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세워진 율법 (Ⅰ)





요한 웨슬리(John Wesley)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로마서 3:31)

1.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전제를 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능력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이 현재의 구원과 동시에 영원한 구원을 차지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이것 외에는 하늘 아래에 달리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특히 죄로부터의 구원에 관하여 말하는데 그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의인(義認), 곧 의롭다 하심을 인정받는다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을 향하여 여러 가지로 논의를 할 뿐 아니라 아무도 자기 자신의 무죄를 호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장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추론을 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핑계를 대거나 변명하는 "모든 입을 막아야 하며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순종을 통하여 즉,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율법과는 별도로" 율법에 대한 우리의 이전의 순종과는 별도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들의 의롭다 하심을 얻을 필요에 있어서나 그것을 얻는데 있어서도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곧 그 모습을 따라 창조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나타내 보이시려고 그리스도를 세워 그의 피로 속죄의 제물을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을 통하여 죄사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지금 이때에 하나님께서 의로우실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까지 의롭다함을 얻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어떤 의혹을 하는 일 없이 그 속죄 제물을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비를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율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 확신은 바울의 대전제입니다.)(3:20-28)

2. 여기에 대하여 나올 반대 이론을 미리 내다보기란 쉬운 일이었습니다. 사실상 이와 같은 반대는 모든 시대를 통해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율법적 행위 없이도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페기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쟁을 할 여지도 없이 바울은 그와 같은 주장을 간단히 부정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3. "사람의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율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바울이 말할 때에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라고 어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상상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말로 충분히 논박됩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굳게 세웠습니까? 그가 그런 율법을 세우지 않은 것은 명백합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그(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었고, 또 자신이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공언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유리가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도덕상의 율법입니다.

4. 그러나 이 점에서 모든 사람이 그의 생각과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생각에 동의를 하지 않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교회사의 어느 시대에서도 수많은 사람들, 곧 크리스쳔이란 이름을 붙이고 산 사람들 가운데서도 "성도들에게 일단 주어진 믿음"은 율법 전체를 무용하게 만들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도덕상의 율법이나 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모두 헌 신짝 같이 버릴 뿐 아니라, 이를테면 "주 앞에서 산산히" 그 두 가지를 다 난도질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렇게 열렬히 주장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율법을 세우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도 못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무 효력도 없게 되며 또한 여러분은 은혜에서 떨어질 것입니다."

5. 이런 사람들의 열정이 지식에 의한 것입니까? 그들이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살펴 본 것일까요? 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고려하고 어느 한 가지를 파괴하는 것이 결국 그 둘을 동시에 파괴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과 도덕상의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믿음과 율법을 함께 폐기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관찰한 것일까요? 어쨌든 이런 경우에, 결과는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든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우리의 영혼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어떤 적절한 수단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6.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나오기를 원하거나 구세주로 모신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모두는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가"에 대하여 경계하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겨나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을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길은 어떤 것인가? 둘째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도 바울을 따를 수 있는가, 특히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는가"를 물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1. 첫째로, 우리는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길은 어떤 것인가"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우선 설교자의 경우 단번에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길이란 율법에 관하여 전혀 설교를 않하는 것으로 해 놓았을 때에 율법에 관하여 설교를 하는 소위 "율법의 설교자"라는 말은 비록 복음의 원수라는 말보다는 덜 할지 모르지만 욕을 하기 위하여 쓰는 말이 됩니다.

2. 이런 모든 일들은 율법의 본성과 속성 그리고 그 사용에 관한 전적인 무지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즉 산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최소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젓먹이들로서 마치 "의의 말씀에 미숙한" 사람들과 같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입니다.

3. 그들이 당당하게 내세우는 구실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에 의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 이를테면 오로지 그리스도의 고난과 공적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이 율법의 모든 목적에 부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첫 번째 목적, 다시 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에조차도 부합되지를 않습니다. 지옥의 문턱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여기 저기 있을 수는 있습니다. 천 명 가운데 한 사람 정도가 복음에 의하여 깨우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반적인 법칙이나 예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방법은 율법으로,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복음은 이런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이 내신 방편도 아닐 뿐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도 이런 목적으로 복음을 사용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 어디를 보아도 복음을 이런 목적에 적용할 수 있는 권위나 근거를 찾아볼 수도 없고, 그것이 효율적이라고 증명할 도리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특히 율법의 본성을 고려할 때에 이와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이나 최소한도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의사를 보내주는 것 같이 어이없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선은 그들이 병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수고를 조금도 고맙게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번도 마음이 아픈 일이 없었던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도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적절한 표현을 찾는다면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일"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들이 그것을 짓밟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되돌아서 물어 뜯을" 것을 기대할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4. "그러나 비록 방심한 상태의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하는 명령이 성경에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한 예가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그런 것은 하나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예를 4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일입니다. 사도들의 어떤 글을 통해서도 사도들이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5.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1:23)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고린도 후서에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4:5)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서 뜻을 찾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분의 발자취를 밟으며 그 분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로지 바울 사도가 전한 대로만 전한다면 논쟁은 끝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으뜸갈 만큼 완벽하게 그리스도를 전하였다는 사실을 비록 우리가 확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누가 사도 바울보다 율법을 더 많이 전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이 동일한 목적에 부합되는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던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6.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서 사도 바울의 첫 번째 설교는 이런 말씀으로 결론이 맺어집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예수 안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여러분에게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보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행할 터인데 그 일을 누가 너희에게 말해 줄지라도 너희는 도무지 믿지 않으리라 하신 말씀입니다."(행 13:39-41). 이제 여러분이 율법이란 말을 이해하는 뜻에서 이 설교는 율법을 전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그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은 아니고 비록 대부분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유대인이었거나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필경 그들의 대다수는 최소한 어느 정도는 죄를 이미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그 다음에는 가장 강력한 의미로 율법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내용으로 해서 심하게 그들을 위협합니다.

7. 바울의 그 다음 이야기, 곧 루스드라의 이방인들에게 한 이야기에서 (행 14:15이하) 그리스도의 이름 같은 것은 그렇게 찾아 볼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 목적은 그들이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이제 진실을 고백합시다. 만약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여러분이 바울보다도 설교를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이 설교를 그렇게 잘못 했기 때문에 그렇게 잘못 대접을 받았고, 또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심판으로 그가 돌로 맞았다고 여러분도 생각하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8. "뛰어 들어가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고 묻은" 간수에게 바울은 즉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행 16:29이하). 이와 같이 죄를 깊이 뉘우친 사람의 경우에 그와 똑같은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아덴 사람들은 향해서는 바울이 전혀 다르게 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미신과 무지와 우상 숭배를 꾸짖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심판과 죽은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을 생각해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감동을 시켰습니다.(행 17:24-31)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도리를 들으려고" 벨릭스 총독이 바울을 부르려 사람을 보냈을 때에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대신에(사실 그렇게 했더라면 벨릭스 총독이 필경은 놀려댔거나 딴 소리를 했거나 불경한 말을 했겠습니다만) 바울은 (그렇게도 마음이 굳은) 벨릭스가 두려운 생각이 들 때까지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 했습니다"(행 24:24,25) 여러분도 가서 그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통하여 방심한 상태에 있는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9. "그렇지만 바울은 그의 서간문을 통해서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였습니다"라고 여러분이 말씀하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첫째, 바울은 거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 있어서 설교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문제 삼고 있는 설교란 회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고집하지는 않다라도 이렇게 또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둘째는, 바울의 서간문들은 우리가 현재 말하고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로마와 고린도와 빌립보와 그 밖의 여러 곳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향하여 쓴 것입니다. 물론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보다는 이들을 향하여 더욱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째로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렇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보아도 그렇고 그의 모든 서간문들은 모두 율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여러분이 말하는 바와 같이 "율법을 전하며 설교를 하는데" 믿을 사람들과 믿지 않을 사람들에게 똑같이 율법에 관한 설교를 합니다.

10. 이런 점에서 보면 명백한 것이 여러분은 바울 사도가 의미하는 면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심할 것 없이 바울은 그 자신의 판단으로서 벨릭스에게 뿐만 아니라 안디옥과 루스드라와 아덴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였습니다.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와 같은 그의 예로 미루어 생각(추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죄인에게 선포하는 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불꽃을 타고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선포하는 것은 바울의 의미로서는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완전한 의미의 설교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일은 신구약성서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인 만큼, 여러분이 "악한 자들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은 모두 지옥에 빠질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든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하고 말을 할 때에 그것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것이 됩니다.

11. 이 점을 잘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일은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모든 것, 즉, 그 분의 모든 약속과 경고와 명령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이오, 그 분의 책인 성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것입니다.

12. "그렇지만 우리가 특별히 그리스도의 공로와 고난에 관하여 설교를 할 때에 그런 이야기에 가장 큰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까?"
아마 애통하는 사람들이나 믿는 사람들의 회중을 향하여 설교를 할 때에는 그런 설교가 가장 큰 축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특별히 그들의 상태에 적중하겠기 때문입니다. 최소한도 이런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가장 위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나 가장 큰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내 마음을 예리하게 찌르는 이야기나 나를 낮추게 만드는 이야기를 통해서 훨씬 더 큰 축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만약 그리스도의 고난 외에는 아무 이야기도 설교를 하지 않거나 듣지도 않는다면 그런 위안을 받아서도 안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가 되고 말기 때문에 드디어는 영(靈)도 생명도 덕도 없는 그져 맥빠진 말의 되풀이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결국 복음은 물론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1.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두 번째 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그 자체가 천 갈래 작은 길로 갈라지기 때문에 그리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사실상 거기서 전적으로 헤어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까지도 조만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 샛길로 빠져듭니다.

2.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의 율법을 지킬 필요성을 전적으로 배제한다고 확고한 판단은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와 같은 샛길로 빠져드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상상을 합니다. 즉, (1)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보다 이제는 성결이 덜 필요하다든가, (2) 성결의 필요성은 그 정도가 낮다든가, (3)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덜 필요하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이 샛길로 빠져드는 사람들은 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들의 판단이 옳을지라도 그들이 믿기 전보다 여러 가지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곧 그들입니다. 사실상 그와 같은 태도로 사용하는 "자유"라는 말, 곧 순종과 성결로부터의 자유는 그들의 판단이 거꾸로 되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인한 죄와, 믿음이 성결을 대신한다고 생각함으로써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죄를 스스로 짖고 있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나타내줍니다.

3. 이런 것을 명확하게 가르치는 사람들의 첫째 구실은 우리가 이제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언약 아래에 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를 해야 할 필요성에 더는 묶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찍이 행위의 언약 아래 있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타락하기 전에 아담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용납될 수 있는 단 한 가지 조건으로서 완전하고 보편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그 언약 아래에 아담은 완전히 적합하게 묶여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작은 잘못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여지는 그에게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이나 이후로도,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할 것 없이 그 밖에 아무도 이 언약 아래에 있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아담의 모든 자손들은 은혜의 언약 아래 있습니다. 그들이 이 수락을 받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는 믿는 모든 사람들, 곧 모든 순종과 성결을 낳는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주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이것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대로 사람들이 "현재"보다도 "과거"에는 그분의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써 더욱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않되었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좋게 살릴 수 없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위의 언약 아래 있었다면, 우리가 용납되기에 앞서서 그런 모든 행위를 다 하지 않으면 않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늘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와 같은 모든 선한 행위가 우리가 용납되는 데에 필요한 선행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로서 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언약의 본성은 어떤 예나 정도로서도 순종을 배제할 수 없고 부분적으로나 전체로서 성결을 배제할 근거나 가능성을 전혀 제시해 주지 않습니다.

5.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 아닙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렇습니다.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나 도덕상의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정말 확신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악을 미리 방지합니다. 이를테면 특히 율법무용론을 방지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율법무용론을 만드는 것은 바리새파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와는 뚜렷하게(Palpably) 반대되는 한 쪽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정반대의 극단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길을 찾는 그들은 다른 것으로 그것을 대치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겁을 먹게 만듭니다.

6. 그러나 진리는 그 둘 사이에 있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이것은 전체 기독교적 구조의 머릿돌입니다.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는데 필요한 전제 조건으로서 (흔히 생각되는)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다만 그와 같은 율법의 행위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믿음에 즉각적으로 따라오는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행위가 즉, 모든 내적이나 외적인 성결이 우리의 믿음을 따라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가치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실, 즉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실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은 어떤 종류나 정도의 성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7. "아닙니다. 그러나 '행한 것이 없더라도 불경건한 자를 의로운 사람 같이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인정됩니다' 하고 바울이 명백히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적인 말이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의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만약 믿음이 의나 성결의 자리에 있는 것이라면, 이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이 말이 핵심을 찌르고 있으며 사실상 율법무용론의 가장 중요한 기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애써서 길게 대답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인정합니다. (1)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그 시간까지는 모든 악으로 가득 차 있고, 선은 하나도 없는 전적으로 불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2)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는 선한 행위를 하지도 않고 살 수도 없는 그래서 행함이 없는 불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3) 어떤 선이나 의를 앞서서 행하지 않았어도, 믿음으로만 그를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4)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의로 인정되는 것,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마치 그가 모든 의를 이미 다 완성한양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그를 받아 주신다는 사실 등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는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집니까? 여기에서나 그 밖에 어디에서도 바울 사도는 이 믿음이 "결과적인 의"로 인정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믿음 "이전에" 의가 없다고 바울이 가르치기는 합니다만 믿음 "후에" 의가 없다고 어디에서 바울 사도가 가르치는 곳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침으로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도록 구실(colour)을 만들어 주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1. 그러나 아직도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또 다른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지적한 어느 것 보다도 더 보편적인 것으로서 실질적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성결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믿음이 핑계가 되는 양 "삶"을 사는 것으로서 "원리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사실상"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잘 알려진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이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얼마나 진지하게 경계를 시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롬 6:15).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경계를 아주 깊이 고려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2.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은 여기서 이런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즉, (1) 종교의식상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2) 모든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3)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시는 조건으로서, 모든 도덕상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4)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으며, 영원히 죽을 사형 선고 아래 있으며, 무서움과 노예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죄 의식과 정죄 아래 있는 것 등을 의미할 것입니다.

3. 이제 믿는 사람이 비록 "하나님께 대한 율법 없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율법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믿는 순간부터 어떤 선행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그가 "율법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는 "은혜 아래" 있으며 보다 더 자비롭고 은혜스러운 섭리 아래 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나 모세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용납의 조건으로서 도덕상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만큼 그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부터 벗어났으며 모든 죄의식과 정죄에서 벗어났고, 그로서 전에는 그의 삶 전체가 노예와 같이 속박되었던 사망과 지옥의 공포와 모든 무서움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율법 아래" 있는 동안은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기꺼이 모든 일에 순종을 합니다. 그는 노예 같은 공포에서 비롯되는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고상한 원리 곧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그의 모든 행위가 사랑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 때문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행동에 대한 이와 같은 복음적 원리가 율법적인 원리보다 힘이 더 없습니까? 우리가 노예 같은 공포에서 우러나오는 것보다 자식으로서의 사랑으로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을 덜하겠습니까?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좋습니다. 이와 같은 실제적인 율법무용론 곧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다고는 하면서도 지키지 않는 이 길이 수많은 신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이런 것이 여러분에게는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솔직하게 그리고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을 때에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것 같이) 죄를 깨닫고 있었을 때에 감히 하지도 않던 일을 여러분이 현재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를 들면 여러분이 감히 음식에 탐닉하지는 않았습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취했고 그것도 가장 검소한 것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 스스로에게 더 넓은 자유범위를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보다 "조금은" 더 스스로 탐닉하며 만족하지 않습니까?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5. 여러분이 죄를 깨닫고 있었을 때에 여러분은 감히 어느 모양으로도 안목의 정욕에 탐닉하지는 않았습니다. 크고 작고 간에 여러분은 자신의 호기심을 단순히 만족시키기 위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더구나 의복에 있어서도 오로지 깨끗하고 필요한 것만을 생각했고 그렇지 않으면 고작해야 조금 편리한 것으로 소박한 물건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넘치는 것이나 너무 고운 것이나 멋을 부리는 물건들은 여러분들에게는 겁나는 물건이거나 혐오를 일으키는 것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렇습니까? 전과 같이 당신의 양심이 아직도 이런 것들에 대해서 예민합니까? 여러분이 아직도 가구나 의복에 있어서 꼭 같은 법칙을 따르며 모든 고운 것과 모든 넘치는 것과 모든 무용한 것, 그리고 아무리 모양이 좋고 멋이 있더라도 단순히 장식을 위한 것이라면 그 모두를 발 아래 밟아 버립니까?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예전에 이미 다 버린 일들을 다시 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양심을 상하지 않고는 하지 못하던 일들을 다시 하지는 않습니까? "아, 나는 이제 그렇게 양심적이지를 않구나!" 라고 하는 말을 할 줄을 모릅니까? 내가 바라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정말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이와 같이 죄를 짓게 되지는 않습니다.

6. 여러분이 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면전에서 칭찬을 하는 일에도 성실하였고 더욱이 누가 여러분을 칭찬할 때 그것을 견디는 데도 성실하였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는 비수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로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여러분은 그와 같은 대화를 견딜 수가 없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덕을 기르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는 그런 대화를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모든 한가한 이야기나 시사한 잡담을 여러분은 몹시도 싫어했습니다. 비록 불의의 재물일지라도 재산에 대한 불충실한 청지기가 될까봐 떨었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그로 인해서 멸망할 각오를 하기 전에는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그 칭찬을 이제는 목숨을 앗아갈 무서운 독약으로 봅니까? 덕을 쌓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모든 대화를 아직도 몸서리치며 싫어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을 보다 향상시키지 않은 채 순간순간이 지나가지 않도록 매 순간을 보다 선용하기 위하여 애를 씁니까? 아니면 돈이나 시간을 쓰는 일에 있어서 덜 신중하지는 않습니까? 돈이나 시간 중 어느 것이라도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그런 방향으로 이제는 쓸 수 없습니까? 애석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있어야 할 것이" 어떻게 해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까!

7. 그런 일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정욕으로 바꾸는" 일을 더 이상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모든 일에 대하여 가졌던 확신이 얼마나 명백하고 강한 것이었던가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동시에 그와 같은 확신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안 만큼 여러분이 진정으로 만족했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여러분이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말했지만, 여러분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충분히 성실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 고통스러운 수련(school) 속에 더 오래 두신 것은 여러분이 그와 같은 위대한 교훈을 더 완벽하게 배우도록 만들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을 벌써 다 잊어버렸단 말입니까? 너무 늦기 전에 그 모든 교훈을 상기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도 많은 고생을 한 것이 헛수고였단 말입니까? 나는 그것이 아직도 헛되지 않다고 믿습니다. 이제 고통 없이 그 확신을 사용하십시오! 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 교훈을 실행하십시오! 전에 하나님의 무서운 분노에서 느꼈던 것보다 이제 느끼는 하나님의 자비를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이 두려움보다 약한 동기가 됩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제 불변의 법칙을 잡으십시오. "내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 감히 하지 않았던 일들을 이제 내가 '은혜 아래'에서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8. 이제 부작위 죄에 대하여 언급을 함으로써 여러분이 스스로를 살피도록 권면을 하지 않고는 이 설교의 결론을 맺을 수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을 때만큼 "은혜 아래" 있는 현재에도 이런 부작위 죄(sins of omission)에 대하여 명백합니까? 그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여러분이 주어진 기회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습니까?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까? 조그만 방해 때문에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까? 작은 사업 때문에? 찾아온 손님 때문에? 기분이 조금만 언짢아도? 푹신한 침대를 떠나기가 싫어서? 아침에 날씨가 컴컴하게 흐리고 추워서? 그래서 못했습니까? 자주 금식을 하며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제를 하며 정진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지옥 문전에서 오락 가락 할 때에 (춥고 고생스럽더라도)기도를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도 가리지 않고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대담하게 하나님의 뜻에 호소를 하고 죄인을 꾸짖고 음란한 세대 앞에서 진리를 외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졌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때 보다도 이제 여러분의 주님을 위한 열정이 덜 하다는 말입니까? 금식을 하는 일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부르는 일에 열심을 덜 낼 수가 있습니까? 아,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없음을 슬퍼하십시오! 여러분이 계속해서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끊어버리시고 여러분의 몫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돌리실까 염려하면서, 이제 열정을 다하여 처음 일들을 다시 찾아 행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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