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1596

얼마 전 칼뱅주의 논리적 구조에 관한 글을 기고했는데 기고문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제3자는 될 수 없습니다." 제3자가 될 수 없다고? 왜? 대체 그이는 무슨 이유로 필자가 제3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가? 이러한 양자택일의 압박은 필자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부터 늘 받아왔던 것이다.

아무래도 필자가 속한 교단이 침례교단이다 보니 신학교에도 칼뱅주의자와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함께 모여 공부를 했다. 그래서 허구한 날 칼뱅주의 vs.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필자가 썩 유쾌하지 않았던 건 논쟁을 벌이던 학우들 중 몇몇은 늘 필자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했던 것이다. "너는 어느 입장이냐?" 흑이냐 백이냐를 묻는 그들이 나에게 보인 태도는 그 댓글과 같은 태도였다. 이름 하여 '3자 불허!'

나는 이렇게 3자 불허를 외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대체 무슨 근거로 제(諸)기독 신자가 칼뱅주의 아니면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베드로와 요한, 바울 그리고 심지어 예수조차도 칼뱅주의자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중 하나를 택했어야 했다는 말인가?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이 지금까지 그토록 치열하게 지속되어 온 이유는 두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 모두가 둘 중 하나 아니면 안 된다는 3자 배제 원칙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칼뱅주의 아니면 아르미니우스주의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에 동의할 수 없다.

필자가 3자 배제 원칙을 거부하는 이유는 먼저 이들이 감히 광대한 기독교 신앙을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단 둘로 압축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분법적 태도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양분하려는 자기중심주의와 별로 다르지 않다. 사실 3자 배제 원칙을 주장하는 이들은 둘이 모순 관계이기 때문에 필경 하나는 진리고, 하나는 오류일 수밖에 없으니 진리의 편에, 즉 자기 편에 속하라고 늘 압력을 가하려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답변은 이것이다. '싫다~!'

앞글에서도 잠깐 밝힌 대로 3자 배제 원칙을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매우 성서적이며, 그들의 논쟁이 성서의 내용에 충실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3자 배제 원칙은 결코 성서적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논리학의 3법칙 중 배중율(排中律)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논리적으로 봤을 때에도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모순 관계가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은 스펙트럼을 짜 보자. 만일 신의 주권을 전적으로 강조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철저히 약화시키는 태도의 극단을 1이라 하고, 반대로 신의 주권을 철저히 약화시키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강조하는 태도의 극단을 10이라고 해 보자. 이런 스펙트럼에서 1은 이슬람 숙명론쯤 될 것이고, 10은 무신론적 인본주의쯤 될 것이다. 내가 볼 때 칼뱅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이 스펙트럼에서 2~9 사이 어디쯤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1<--------------------------------------------------------------------------> 10
이슬람 숙명론 (칼뱅주의 vs.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 무신론적 인본주의

다시 기독교 신앙의 범주 내에서 위의 스펙트럼을 다시 짜 보자. 그렇다면 1은 하이퍼칼뱅주의쯤 될 것이고, 10은 펠라기우스주의쯤 될 것이다. 이 스펙트럼 상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아마도 2부터 9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것인데, 필자 생각에 요한 웨슬리 같은 복음적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대충 3~4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 않을까 싶다.

1<---------------- 3-----4---------------------------------------------------> 10
하이퍼 칼뱅주의/ 복음적 아르미니우스주의/ 펠라기우스주의

어거스틴의 예정론

이 스펙트럼이 보여 주는 바는 무엇인가? 만일 기독교 신앙의 범주 내에서 칼뱅주의의 카운터파트를 찾는다면 펠라기우스주의이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로 카운터파트가 아니니 둘은 모순 관계도 아니다. 단지 두 입장의 주장 중 상호 모순되는 것들이 존재할 뿐이다. 결론은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다양한 여러 견해의 스펙트럼 가운데 서로 다른 지점에 위치해 있는 몇몇 입장일 뿐이다.

위에서 보다시피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칼뱅주의와 펠라기우스 중간 어디에서 절충적 입장을 택하고 있다. 굳이 라벨링을 하자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수정-펠라기우스/수정-칼뱅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복음적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성향상 칼뱅주의에 더 가깝기 때문에 수정-칼뱅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물론 칼뱅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수정-칼뱅주의로 부르는 것을 무척 싫어하겠지만…. 그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칼뱅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교리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어쨌거나 이런 이유로 제(諸)기독 신자가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둘 중 하나를 양자택일해야 한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펠라기우스는 누군가? 그는 신학적으로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과 동시대 사람으로서 어거스틴의 신학적 숙적이었다. 어거스틴의 예정론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생겨난 결과물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고전적 논쟁은 칼뱅주의 vs.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아니라 어거스틴 vs. 펠라기우스 사이에서 벌어졌던 논쟁에서 찾아야 한다. 칼뱅주의 vs.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은 사실 6세기에 있었던 고전적 논쟁이 1000년 뒤 각색되어 다시 리메이크한 것이다. 그 때문에 칼뱅주의 vs.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펠라기우스주의를 간단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편의상 튤립 교리의 구조를 따라 간단히 설명해 보자.

1) 타락에 대해 -> 펠라기우스는 타락을 아담 개인에게만 국한시키고 죄의 유전이나 원죄 등을 거부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아담처럼 타락 없이 무죄 상태에서 출생한다. 인간이 죄인이 되는 이유는 부모의 죄를 모방하기 때문이다.

2) 선택에 대해 -> 하나님의 선택 같은 건 없다. 만일 선택이 있다면 그건 인간이 스스로의 운명에 대해서 스스로 선택할 뿐이다.

3) 속죄에 대해 -> 인간의 본성이 무죄 상태이니 그리스도의 속죄도 사실상 무의미하다. 모든 인간은 자기에게 있는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의지를 활용하여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4) 은총에 대해 -> 흥미롭게도 펠라기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의 자력 구원을 강조하면서도 그가 은총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방할 수 있는 올바른 모범, 즉 100% 완전한 교과서를 내려 주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올바른 모범으로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선물이고 은총이다. 우리는 예수를 모방함으로써, 혹은 그를 따름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

5) 견인에 대해 -> 인간이 스스로 구원하기에 자신의 구원을 지키는 자도 자기 자신이다. 견인은 인간 자신의 의지에게 달려 있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에서 바울이 신랄하게 비판했던 행위 구원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어거스틴은 이를 탄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어거스틴의 예정론의 대략이 생겨난다.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종교개혁 신학에 맞춰서 논리적으로 더욱 일관성 있게 정교화한 것이 칼뱅주의 예정론이라 할 수 있다.

칼뱅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펠라기우스주의라고 부르기 좋아하지만 사실 아르미니우스주이자들은 펠라기우스를 매우 강력하게 거부한다. 그런데 그들은 동시에 칼뱅주의의 경직성과 완고함에도 거부감을 표한다. 즉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어거스틴-칼뱅주의도 거부하고, 동시에 자력 구원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도 거부함으로써 제3자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사실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의 후대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는 칼뱅주의자로 신앙하고 신학했던 사람이다. 그러다가 점차 칼뱅주의를 떠나면서 칼뱅주의자들과 적지 않은 갈등을 겪게 된다. 칼뱅주의 vs.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이 본격화된 것은 그가 죽은 뒤였다. 1609년 그가 죽은 지 1년 후 그의 추종자들이 전통적인 칼뱅주의에 반대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아르미니우스주의 5대 교리를 네덜란드 교회회의에 제출했는데 이때 이들의 5대 교리는 칼뱅주의에 대한 명백한 저항 선언이었다. 저항했다 해서 이들 아르미니우스의 후예들을 '항론파(Remonstrance)'라 부르게 된다. 칼뱅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 5대 교리를 반대하기 위해서 칼뱅주의 5대 교리를 확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앞글에서 소개한 튤립 교리라 불리는 도르트신조다.

그렇다면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말하는 5대 교리는 무엇인가? 그들의 입장을 역시 편의상 튤립교리의 구조를 따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미리 밝혀 두는 바이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상당히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기에 필자의 용어와 개념이 모든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포괄한다고 자신할 수 없다).

Natural Inability(자연적 무능력) :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나 하나님의 은총에 반응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남아 있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되었다.

Conditional Election(조건적 선택) :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을 자를 미리 아시고 그들만 자기 백성으로 선택/예정하신다. 여기서 복음을 믿는 것이 선택의 조건이 된다.

Unlimited Atonement(보편 속죄)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차별 없이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Resistible Grace(거부할 수 있는 은총) : 하나님께서 베푸신 십자가의 은총은 이를 믿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믿지 않기로 거부할 수도 있다.

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인내) : 신자는 인내로써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신자를 붙드신다.

이를 좀 더 부연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자연적 무능력 :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를 가르는 분기점은 전적 타락 교리에 있다. 칼뱅주의는 '구원에 관한 한' 인간에게는 아무런 능력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그래도 뭔가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남아 있다고 말하면 '전적' 타락이 부정되어 펠라기우스주의로 신속하게 빠져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회복'되었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즉,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복음을 깨달을 수 있는 지각, 하나님의 은총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 복음을 믿을 수 있는 능력, 결단과 그에 대한 책임 등을 회복시켜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선행은총'이다. 하나님께서는 은총으로 타락 직후 모든 인간 안에 이러한 최소한의 능력과 자질을 회복시켜 주셨다.

2) 조건적 선택 : 선행은총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복음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반응을 기대하시고, 요구하신다. 인간이 해야 할 반응은 자발적인 믿음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반응을 보시고 자기 백성을 선택/예정하신다. 그 때문에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께서 택자는 물론이고 유기하실 자도 아울러 예정하셨다는 이중 예정을 부정한다. 또한 무슨 이유로 어떤 자는 택자로 정하시고, 어떤 자는 비택자로 정하시는지 알 수 없다는 무조건적 선택도 거부한다. 그 때문에 그들에게 예정의 신비는 불필요한 가설이 된다.

3) 보편 속죄 : 모든 인간에게 복음을 믿을 능력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이것이 보편 속죄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보편 속죄를 종종 보편 구원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보편 속죄와 보편 구원은 다르다. 보편 구원이란 믿든 안 믿든 모든 인간을 하나님께서 전부 다 구원하신다는 뜻이고, 보편 속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위해서 차별 없이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는 뜻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예수께서 택자만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제한 속죄를 하나님의 차별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리고 그들은 '차별 없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을 사람뿐만 아니라 믿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서도 똑같이 피를 흘리셨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선택은 인간의 몫이다.

4) 거부할 수 있는 은총 : 모든 인간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이제 인간이 반응할 차례다. 복음을 믿고 주님을 영접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지만, 믿기를 거부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 자, 어떻게 할 텐가? 요한계시록 3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예수는 문밖에 서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지만 억지로 문을 부수고 들어오시지는 않는다. 주님은 우리가 문을 열기를 기다리신다. 만일 문을 열면 주님이 들어오시지만 열지 않으면 주님은 들어오실 수 없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이러한 자발주의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될 수 있는 은총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거부할 수 있는 은총론이 믿을 사람은 손들어 보라는 식의 제단초청(altar calling)을 할 수 있게 만들고, 영접기도라는 것이 가능하게 만든다.

5) 성도의 인내 : 영어로 perseverance of the saints를 칼뱅주의자들은 신자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견인'으로 읽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신자의 '인내'로 읽는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신자가 믿기로 결정했으니 신앙을 지키는 것도 그가 할 일이라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옆에서 그를 붙들어 주신다. 하지만 결국 그 자신이 자신의 신앙을 붙들어야 한다. 그 때문에 신자가 스스로 믿음을 포기하면 그의 구원은 취소된다. 이러한 이유로 칼뱅주의 교리에서 배교는 불가능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 배교는 가능하다.

눈치챘을 테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 역시 칼뱅주의와 비슷하게 첫 번째 교리로부터 마지막 교리까지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논리적 체계다. 이렇게 양 체계 모두 미학적으로 산뜻하고 아름다울 정도로 하나의 완성된 논리 체계를 이룰 수 있는 이유는 칼뱅주의자들이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나 모두 중세 스콜라철학을 자신들의 신학 방법론으로 차용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바로 이 스콜라철학 때문에 두 신학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칼뱅주의에 비해 논리적 엄격함이나 완고함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왜일까? 필자가 보기에 그 이유는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칼뱅주의의 수정을 시도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소위 정통이라고 일컬어지는 칼뱅주의를 일부(칼뱅주의자들은 전부라고 주장) 수정하려 한다. 하지만 앞에서 봤듯이 칼뱅주의는 일부를 수정할 수 있는 체계가 아니다. 그건 아예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이단으로 낙인찍히거나, 논리적 모순을 범한다고 비웃음을 사게 될 뿐이다. 그 때문에 칼뱅주의 입장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어쩌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도를 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창작한 여러 논리적 장치들은 이런 시도들 때문에 생겨난 것들로서 좀 궁색해 보인다. 이것이 칼뱅주의를 더욱 공세적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더욱 수세적으로 만드는 이유다.

칼뱅주의는 1000년 전 어거스틴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이런 점에서 칼뱅주의는 역사적 특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어거스틴-칼뱅의 전통을 수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칼뱅주의 vs.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논쟁을 정통주의와 개량주의의 싸움으로, 혹은 순혈주의와 수정주의의 싸움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역사가 아르미니우스주의 편으로 점점 기울어 왔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아르미니우스주의가 근대의 시대정신을 더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자신이 결핍한 역사적 정통성을 당대의 시대정신으로 메웠다. 특히 계몽주의의 개인 인권에 대한 무한한 존중과 개인이 자신의 운명과 신앙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하는 자율적 인간관, 평등주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출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정신이 논리적으로는 다소 수세에 몰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아르미니우스주의가 근대인들에게 설득력을 얻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칼뱅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세속주의에 물든 기독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칼뱅주의자들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신학이 시대정신과 대화하며 생겨나고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종종 간과한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논리적으로 보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기본적으로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고 한다. 즉 그들은 펠라기우스의 자력 구원을 엄중하게 반대한다는 점에서 칼뱅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칼뱅주의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과도하게 제거한 점을 비판한다. 다른 말로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토끼와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토끼를 다 잡고 싶어 한다. 그들의 논리적 약점은 여기서 생겨난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그들은 장치들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전적 타락이라는 전통적인 교리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는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 은총, 원죄 등을 그대로 인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복음을 들으면 깨닫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으며,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면서도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은' 인간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서 '선행 은총'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선행 은총이란 아담의 범죄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칼뱅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님을 사모하고, 복음을 깨달으며, 반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과 자율성, 책임을 회복시켜 주셨다고 말한다. 타락 직후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부어 주신 '선행 은총'이라는 것인데, 문제는 이것이 성서의 증거를 심각하게 결여하고 있다. 선행 은총론은 성서보다는 경험과 이성의 산물처럼 보인다. 이것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논리적 장치다. 그런데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이 선행 은총론의 기초 위에 자신들의 모든 논리를 세워 놓았다. 그러니 위태로울 수밖에….

이런 식의 필요에 의한 창작은 예정에 관한 교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칼뱅주의의 이중 예정과 무조건적 선택을 거부한다. 하나님은 사실 하나님이 영원 전에 예정한 것은 택자, 비택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믿는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기로 예정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복음을 믿기로 결단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비택자를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또 선택이 무조건적이지도 않다. 믿음이 선택의 조건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논리적으로 인간의 믿음의 결단이 하나님의 선택보다 앞서게 된다. 왜냐하면 믿음이 하나님의 선택/예정의 조건, 즉 원인이 되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이 믿을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시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가? 하나님은 과연 전지전능하신가?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논리적 순서와 시간적 순서를 뒤바꾼다. 논리적으로는 언제나 늘 인간의 믿음이 먼저고 하나님의 예정이 나중이 된다. 하지만 시간적으로는 그가 믿을지 안 믿을지를 하나님께서는 더 먼저 아신다.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력 때문에 시간적으로 하나님의 예지가 먼저다. 그리고 이 예지에 기초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기 백성으로 선택/예정하신다. 이것이 바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예지예정설이다. 이처럼 칼뱅주의에 대한 수정 -> 문제 발생 -> 문제 해결을 위한 창작… 이 사이클이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는 반복된다.

다시 하나님의 예지 예정으로 돌아가 보자. 만일 믿을지 안 믿을지를 전적으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가? 결국 다 아신다는 얘기는 다 프로그램하셨다는 뜻이 아닌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예지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중간 지식'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에게는 두 가지 지식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가능태에 관한 필연적 지식(scientia mecessaria)과 현 실태에 관한 자발적 지식(scientia voluntaria)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하실 일을 알고, 또 하지 않으실 일이지만 그것도 다 아신다, 뭐 이런 뜻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식의 기초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행동이 된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제3의 지식, 중간 지식(scientia media)을 가지고 계시다고 주장한다.


중간 지식은 뭔가? 어려우신 분들은 건너뛰셔도 좋다. 중간 지식이란 비유로 쉽게 말하면 바둑의 고수가 초심자와 바둑 둘 때 초심자의 바둑 수를 미리 내다볼 수 있는 능력과 유사하다. 초심자가 딴에는 무지 고심해서 바둑을 두지만 고수는 자신이 어디다 돌을 놓으면 초심자가 그다음 어떤 식으로 돌을 놓을지를 훤히 꿰뚫고 있다. 고수가 초심자의 수를 내다본다고 해서 고수의 예지력이 초심자의 의지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이것은 제갈공명이 적벽대전에서 보인 지략과도 비슷하다. 공명은 뛰어난 지략으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면 조조군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를 훤히 내다본다. 공명은 조조군의 의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행동을 내다보았고 이 예지력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행동을 훤히 내다보실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예지력은 바둑의 고수나 제갈공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 이때 하나님의 예지 능력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인간은 나름 고심해서 자신의 자유의지로 뭔가를 결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뭘 결정할지를 다 꿰뚫어 보신다. 중간 지식은 이렇게 이해하면 쉽다. 하나님께서는 이 중간 지식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줄 때 어떤 사람이 복음을 믿기로 결단할지 안 할지를 훤히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작정하신 뜻에 따라 믿기로 결단할 자를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이 논리적으로는 인간의 결단에 뒤따르지만 시간적으로 앞서기 때문에 예지에 기초한 예정이 된다. 통상 이러한 예정론을 '예지 예정'이라 부른다. 그리고 칼뱅의 예정론은 '예정 예지'가 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예지 예정'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는다.


대체 이런 복잡한 이론이 왜 필요한가? 이유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전지전능성을 동시에 붙잡기 원하기 때문이다. 선행 은총도 마찬가지지만 중간 지식이라는 게 성서 계시에 기초했다기보다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필요 때문에, 그리고 논리적 체계를 완성하기 위한 필요 때문에 창작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논리적 창작에도 불구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새로운 문제와 부딪히게 된다. 시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이 인간의 믿음의 결단보다 앞서기는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언제나 늘 인간의 믿음의 결단이 앞서고 하나님의 선택이 뒤따른다. 인간이 결단하면 하나님은 그 결단을 늘 언제나 받아들이셔야만 한다. 마음에 안 드는 결정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따라서 엄격하게 말하자면 예지만 있지 예정은 없다.

더 나아가 논리적으로 보면 결국 주권은 인간에게 있지 하나님에게 있다고 할 수 없다. 선택은 하나님의 몫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배경을 만들어 주신다. 하지만 결정적인 선택은 인간이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믿음을 늘 언제나 승인하는 배경으로 전락하게 된다.

주권이 인간에게 넘어감으로써 하나님은 죄의 창조자 혐의를 벗게 된다. 칼뱅의 예정설은 자칫 하나님을 죄의 창조자로 만들 수 있는데 반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죄의 책임을 하나님이 지실 필요가 없다. 책임은 이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복음을 들어 보지도 못하고 죽어 간 이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설명해야 할 또 다른 책임을 지게 된다. 처음부터 믿음을 결단할 기회조차 없었는데 그건 누구의 책임인가? 이처럼 설명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복음을 들어 보지도 못하고 죽어 간 이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신학적 변증보다는 행동주의라는 전략을 취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거야." 하나님의 책임을 따지고 앉아 있기 전에 어서 일어나 복음을 전하러 가자! 이처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이 인위적인 전략과 기술 과잉으로 오염되기도 하지만, 소극적인 신자의 태도를 적극적인 태도로 교정하는 데 효과적이다. 이것이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강점이고, 근대인에게 매력적인 측면이다.

구원의 확신을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것도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또 다른 매력이다. 구원의 확신, 혹은 신앙의 확신은 칼뱅주의에서도 강조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궁극적인 선택의 신비는 구원의 확신의 확실성을 늘 반감시킨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 체계에서 그런 류의 신비는 없다. 따라서 칼뱅주의보다 훨씬 더 명료하고 분명하게 '구원의 확신'을 선포할 수 있다.

어떻게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알 수 있는가? 믿기로 결단하면 된다. 물론 여기서 과연 '진실로' 결단했느냐는 문제가 생기기는 하겠지만… 편의상 복음주의자들은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겠다고 하면, 그리고 예수님을 마음속에 구주와 주로 영접하면 그를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간주해 왔다. 이때 내가 믿는 것을 내가 알 수 있고 남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은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구원의 확신이다. 이러한 확실성은 자신이 택자인지 비택자인지 알 수 없어서 전전긍긍해 하던 사람들에게 큰 매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구원의 확신도 칼뱅주의처럼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다. 왜냐? 마지막 교리인 배교 가능성 때문이다. 사실 배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성도의 인내' 교리는 꽤 성서적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여러 본문에서 믿음의 파선과 배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를 엄히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히브리서에서는 배교를 경계하는 고전적 본문들이 수두룩하다(물론 칼뱅주의자들은 이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 능수능란하지만…).

그런데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체계 내에서 배교 가능성에 대한 교리는 구원의 확신을 결국 불확실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구원의 확신은 '지금 여기'에만 국한된다. 미래까지 확신할 수 없다. 자신이 배교할지 모르니 말이다. 하나님을 믿을 수는 있어도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 아닌가? 그러니까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만이 구원의 확신을 100% 자신할 수 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주장할 수 없다. 칼뱅주의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불확실성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구원의 확신이 살인 면허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다. 내가 믿고, 내가 믿는다는 것을 내가 알고, 그래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아르미니우스주의다. 하지만 그 구원은 결코 보장된 것이 아니다.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구원의 확신을 비교해 보면 '조삼모사'다. 왜냐하면 칼뱅주의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지만 그대가 택자인지 비택자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그대가 구원받은 건 확실하지만 그 구원이 영원히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둘 다 안심할 수 있는 체계는 아닌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배교 가능성에 대한 가르침은 칼뱅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기독 신앙에 긴장을 부여한다. 칼뱅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을 신비로 돌림으로써 택자와 비택자를 100% 확실히 확신할 수 없다며 기독 신자들에게 긴장을 부여했다. 이 긴장이 신자들로 하여금 윤리적 실천을 결과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100% 확실히 알 수 있지만 그 구원이 언제 상실될지 모른다는 것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지키고, 이루어 가야 한다며 긴장을 부여한다. 구원은 감격하고 감사해야 할 선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끝까지 마저 이루어 가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한 웨슬리의 완전성화론을 이해할 수 있다. 구원은 지금 받아 누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루어 가야 하는 과제다. 그리고 우리가 이루어야 할 과제의 궁극은 예수 그리스도다.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모든 신도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도록 힘써야 하며, 또 그렇게 될 수 있다. 이것이 요한 웨슬리를 비롯한 감리교인들이 전통적으로 개인적 삶뿐만 아니라 사회적 실천에 모범을 발휘할 수 있는 신학적 이유다.

신광은 / 대전 열음터교회 담임목사·<메가처치 논박> 저자

출처:USA 아멘넷/기다림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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