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아멘넷에 올렸다가 자삭한 글입니다.  John MacArthur 목사님의 Extreme Tolerance를 번역하였습니다. 잘못 번역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얼마나 아멘넷에서 버틸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참고 자료로 남깁니다.

전에는 교리(doctrine)에 세심하고 성경적이었던 많은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이, 교인이 아닌 사람들(unchurched people)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빠르게 교리에 문외한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30여년 간 전에는 건전하였던 교회들이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끌어 들이기 위하여, 진리로 부터 벗어난 가장 최악의 급조한 교리 조차 분간 못하는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복음주의의 교회가  광신자(cultists), 정통파가 아닌 미디어 설교자(media preacher), 또한 다른 유(other sources)의 거릇된 교리의 가장 심각한 오류(the most profound errors)조차도 답변에 응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점차로 어떤 이슈(issue)에도 명확한 입장을 취하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의 문화는 분별력(discernment)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사실 후기근대의 배경(the postmodern perspective)은 분별력에 대하여 단순히 적대적인 이상으로, 실제적으로 극과 극의 정반대입니다(polar opposite). 어떤 것을 "진리(true)"로 그리고 그 대조(antithesis)를 "오류(error)"라고 선언하는 것은 후기근대의 최후의 난공불락의 교의(one last impregnable dogma)에 대한 침해(breach)입니다. 그 이유는 영적(spiritual), 도덕적(moral), 또는 윤리적인 일(ethical matters)에 강경한 의견을 말하는 것은 후기근대주의자에게는 가장 세련되지 못한 일(uncouth)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판결(most important convictions)은 가능하다면 늦추기를 기대합니다. 어떤 것을 확신(certainty)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고, 그리고 원리나 교리의 어떤 것(any point of principle or doctrine)에 대하여 얼버무리지 않는(refuse to equivocate) 사람은 그러므로 자동적으로 가장 옹졸하다고 낙인이 찍힙니다. 진리에 대한 열심(zeal for the truth)은 정치적으로 틀린 것(politically incorrect)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만사를 "허용(tolerance)"하는 분위기에서는 성경적인 분별력(biblical discernment)은 실제로 조금도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세속의 영역에서, 후기근대의 지나친 허용(extreme tolerance)을 수 십년간 엔터테인먼트 미디아(entertainment media)에 의하여 의심하지 않는 대중에게 슬그머니 속여 팔았습니다(foisted). 날마다 텔레비전의 넘치는 토크 쇼(a plethora of talk shows)가 그 길을 열었습니다. Phil Donahue가 그 형태(format)를 수립하였습니다. Jerry Springer는 어이 없는 과격한 상태(ridiculous extremes)로 몰고 갔습니다. Oprah는 그래도 다소 고상하고 세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쇼들은 날마다 보는 자들로 하여금 지나치게 자신의 의견에 사로잡히지 않토록 상기시키고 , 그리고 가장 기괴하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여러가지 급진적인 "평범하지 않은 대체적인 삶(alternative life)"의 극단적인 지지를 청중들의 코 앞에서 과시합니다. 여러가지 정도에서 벗어난 주변문화(aberrant subcultures)의 명백한 자기 파괴의 충동에 충격을 받거나 인지하지 않도록 만듭니다. 핵심은 마음의 영역을 넓히고 허용의 정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가치관을 비판하는 것은, 성경적인 분야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기 위하여 종교적인 신념을 인용하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철저히 종교적 이단자에게 퍼 붓던 그런 경멸의 대상이 됩니다. 이러한 문화가 모든 성경적인 표준에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소수의 크리스찬들이 의식없이 이러한 일들을 몇 년전에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으로 교회 안의 온 세대가 후기근대의 상대주의(postmodern relativism)를 공개적이고 고의적으로 받아 들이도록 문을 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진리를 순수한 흑백의 명백함으로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옳고 그른 것, 진리와 오류, 좋고 나쁜 것을 고의적으로 회색으로 칠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조차도 진리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고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명확함도 후기근대의 사람들의 귀에는 공격적인 소리로 들립니다.

한 젊은 교역자는 "설교한다"는 말의 권위적인 암시를 싫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설교사역을 사람들과 "의견을 나눈다(sharing)"는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역은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평(comments)이 아마 오늘날 교회 안의 보편적인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D. Martyn Lloyd-Jones는 수십년 전에 이러한 경향을 지적했습니다. 그의 놀랄만한 저서 "Preaching and Preachers"는 설교한다는 자체가 현대사회에서는 불편한 일이 되어 간다는 것을 언급하며 시작합니다.

설교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조금씩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가지 형식을 취합니다. 그중의 중요한 하나는 예배에 있어서 설교(sermon)라는 말 대신에 "강연(address)"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자체가 아주 미묘한 변화를 암시합니다. "강연(address)."  더 이상 설교가 아니라 "강연" 이나 강의(lecture).....한담(chat), 화롯가의 한담, 조용한 대화(quiet talks)등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Lloyd- Jones는 단순히 후기근대주의의 명확성과 권위에 대한 경멸의 미묘한 전조의 하나를 지적하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싹이었던 것이 지금은 아주 큰 괴물이 되었습니다.

2004년의 "Emergent Convention"에서, Emerging Church 운동에 관여하는 약 1100명의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Doug Pagitt는 회중에게 "설교가 무너졌다(preaching is brocken)."고 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참가자들에게 동등한 완전히 열린 대화(open conversation)의 광장이 후기근대의 문화에 적합하다고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왜 나는 30분간 말을 하는데 당신은 듣기만 하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는 "설교는 하나의 난폭한 행동이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설교가 그 자리에 않아서 들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의지에 거스르는 폭행이다."고 하였습니다.

Rudy Carrasco는 설교를 단순히 후기근대의 시기에 걸맞지 않는 일방적이고, 너무 권위적이고, 너무 딱딱한 것이라고 동의하였습니다. "매일, 매주, 살면서 자질구레한 일들이 생긴다, 그리고 해결이 되지않아, 미칠 것 같고 혼동이 되고 괴롭다. 사람들이 세가지 답변을 뜻밖에 찿았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고(they know everying), 그들은 그것을 강경하고 권위적으로 말한다(they have this iron sheen about them), 나는 들을 수가 없다(I'm turned off) .....정말 나는 들을 수가 없다. 나 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오래된 시대사조(in the spirit of the age)에 붙잡혀서 크리스찬은 어떤 강경한 입장을 취하여서는 안되고, 아무 것도 논쟁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논쟁도 하지(engage in polemics)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왜 진리의 긍정적인 면만 말하고 당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의견은 버리지 않느냐? "고 따지며, " 부정적인 것은 잊어버리고 모든것을 긍적적으로 생각하라, 왜 맑은 물에 돌을 던져 흙탕물로 만드느냐?(why not steer clear of controversy)"고 말합니다.

이런 풍조로 인하여 더 이상 성경적인 이슈들을 직접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방법으로 다루지 않게 되었습니다. 명확한 방법으로 진리를 선포하는 자는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최악의 경우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잘못되었다고 하면 불평분자로 낙인이 찍힙니다. 타협(compromise)하는 것이 미덕이 되었고 진리에 대한 전념(devotion to truth)은 남을 공격하는 것이다(offensive)고 말합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운동의 많은 이슈들이 타협되어가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명백하게 동성연애(homosexuality)를 거절합니다. 간음(adultery)에 대한 크리스찬의 입장은 전혀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할 것인가란 질문은 명백히 설명되었습니다. 성경은 어느 크리스찬이 다른 크리스찬을 세상의 법정에 서게하는 것을 아주 명료하게 금하였습니다. 이기심(selfishness)과 자만(pride)은 명백히 죄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것은 회색의 영역이 아닙니다. 타협할 틈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슈들까지도 크리스찬 방송, 크리스찬 텔레비젼, 그리고 크리스찬 서적에서 회색 영역으로 다루는 것을 계속적으로 듣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협상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많은 크리스찬 지도자들이 기꺼이 호의를 보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명확한 일들도 권위있게 말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진리와 오류, 지혜와 우둔,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는 선이 이런 방법에 의하여 제도적으로 말살되었습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크리스찬은 오히려 세상과 대조적인 견해(antithetical worldview)를 받들고, 진리와 윤리에 대하여 흑백의 명확함으로 대답할 수 있는 성경적인 올바른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이고 부동적인 진리가 없으면 구원(salvation)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협하고, 변하고, 묵인하는 여론(tolerant opinion)은 Carrasco가 날마다 겪게되는 " 미치고 혼동이 되고 괴로운" 이슈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진리만이 구원(save)하고 죄를 씻어주고(sanctifies) 희망(hope)을 줍니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성경적인 진리를 옹호하는 이 세대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두려워 하고,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그리고 지나친 허용의 세대에 주님의 진리를 높이 들 수 있도록 주님께로 부터 오는 능력과 용기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출처: USA 아멘넷/ 번역: 김준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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