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탄의 성육신

유명한 투자회사의 CEO요, 한국어를 포함해서 수십 개 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며, 지적이고, 신사적이고, 잘 생기고, 춤 솜씨도 좋고, 매너도 좋은 중년 남성, 존 밀턴.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인 이 남자의 정체는? 사탄이다. 만일 사탄이 오늘날 현대사회에 성육신(incarnation)한다면 그는 분명히 '데블스 에드버킷'의 존 밀턴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왜 하필 이름이 '존 밀턴'일까? 그건 아마도 '실낙원'을 연상케 하기 위한 장치일 게다. 그리고 이건 이 영화가 창세기 3장의 뱀의 유혹과 실낙원 사건을 재해석하겠다는 의도를 노출한 것이다. 실제로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존 밀턴이 캐빈 로맥스에게 크리스타벨라와 섹스를 하라고 설득하는 신으로 설정되어 있다.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찬 매력적인 이 신에서 에덴동산은 존의 집무실로, 뱀은 존 밀턴으로, 아담은 캐빈 로맥스로, 이브는 크리스타벨라로, 그리고 선악과는 섹스로 재현되어 있다.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에게 다가가 유혹했듯이, 이곳에서 존은 캐빈을 유혹한다.

이 영화에서 나의 시선을 유독 끄는 대상은 바로 사탄, 존 밀턴이었다. '데블스 에드버킷'은 사탄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놀라운 독창성을 보여 준다. 사실 사탄은 할리우드 장르 영화가 심심치 않게 사용해 오던 소재다. 전통적인 호러 영화에서 사탄을 묘사하는 방식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오멘' 유의 영화에서는 사탄을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초월적이고 거대한 힘으로, '엑소시스트' 유의 영화에서는 타인의 신체를 강탈하거나 빙의하여 그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악령으로, '드라큘라' 유의 뱀파이어 영화에서는 사람의 피를 좋아하는 흡혈귀로 묘사한다. 대체로 사탄은 섬뜩하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며, 무섭고, 폭력적인 살인자로 그려진다. 선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 악이다.

하지만 '데블스 에드버킷'에서 사탄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그가 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도무지 이치에 어긋남이 없다. 존 밀턴이 캐빈에게 "믿는 대로 행동해, 이젠 질 때야"라고 했을 때나 재판에서 손을 떼고 이제 그만 아내를 돌보라고 조언할 때, 사탄은 캐빈보다 훨씬 정직하고 인간적이다. 그는 누구도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외로운 16세 소녀의 말에 처음으로 귀 기울여 주는 친절한 사람이었으며, 그녀에게 성경 말씀을 알려 줄 정도로 성경에 해박하다. 스스로 말하듯 그는 사람을 강압적으로 굴복시키거나 조종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무대만 만든다. 나머지는 자신에게 맡긴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인격적이다. 그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못하게 막거나, 원치 않는 것을 억지로 시키는 법이 없다. 그는 인간의 욕구를 존중하고 비판하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나는 네 편이야."

'데블스 에드버킷'이 사탄을 묘사하는 방식은 유혹자다. 사탄이 애용하는 두 가지 무기가 있는데, 하나는 폭력이고 또 하나는 유혹이라 할 것이다.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폭력이 강제적이라면, 유혹은 비강제적이다. 무엇이 더 치명적일까? 폭력은 사람의 몸을 얻을 수 있지만, 유혹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 하여 유혹은 폭력보다 더 치명적이다. 통치 수단의 측면에서 봤을 때 폭력에 비해 유혹이 훨씬 효율적이다. 로마가 10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유혹의 기술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들이 간파했듯이 서구 자본주의사회가 극심한 모순에도 붕괴하지 않는 이유는 문화 산업이라는 유혹의 기술 때문이다. 하여 20세기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원하는 사탄은 '데블스 에드버킷'에서 존 밀턴이라는 유혹자로 성육신했다.

# 선악과와 선악과 금령

사탄이 본성상 유혹자일 수밖에 없는 건 인간에게 있는 '자유의지' 때문이다. 존은 캐빈에게 이복동생과 관계를 해서 아이를 가지라고 유혹한다. 그러자 캐빈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존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내가 자원해야 하죠?"

존이 답한다.

"그 망할 놈의 자유의지!"

그렇다. 결국, 최종 결정은 인간의 몫이다. 자유의 상징이자, 인간 조건의 표상인 선악과 앞에서 뱀이 유혹자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선악과 앞에서 인간의 마음을 얻기를 바라는 사탄, 그리고 또 다른 편에서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인간의 결정을 기다리는 뱀과 하나님, 그 사이에 인간 실존의 자리가 놓여 있다. 이 얼마나 위험하고도 놀라운 자리인가? 이 얼마나 감당하기 벅찬 권한인가?

하지만 이 놀라운 은총은 너무나 자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뱀은 하나님이 질투심 때문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먹지 말라고 했다며 하나님을 참소했다. 존 밀턴은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먹지 말라고 명한 것은 말도 안 되는 모순된 규칙이라며 그를 못돼먹은 사디스트라고 비난했다.

"보되 만지지 마라.
만지되 먹지 마라.
먹되 삼키지 마라. 푸하하하…."

하지만 옛 뱀이 그랬듯이 존 밀턴도 하나님의 심오한 계획을 오해했다. 선악과는 자유를, 선악과 금령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감당하기 벅찬 자유의 권한을 주신 이유는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오직 자유로부터 참사랑이 나온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유롭게 사랑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기를 원하셨다. 성서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사랑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길이고 이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고.

# 모든 것이 테스트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을 원하는 건 사탄도 마찬가지다. 자발적 의지로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캐빈에 대한 존의 요구였다. 만일 우리가 자발적으로 사탄의 유혹을 따를 때 우리의 의지는 사탄의 의지와 뒤섞인다. 캐빈이 개티스 법정에서 성추행 교사를 두둔할 때, 모예즈 사건 때 교황과 사이비를 똑같이 싸잡아 몰 때, 컬른의 유죄를 알고도 무죄라 주장할 때 그는 그 모든 악을 '스스로' 한 것이다. 예수의 말대로 그 모든 악을 "제 것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캐빈은 존에게 '당신이 시킨 것'이라고 변명할 수 없고 사탄을 비난할 수 없다. 스스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캐빈은 존과 하나다.

그 무시무시한 권능을 소유한 존 밀턴이 캐빈에게 원했던 것은 고작 크리스타벨라의 난자에 수정될 수 있는 정자 한 마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캐빈의 자발적인 순종으로 하는 것이라야 했다. 즉 존이 원했던 것은 사랑으로 이루어진 가족이었다. 존은 그 가족의 가장이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정체가 뭐냐고 묻는 캐빈에게 존은 "아빠라고 불러"라고 했던 것이다.

진리는 언제나 단순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지만, 사탄의 유혹을 따르면 사탄의 자녀가 된다. 그래서 말로는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하나 행위로는 마귀의 일을 하는 유대인을 향해 예수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하셨던 것이다.

사랑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느냐, 아니면 자발적으로 사탄의 유혹을 따르느냐? 인간의 삶은 늘 이러한 실존적 결단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테스트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본질적이다. 팸 게리티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고 메리 앤이 직감했던 것처럼 "모든 것은 테스트다!" 캐빈이 게티스 법정에서 궁지에 몰렸을 때, 밀턴 채드윅 워터스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을 때, 직장에서 크리스타벨라를 보았을 때, 아내의 푸념을 듣던 중에 전화벨이 울려 올 때, 컬른의 유죄를 확신하게 되었을 때, 이 모든 것이 캐빈을 테스트하는 순간이다. 그뿐만 아니라, 메리 앤이 존 밀턴으로부터 머리를 좀 올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나 뉴욕에 처음 온 캐빈의 엄마에게 존이 다가와 그녀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줄 때 테스트는 그들도 비껴가지 않았다.

# 사탄이라는 작업가설

하지만 삶을 실존적 결단으로 충만한 테스트의 연속으로 묘사하기 원한다면 굳이 사탄이라는 작업가설이 필요할까?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신이니, 사탄 없이도 사물과 인간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우주는 그저 우연히 존재하는 잉여적 존재라고 하면 그만이다. 신이나 사탄이 꼭 필요할까? 꼭 악에 대해서 설명해야 한다면 그건 뭐, 인간의 탐욕이니, 혹은 사회적 일탈이니, 자본주의의 폐해니, 타락한 다국적 기업의 담합과 카르텔… 뭐 이런 심리학적, 사회학적 설명으로도 충분치 않은가?

   
 
  ▲ 서구 자본주의사회가 극심한 모순에도 붕괴하지 않는 이유는 문화 산업이라는 유혹의 기술 때문이다. 하여 20세기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원하는 사탄은 '데블스 에드버킷'에서 존 밀턴(사진, 알 파치노 분)이라는 유혹자로 성육신했다. (영화 '데블스 에드버킷' 갈무리)  
 
'데블스 에드버킷'의 존 밀턴도 따지고 보면 실존하는 특정 인물이 아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존 밀턴은 사실 캐빈 자신임이 밝혀진다. 어찌 보면 존은 캐빈의 투사였다. 존은 캐빈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친구 기자 래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에디 바준을 때려죽이는 노숙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존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누구나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말은 결국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닌가? 또 누구나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무도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사탄은 과연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을 통과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아담 이야기에서의 '뱀의 정체'에 관한 물음이기도 하다. 대체 뱀은 뭔가? 걸어 다니고 말도 하는 뱀이라니 혹시 그건 고도로 지능적인 공룡인가? 그건 왜 순진무구의 낙원에 존재했을까? 만일 아담이 그 자신의 의지로 선악과를 따먹었다면 왜 뱀이 필요할까? 판도라의 이야기에서처럼 뱀 대신 마음속에서 일어난 욕망의 불꽃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리꾀르(P. Ricoeur)의 말대로 뱀은 아담 신화의 가장 심오한 미스터리 중 하나다.

현대주의자들은 사탄 없이도 얼마든지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최근 학자들은 다시 사탄이라는 낡고 오래된 신화적 용어를 끄집어내고 있다. 상담심리학자 스캇 펙(Scott Peck)은 '악의 심리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거짓의 사람들>에서 악은 실존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 관찰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했다.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했던 필립 짐바르도(Philip George Zimbardo)는 인간으로 하여금 매우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게 만드는 외부의 어떤 힘이 실존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흥미롭게도 짐바로도는 이를 가리켜 '루시퍼 효과(rucifer effect)'라고 명명했다.

신학자 중에서도 사탄을 근본주의자들과는 다르게 보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사탄을 귀신이나 악령으로 보기보다는 이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사와 권세'라는 관점으로 보려는 이들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헨드리쿠스 벌코프(Hendrikus Berkhof), 존 요더(John H. Yoder), 월터 윙크(Walter Wink), 마르바 던(Marva Dawn), 그리고 자끄 엘륄(Jacques Ellul)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대체로 신약성서를 퇴마록처럼 읽는 피터 와그너(Peter Wagner)식 독법을 반대한다. 이들은 사탄의 존재를 찾기 위해서 빙의 현상이나 주술적 접촉 혹은 흑마술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탄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무엇일까? 여기서 잠깐 자끄 엘륄의 마귀론을 살펴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마귀의 마지막 유혹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케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런 확신을 하게 되는 순간 즉시 환상과 망상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마귀는 실존한다. 하지만 그는 전통적인 마귀론을 거부한다. "무대 뒤의 다른 세계란 없다.…신비나 악한 저편의 세계에 대한 열림도 찾을 수 없다." 즉 루시엘이니, 루시퍼니, 아마겟돈이니, 이런 건 마귀에 대해서 허상일 뿐이다. 이런 고대의 언어로 사탄을 이해하려는 것은 은유와 실제를 혼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귀는 무엇인가? 엘륄에게 있어서 마귀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다. 한마디로 그것은 반창조(anti-creation), 곧 창조 세계의 파괴다. 그가 하는 일은 "지상에서의 상황을 비극적으로 만들고, 인생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들며, 신앙을 파괴하고, 신뢰를 없애며, 인간들을 고통 받게 하고, 사랑을 말살시키며, 소망이 태어나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데블스 에드버킷'이 묘사하는 사탄의 모습이기도 하다. 사탄은 캐빈 부부가 아이를 낳지 못할 정도로 캐빈을 바쁘게 만들고, 불륜을 일으키고, 아내를 신경쇠약에 걸리게 하여 끝내는 자살하게 하는 힘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탄은 미성년자 성폭행범, 살인범, 그리고 사이비 종교 지도자에게 면죄부를 주어 사회로 내보내게 하는 비합리적 사법 시스템 속에 존재하며, 세계 곳곳에서 무기 거래를 하고, 화학무기와 산업폐기물을 다루고, 이를 위한 돈세탁도 거침없이 하는 부도덕한 다국적 기업 속에 거하기도 하다. 존 밀턴, 곧 사탄은 그것들 가운데 실존하며, 그 모든 것들의 우두머리다.

사탄이 아니고서는 인간 영혼이나 이 사회를 설명할 수 없는 여분의 영역이 존재한다. 주체철학자들은 인간 영혼을 순수하게 자유로운 상태에서 사유하고 결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로 상정했지만, 현실에서의 개인이나 집단은 꼭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지만은 않는다. 그들로 하여금 원치 않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하는 외부의 강력한 힘(power)이 존재한다. 혹은 월터 윙크식으로 말하자면 그 속에 편입된 순간 그 일부가 되어 버리는 거대한 사탄의 체제가 존재한다. 그걸 영화에서는 '존 밀턴의 무대'라고 표현했다. 존은 조종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도록 무대만 만들어 준다. 그런데 그 무대에 올라서기만 하면 누구라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바로 이 여분의 영역, 이곳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곳이 바로 사탄의 거처다.

영화는 바로 이 여분의 영역, 곧 우리의 삶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실존하고 있는 삶의 초월적인 차원들을 장르 문법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데블스 에드버킷'은 법정 드라마로 시작해서, 법정 드라마로 끝나는 일종의 액자식 구성이다. 법정 드라마 장르는 현실 공간, 곧 세속적 일상의 차원을 상징한다. 이 법정 드라마 장르 사이에 여러 장르 복합체가 끼어 하나의 삽화를 이룬다. 이 삽화는 호러를 대표로 누아르, 오컬트, 멜로, 재난 영화 같은 여러 장르가 혼합되어 만들어진 장르 복합체다. 물론 중간에 끼어 있는 이 삽화는 나중에 현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 그렇다면 그건 무엇인가? 순수한 가상인가? 아니다. 그것은 세속의 일상 한가운데를 교차하며 지나는 삶의 영적이고 초월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말하려는 바는 이것이다. 즉 우리의 삶에는 보이는 일상의 차원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초월적 차원도 존재한다는 것인데, 특별히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숱하게 만나게 되는 테스트의 순간에 그 배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메시지를 통해 관객에게 각성 효과를 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혹의 본질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우리의 삶에서 숱하게 만나게 되는 그 모든 테스트가 사실은 창세기 3장의 뱀의 유혹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영화는 곤경에 처한 캐빈이 게티스 법정의 화장실에서 고민하고 있는 바로 그 테스트의 순간에서 출발하여 관객을 에덴에서 뱀이 아담을 유혹하는 그곳으로 이끌어 간다. 게티스 법정에서의 테스트는 본질상 에덴에서의 뱀의 유혹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게티스 법정의 화장실에서 캐빈에게 찾아온 유혹이 다른 유혹보다 더 특별하지는 않다. 모르긴 해도 캐빈이 게티스 선생의 변론을 포기한 다음 날 래리와 인터뷰를 하게 될 것인데, 그곳에서 캐빈은 또 다른 테스트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유혹의 본질 역시 창세기 3장에서의 뱀의 유혹과 본질상 다르지 않다. 이것은 유혹의 본질에 대한 근사한 영화적 통찰인데, 모든 유혹은 창세기 3장의 유혹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1500년 전 오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원죄 논쟁을 언뜻 떠오르게 한다. 당시 오거스틴은 창세기 3장의 뱀의 유혹을 단회적인 사건으로, 펠라기우스는 계속적 사건으로 보았다. 이렇게 봤을 때 영화는 펠라기우스의 성서 이해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이런 신학적 프레임으로 이 영화를 펠라기우스 주의 영화라고 단죄하는 것은 영화와 조직신학 책을 혼동하는 태도일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는 우리가 삶에서 부딪히는 크고 작은 유혹이 멀리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신처럼 되리라고 했던 뱀의 유혹과 조금 가까이는 예수를 산꼭대기로 이끌고 가서 만국과 영광을 주겠노라 딜을 했던 마귀의 유혹과 본질상 다르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모든 유혹을 관통하는 유혹의 동질성,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Vanity!'

우리말로 허영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vanity가 유혹의 본질이다. 이글이글 불타는 화염과 태양의 이미지는 원자를 분해할 정도로 뜨거운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그 욕망 중에서도 더 높아지려는 자기애적 상승 욕구가 가장 뜨겁고 강렬하다. 이 뜨거운 욕망의 불꽃은 사탄이 창조한 것이 아니다. 그건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존의 말대로 인간에게 부여한 신의 놀라운 선물이다. 프로이트(G. Freud)가 리비도라고 불렀던 이 생본능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하지만 이 불꽃은 제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나의 욕구의 불꽃만큼 타인의 욕구 불꽃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제어되지 않는 자기중심적 욕망은 결국 파괴와 죽음만을 남긴다.

사탄이 하는 일은 바로 이것이다. 욕망의 불꽃을 제어하지 말고 발산하도록 자극하는 것. 그래서 모두가 이기고 싶어 하고, 황제가 되고 싶어 하고, 종국에는 신이 되고 싶어 하도록 욕망을 발산하라는 것, 이렇게 그저 속삭여 주기만 하면 된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걸려들게 되어 있다. 그 옛날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후손들도 조상을 본받아 오늘도 거대한 바벨탑의 꼭대기를 향하여, 존 밀턴의 집무실이 있는 꼭대기 층을 향하여 부단히 오르고 있다. 그래서 존은 "허영심이 나의 최고의 기호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영적 전쟁

'데블스 에드버킷'은 후반부로 가면서 존 밀턴의 정체가 밝혀지며 점차 호러물이 되어 간다. 하지만 영화는 관객이 기대하는 장르적 관습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무엇보다도 관객을 당혹게 하는 건 악마와 맞서 싸울 영발이 출중한 퇴마사가 없다는 것이다. 장르 관습상 관객은 신앙심 깊은 캐빈의 엄마가 퇴마사 노릇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캐빈의 엄마는 사탄의 애인으로 밝혀졌다. 유일하게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메리 앤도 일찍 자결했다. 밀턴 채드윅 워터스의 비리를 알고 있다는 위버위원회나, 그에게 맞선 에디 바준은 존 앞에 깜냥도 안 된다. 그렇다고 존의 손에 놀아난 캐빈의 힘으로 존과 맞서 싸워서 도무지 이길 것 같지 않다. 그럼 누가 악마를 처단한단 말인가? 이 심각한 힘의 불균형은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이런 식의 관습 폐기는 악마를 무찌를 수 있는 무기가 없다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전통적인 호러 영화에서는 악마와 맞서 싸우는 영웅과 그가 애호하는 무기가 반드시 나온다. 하지만 성당 앞 성수 통에 손가락을 넣고 조롱하는 존을 보는 순간 관객의 기대는 무너져 내린다. 무엇으로 악마를 없앨 수 있단 말인가? 십자가? 마늘? 성경 구절? 어림없다. 캐빈의 엄마에게 마태복음 10장 16절을 가르쳐 준 이가 바로 존 밀턴이다. 그러다 보니 플로리다 한적한 시골 예배당에서 "Roman Sixteen Nineteen says!!~"라는 찬송가를 있는 힘껏 불러 대며 영적 전쟁을 펼치고 있는 교인들의 모습이 한심해 보일 수밖에…. 결국 캐빈이 기껏 가지고 간 무기는 손바닥만 한 권총이다. 존을 향해 권총을 갈겨 대며 분노를 터뜨리는 캐빈의 모습은 누구 말마따나 애잔하기까지 하다.

영화는 전통적인 축사나 축귀 방식으로 사탄과 대결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에도 축사나 축귀 현상은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 따르면, 사탄이 보기에 피터 와그너식 영적 전쟁이란 유치한 어린애 장난스러워 보일 뿐이다. 자, 보라.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에게 들러붙은 귀신을 내쫓으며 그들을 고치셨다. 하지만 예수는 마귀의 자녀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축사를 행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결국, 예수는 성전을 중심으로 결탁된 거대한 권력 카르텔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이런 마귀는 축사해도 나가지 않는다. 영화는 바로 이 대마귀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재벌의 무한 탐욕, 국가권력의 폭력, 사법기관의 기만과 거짓, 교회와 목회자, 신자의 위선, 다국적 기업의 횡포, 제삼세계 국가에 대한 막대한 국가 부채를 통한 항구적 지배, 자원의 고발, 갖가지 오염과 파괴, 그리고 황금만능주의와 소외…. 자, 이 모든 것들과 싸우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땅 밟기? Roman Sixteen Nineteen Says!를 목청껏 부르기? 축사 기도? 그렇게 해서 그 악이 줄어들 것 같은가? 사탄이 순순히 자신의 왕국을 내어놓겠는가? 어림없다. 이미 사탄에 점령당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텅 빈 뉴욕 시가지를 혼자 걸어가는 캐빈의 부감숏은 바로 그러한 무력감의 시각화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는 다시 한 번 반전된다. 이 거대한 사탄의 체제 앞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인간이지만, 그러나 사탄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다. 놀랍게도 영화는 모든 초점을 한 점에 집중시키고 있는데, 그건 바로 캐빈의 자유의지다. 이것은 학문적 통찰과도 상통한다.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인간이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권위에 65%나 되는 사람이 무조건 복종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그 비합리적 권위에 35%는 복종하지 않았다.

실존주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e)은 자신의 아우슈비츠 수감 시절을 기록한 수기에서 인간에게는 여전히 '마지막 하나의 자유'가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99%(정확한 수치 아님)의 수감자들은 금세 인간의 존엄을 잃어버리고, 조금이라도 덜 힘들고,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고, 조금이라도 덜 배고프기 위해서 짐승처럼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작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끝까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1%의 예외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눠 주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웃에게 다가가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해 주며, 그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애써 찾으며, 심지어는 타인을 위해서 대신 가스실에 들어가기도 했다.

캐빈의 자살은 바로 이 자유의지의 발현이다. 캐빈은 자신의 마지막 남은 권리를 행사하는 방식으로 자살을 택했다. 그 권리란 온 세상이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가서 단 한 사람의 조력자도 남지 않는 상황에서, 아무리 극심한 외부의 위협과 구조적 압박에도 주변 환경의 강력한 영향력에도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만은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는 위대한 독립 선언이다. 캐빈의 영웅적 결단이 인간이기를 선택하는 길이며, 사탄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진정한 무기이다.

이런 점에서 캐빈의 자살은 메리 앤의 자살과는 조금 다르다. 메리는 자살이라기보다는 사실상 타살당한 것이다. 존에게 유린당할 대로 유린당한 뒤, 팸 게리티가 일부러 건네준 거울 속의 악령을 보고 공포에 질려 목숨을 끊었으니 사실상 타살이다. 하지만 캐빈의 자살은 이와는 다르다. 자신의 오류에 대한 성찰에서 오는 회개와 뉘우침이며, 자기 굴복이었다. 비록 무패의 행진을 이어 오던 자신의 이력이 손상당할지라도 피 묻은 돈을 받지 않겠다는 양심선언이며, 자기 부인이고, 아내에 대한 사랑을 능가하던 자기애를 죽이는 길이었다. 다소 정체가 모호하긴 하지만, 캐빈 나름의 십자가의 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 캐빈은 또 한 번 십자가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테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이 기사는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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