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습목사다.
<교회세습논쟁➀>

입력 : 2012년 07월 25일 (수) 11:41:43 / 최종편집 : 2012년 07월 25일 (수) 19:02:56 [조회수 : 973] 김명섭onthewaychurch@hotmail.com

기독교 대한 감리회 홈페이지에 때아닌 “세습 논쟁”이 한창이다. 이에 강릉예향교회 김명섭 목사가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자신의 글을 당당뉴스에 보내왔다. - 세상과 교회의 다리, 당당뉴스는 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언제나 환영합니다.(당당뉴스 홈피 ‘나도기자’ 메뉴 참조)

지난 7월 18일 김명섭 목사가 감리교선거와 관련해서 “H목사를 감독회장 단일후보로 추대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후, 감리교 게시판에는 목회자 세습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논쟁의 한 가운데 서있는 김명섭 목사는 이 글이 단순히 ‘세습논쟁’을 넘어 ‘감리교회의 근본적인 개혁’에 관해 진지하게 성찰해 보는 단초가 되기를 소망한다는 뜻과 함께 자신의 글 전문을 보내왔다.

이에 당당뉴스는 총 5회에 걸쳐 김명섭 목사의 글을 연재 할 예정이다. - 당당뉴스는 댓글이나 혹은 논쟁적인 글쓰기를 통해 독자님들의 많은 의견을 기다립니다.  본 글은 감독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감리교회 내부의 논쟁이며, 개신교 전체에 대해 일반화할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편집자 주.




<교회세습논쟁➀>
나는 세습목사다.

1. 나는 목회세습을 했다.

   
▲ 김명섭 목사
(강릉예향교회)

세습의 사전적 정의는 ‘한 집안의 재산이나 신분, 직업 따위를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음’이다. 편의상, 재산(교회)이나 신분(담임자)을 물려주는 것을 ‘교회세습’이라고 하면, 직업(직분)을 물려주는 것은 ‘목회세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목회세습을 했다’ 나의 아버지는 목사님이셨고, 나도 목사인 까닭이다. 좋게 말하면, 2대째 목회자 집안이다.

나의 아버지는 감리교회의 평신도 출신으로 40대 중반에 감리교총회신학교(협성)에서 공부하시고 감신대 선교대학원을 졸업하셨다. 뒤늦은 목회로 험난한 인생역정과 우여곡절 끝에 60대가 되셔서 ‘연령제한으로 인해’ 장로교(대신측)에서 목사안수를 받으셨다. 몇 해 전 불의에 사고로 작고하셨지만, 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시지 전까지 시골에서 이름 없고 빛도 없는 무명의 목회자로 생을 마감하셨다.

내가 ‘목회세습’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과장이 아니다. 내가 목회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영향인 탓이다. 사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지만, 아버지가 뒤늦은 목회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입신양명을 꿈꾸던 나는 다른 일에 헌신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아버지로부터 신학과 신앙에 엄청난 무형의 유산들을 아낌없이 대물림해서 물려받았다. 그 가운데 으뜸은 ‘목사의 자존감’이다. 다른 이들은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어마어마한 유산이다.

2. 나는 교회세습도 했다.

나는 엄밀히 말하면 ‘교회세습’도 했다. 그 이유는 지나칠 정도로 정의롭고 강직하신 나의 아버지 때문에 지금 나의 목회지에 부임했기 때문이다. 내가 10년째 담임하고 있는 교회는 2년간 세 명의 담임자가 바뀌고, 세 번이나 이름을 바꾼 실로 ‘사연 많은(?)교회’였다. 내가 그 3번째 담임자였고 ‘강릉예향교회’는 벧엘, 온누리에 이은 3번째 이름이다. 이런 이유로, 부임할 당시 우리교회는 강릉지방의 유력한 목사님의 괘씸죄에 걸려 ‘절대인준불가판정’을 받았다. ‘누구든지 부임해오면 죽는다(?)’고 공포하신 까닭이다. 누가 봐도 밟으면 죽는 부비트렙이였다. 실제로 나는 6개월간 파송을 받지 못했다.

수련목 1기로 33세에 때늦은 목사안수를 받고 고민하는 나를 대신해서 내 아버지께서는 선뜻 교우들에게 부임결정을 약속하셨다. “감리교목사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아골 골짝 빈들이라도 복음전할 수 있으면 그만이지요, 이렇게 어려운 교회라서 우리 김목사를 보내셨다고 믿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나는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우리교회에 담임목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상가 월세교회를 졸업하고 200평대지 위에 150평의 교회건축을 준비하고 있는 남부럽지 않은 교회가 되었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목회적 어려움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때마다 내 아버지는 나의 멘토가 되셨고, ‘지혜’와 ‘용기’, ‘인내’와 ‘헌신’ 아버지의 유산은 빛을 발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내 아버지가 물려주신 믿음의 유산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3. 나는 교회세습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는다.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는 ‘목회세습’과 물질적인 유산을 물려주는 ‘교회세습’의 정확한 차이점을 나는 잘 모르겠다. 예를 들면, 아무도 가지 않는 오지에 있는 소위 영구미자립교회를 세습했다면, 그건 도리어 칭찬 받을 일 아닐까? 혹은 갚을 수 없는 빚더미에 앉아 희망 없는 교회를 물려받았다면, 그건 도리어 십자가를 지는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교회세습을 비판 할 때, 나름의 특수한 사정과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으로 타인의 중심을 함부로 제단하는 ‘일반화의 오류’을 경계하고 정면으로 거부한다.

물질적인 유산을 물려주는 ‘교회세습’과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는 ‘목회세습’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득권 곧 물질(돈과 부동산)의 차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형의 유산을 대물림하는 ‘목회세습’은 문제 삼지 않고, ‘유형의 자산을 대물림하는 교회세습, 그것도 대형교회의 세습만을 유난히 비판하는 숨겨진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가치는 하찮게 여기고,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가치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물질주의적인 가치판단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비판하는 대상의 오류를 스스로 범하고 있는 격이다. 욕하면서 사실은 부러워한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오늘날 대형교회의 목회자들과 교회세습을 한 목회자들만 성공주의, 성장주의, 물질주의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세습과 무관한 대다수의 목회자들 역시 동일하게 성공과 물질,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둘의 차이는 한쪽은 이미 이루었고, 한쪽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나는 ‘교회세습’ 말할 때, 교회세습을 한 이들의 부와 권력에 대한 탐욕과 더불어, ‘교회세습’을 비판하는 이들의 마음 한편에 있는 부와 권력에 대한 박탈감과 갈망, 시기와 질투를 동시에 본다. 물론, 그들 모두는 아니고 그들 가운데 일부에 해당한다.


4. 나는 비교하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려운 목회실존 속에서 세 자녀를 키우기 위해 일을 하셔야 했다. 신학교시절엔 동네슈퍼를 하셨고, 목회하시면서 회사구내식당도 하셔야 했다. 생활을 위해서... 그래서 아버지의 목회는 늦어졌고 그 희생으로 나는 남부럽지 않게 공부하며 구김살 없이 성장했다. 나 역시 작은 교회를 10년간 담임하면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 전전긍긍 하는 목회현실이 때때로 무척 피로하고 몹시 곤고하다. 말할 수 없는 깊은 절망과 낙심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대형교회목회자들의 호의호식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비교하지 않는다. 목사로 산다는 것은 본래 물질적인 가치가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이것은 무명의 목회자로 인생을 마감하신 내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주신 유산 가운데 하나다.

늘 가난했지만 언제나 숭고함을 잃지 않으셨던 나의 아버지는 늘 내게 말씀하셨다. 고난과 역경은 더 풍성한 삶과 깊이 있는 목회를 경험하게 한다. 무엇보다, 진짜 목사다움을 경험할 수 있다. 목사답게 살면 그것이 목회의 가장 큰 성공이다. 지금 너의 목회현장이 너에게 가장 좋은 곳이다.


5. 나는 그들도 친구(동역자)라고 여긴다.

몇해전, 참석했던 목회자세미나에서 사랑의 교회 오정현목사는 대형교회 목회자를 3D( Difficult, Dirty, Dangerous) 업종 가운데 하나라고 하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허튼소리가 아니라, 옥한흠 목사님의 뒤를 이은 부담감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과연, 대형교회 목회자는 천하태평과 무사안일의 편안하고 안락하기만 할까? 꼭 그렇지 만은 않으리라. 목회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부담인 까닭이다.

소위 아버지의 목회를 이어서 자신이 자란 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하는 분들은 정말, 무사태평하기만 할까?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받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냥, 목사로 사는 것도 힘든데, 탁월한 목회를 감당하고도 아버지의 후광덕분이라고 평가절하 되고, 30년을 넘게 목회하고 환갑이 넘어도 세습목회자라는 지탄을 감수해야 한다. 한 평생을 마음 한구석에 불편한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 목회자들을 나는 동역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냥 하는 빈말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교회세습이 나에겐 둘도 없는 친구(동역자)의 실존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카드빚과 학자금대출로 신학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되어서도 보험회사, 택시운전을 감당하며, 자녀들을 키우고, 가난한 목회적 실존을 해결하기 위해 일하는 이 시대의 수많은 미자립교회 동역자들의 아픔을 안다. 나는 이와 동일한 시선으로 교회세습을 한 목회자들의 남모르는 아픔도 본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들도 나와 같은 친구(동역자)라는 시선으로 서로의 아픔을 바라볼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우리 모두가 해원상생으로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유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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