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서 목사가 그래서야 되느냐며 한탄을 하셨다. 무슨 문제냐고 여쭈니 고향교회를 담임하시는 목사님 이야기다. 이제 40대 초반 강원도 산골에 젊은 나이에 오셔서 10여년, 그동안 고생도 많이 하셨겠지만  성도는 점점 줄고 재정도 너무 열악한데 목사님은 성도들의 영적 상태는 전혀 무관심해 보이신다는 것이다. 은퇴장로인 아버님은 몇년째 목사님과 성도들을 위해 매일 밤마다 가정에 기도 제단을 쌓고 계신다. 사모님과 두분 모두 무슨 공부를 하신다고 주중에는 집에 안계시고 그나마 계셔도 무슨 세미나다. 무슨 모임이다 매일 시내로 출타하신다. 목사님은 몇년 째 석사학위때문에 계속 학교를 다니시더니 올해엔 박사과정을 밟느라 또 학교를 가야하신단다.

늙어 글도 제대로 읽지못하시고 대부분이 문맹인 할머니들 몇명이 전부인데 왜 박사학위가 필요하냐신다. 어려운 교회재정으론 사례비는 커녕 기름값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요즘 새로 승합차를 뽑으셨다. 몇년전부턴 새벽기도도 나오지 않아서 두 노인분들만 새벽예배를 드리시다가 이젠 아예 집에서 새벽예배를 드리신다. 드리던 속회예배도 그만두어야 할 판이란다.

심방이라곤 1년에 한번있는것도 제대로 안하고 주일예배와 저녁예배 그리고 수요예배엔 컴퓨터 화면을 틀고 성경공부를 시킨다고 몇 년째 닥달을 하시는데 무슨 신학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노인분들 전부 졸고 웬 고역인지 그나마 드문 드문 나오던 젊은 분들도 나오지 않으니 성도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하시는지 모르겠단다. 목사님이 기도도 하지 않으시고 심방도 않으시고 박사학위에 몸이 단 목사님과 사모님... 늙고 병든 성도들을 위해 치유기도와 외롭고 쓸쓸한 그들을 위해 심방 한 번, 손 한번 더 잡아주는 것이 그리고 천국을 소망하도록 기도라도 해주시는 것이 시골 노인들에겐 위로요 은혜가 된다. 아무리 명 설교를 한다 한들 문맹인 그분들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남아있는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며 하소연을 하시는 아버님은 김목사는 그리하지 마시게, 그리하지 마시게 라며 신신 당부를 하신다.

그러면서 이웃 동네에 있는 교회는 목사님이 얼마나 성도들을 위하시고 챙겨주시는지 모두 다 우리 목사님 최고라고 자랑을 하며 그 깊은 시골에 멀리 도시에서 본 시골 동네 성도들 보다 더 많은 수의 성도들이 일부러 찾아온다고 한다. 그러니까 교회 재정도 넘쳐나고 목사님 말씀이 너무나도 은혜가 넘친다며 장로님도 우리교회로 나오라고 권하더란다. 본교회에서 예수믿고 구원받고 신앙생활해서 50년동안 고향 교회를 지켜오신 아버님, 교회는 아버님의 삶이요 인생과 같은신데 비록 은퇴하였어도 나이 여든에 어찌 교회를 옮기겠느냐신다. 그저 너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울 뿐이다.
 
요즘, 목사들이 기도하며 말씀보고 묵상하고 심방하고 목회하는 일에 정진하는 것보다 각종 세미나에 교회성장 프로그램에 가짜 박사학위 받느라 자격증 취득하느라 정신들이 없다. 또한 주의 이름으로 각종 사업하느라 또한 건축하느라 대출 받으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날의 목회자는 세상적인 가치와 기준을 채우느라 일명 ‘스펙’을 갖추느라 정신이 없다.

 목사에게 박사학위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또는 자아성취를 위한 노력일 뿐, 영혼에는 아무런 유익도 없다. 오히려 목회자는 자기를 포기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진대 도시교회로 가기위한, 더 큰 교회로 진출하기위한 교두보와 더 좋은 조건과 환경을 누리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세상적인 가치와 스펙을 쌓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것이 아니고 목회를 더 잘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영성을 채우고 이루기 위해 더 기도하고 더 낮아지고 더 버려야 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은가?  목회가 무엇인가? 진정 목자의 사명을 내팽개치고 병들고 굶주린 양떼들은 이리가운데 버려둔 채 자신의 성공과 욕심만을 채우는 것이 목회를 위한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은 스펙을 쌓느라 정신없는 동안 양떼는 흩어지고, 병들고 죽어가고, 이리에게 잡아먹히고 울타리를 넘어 다 흩어지는데도 전혀 감각도 없는 사람들... 자신이 섬기는(?) 양들이 눈가에 눈물이 가득한 채 옆집 우리에 든 살진 양떼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하고 있는데도 이 게으로고 악한 목자는 강제로 젖을 짜기에만 급급하다. 
 
주님이 주신 목사라는 엄청나고 위대한 최고의 직분을 우습게 여기고 그저 밥벌이 수단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자들, 당회장이니, 노회장이니 총회장이니 하는 따위의 도깨비감투 따위와 박사와 교수 따위의 세상 타이틀을 좋아하는 자들... 왜 주님께서 친히 기름부어 세우시고 명하신 목사라는 이 영광스런 직분에 감사하고 만족하지 못하여 헛되고도 헛된 다른 직함과 타이틀을 탐낸단 말인가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타이틀 자랑하는 대부분의 목사들이 가지고 있는 박사학위는 절반 이상이 가짜고 나머지도 대부분 명예(역시 가짜)다. 목회학 박사치고 목회 잘하는 사람 별로 없고, 신학박사치고 성령 충만한 사람 별로 없다. 돈만 몇 백 있으면 박사 그냥 된다.  명박(명예박사), 목박(목회학 박사) 그거 돈 얼마 안 든다.

내가 알고 존경하는 목사님 한 분이 계신다. 한국의 대표교단 소속이고 속칭 스펙이 대단한 분이셨다. 그분이 외국에서 공부를하시고 박사학위를 받으러 가시던 중 비행기 안에서 묵상하시는데 주님께서 물으셨다. “너 박사학위를 왜 받으려고 하느냐?”   “예! 주님, 주를 위해섭니다.” “정말 나를 위해서 박사학위를 받으려는 것이냐?” 그 두 번째 질문 앞에서 목사님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주님, 사실은 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나는 내가 세운 목사 너를 원하지 박사를 원하지 않는다” 그 목사님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공항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물론 학위를 받지 않으시고 말이다. 그리고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셔서 목회를 잘 하시고 계신다. 얼마 전까지 섬겼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도 그런 분이셨다. 얼마나 존경스러운지 실로 귀감이 된다.

외국유학을 하면 영성이 더 충만해지는가? 유학파 출신 목사, 박사 학위가진 목사를 선호하는 성도들도 문제다. 자신의 모자람을 담임목사를 통해서 대리 만족하고자 하는 성도들, 자신의 교회의 크기와 성도들의 숫자로 스스로 우월감에 빠져있는 성도들, 자신들의 삶에 교회의 강단에 정작 무엇이 빠져있는지 자신의 영혼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조차 감각하지 못한 채 넓고 화려하고 큰 길로 달려가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가?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라는 책이 있다. 작은 교회 작은 목회를 지향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참된 목회를 꿈꾸며, 또는 땅 끝 불모지에서 한 영혼을 위해 눈물로 선기는 수많은 종들도 있다. 그런데 매머드급의  교회의 어느 목사님은  "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는 말을 믿지 마라. 목회에 실패한 이들이나 하는 변명이다. 주님 보기에 큰 교회가 아름답다."라고 말했다.  이런 분들에게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그저 아름다운 문장 표현이요 유명한 책의 제목일 뿐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루저(loser)들의 넋두리에 불과하다. 시골 오지에서 또는 낙도에서 몇 명 안 되는 주민들과 한 영혼을 위해 눈물로 섬기며 헌신하는 종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무서운 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목회란 사업이요 돈벌이요 출세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성도는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킬 도구에 불과하다. 갖가지 행사와 훈련과 세미나와 프로그램을 동원하고 인맥을 동원하고 자금을 동원하고 심지어 정치까지 동원한다. 그 들의 설교는 사람을 위한 이야기이며 복음이란 말로 허울을 쓴 포장지에 불과하다. 그 내용물은 돈, 명예, 성공, 출세, 축복 따위로 가득 차 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은 세상적인 복과 전혀 다른 것이다. 제발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성경의 말씀과 섞지 말라.  거기에 무슨 복음이 있는가? 거기에 무슨 구원이 있는가? 거기에 무슨 진리가 있는가? 예수님 자신이 복음이고, 예수님 자신이 구원이고,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며,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며, 예수님 자신이 천국이시다.

오늘날  강단에서 외쳐지는 설교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복음이 얼마나 선포되어지고 있는가? 예수님은 인간의 죄악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반드시 죄에 대하여 선포하고 죄인임을 각성시키고 죄를 회개시키고 죄를 미워하도록 결단시키고 세상 명예와 모든 욕심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절대 명령과 순교를 각오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헌신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하나님 나라 내가 천국 되어 사는 생명복음,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자신을 성전 -거처- 삼으시고 나의 삶을 통해 당신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시고 나타내시고자 하심을 알고 믿고 주님과 동행하는 영광스런 삶을 살도록 주님의 거룩함으로 인도하는 것이 목회자가 해야 할 사명이요 본분인 것이다. 이 복음은 강단에서 백성들에게 선포되어져야 하며 또한 목회자 자신이 그 삶을 살아내야 한다.

무엇이 축복인가? 이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이름으로 구원받고 성령 안에서 오신 예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삼고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역사하심을 좇아 행하는 믿음이 축복인 것이다. 이것이 성전 됨이요, 교회요, 천국의 삶이며 이 천국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

목사가 먹사로 전락한지는 이미 오래고 목회는 생업을 위한 것이고 성도들은 교회를 교제의 장소, 친목의 장소, 사업을 위한 사교의 장소요 예배와 헌금은 명예와 욕구 충족의 방편으로 삼고 있다. 그들은 구원과 거리가 멀다. 예수와는 그저 잘 아는 친분이 있는 분 정도며 헌금은 복채요 로비자금일 뿐이다.

사탄은 교회를 자신의 집과 놀이터로 삼고 있다. 성도들은 마귀의 먹잇감이 돼버렸고 주의 종들은 마귀의 하수인으로 전락해버렸다. 이제 마지막 선교지는 교회요 전도대상자는 교인들이다. 오죽하면 각종 이단과 사이비, 신천지 같은 집단에서 대놓고 교회와 교인을 추수대상자로 삼겠는가? 그런 곳으로 넘어지고 빠지는 영혼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진리에 목말라 참된 복음에 목말라 헤매다가 거기 진리가 있는 줄 알고 빠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그들만의 잘못인가? 그들 영혼을 진리로 세우지 못한 복음을 먹이지 못한 책임을 주님 앞에 섰을 때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오늘날 교회는 무엇을 위해 달려왔으며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가? 교회당 건물 짓기 위해 전 재산을 드리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드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였는가? 장로, 권사 되기 위해 헌금은 수백 수천씩 드리면서 굶주리고 이웃집의 헐벗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는 얼마를 드렸는가? 노회장, 총회장 해먹으려고 교단의 대표가 되기 위해 몇 억씩 성도들의 생명 같은 헌금을 마음대로 쓰면서 땅 끝 복음을 위한 선교에는 얼마나 쓰고 있는가? 오늘 우리는 육신을 따를 것인가 성령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지금은 어느 때 인가? 이 세상은 그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다. 말세 중 지말, 세상의 끝에 와다. 이때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때를 사는 우리들은 무엇을 준비하며 기도해야 하는가?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 마지막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 하셨다. 주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 우리의 주가 되시는 그분은 우리와 완전한 합일로 함께 계신다. 그분을 24시간 인식하고 생각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며 내생각과 내 감정과 내 의지를 죽이고 주님께 모든 것을 묻고 의뢰한다면 주님을 갈망하고 경외한다면 주님은 우리의 삶을 당신의 거룩하심과 덕스러움과 아름다움으로 변화시키시며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요 주님 안에서 사는 삶이요 온전히 주님을 위한 삶이 될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영적인 스펙을 쌓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함으로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날 것이며 구하는 것마다 이루어 질 것이며 주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며 우리를 존귀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금방 변하고 시들고 거짓되고 헛된 명예와 부, 성공이라는 선악과와 세상풍조를 따르지 말고 모든 것을 아시고 심판하시는 주님 앞에 철저히 진실한 모습으로 설 때에 주님께서 보잘것없는 우리의 스펙을 높여주실 것이다.
 
주님께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삶을 다 내어드립시다. 주권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입시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신뢰합시다. 그리고 주님께 먼저 물읍시다. 분명한 주님의 인도를 따라 삽시다. 주님은 언제나 신실하시며 언제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도우십니다. 할렐루야.


출처: USA 아멘넷/ 김은태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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