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자신이 목회하던 교회를 물려주었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교회를 대물림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한 것이 언론에 기사화 된 적이 있습니다. 자녀에게 교회를 대물림 하는 것의 시초가 되었던 그 목사님 이후로 많은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앞 다투어 자녀들에게 교회를 물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의 대물림현상에 대하여 많은 지탄과 비판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자녀가 부모님이 평생을 섬기던 교회를 물려받아서 섬기며 사역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왕왕 있는 일입니다. 또한 그러한 일들을 과거에는 아름답고 감동적 본이 되는 미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미담이 되어야 할 이런 대물림이 왜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요?

사실 목사가 그 자녀를 다시 목회자로 키우기란 쉽지 않습니다. 부모나 자녀모두 희생하고 양보하고 손해보아야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가난과 자신의 뜻대로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나하나 성도들에게 노출되어 있어서 평가받는 삶이 얼마니 힘들고 버거운지 목회자 자녀들은 절대 부모를 따라 목회자가 되는 것을 대부분 싫어합니다. 대부분의 목회자 자녀들이 그러하고 과거의 목회자 자녀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혹 자녀들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헌신하더라고 자신의 사명과 사역의 인도하심을 따라 다른 교회에서 사역하기도 하고 때론 부모가 사역하였던 교회를 맡아서 열심히 사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부 성공한(?) 대형교회의 자녀들은 왕자와 공주님이 되어 성도들로부터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황태자로 대우를 받는 경우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부족함 없이 살고 모든 삶이 안정되게 보장받는 삶을 살아온 그들에게 은퇴를 앞둔 목사들이 자신이 평생에 이루어 놓은 기업과 같은 교회를 통째로 아들에게 물려주어 안정된(?) 삶을 대물림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교회의 묵인과 비호, 검증되지 않은 소명과 영성에도 불구하고 당사자 스스로 편한 그 길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교회의 목회사역을 대물림 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목사의 자녀가 대를 이어 목사가 되는 것은 매우 성경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 어렵고 힘든 희생과 봉사의 길을 가길 원하겠습니까?  

당연히 분명한 부르심의 소명이 있고 주님의 종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돌보는 투철한 사명감과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헌신의 각오가 있어야 하는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였을 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크건 작건 대물림 자체가 비난받아선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존경 받고 인정 받아야할  모습입니다.

성경을 묵상해 보면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각 지파별로 기업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론과 모세가 속한 지파인 레위지파는 가나안에서 기업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대대로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도록 명령하셨기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 레위지파에게는 각 지파에서 구별한 도피성과 제물로 쓰일 짐승을 먹일 목초지와 하나님의 성막을 섬기는 일과 제사하는 일에 쓰일 포도주 생산을 위한 포도원과 떡을 위한 토지(생산지)들을 떼어서 하나님께 돌리게 하였고 각 지파에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 그 성과 토지와 포도원과 목장을 돌보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레위지파의 자손들에게 그 하나님께 드린 것을 기업으로 분배하였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아론의 자손들은 대를 이어 제사장으로, 다른 이들은 교회를 돌보고 성막에서 각자 섬기도록 하였으며 포도주 생산과 짐승을 기르는 일과 농사짓는 일과 도피성을 지키는 일 등 각기 기업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어디 한 군데에도 모세의 두 아들이 기업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늘의 대형 교회는 그 사역의 폭도 넓고 다양하기에 각자의 달란트와 사역에 따라 교회를 섬기며 봉사하는 일이 여러 가지입니다. 목회자의 자녀들이 어떤 사역과 일을 하는가는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목사님의 자녀들 중에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기관이나 기업을 물려받아서 운영하기도 하고 또는 교회를 대물림한 것에 대하여 지탄을 받고 비난과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작 당사자들인 목사님들과 그 자녀들이 문제의 본질과 이유를 모르고 있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수백만을 이끌고 출애굽 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종으로써 가나안으로 인도하였던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위대한 지도자 모세,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독대하였고 가장 온유한 지도자, 강력한 카리스마와 능력의 소유자인 모세. 그런데 그의 자녀들, 애굽에서 도망하여 미디안에서 그 이방신의 제사장인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게르솜과 엘리에셀이 성경의 역사에서 어떻게 기록되는 지를 살펴보면 목회자의 자녀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르비딤의 광야에 있을 때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딸과 손자들, 즉 모세의 처 십보라와 두 아들인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데리고 모세에게로 나옵니다. 아마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애굽으로 돌아가던 중에 천사를 만나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급히 십보라가 그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를 살린 그 일과 관련하여 아내와 아들들을 처갓집으로 돌려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8장 이후로 이 모세의 두 아들의 기록은 성경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하나님의 교회의 지도자였던 모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비록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죽었다고는 하나 그 아들들이 가나안에서 특별한 기업을 얻지 못하였고 특히 레위족속에게 분배하여 하나님의 기업을 맡길 때에도 그들의 이름이 언급이 없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후손들에게 어떤 특혜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론의 아들들은 대를 이어 대 제사장이 될 수 있었지만 모세의 후손들에게는 그러한 특혜(?)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그 후손들에게서는 선지자들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삿 18:장에 단 지파가 라이스 땅을 정복하고 그 땅에 사는 미가가 만든 신상을 빼앗아 가져가서 미가가 제사장으로 세웠던 게르솜의 후손들을 데려다가 그가 레위인 인줄 알고  단지파의 제사장으로 삼은 기록이 있습니다.

또 다른 성경에는 대상 15:7절에 보면 다윗이 자기 성을 짓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올 때에 레위지파에서 장정들을 모을 때 “게르솜 자손 중에 지도자 요엘과 그의 형제가 백 이십명이었더라”고 기록 된 것을 보게 됩니다. 당연히 레위인으로써 성막(성전)에서 섬기는 일과 또한 그와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살았겠지만 모세의 아들이라는 신분상의 특혜는 없었다는 것이지요.

대상 23장에는 레위자손들이 성전의 보살피는 일에 각각 세움 받은 기록이 나오는데 특히 그 직분이 아론의 자손(제사장)을 도와서 여호와의 성전과 뜰과 골방에서 섬기고 모든 성물을 정결케 하는 일과 제물과 및 모든 제반 업무와 찬양과 예배하는 모든 일들을 섬기는 일이었으며 모세의 두 아들인 게르솜과 엘리에셀의 아들들은 단지 레위사람들의 가문을 계수하는데 들어 있을 뿐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 이후로 그들과 그들의 후손의 기록은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문제의 본질은 욕심과 믿음, 두 가지입니다. 모세의 두 아들과 그 후손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지만 전혀 특별한 대접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세상의 욕심조차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본분인 레위 인으로써 성전을 섬기는 소임에 충실했을 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두 아들에 대하여 특별이 어떤 대우나 기업을 줄 것을 유언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유대인의 관습을 보더라도 충분히 축복하고 기업을 남길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게르솜과 엘리에셀 두 아들의 신앙 역시 남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요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테지만  심지어 모세의 처남들에게조차 기업을 주었는데도 그들은 욕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광야의 훈련을 통해서, 그리고 아비 모세의 신앙과 그 믿음을 본받아 절대 순종의 신앙을 배운 그들은 겸손히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구별된 자로써 묵묵히 섬김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모든 사역자들과 그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그 여호와 하나님이 주가 되심을 믿는다면 교회를 자기 것인 양,  마치 자기의 능력으로 키우고 이루어 낸 자신의 소유인양 생각할 수 없겠지요. 교회와 성도들을 속이고 하나님을 능멸하고 자신의 배와 자식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어리석은 우상숭배의 길을 걷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도 않을 뿐 더러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알지 못하거나 혹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가증하고 무서운 죄를 짓고 있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어려운 개척교회의 목사님들이나 가난한 시골과 낙도를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모두가 꺼리는 힘들고 어려운 오지의 사역을 이어받아서 목회를 한다고 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존경할 만한지요. 또한 도시의 커다란 대형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분명한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주의 종의 길을 가려고 헌신한 많은 목사님들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 아버지가 섬기던 교회의 청빙과 부름을 받아서 얼마 던지 사역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싸잡아 욕할 순 없으며 욕해서도 안 됩니다.

단지 동기가 무엇인지, 어떤 의도함이 있는지, 그 마음이 어떠한지의 문제인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시며 동기를 판단하십니다. 그 과정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자격도 안 되거나 혹 목사나 그 자녀의 개인의 욕심이나 다수의 이권과 관련된 또한 적법한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위법한 일로 문제가 되었다면 교회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요 세상에 비웃음꺼리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범죄행위이므로 마땅히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신 8장은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염려하시며 경고로 말씀하시는 대목입니다. 11절부터 20절에 특별히 경계의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2-14)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신 8:17-20)

오늘날 세상 매스컴과 온라인상의 뉴스 1면을 장식하고 있는 목회자들과 그 가족들과 관련된 아름답지 못한 뉴스들을 보면서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써 부끄러움과 반성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세상은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서 희망을 찾기를 원합니다. 어두움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그나마 교회에서 한줄기 빛을 보기를 원합니다. 교회세서 진리를 찾고 교회에서 소망의 불씨를 얻으려 합니다. 더러운 오물투성이 세상에서 깨끗한 생명수를 얻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언제 주님이 우리들에게(목회자) 세상에서 영광을 취하고 편안함과 부귀영화와 명예를 취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세상에서 위로를 받으라고 하셨습니까? 귀신같이(?) 스며들어온 번영신학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정직한 것처럼 합리화하려 하지만 세상은 속아주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목사도 사람입니다"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맞습니다. 목사도 사람이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분부하셨습니다. 분명 우리는 사람대접받으며,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되는 존재들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처럼, 주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 사명이 있지 않습니까? 사도들과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모두 그길을 걸었고 그 삶을 기꺼이 사랑했으며 삶으로 살아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 삶의 길로 부르시고 택하셨습니다. 왜냐면 우리들 사역자들의 기업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그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기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부름을 받고 택함을 받아 사역자로 종으로 세움 받음을 믿고 인정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합시다. 성도들 앞에서 정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깨끗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실제가 되는 그런 삶을, 적어도 우리 목회자들만이라도 살아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출처: USA아멘넷/ 교회는 하나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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