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와 CCM, 새 노래란?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전 3:12-15).


사도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려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기도 했었습니다. 열심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헤아려볼 줄 아는 명철함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 눈에는 좋게 보여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을 일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너무나 크고 많은 일을 한 것 같더라도, 나중에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 그 동안 했던 모든 수고가 완전히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변치 않고 견고하고 영원한 천국을 건설하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 값싸고 다루기 쉬운 재료를 사용하여 눈에 보기에 크고 멋있고 웅대해 보이는 건축물을 단시일 내에 만들 것이 아니라, 값비싸고 다루기 어렵더라도 진귀하고 든든하고 오래 견디는 견고한 재료들로 하나님의 집을 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거하시는 동안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신 다음 그 모인 사람들의 힘을 결집시키고 여세를 몰아 세력을 확장시키기보다는 도리어 모여오는 사람들을 피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쫓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심으로 또다시 흩어버리시고 오직 12명의 제자만 남기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앞과 뒤에서 큰 무리를 지어 따르던 사람들을 모아서 예루살렘 성을 당장 거룩한 도성으로 만들려 하지지 않으시고, 도리어 말없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따르던 사람들을 완전히 실망시켜 떠나게 만드셨고, 오직 믿음이 있는 사람만 남겨 두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자세는 우리들이 반드시 꼭 배워야 할 자세이며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음악의 적합성 여부도 이런 기준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 당장에 사람들을 많이 오게 만들고 사람들이 좋아하고, 부흥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보인다고 지금 세상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장르의 음악을 교회에서 사용하여 손쉽게 사람들을 모으려는 것은 결코 예수님과 같은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결코 사람을 모아서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큰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이면 무조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대형 교회가 된다는 것이 결코 언제나 바람직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가 명백하게 보여주는 사실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심각한 타락과 한심한 다툼은 주로 교회가 대형화 되었을 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대형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고, 인기가 좋고, 예배 분위기를 살려주고, 사람들을 많이 교회로 끌어 모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교회 음악의 적합성 여부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 말씀에 비추어 분별해 보는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음악에 대하여 많은 팽팽히 엇갈린 주장들이 오고 감으로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 비추어 과연 CCM이라고 분류되어 요즈음 예배드릴 때나 전도할 때 사용되는 계통의 음악들이 교회 음악으로 적합한지, 자녀들에게 부르게 해도 괜찮은지의 여부를 논의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중에 몇 가지 논쟁이 되는 점들을 추려서 부모님들이 알고 있어야 할 점들을 몇 회에 걸쳐서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CCM이 과연 성경에서 권하고 있는 “새 노래”에 해당되는지 살피는 일부터 시작하여, 복음전파의 수단으로 수용하는 것이 합당한지, 예배 음악으로 적합한지, 교육적 측면은 어떤지, 하나님은 CCM을 어떻게 평가하실지, CCM의 추구가 과거의 종교개혁과 같은 개혁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믿음 생활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도 검토해보고, 세상 곡조와 하나님의 말씀을 합치는 것이 합당한지도 논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또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왜 찬송을 부르라고 우리들에게 권하시는지 하나님의 의중에 대하여도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울러서 전통적인 찬송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전통적인 찬송가에 포함된 복음성가들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더구나 과거에 세상 오페라나 가곡의 곡조들이 수용된 것과 요즈음의 대중가요가 수용된 것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등등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영적으로 유익한 것을 생각해 보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유익한 것들 보다는 당장 듣기 좋고 재미있고 신나고 내 마음을 알아주고 다정다감하게 다가오는 것들을 택하는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교회음악을 선택 할 때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 듣기에 감미롭고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음악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상고하여 보고 주님으로부터 옳다고 인정함을 받은 음악을 택하는 지혜로운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적 측면에서 본 찬송가와 CCM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 지어다” 시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CCM은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새 노래”가 아닐뿐더러, 새 노래가 될 수 없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찬송가를 오래된 옛 노래, CCM은 최근에 새로 작사 작곡 되어진 노래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권하는 새 노래가 CCM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성경 말씀들 중에 똑 같이 “새”라고 번역 되지만 상당히 근본적으로 다른 두 헬라어 단어인 kainos neos의 차이점을 모르고 또한 히브리어인 chadash의 정확한 의미를 소홀히 지나쳤기 때문에 빚어진 잘못된 견해입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 성경이 말하는 새(kainos) 노래는 시간적으로 새로(neos) 만들어진 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새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kainos는 질적인 새것을 의미하고 neos는 시간적 새것을 의미하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언급하는 새 노래의 ""라는 헬라어 단어는 시간적으로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최근의 것을 의미하는 neos가 아니라, 본질과 의미에서 새로움을 뜻하는 "kainos"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담근지 얼마되지 않은 새(neos)포도주를 뜻할 때는 neos로 포도주의 상태를 표시했지만, “새(kainos) 부대", "(kainos) 계명", "(kainos) 마음"을 표현할 때는 질적으로 새로운 상태를 나타내주는 kainos라는 형용사가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새(neos)” 포도주와 “오래된” 포도주의 차이점은 오직 시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지만, “새”부대와 “낡은”부대는 시간적으로 “금방”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인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된 적이 있었는지, 아니면 없었는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부대라도 한번이라도 쓰였으면 낡은 가죽 부대가 되는 것이고, 1년 전에 만들어진 가죽부대라고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부대이면 “새(kainos)” 가죽부대가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한 번도 사용해 본 일이 없는 무덤이기에 예수님을 “새(kainos)”무덤에 두었다고 했던 것입니다. kainos란 시간과는 상관없이, 아무튼 질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하나님의 세계에 존재하는,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특질을 지닌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계명으로 주신 “서로 사랑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감정적인 사랑만 알고 있지 하나님의 세계에서 요구되는 아가페 사랑에 대하여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시면서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고 절대적 가치를 지닌 “아가페” 차원의 사랑을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존재하고 있지 않는 아가페 사랑을 높은 차원의 새(kainos)계명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kainos로써의 “새”의 의미는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면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CCM은 시간적으로는 최근에 만들어진 새(neos)노래가 될 수 있지만, 세상에서 이미 널리 유행되는 장르의 특징적 곡조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쓰기 때문에 질적으로는 새(kainos) 것이 사실상 아닙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실질적으로 금방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유행가를 부를 때마다 부르는 사람이 새로운 감동을 받게 되나요? 유행가는 노래를 부를 때에 새로운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옛 사람의 감정을 가지게 만들어 줄 뿐입니다. 대부분의 CCM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세상 유행가 풍의 멜로디에서 어떻게 질적으로 다른 새(kainos) 노래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분명히 “전통적인 찬송가”가 도리어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새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찬송가는 작곡된 시간으로 보면 옛 노래이지만, 부를 때마다 새로운 감동이 오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솟아나고, 몰랐던 것을 새롭게 깨닫는 역사가 일어나고, 식어지던 믿음이 소생함을 얻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옛 노래처럼 언뜻 들리더라도 분명히, 제대로 부르면, 부를 때마다 “새 노래”가 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히브리어로 언급되고 있는 “새(chadash)노래”도 최신 유행가의 곡조에 가사만 성경적인 것으로 대치시킨 형태의 복음성가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말의 새것을 의미하는 chadash라는 단어도 시간적인 새것을 뜻하기보다는 질적인 새것을 뜻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의 시편에 "새 노래"라고 표현된 chadash라는 히브리어도 새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하는 bariyah나 시간적으로 가까움을 의미하는 qarowb이라는 단어 대신, 질적으로 새로운 노래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chadash는 무조건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특성적으로 새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chadash)’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chadash)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전도서 기자가 말씀하신 것처럼, 해 아래에서 만들어진 것들 중에는 새(chadash)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새(chadash)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라는 말씀은 새로 작곡하여 노래하라는 뜻이 전혀 아니고, 도리어 특성상 새로운 노래, 해 아래의 세상에는 없는 노래, 즉 거룩하고 신령한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고 명하시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70역을 보면 시편에 등장하는 "새 노래"라는 단어에서 쓰인 chadash라는 히브리어들이, 예외 없이 모두, neos가 아닌 kainos라는 헬라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 생겨난 지 이미 오래된 찬송가를 부르고 있지만,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여 다시금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맛보며 뜨뜻미지근했던 마음이 활기를 찾아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면, 항상 불러오던 옛날에 만들어진 찬송곡일지라도, (chadash)노래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약에서 말하는 새(kainos)노래의 의미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독특한 음악을 주셨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라는 말씀의 뜻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는 포괄적 행동 규범 안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성경에서 신자들에게 명하신 행위 규범을 한마디로 말하면 “거룩하라”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거룩”이라는 것은 “분리된, 다른”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거룩하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과는 생각과 행동이 달라야 된다는 뜻이고 동시에 신앙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찬송가는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만들어진 곡조와 가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느 누가 들어도 무엇인가 일반적인 노래와는 다릅니다. 그런 의미로 보아도 찬송가는 거룩한 음악이며 질적으로 새로운 “새 노래”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부를 때마다 부르는 사람의 심령을 새롭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새 노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지칭하고 있는 ""노래를 새로 만들어진 CCM으로 보기보다는 세상 노래와 다르고 항상 새로운 감동을 주는 전통적 찬송가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새 노래는 새로 작곡된 CCM이 아니라, 사람의 심령을 새롭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감동 감화로 인간들에게 선물로 주셔서 오랜 세월 동안 계속해서 인간의 심령에 소생함을 주고, 잘못을 깨우쳐주고, 믿음을 일깨워 주어 왔고, 아직도 여전히 감동 감화의 역사를 일으키고 있는 전통적인 찬송가를 제외하고는 달리 “새 노래”를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는 수백 년이나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면서도 그 질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지금까지 불리워지고 있는 특별한 가치를 지닌 신령한 노래들입니다. 성경이 우리들에게 권하는 찬송은 계속해서 새로 만들어진 노래들을 부르라는 것이 아니라, 오래 되었건 새롭게 만들어졌건 상관없이, 세상에서 흔히 들을 수 있고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종류의 노래들과는 확실히 구별이 되는, 오직 하나님만 갖고 계시고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거룩하고 고상한 성품과 특질들이 확실히 포함된 곡과 가사로 만들어진 노래로 찬송을 부를 것을 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더욱 찬송가를 귀히 여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 부르게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_세 운 돌 4/14/2007_________________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잠 22:28)


Remove not the ancient landmark, which thy fathers have set.





출처: 아멘넷, 작성자/ 공부합시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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