렇게 하셨듯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하셨기 때문에 그것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중생하지 않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곳이 양심의 채찍질과 하나님의 거룩함의 고통스러운 불로부터 피할 수 있는 

은신처는 되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먼저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은 (행 26:18)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죄의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는 (미 7:19) 

하나님이 그들의 허물을 없이 하신다. 

죄를 용서하고 마음을 청결히 하는 것은 

구세주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처럼(요 19:34)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하늘에 합당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 그 곳을 위한 한 자격이 되듯이, 

심령으로 새롭게 되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엡 4:23-24)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죄인은 용서함을 받음으로 

왕의 존전에 서서 그의 식탁에서 시중들 수 있는 자격은 얻을 수 있으나 

그의 악취나고 해충이 득실거리는 옷을 벗어버릴 때까지 

그에 합당한 존재는 되지 못한다. 

자신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죄는 하나님이 용서하셨다고 상상하는 것은 

치명적인 위험이며 위험한 가정인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을 증거해 주는 것은 

바로 “중생의 씻음”(딛 3:5-7)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 구원받은 자 안에 내주(內住)하신다.(갈 2:20) 

그러나 그가 영적으로는 

냉담하고 완고하고 생명이 없는 채로 남아 있는 마음 속에 

거하시는 일은 불가능하다. 

거룩함의 최고의 모범이신 이가 방종한 자의 후원자가 되실 수는 없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어떤 사람이 죄책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을 때 

그는 또한 죄의 지배로부터도 구원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영혼이 중생하기 전까지는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반드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되어야 했던 것처럼(롬 8:3)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기 전에(고전 5:21)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후 5:17)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전 1:4)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할 수 있기 전에 범사에 인간들과 같이 되심처럼 

실제적이고 크게 필요한 일이다.(히 2:14-17) 

하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고는, 그는 죄의 나라로 들어올 수가 없다. 

인간이 거듭나지 않고는 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 

즉 모든 의지의 신성한 전권대사이며 집행자인 성령의 능력이 

하나님의 성육신과 인간의 중생을 이루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죄가 될 수도 있으며 

사람들의 아들들이 의롭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시간을 죄 속에서, 즉 자신만을 즐겁게 하며 소비해 버린 사람이 

어떻게 그 지극히 거룩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오랫동안 깜깜한 어둠만을 보아왔던 눈이 

갑자기 한낮의 밝은 빛을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이 되듯이, 

중생하지 못한 자가 빛이신 자를 바라볼 때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한 광경을 환영하는 대신에, 

“땅에 있는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할 것이다”(계 1:17) 

실로 그들의 고통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그들은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고 할 것이다.(계 6:17) 

하나님이 당신을 중생시키지 않으신다면, 

바로 당신이 이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아더 핑크의 ‘구원의 교리’ 중에서


 

첨부파일 중생의 필요성.hw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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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태도/ 아더핑크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6).

이 장에서 우리가 어느 정도로 간단하게 생각할 것은 이 책의 처음에서 여러 가지 적은 구분을 하기에 숙고한 위대한 진리를 우리 자신에 실제로 적용하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 교리의 가치를 더욱 세밀하게 다룰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 하는데 대한 정의를 하려 한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진리는 다 우리에게 알릴뿐 아니라 역시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함이다.

성경은 우리의 쓸데없는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그의 통치 원리를 설명하는 추상적 법칙 ...이상의 것이니 그것은 경건의 동기를 목적했고 또 그것은 의로운 생활을 추진시키기 위한 것으로 우리에게 알려졌고 또 그것은 우리의 반역하는 마음을 복종시키기 위하여 계시되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진정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무 것도 겸손케 하지 않거나 또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겸손케 하며 또 마음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복종시키는데 따라서 우리의 의지는 버리고 주님의 뜻을 깨달아 실천하는데서 우리로 기뻐서 행하게 한다.

주님의 주권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의 통치하는 능력을 행사하는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이 책 처음에 있는 장들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주권은 신성을 의미한다. 가장 원만하고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의미하는 것은 기쁨과 맘대로 행하시는 분의 성격과 존재이다. 그런고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주권적인 그 자신을 겨눠보는 것이다. 그것은 위엄스럽게 높은데 계시는 존귀하신 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지닌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관찰은 하나님에 대한 견해에 관한 경험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가진 사람들을 알려주는 성구에서 배울 수 있다.

욥의 경험에 대하여 고찰해 본다면 주님이 친히 말씀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고 했다.

욥기 끝에서 욥이 하나님 앞에서 그를 대면하여 볼 때에 어떻게 그가 행했는가?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본다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습 곧 하나님이 놀라게 존엄하심을 계시하신 것을 볼 때에 욥이 자신을 미워했을 뿐 아니라 전능자 앞에서 자기를 낮추었다.

이사야를 보자. 이사야서 6장에서 우리에게 보여 준 광경은 성경에도 그와 같은 것이 별로 없다. 선지자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을 보았으니 그 위에 스랍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외쳐 말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했다. 선지자 위에 나타난 이 광경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그 결과는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한 말에서 나타났다. 거룩한 왕의 모습을 볼 때에 이사야는 티끌에 엎드리기 까지 겸손해지고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다시 한 번 다니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말년에 다니엘은 주님이 나타나신 것을 보았다. 그는 당신의 종에게 사람의 모양으로 세마포 옷을 입었고 또 허리에는 정금 띠를 띠었으니 곧 거룩하고 신령한 영광의 상징이다.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고 묘사했다.

그 다음에는 다니엘이 자기와 그와 함께 있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이 이상의 결과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이상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이상을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단 10:6-9)라고 하였다.

그런고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주권적 하나님의 광경은 피조물의 힘이 약해지게 함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창조주 앞에서 티끌과 같이 겸손하게 한다. 그러면 최고의 주권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될까?

1.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

이 시대에 많은 사람이 신령하고 영원한 것들에는 전연 무관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지 모른다. 전쟁터에서도 대중은 저희의 영혼 문제에 대하여는 그렇게 무관심한 태도다. 천국을 멸시하는 것이 더욱 공개적이요, 더욱 야단스럽고 더욱 대담하다. 그 이유는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8)고 하는 말씀이다.

또 근대에 와서는 성경의 권위가 그렇게도 저속해졌는가? 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일이 그렇게 적고 그의 규례들을 그렇게도 경시하여 쉽사리 내동댕이쳐 버리는지 모른다. 이 시대에는 하나님이 경외함을 받는 분이라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 1:7)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뵈었으니 망하리로다. 사람은 복되다.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하심과 그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성과 그의 완전하신 의와 그의 불가항력적 권능과 그의 주권적 은혜에 관한 이상을 본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해야 될 사람들 다만 구원받지 못한 즉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구원 받은 사람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들의 구원을 이룩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이 충분한 답변이다. 신자를 가리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으로 습관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 칭호가 거의 다 없어진 것은 다만 어디서 우리가 이탈된 것을 보여주게 할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아직도 기록되어 있는 대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라고 했다.

물론 우리가 경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이교도 사회에서 저희의 섬기는 신들을 섬길 때에 성행되는 것 같이 우리는 비굴한 경외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여호와가 축복하시로 약속하신 그 정신을 의미하는데, 그 정신은 이사야 선지자가 다음의 말씀에서 언급한 것이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여호와)가 권고하려니와”(사 66:2)라고 한 말씀이다. 이 정신은 사도 베드로가 생각한 것으로서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 2:17)고 한 말씀에서 증명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처럼 경건 사상을 길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2. 전적으로 순종하는 태도

하나님을 발견하면 자신의 미약함과 허무함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자신을 그에게 맡기는 생각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론에 의하여 경건 사상이 추진되며 그 다음에는 이것으로 인하여 순종하여 행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있는 본래의 악한 성품에 대한 신령한 해독제의 역할을 한다. 필연적으로 인생은 자기는 중요하다. 자기는 위대하다 또 자기는 자족하다는 사상으로 꽉 채워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밝힌 것과 같이 하나님의 왕권을 쳐다 볼 때에 크게 고침을 받는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진정으로 사람을 겸손케 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아니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인생은 자기를 섬기고 기쁘게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섬기고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 것이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불경건은 불순종을 낳는다. 교만한 애굽 왕이 말하기를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고 하였다.

바로에게 히브리 민족의 하나님은 단지 잡신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여 경외하거나 봉사할 필요가 없는 무능자에 불과했다. 바로가 얼마나 잘못했고 얼마나 그것 때문에 고배를 마셔야 한 것은 그는 미구에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바로가 경외심이 없는 결과로 교만하게 되었고 또 그의 불경건은 신성한 존재의 왕권과 권위에 대하여 무식한 탓이었다.

만일 불경건이 불순종을 낳는다면 진정한 경건은 순종심을 낳고 또 그것을 추진시킬 것이다. 성경은 가장 존귀한 분이 주신 계시요 그의 생각을 알게 하고 그의 뜻을 우리에게 정의해 주시는 것으로 아는 것은 실제상 경건의 첫걸음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법도를 전능자의 법도로 인정하는 것은 성경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이 무서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할 것이다. 성경은 창조주가 친히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우리 영혼에게 말하는 것으로 환영하는 것은 시편기자가 외친 것과 같이 우리도 외치게 할 것이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소서”(시 119:36,133). 한번 그 말씀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당신의 말씀에 있는 규례와 법도 가운데서 사람에게 맞는 것으로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 사람은 절대적으로 전심으로 그것에 순종하는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3. 온전히 순종하는 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은 모든 불평을 제외한다. 이것은 분명하나 그 사상은 고려할만 하다. 환란과 손실에 대하여 불평을 품는 것은 필연적이다. 우리가 마음이 끌리는 것들을 빼앗긴 때문에 불만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소유물은 무조건 내 것이라는 버릇이 있다. 우리가 어떤 계획을 잘 알고 부지런히 실천시킬 때에 성공할 수 있고 힘써서 일해서 [재산]을 저축한 때에는 그것을 보관하며 즐길 수 있고 또 우리가 행복된 가정의 분위기에서 살고 있을 때에 아무도 합법적으로 침입해서 사랑하는 식구를 구타할 수 있는 세력이 없다. 또 이러한 환경들 가운데에서 실망이나 파산이나 또 사망이 실제로 올 때에는 잘못된 인심이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반항하게 된다.

그러나 은혜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런 불평은 없고 도리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또 우리가 전연 받아야 될 환란을 받지 않게 함을 알게 된다.

참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은 하나님에게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다루실 권리가 온전히 있는 것을 공공연하게 시인할 것이다. 전능자의 뜻에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대로 우리를 대하실 절대적 권한이 그에게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만일 그가 가난이나 질병이나 가정적 사별을 보내시기로 하거나 심지어 마음이 매우 고통을 당할지라도 세상 모든 것의 심판장에게 잘못하심이 있겠는가 하고 우리는 말해야 될 것이다.

때때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은 신자들에게 육에 속한 마음이 이 세상 순례 생활의 끝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심중에 충돌이 있을지라도 참으로 이 진리에 굴복한 사람에게는 옛날 거친 게네사렛 호수에게 “잠잠하라”고 말씀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릴 것이요 또 그의 속마음에서 노도와 같은 홍수라도 잔잔해 질 것이요 또 순종하는 영혼은 눈물과 신앙으로 가득찬 눈을 들고 이르기를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순종한 사람의 놀라운 실례는 이스라엘의 제사장 엘리의 사적에 의하여 제시된다.

삼상 3장에서 알려진 대로 하나님이 소년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그는 엘리의 두 아들이 악행한 것 때문에 죽이려고 하신 것을 그에게 알리셨다. 그 다음 날에 사무엘이 이 소식을 연로한 제사장에게 전달했다. 경건한 부모의 마음에 더욱 무서운 소식이 들림에 대하여는 상상하기 곤란하다. 여하한 경우에서든지 그의 아이가 갑자기 죽을 것이라는 말은 어떤 아버지에게든지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이 젊은 나이에 전연 예기치 않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는다는 것은 반드시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비참한 소식을 사무엘에게 들었을 때에 엘리에게 어떤 영향이 미쳤는가? 그때에 그가 어떻게 대답했는가?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삼상 3:18)라고 대답했고 다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놀라운 순종이요 뛰어난 순종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힘으로 사람의 마음의 가장 강한 애정을 주관하시고 반역하는 생각을 굴복시켜서 여호와의 주권적 의지를 불평 없이 알게 하는 데에 귀한 실례이다.

똑같이 놀라운 실례가 또 하나 있으니 욥의 생활에서 그것을 보여준다. 잘 알려진 대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미워한 사람이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일찍이 하나님의 섭리가 임하기를 기대할만 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욥이었다. 얼마동안 그에게 운(運)이 터졌으니 주님이 그에게 칠남 삼녀의 대가족을 허락하셨고 그가 큰 부자가 될 때까지 이 세상 물질로 풍성하게 하셨다. 그러나 갑자기 그의 생애에 액운이 덮여졌다. 그래서 하루 사이에 욥은 재산뿐 아니라 그의 일곱 아들과 세 딸을 다 잃어버렸다. 그의 가축이 다 도둑을 맞았고 그의 자녀들은 다 큰 폭풍에 의하여 살해됐다는 비보에 접했다. 이 소식을 들을 때에 그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그의 놀라운 말을 들어 보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라고 했다.

여기에서 그는 여호와의 주장하시는 뜻에 순종했다. 이것은 곧 그가 당한 환란을 그렇게 되게 하신 분을 더듬어 찾아낸 것이다. 그는 자기의 가축을 도둑질한 스바 사람들의 배후와 그 자녀들을 죽게 한 폭풍의 배후에서 하나님의 손을 봤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그것에 또한 만족했으니 그가 말하기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했으니 이것은 놀라운 순종이요 완전한 순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을 참으로 인정하므로 우리의 모든 계획을 하나님의 뜻에 보류해두게 한다.

저자는 20세기 초에 영국에서 생긴 한 사건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이 별세하고 그의 장자 에드워드의 대관식 일자를 1902년 4월로 정했다. 이에 대하여 발송된 모든 초청장에는 즉 “D.V -Deo Volente, 하나님의 뜻이면”라는 이 두 자가 빠졌다. 이 큰 예식에 필요한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세계 각국의 군왕들은 다 이 초청을 받고 영국 왕의 대관식에 참예하려고 했다. 왕자의 선서문도 다 인쇄하여 비치해 두었다. 그러나 이 저자가 아는 대로는 이 D.V.라는 두 문자는 그 어느 한 문서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가장 훌륭한 예식 차례가 다 예비 되어서 정한 시일에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서 여왕의 장남이 대관하고 에드워드 제 7세라 칭했다. 그러나 그 후에 하나님이 간섭했으므로 사람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오히려 적은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네가 나를 생각하지 않는구나”라고 했을 때에 왕자는 맹장염으로 병석에 눕게 되니 그의 대관식은 여러 날 동안 연기되었다.

이미 설명한대로 하나님의 주권을 참으로 인정하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계획을 하나님의 뜻에 보류해 두게 된다. 그래서 거룩한 토기장이는 절대권으로 가지시고 진흙을 가지고 당신의 왕권적 임의로 그릇을 만드시는 것을 우리가 믿게 된다. 그것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 교훈에 주의하게 된다. “너희 가운데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약 4:13-14)는 교훈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순종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 살든지 저기에 살든지 내가 사는 한계를 정하신 이는 그분이시다(행 17:26). 가난하게 살든지 부하게 살든지 건강하든지 않든지 내가 살 환경도 그분이 결정하신다. 내가 들의 꽃과 같이 소년 시절에 요절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70년을 계속하여 살든지 얼마나 오래 살 것이라고 말하는 이는 그분이시다. 진정으로 이런 교훈은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학교에서 고등 교육으로 얻게 된다. 우리가 이것을 배웠다고 생각할 때에도 재삼 재사의 교훈을 다시 받지 않으면 안될 것을 발견한다.

4. 깊이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태도

마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이 가장 복된 진리를 알아보는 것은 할 수 없이 경외하는 것과 매우 질이 다르다. 이 멸망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철학에 의하면 악 조건을 잘 이용하는 것 이외에 별도리가 없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그 세계관이 훨씬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므로 우리에게 경외심과 전적 순종과 온전한 순종만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시편 기자와 함께 “내 영혼아 영호와를 찬송하라 내게 있는 모든 것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기 위함이라”라고 말하게 한다.

사도 바울도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심령 상태가 매우 자주 시험을 받는 것이 이 점이다. 우리 각자에게 자행(自行)자지(自止)-제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아니 함- 하는 일이 매우 많으니 슬픈 일이다. 모든 것이 우리의 원대로 될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매우 감사함을 돌리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이 우리의 계획과 소원에 반대로 될 때에는 어떻게 하는가?

참 신자가 기차 여행을 할 때에 그의 목적지에 도달한 후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의당 할 일로 안다(그것은 물론 그가 모든 것을 주장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기차의 기관사와 화부와 신호사 등등에도 마땅히 감사해야 된다). 또 사업에 있어서 잘 팔린 주말에 가서는 모든 좋고(세상에서) 또 모든 온전한(영계에서) 은사를 주시는 분에게 감사한다(그것은 또한 그가 모든 고객을 당신의 상점으로 인도했다는 의미이다).

여기까지는 좋고 또 그런 경우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내가 탄 기차가 연착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다른 기차와 충돌이 되어서 내가 부상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자. 또 내 사업에 수지가 없다거나 점포가 벼락을 맞아서 홀랑 타버렸다거나 도둑을 다 맞았다고 하자. 그때에는 어찌할까? 이 모든 일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을 내가 아직도 보고 있는가?

욥의 경우를 또 한 번 생각해 보자. 손해에 손해가 꼬리를 물고 그의 앞길을 가로 막을 때에 그는 어떻게 했는가? 그의 불행을 괴로워하고 있었는가? 도둑놈들을 욕하였는가? 하나님께 불평을 말했는가?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경배하고 순종하였다. 우리는 모든 것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손을 보는 것을 배울 때 까지는 진정으로 마음이 평안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반드시 계속해서 역사해야 된다.

그러면 신앙이란 무엇인가 맹목적 인정인가 치명적 묵인인가 그것과는 퍽 다르다. 신앙은 확실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말하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한다. 그러니 신앙은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는 것이다. 활동하는 신앙은 “항상 주안에서 기뻐할”것이다(빌 4:4).

이제는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인정된 것에 주의하여 보기로 하자. 그것은 경건과 전적 순종과 온전한 순종과 깊은 감사와 기쁨에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최고로 또 온전히 예시된 것을 주의해 보자. 모든 일에 있어서 주 예수님은 우리가 좇아가야 될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처음에 말한 제목과 관련하여서도 사실로 그러한가? 경건이라는 말이 그의 비할 수 없는 이름에 관련된 일이 있는가? 경건은 노예적 공포가 아니라 친속적(親屬的) 순종과 존경을 의미하며 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니" 지혜가 육신으로 탄생하신 분과 관련함에서 경건에 대하여 하등의 언급된 것이 없다면 라는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것이 아닌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고 하였다. 예수로 하여금 그의 소년 시절에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케 한 것이 경건이 아니고 무엇이었는가?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 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눅 4:16)라는 말씀에서 그가 행하신 것이 경건이 아니었는가?(하나님에게 친속적 복종과 존경).

사단이 예수를 시험하여 자기 앞에 엎드려 경배하라고 할 때에 “기록하였으되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말하게 한 것이 경건이 아닌가? 깨끗함을 받은 문둥병자에게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마 8:4)고 말씀하게 한 것이 경건이 아니었는가? 그러면 왜 실례를 더 열거할 필요가 있겠는가?(사 11:1,2).

예수께서는 성부에게 온전하게 순종하였다. 바로 하나님의 형체이신 그로 하여금 심히 낮아져서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순종하실 수 있는 위치에 처하게 하신 그 놀라운 은혜를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 온전한 종으로서 그는 당신의 아버지에게 온전하게 순종하셨다. 얼마나 온전하고 전적인 순종이었는지는 그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고 한 말씀에서 알게 된다. 이 순종의 태도에 대해서는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성자가 성부의 뜻을 절대로 순종하신 일에 대하여는 두 분은 온전히 일치하신다는 것 이외에 할 말이 없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고 하셨다. 또 그가 어떻게 그 주장을 충분히 실천하신 것은 성경에 지시된 대로 그의 자취를 주의 깊게 따르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 계신 그의 모습을 보면 성부의 손에 들려 있는 그 쓴 잔은 그의 생각을 보여 준다. 그의 태도에 잘 주의하여 보자. 마음이 겸비하신 그를 배우라.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육신 즉 온전한 사람이 되신 말씀이심을 기억하라. 그는 전신을 떨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육체적 수난을 정관하고 계시며, 그의 거룩한 성품과 육감적 성품은 그를 압박하고 있는 무서운 모욕 때문에 위축되고 있으며 그의 마음은 그에게 임할 무서운 비난 때문에 고통스러우며, 그의 생각은 어두움의 권세와 일대 충돌을 예측하므로 심히 괴로웠고 무엇보다도 최고로 그의 영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떠날 것을 생각하고 공포에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성부에게 자기의 영으로 크게 외치며, 말하자면 피땀을 흘리셨다). 오히려 벅찬 마음으로 그의 복된 입술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들어보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복종이 실천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순종하신 것이 최고로 예시되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반드시 좇아야 할 모본을 남겨 주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시험을 당하셨으나 죄는 범하시지 않고 사람의 성품을 지니신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위에서 물어본 대로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뜻에 절대로 순종하신 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더 대답한다면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는 고귀하심이 비할 데 없다.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탁월하시다. 주 예수님에게는 꺾어야 될 반역적 의지가 없으시고 그의 마음에는 복속시켜야 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예언적 언사에 있어서 그가 말씀하시기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시 22:6)라고 하시지 않았는가?(벌레에는 반발하는 힘이 없다).

그가 이르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이다”(요 11:34)라고 하실 수 있는 것은 그에게는 반발하심이 없기 때문이다. 과연 그가 말씀하시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라고 하신 것은 그가 모든 일에 있어서 성부와 온전히 합의되었기 때문이다. 위의 말씀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그의 비할 데 없는 탁월하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법을 우리 생각에 두시고 그것을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셨으나(히 8:10 참고) 그의 법이 벌써 그리스도의 심중에 있었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감사하고 기뻐하심에 대한 실례가 마태 11장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 관찰하는 요점들은 첫째로 그의 선구자의 신앙이 약함과(12,13) 다음으로 백성의 불만 즉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이나 요한의 장엄한 소식에도 만족하지 않았다(16,20). 셋째로 우리 주님이 가장 많이 역사하신 성읍들이 회개하지 않았다(21-24).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니이다”(25)라고 하셨다.

눅 10장에 있는 병행 구절은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 하사 가라사대 ……감사하나이다”라는 말씀으로 시작된 점에 주의하라. 여기에 순수하게 순복하신 것이 있다. 여기에 천지를 지으신 분이 있는데 그가 오히려 그의 낮아지신 시대와 또 버림을 받은 마당에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여 천지의 주재의 뜻에 순종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되겠는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로 한다.

5. 숭경(崇敬)하는 태도

“참된 경배는 위대성을 인정한 경배이며 위대성은 하나님의 주권에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그런고로 이외의 다른 형식으로 사람이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J.B. Moody)고 한 것은 바로 말한 것이다. 거룩하신 왕이 당신의 보좌에 앉아 있을 때에 스랍들도 “그 얼굴을 가리었다”.

하나님의 주권은 잔인하게 독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의로우시므로 불의하게 행하시지 않는다. 여기에 이 진리의 고귀성이 있다. 단순히 하나님의 뜻은 배격할 수 없고 번복할 수 없다는 사실 그 자체만도 우리에게 경외심을 채워 주시나 하나님의 뜻은 다만 착한 것만을 원하신다는 것을 인식할 때에 내 마음에는 기쁨이 차게 된다.

그렇다면 이 장에서 질문한 것에 마지막으로 대답할 것이 있다. 그 질문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우리의 태도다 어떠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맞게 취해야 된 태도는 경건과 전적 순종과 무조건 복종과 부속함이다. 그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과 주권 자체가 내 성부라고 하는 생각이 내 마음에 충만해서 나로 하여금 그 앞에 엎드려 숭경하게 한다. 언제나 우리는 "아버지여 그래도 당신이 보시기에 이것이 합당하나이다"고 해야 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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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실은 기독교계 안에 영성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가 급격하게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님의 백성들은 복음이 여전히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갖습니다. 슬프게도 이들의 낙관적인 추측은 근거가 약하며 모래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선교 홀에서 전해지고 있는 메시지를 조사해 보거나, 일반대중 가운데 뿌려진 소책자를 면밀히 검토해 보거나, 옥외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주의해서 들어 보거나, 구령 캠페인에서 전해지는 설교나 강연을 분석해 보거나, 현대의 복음주의를 성경의 저울에 무게를달아보면, 요컨대, 참된 회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없으며, 죄인이 구원자(救主 : Saviour)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본질적인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변화된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흠을 잡으려고 이 글을 쓰거나 남의 감정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함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며, 완전함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다른 이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
 

이것은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시대의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표면적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나오도록 호소하는 기초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안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거룩보다 훨씬 더 크며,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진노보다 훨씬 더 크다는 균형을 잃은 슬픈 양상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알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들이 치명적으로 빠져 있습니다.
비난받아 마땅할 자기를 드러내는 멋진 찬양, 유머 있는 익살, 재미있는 일화 등은 도입되었지만, 오직 복음만이 효과적으로 비출 수 있는 어두운 배경은 의도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심각한 것은 이러한 것이 부정적인 면의 한쪽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

더욱 심한 것은 복음이 현대의 싸구려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값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단지 죄인의 눈에 먼지를 날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의 혼은 전혀 의심받지 않고 사용되는 마귀의 마취제로 잠에 빠져 있습니다
.
오늘날 대부분의 "정통" 설교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길이 사람에게는 옳은 길로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은혜의 기적으로 간섭하지 않을 경우, 그 길을 따르는 자는 결국 그 끝이 사망의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늘(천국)을 향해 가는 중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후에 지옥에서 깨어날 때 참혹한 환멸을 갖게 될 것입니다
!
 

복음이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자를 사악함 가운데서 편하게 만드는 하늘로부터 전해진 좋은 소식인가요? 미친 듯이 쾌락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믿기만" 하면 장차 두려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을 주고자 주어진 것인가요? 혹자는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에 - 오히려 왜곡시킨 방식에 - 비추어 그렇게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회심한 자들"의 삶을 바라 볼 때,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영적 분별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를 완전히 용서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

복음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앞서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를 완화시켰다거나 그분의 거룩의 표준을 낮추셨다고 공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복음을 성경적으로 설명할 때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단호함과 그분께서 죄를 절대적으로 혐오하신다는 것에 관한 가장 확실한 실증과 가장명확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
슬프게도 육체의 자랑은 수많은 자격 없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보다 훨씬 지혜로운 자들이 지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곳을 뛰어들도록 방임합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비참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이러한 자격 없는 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교회들과 모임들이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이유는 이러한 "회심자"들로 가득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이여, 복음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결코 죄들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기 백성들의 범법으로 인한, 구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치신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공의의 검을 보여줍니다
.
복음은 율법을 무효로 하기는커녕 오히려 율법의 저주를 견디어내시는 구원자(구주)를 보여줍니다. 갈보리는 엄숙하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시간 안에서와 영원 안에서 계속 줄 것입니다.


당신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이 우상에 집착하고 그 마음이 여전히 죄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리스도를 단지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함으로 복음이 존귀하게 되거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음란한 것으로 변개시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몇몇 독자들은 앞에 기술된 우리의 "거칠고" "비평적인" 말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물을 것입니다. "영감을 받은 베드로 사도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분명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오늘날 동일하게 죄인들에게 말하는 것이 틀렸단 말인가요?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에는 신성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기 때문에 훈련받지 않은 많은 표면적인 사람들이 모두 그 말씀을 그대로 말하는 것을 옳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 16:31이 결코 어중이 떠중이 군중들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라 특정개인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 말씀은 아무에게나 전해진 메시지가 아니라 복음이 최초 전해졌던 자들과 같은 성품을 가진 자에게 전해진 특별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구절들은 절대로 왜곡되어서 안 되며, 본문에 따라 고찰하고,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듯이 숙고하고, 주의 깊게 명상하며, 시간을 드려서 연구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급변하는 시대가 만든 이러한 겉만 번지르르한 가치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1을 보십시오.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사도와 그의 동료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라고 말한 때가 언제이며 누구에게 말했는가요? 복음의 말씀이 진실로 전해진 자들의 특성을 뚜렷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일곱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이들 일곱 가지 항목들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독자들은 이 항목들을 주의 깊게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은 바로 전에 기적을 일으킨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했습니다
.
"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고 즉시 모든 문이 열리며 각 사람의 결박이 풀린지라"(16:26).


둘째, 그 결과로 그 사람은 매우 동요되어 스스로 자기 생명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
간수가 잠에서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친 줄 생각하고, 검을 뽑아 자결하려 하거늘..."(27
).
셋째, 그는 경위를 알고 싶었습니다
.
"
간수가 등불을 달라 한 후..."(29
).
넷째, 자기 만족을 누리며 살던 그의 삶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
"...
뛰어 들어가 떨면서..."(29
).
다섯째,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
"...
바울과 실라 앞에 와 엎드리고..."(29
).
여섯째, 그는 하나님의 종에게 존경과 경의를 보였습니다
.
"
그들을 데리고 나와..."(30
).
일곱째, 자신의 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었습니다
.
"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
 

우리가 기꺼이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를 가르치는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 간수는 "단순히" 믿기만 하라는 권면을 받은 경솔하고 부주의하고 무사태평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자기 안에 이미 역사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는 자입니다.
 

그의 혼은 깨어 있었습니다(27). 그 간수의 경우, 그의 잃어버린 상태를 깊이 느끼도록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상태를 분명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도들이 반드시 회개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의 완전한 태도는 그가 진정으로 회개한 자임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타락한 상태에 완전히 눈이 멀어 있고 하나님께 대하여 완전히 죽어있는 자에게 간수에게 전해진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방금 물에서 나와 후각이 없는 자의 코에 후자극제(嗅刺戟劑 : 냄새로서 각성, 자극시키는 약)를 갖다대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
독자들은 이 글의 비평을 읽고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통독하며, 과연 사도가 어중이떠중이 청중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에게 연설을 할 때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고 말한 경우가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구약 성경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신약 성경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앞서서 회개로 부르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마음에 율법이 적용되기 전까지는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되기" 때문입니다( 3:20). 미리 경작하지 않았거나 일구지 않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
 

온통 죄를 짓는 일에 몰두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을 소개하는 것은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그가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할 분의 성품과 자신에 대한 그분의 권리와 의로운 요구와, 그가 극악무도하게 그분을 무시하고 자기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이 오늘날의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 대신에 지옥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를 전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육욕과 세속적인 마음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이 조금도 없이 불호수만 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맨 처음 언급하는 곳은 "그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다가오는 진노로부터가 아니라) 그 죄들에서 구원할 것임이라"입니다(
1:21).
죄의 엄청난 가증함에 관하여 깨닫는 자, 양심에 죄의무거운 짐을 느끼는 자, 그리하여 죄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자, 죄의 무서운 지배로부터벗어나고 싶어 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구원자가 되시지만, 다른 이에게는 구원자가 되시지 않습니다
.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죄를 사랑하는 자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신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사악함을 묵과하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들을 편드는 죄의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분을 그같이 고소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신성모독인가요
?
 

만약 독자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실 때, 나는 죄의 가증함을 알지 못했고, 죄의식으로 복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즉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결코 구원받은적이 없거나, 당신이 이전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실제로는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은혜 안에서 자라감에 따라 죄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대한 반역> - 더욱 분명하게 깨닫고, 더욱 더 죄를 미워하고 죄에 대하여 슬퍼하게 됩니다. 그러나 양심이 결코 성령에 의해 찔린바 된 적이 없는 자와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적이 없는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떠한 사실의 영역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
온전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라"( 9:12).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위대한 의사에게서 치료받기를 구하는 자만이 죄로 병든 자입니다. 그러한 자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죄의 행위와 혼을 더럽히는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로부터의 구원이요, 죄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의 지배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의 교활함과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에, 복음전도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와 주된 사역은 죄에 관하여 선포하고, 죄의 열매가 아닌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죄 안에 있는 무한한 극악성을 보여주며, 마음속에서 죄의 다양한 역사를 찾아내고, 영원한 형벌이 바로 죄의 공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아, 복음전도자가 죄에 관하여 선포하는 것, 단지 죄에 관하여 상투적으로 몇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가 무엇인가를 선포하는 것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지 않고 청중들의 관심을 끌지도 않을 것입니다.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얻는 것보다 사람의 칭찬을 사랑하는 자와, 구령(救靈)보다 자기 봉급에 더 가치를 두는 자는 그에 알맞은 임기웅변의 조치를 취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의 선포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신실한 말씀을 선포함으로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 부정하게 육체와 영합하여 성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입니다
.
 

오늘날 복음전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란 용어를 잘못 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전하는 내용은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값없이 선물로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고, 단지 그리스도의 피의 무한한 공로를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개념이 지금 "정통" 기독교계에 널리 유행하고 있고, 그들의 귀가 멍하도록 자주 듣고 있으며, 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내리고 있어서, 이제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이 부적절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서 사람을 미혹하며 잘못된 것 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면, 그는 즉시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히고 행위 구원을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손상시킨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타락한 피조물이 하나님께 공로를 인정받거나 은혜를 얻을 만한 일을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을 희생하면서 까지 역사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결코 죄와 타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은 값없는 선물로서, 오직 빈손으로 받아야 하며, 여전히 세상을 굳게 쥔 손으로는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배를 채우지 못하는 돼지 먹이인 곡식 껍질로 죄인의 배를 채우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먼 나라에서 돌아서게 하셔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자기 죄들을 인정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죄인 스스로가 반드시 해야 할 행동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것들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탕자가 계속해서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죄악 가운데 있는 동안은 아버지의 입맞춤과 반지를 받을 수 없는 것 같이, 탕자가 이러한 것들을 행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단단해진 마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먼저 반드시 그 마음이 부서져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고 말합니다( 13:3). 회개도 믿음과 똑같이 구원에 필수적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 후에 회개하지도, 믿으려 하지도 아니하였음이니라."( 21:32). 모든 순서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정하셨습니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15)

회개는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으로 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버리고자 마음으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자유로이 역사합니다. 왜냐하면 거룩의 요구는 죄를 버릴 때 만족되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복음전도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합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아담 안에서 떠났던)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55:7).
 

복음전도자의 책무는 그의 청중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병기를 버리도록 요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긍휼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의 길에 대한 정의가 잘못 내려져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현대의 "복음전도자"들은 죄인이 지옥을 면하며 확실히 하늘(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회중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죄인을 완전히 잘못 인도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배척하면서 동시에 구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복음 선포자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또한 주님으로서 그분께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고 부언하기는 하지만, 회심자가 그와 같이 하지 않더라도 하늘이 확실하게 보장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즉시 그러한 말을 쓸모 없게 만듭니다. 그와 같은 주장은 마귀의 거짓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으로 눈먼 자들만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그분의 멍에를 거절하는 자도 구원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독자들이여, 그것이 은혜가 아니라 수치인 이유는 그리스도를 불법을 장려하시는 분으로 뒤집어씌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주님(Lord)의 직분으로 하나님의 영예를 유지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도우시며, 하나님의 법을 집행하고 계십니다.
만약 독자들이 두 개의호칭이 등장하는 누가복음 1:46,47, 사도행전 5:31, 베드로후서 1:11, 2:20, 3:2, 3:18을 본다면, 항상 "구주와 주님"이 아니라 "주님과 구주"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권에 복종한 적이 없고, 그분을 자신의 마음과 삶 가운데서 왕위에 앉힌 적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오른 손에 거짓을 쥐고 영존하는 타오르는 불 속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44:20). 그리스도는 "자신을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십니다( 5: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님 되심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께 대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19:14).
 

독자들이여, 잠깐 멈추고 정직하게 다음의 질문을 직시하기 바랍니다.
"
당신은 그분의 뜻에 복종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진정으로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
슬프게도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의 길"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은 거의 보편적으로 오해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이란 용어는 모든 방면에서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
 

지금 선포되고 있는 "복음"은 십중팔구 진리를 벗어났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천국)을 향하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사실은 가능한 빨리 지옥으로 서둘러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계 안에 이러한 사태는 심지어 "비관론자" "기우가 심한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쁩니다. 우리는 대언자가 아니며, 결코 대언서의 예언을 고찰하는데 깊이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필자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들이 자주 그렇게 행함으로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건대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영국에서조차 종교적인 상황은 150년 전보다 훨씬 더 나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심히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부흥을 주시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곧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짙은 어둠이 백성들을 덮을 것입니다"( 60:2). 왜냐하면 참된 복음의 빛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판단컨대 현대의 "복음주의"는 모든 "시대의 표적들"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더 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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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이 구절에서 욥은 무엇을 나타내고자 했을까요? 분명한 사실은 욥의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비유를 적용하면, 이제 자기의(自己義)로 말미암은 불신앙의 안개가 걷혔으며, 믿음이 하나님의 존재를 살아있는 영광스러운 실체로 이해하였습니다. "내 눈이 항상 주를 향함은"(시편 25:15).

욥의 믿음은 계속해서 실행 가운데 있었습니다. 성경은 모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을 보는 것 같이 하여 견디어 냈으며"라고 합니다(히 11:27).

곧, 모세의 마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점유된 믿음을 통하여 격려를 받았습니다.

성경은 자주 믿음을 육체적 시각으로 비유해서 표현합니다.

우리 주님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하여 "너희 아버지 아브라함은 나의 날 보기를 기뻐하다가, 보고 반가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56).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시고 높아지신 날을 즐거이 기다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가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하라는 사역을 위임받았습니다(행 26:18).

달리 말하면,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그들을 회심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벗어난 몇몇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바울은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인들아, 누가 너희를 미혹하여 진리에 순종치 못하게 하더냐? 너희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눈 앞에 명백히 제시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썼습니다(갈 3:1).

이제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성경기록이 믿음을 육체적 시각의 개념으로 말할 때 그 성경기록의 저자는 적절하고 적합한 비유를 이용한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기록의 저자는 처음에 놀라운 시각 기관인 눈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데 있어서 매우 주요한 역할을 하는 보이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눈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사실을 분별하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물질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영적 세계 안에 있는 어떤 위대한 실제를 희미하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점에서 얼마든지 주시하고 묵상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몸의 눈이 마음의 믿음을 상징하는 한 가지 예표로 제한해야 합니다.

1. 눈은 수동적인 기관입니다.

눈은 스스로 빛을 비추거나, 바라보는 대상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합니다. 눈이 해, 달, 별을 바라보며 무엇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나눌 수 없습니다. 눈은 아무 것도 더하지 못하며, 단지 마음 안에(망막에, 그러면 뇌에 전달됩니다.) 상(像)을 남기거나 비출 뿐입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믿음은 아무 것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안에서 붙들고 있는 것에 아무 것도 주지 못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혼의 시각에 비쳐지는 대로 단순히 받거나 또는 마음 안에 취합니다.

과연 불 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놋 뱀을 바라보고 치유되었을 때, 놋 뱀과 무엇을 나누었을까요? 우리는 아무 것도 그리스도에게 더하지 못하며, 다만 그분을 바라보며 구원을 받습니다(이사야 45:22).

2. 눈은 인도하는 기관입니다.

낮에 빛이 있을 때 눈을 뜬 사람은 자기 길을 볼 수 있으며, 눈 먼 사람이나 밤길을 걷는 사람처럼 도랑에 빠지거나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사악한 자들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들은 심지어 어디에 걸려 넘어지는지도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의인들의 행로는 빛나는 광채 같아서 점점 더 빛나 완전한 낮에 이르느니라"(잠언 4:19,18).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 관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함이라"라고 말합니다(고후 5:7).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믿음이 우리의 본(本)이신 분을 봄으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로를 달릴 수 있습니다.

3. 눈은 매우 빨리 기능을 하는 기관으로서, 아주 멀리 있는 것들도 봅니다.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땅위에 있는 것들에서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산을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땅의 것들과 가장 높이 떠 있는 별을 동시에 볼 수 있으며, 넓디넓은 온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시력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동일하게 믿음의 권능도 놀라운 것입니다.

실로 믿음이란 시각이 예민한 은혜로서, 조상들의 믿음이 행했듯이, 아주 멀리 있는 것도 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약속된 것들을 보았습니다(히 11:13).

그와 같이, 믿음은 순간적으로 영원 과거를 뒤돌아보며 땅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영존하는 근원과 그 역사를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장차 올 영원을 향해 돌아서서 휘장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감춰진 영광들을 봅니다.

4. 눈은 비록 작지만 성능이 매우 뛰어난 기관입니다.

낮에 빛이 있을 때 눈을 뜬 사람은 자기 시야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을 돌아보거나 앞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으며, 샘물을 들여다보거나 깊은 골짜기 아래의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멀리 하늘의 천체(天體)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광대한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에까지 미칩니다.

믿음은 먼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알게 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깨닫게 합니다. 믿음은 지옥을 들여다보며, 하늘들을 관통해 봅니다. 믿음은 주변 세상의 온갖 허탄한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믿음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조금 밖에 취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땅에 속한 예시가 영적인 진리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곧, 유아(乳兒)의 눈은 빛을 보고 외부의 물체를 지각하지만, 계속해서 시각이 자랄 동안에는 많은 연약함과 혼란을 겪게 됩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처음에 영적 지식의 빛은 매우 희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기는 멀리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들 안으로 더 깊게 자라게 되며, 마침내 열려진 비전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5. 눈은 매우 확신을 주는 기능입니다.

눈은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五感)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면 얼마나 확실한지요!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물을 단지 정신적인 착각이라고 확신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바른 마음을 가진 자들은 누구도 그들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서 해가 빛나는 것을 보면 낮이라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바로

그 본질에서 수많은 확신을 가져오는 은혜입니다.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서(證書)니"(히 11:1).

회의론자들은 성경에 관한 하나님의 영감을 부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그 진리의 초자연적인 아름다움들을 바라볼 때 그 문제는 영단 번에 해결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꾸며낸 한 경건한 사람으로 간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가 일단 진정으로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면, "내가 알기에 내 구속자께서 살아계시니"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6. 눈은 자취를 남기는 기관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마음에 자취를 남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종종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며"라고 기도드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며(시편 119:37),

대언자가 왜 "내 눈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하였도다"라고 선언하였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애가 3:51).

계속해서 몇 분 동안 해를 바라보면, 해로부터 눈을 돌리거나 눈을 감을지라도, 해의 자취는 눈에 남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믿음은 마음에 의(義)의 태양이신 분의 자취를 남깁니다.

"그들이 그분을 바라보고 빛을 받게 되었으며 그들의 얼굴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였도다."(시편 34:5).

고린도후서 3:18은 이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듯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나니, 곧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권능이 자기 백성들의 몸을 죽을 것에서 생명으로, 천한 것에서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지금 성령님께서는 도덕적으로 변화시키는 권능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품에 역사하고 계시며, 믿음을 실행으로 옮기심으로 자녀들이 점점 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7. 눈은 놀라운 기관입니다.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데 유능한 사람들은 이 특별한 지체가 인간의 몸 중에서 가장 기묘하고 진기한 부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창조자의 지혜와 권능의 많은 부분이 보는 기능을 형성하는 가운데 발견됩니다. 그와 같이 믿음은 영혼 안에 기묘하고 놀랍게 역사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의 지혜와 권능의 많은 부분이 새로운 피조물의 그 어느 부분보다도 믿음의은혜가 형성되는 가운데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믿음의 행위를 권능으로 성취하사"라고 말합니다(살후 1:11).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을 때 임했던 위대하고 전능하신 그 뛰어난 권능이 동일하게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 위에와 안에 역사하고 있습니다(엡 1:19).

8. 몸의 눈은 매우 예민한 기관입니다.

눈은 빨리 다치고 쉽게 해를 입습니다. 아주 작은 재 하나가 고통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눈을 회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눈물을 흘림으로 눈 안에 들어온 먼지나 티끌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믿음은 가장 섬세한 은혜로서, 깨끗한 양심 안에서 가장 잘 자랍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순수한 양심에 믿음의 신비를 간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딤전 3:9).

생기 넘치는 믿음의 역사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음 안에 들어온 죄의 먼지나 세상의 허탄한 것에 의해 쉽게 손상됩니다.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죄로 인해 상처를 입었을 경우, 스스로 경건한 슬픔의 길로 그 죄를 배출합니다.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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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가

이제 여호와께서 그의 종을 머물게 하신 그 장소를 좀 자세히 살펴봅시다. 바로 "그릿 시냇�"입니다.

아하, 그곳은 강이 아니라 시냇가였습니다. 당장이라도 물이 말라버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을, 혹은 그의 백성들까지도, 풍요와 사치가운데 두시는 경우가 매우 희귀합니다.

이세상의 것들로 포식하게 되면 그것들을 주신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의 멀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시험대에 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질적인 해를 입을 때에 나타내는 반응에서 참그리스도인과 세상적인 사람과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법입니다.

세상적인 사람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완전히 짓눌려서 자살을 감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의 전부가 사라져 버렸고 이제는 삶의 의욕이 주는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심하게 흔들리고 잠시 깊은 고뇌 속에 괴로워하지만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나의 분깃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강대신 시내를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물이 흐르지만 내일이면 말라버릴 수 있는 그런 시내 말입니다.

왜요?받는 복에 안주하지 말고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할 것을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많이 실패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 아닙니까?

선물을 주시는 분은 뒤로 제쳐두고 선물에만 마음이 빠지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강을 맡기지 않으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라고 말씀합니다(신 32:15)

이와 동일한 악한 성향이 우리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을 주시면 좋을텐데 일부러 강대신 시내를 주셔서 우리를 심하게 다루신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너무 모르고 하는 투정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를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데, 어린아이들의 손에 위험한 칼을 들려주시겠습니까?

그런데 그런곳에서 선지자가 어찌 목숨을 연명하겠습니까? 대체 어디서 음식을 구해야 합니까?

아하, 그가 쓸 것을 하나님이 직접공급하실 겁니다.

“그 시냇물을 마시라”(4절)

아합과 그의 우상숭배자들이 어찌 되든 엘리야는 망하지 않습니다.

최악의 시간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그의 강하신 능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33:16)

기약도 없이 시냇가에 거하라는 명령이 상식적으로 얼마나 어처구니없어 보이는지 모릅니다.

예 그렇습니다.하지만 이 명령을 주신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가타부타해서는 안되고 오로지 순종할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자기의 눈과 이성과 모든 현상적인 조건에 어긋나는 여호와의 조치에 순종하고, 여호와 한분을 신뢰하고 참고 그를 기다린 것입니다.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4절)

“거기서”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선지자는 몸을 숨기기에 적당한 다른 곳을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쓸 것을 공급하실 것이니 반드시 그릿 시냇가로 가야 했습니다.

그러니 내가 과연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하신(그의 말씀으로나 섭리를 통해서)곳에 있는가?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내가 거기에 있다면, 하나님이 분명 나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께 등을 돌리고 먼 나라로 가 있는 것이라면, 분명 그 탕자처럼 주리고 목마름을 당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원리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앞에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가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만나를 공급받기 위해서는 구름기둥을 따라가야 했던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물을 마시고 우리의 영적 삶이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생애 중에서 -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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