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 Quite Time 이라는 용어는 이전에 없던 것인데 “영성운동” 이라는 이름으로
1970년을 전후하여 등장한 새로운 훈련입니다.

고요한 시간에 혼자서 조용히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보다는 늘 성경을 읽고 그 말씀대로 실천해 나가는 일이 더욱 중요하겠지요. 책방에 가면 QT를 장려하는 책들, QT 성경구절 책들이 줄비하지만 그 보다는 기독교 교리에 관한 책들 이를테면 Heidelberg Catechism 이나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을 읽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고 본인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기독교가 타락하는 이유, 이단들이 생겨나는 주요한 이유는 성도들이 기독교 기본 교리에 너무 무식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문제는 무슨 무슨 영성운동이니 영적각성운동이니 하여 Tres Dias 니 Alpha Course 니 G12 니 옛날에는 들어보지 못하던 이상한 운동이 교회를 침투하지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운동을 주관하는 목사들은 자기 교회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권장하겠지만 혼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제멋대로 해석하여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바로 해석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일이 급선무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성경 해석의 원칙에 익숙치 못한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QT 를 한다면서 성경구절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실생활에 잘못 적용하고 심지어는 다른 교리를 따라가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이단들은 성경 해석의 원칙 즉 Grammatico-Historical-Theological Interpretation의 원칙을 무시하고 Biblical Theological Method 나 Perspectivalism 에 빠져서 성경을 해석하는데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QT 보다는 성경을 체게적으로 공부하는 교리 공부가 좋은데 그런 공부는 역사적 신앙고백서 (1560년의 Scots Confession, 1561년의 Belgic Confession, 1563년의 Heidelberg Catechism, 1599년의 프랑스 Huguenot 성도들의 French Confession, 1619 년의 Canons of  Dordt, 1647년의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및 그 대소 요리문답, 1996년의 Cambridge Declaration (켐부릿지 선언) 등과 같은 역사적 신앙고백서를 공부시키는 일이 훨씬 권장할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QT 는 잘못하며 성경을 읽지 않고 명상만 하면 이는 가장 위험한 일이고 (성경이 없는 명상은 있을 수 없으며 곧 사탄을 불러 옵니다. 묵상에는 반드시 성경말씀의 봉독이 있어야 함),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고 해도 가령 예를 들어 마태복음 7장 1절 말씀 같은 것을 오해하여 어떤 이단 사설도 용납하고 남의 비판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으면 이는 가장 비성경 적인 일이 됩니다. 지금 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람들중에서 QT 을 권장하는 사람들은 누가복음을 7:1을 잘 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QT 를 바로 하려면 개혁주의 목사님 밑에서 성경의 교리를 바로 배우면서 올바른 교리에 근거하여 방금 읽고 묵상한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행동철학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요컨대 우리 모든 성직자들은 이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때에 양떼들을 바로 인도할 막중한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QT 가 없는 한국교회가 거의 없습니다만 한국에는 유달리 새로운 신앙형태가 늘 새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를 신실히 믿는 미국의 교단에는 QT 가 없습니다. 개혁주의들 믿는 교회 성도들은 매일 항상 성경을 읽으면서 교리 공부에 중점을 둡니다. 교리를 확실히 알고 그대로 실생활에서 그 교리대로 살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청교도들의 생활양식이었고 저 자신도 오늘까지 그렇게 목회해 왔습니다.  QT 에는 성도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지금 블로그에서 얼마나 많은 사역자들이 QT 을 장려하면서 예로 누가 복음 7:1을 들면서 남이 아무리 잘못해도 (교리 잘못을 포함해서) 용서 해주자고 말합니까? 이는 오늘 Postmodernism 시대에 풍미하고 있는 “Rapprochment (라프로쉬망)” 사상으로 성경적으로 용납되지 않습니다.  모두 다 덮어주고 용서하면 십자가의 군병으로 “전투적교회 Church Militant" 의 구성원인 우리들의 싸울 대상은 무엇입니까? 저와 동기 동창으로 지금 대학교를 운영하는 Robert Morey 박사의 책 “When Is It Right to Fight?“ 라는 책 (P&R 1980) 을 읽어 보십시오.

목회자들은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목자장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양떼를 바른 말씀으로 양육할 사명과 의무와 책임을 받은 종으로 하나님과 성스러운 계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항상 하나님에게 계산할 때가 온다는 심정으로 목회해야 합니다. 만일 실수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면 하나님과의 계약을 위약한 것이니 하나님에게 심한 문책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1:8-9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고 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원어는 헬라어인데, 헬라어에는 “다른” 이란 말이 두 개 있습니다. <동질적인 것>으로 다른 것을 말할 때는 “allellos" 란 단어를 쓰는 반면, <이질적인 것>으로 다른 것을 말할 때는 전혀 다른 헬라어 인 “heteros" 를 씁니다. 본문 갈라디아 1:8-9 에서는 ”to heteron euangelion" 이니 <이질적 복음> 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질이 다른”, 즉 “주님이 말씀 하시지 않으신” 또 <주님이 명령하지 아니한,  전혀 다른 복음> 이라는 말이고 그런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농담이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가감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저주를 받는다“란 말은 헬라어에서 ”anathema" 인데 두 단어 즉 “ana 위에” 와 “tithemi 놓이다“ 의 합성어 (compound word)입니다. 이 말은 <위에 (하나님에게) 바쳐졌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놓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심판해서 잘못이 들어나면 다시 소생할 기회가 없이 지옥으로 멸망한다> 라는 뜻입니다. 이는 무서운 말로 그냥 지나칠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옛날 Scotland 의 목사님들은 잔인하고 악독한 Charles II 와 싸우면서 이 말씀을 목숨보다 중요시 하여 성경대로 살다가  Edinburgh 시내, 지금의 Scottish Reformation Society 건물 바로 앞에 있는 Grass Market에서 1638년 120여명의 Covenanters (언약파) 들이  모두 목에 밧줄을 받고 교수형으로 순교한 것입니다.

주의 종들은 죽음이 와도 바른 신앙을 지키며 양떼들을 바른 믿음으로 인도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데  후에 주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문책할 때가 온다는 사실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상과 같이 답변 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김명도 교수
튤립 교육 선교회
튤립 신학 연구원
칼빈 신학교 대학원
1/7/09

http://blog.daum.net/kkho1105/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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