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적 탐욕에 대한 고찰(존 오웬)

질문 1 : 누군가의 죄나 탐욕이 습성적이거나 지배적이라고 간주되는 경우는 언제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나는 다음의 전제들을 밝혀야만 한다.

1. 모든 탐욕들과 타락은 아무리 최악의 경우라고 할지라도 그 근원과 거주지는 바로 우리의 본성 안에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라고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특별한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가 경험하듯이 그 욕심의 근원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안에 있습니다. 이러한 탐욕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며, 이 본성은 모든 사람가운데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심한 후라 할지라도 이런 욕심은 사람의 본성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들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고 편지를 썼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육신을 쫓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육신의 일입니다. 육신의 일은 무엇입니까? “곧 간음과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갈 5:19-21)입니다. 육신은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여전히 이렇게 추악한 것들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진리는 악한 시대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빛으로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과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될 커다란 재앙과 황폐함과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눅 21:3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간절하게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너희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21:34) 분명하게, 주님께서는 죄악이 난무하는 그 때가 다가올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최고의 것은 바로 죄의 심각성과 악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방탕함과 술취함에 빠지고, 그런 문제와 괴로움 가운데 삶을 걱정하리라고 어느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지혜의 하나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 일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게 될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크리스챤이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멸망이 문 앞에 누워있는 것과 같이 육적이고 자극적인 죄악들을 범하게 되는 위험에 처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날에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 우리 안에 거하는 죄의 근원과 뿌리는 우리를 유혹하여 모든 악한 일을 행하도록 시도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영혼과 또 다른 것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룩한 질투심을 자극할 것입니다.

3. 만약 죄가 우리 안에 거하여 항상 모든 악한 일들을 하도록 부추긴다면, 죄를 극복하고 정욕과 감정을 억제하고 극복하는 것은 날마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의무가 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골 3:3) 축복받은 지위와 신분! 온 세상에서 이보다 더 위대한 축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진리로 인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의무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그것이 무엇입니까? “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 죄를 벗어버리는 것은 성숙한 성도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4. 개개의 죄가 특별한 우월함과 지배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습성적인 지위를 갖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죄성은 보편적으로 동등하게 타락되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죄들은 특별한 우월함으로 말미암아 지배력을 얻게 됩니다. 지금 이 우월함이 무엇인지 모두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먼저 현저하게 나타나는 2가지를 지목할 것입니다.

우리가 타고난 체질적인 성향이 특정한 죄악들에 특정한 우월함과 지배력을 가져다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질투심이 강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쉽게 분노하거나 격정(激情)하는 성향이 강하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는 탐식과 술취함같은 육욕의 죄악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질을 죄에 대한 핑계와 구실로 삼으려는 악마의 거짓말입니다. 어떤 이는 “나는 천성이 성미가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체질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본래 낙천적이고 친구들을 사랑한다”고 말을 합니다. 당신의 기질은 당신의 죄를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죄에 대한 구실이나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이 다룰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가 타고난 체질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그 은혜를 자랑스러워 하겠습니까. 늑대나 사자도, 곰이나 원숭이도 독사의 본성마저도 양과 같이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이 바로 위대한 약속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타고난 기질이나 체질에서 오는 삶의 습성적 패턴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은혜는 결코 그런 일들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습성적인 원리로 인하여 은혜가 천성적이고 체질적인 성향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저는 그것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외적인 유인(誘因) 역시 특정한 죄에 대해 특별한 우월함을 가져다 줍니다. 어떤 죄들은 교육을 통해 우월함을 얻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아이들을 거만하고 오만해지도록 교육한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욕심이 그들을 불사르고 파괴할 때까지 바짝 마른 연료를 쌓고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또한 삶 속에서 상이한 사회적 환경들 역시 특별한 죄악들을 선동하고 자극합니다.
이 같은 전제를 토대로 이제 질문에 대답하겠습니다.

누군가의 죄나 탐욕들이 습성적이고 지배적이라고 간주되는 경우는 언제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이여, 나는 우리 주님과 그의 사도들이 우리에게 인내하며 극복하라고 경고하셨던 가장 추악하고 수치스러운 탐욕들이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서 활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특정한 욕심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습성적으로 널리 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외적인 결과나 효과를 수반하지는 못합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생각과 영혼속에 빈번하게 그리고 아주 강하게 특별한 욕망과 타락이 밀어 닥쳐와서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 사실 자체가 특별한 욕망이나 혹은 타락이 습성화, 혹은 지배적인 것이 되었음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것은 단지 유혹이 가져온 힘겨운 순간에 지날 수도 있습니다. 유혹과 결합하여 내재하고 있는 죄는 당신을 죄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강력하고 힘겨운 투쟁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당신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습성적인 죄의 지배 가운데 거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일반적인 유혹일 뿐인지 당신은 어떻게 구별하겠습니까? 만약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이 옳다면 당신은 습성적인 죄에 빠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1. 만약 당신이 죄로 인하여 더럽혀지기보다는 더 슬퍼진다면, 그것은 단순한 유혹이지 습관적인 탐욕은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 죄와 은혜 모두 자신의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정반대입니다.
은혜의 목적은 영혼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고, 죄의 목적은 영혼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죄를 인정하고, 죄에 동의하게 되면 영혼은 타락하고 맙니다. 생각속에서만 일어나는 활동적인 유혹은 사람을 타락시키지 못합니다. 단지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를 동의하게 만드는 유혹만이 ‘타락’하게 만듭니다.
죄에 대한 동의가 본래 얻어졌든지 오랜 기간 동안의 유혹이후에 얻어졌든지 간에, 그것은 죄로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겠다는 동의인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죄로 인해 더럽혀지기보다는 더 슬퍼하고 애통해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죄가 습성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유혹은 길고도, 피곤하고, 절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유혹에 동의하기를 거절하는 한, 영혼은 유혹의 공격으로부터 순결함과 거룩함을 지킬 수 있습니다.

2. 만약 당신이 진심으로 특정한 죄를 가장 큰 도덕적인 적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이것은 죄를 바라보는 당신의 관점이 되며, 당신은 습성적인 죄의 지배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유혹의 힘이 미치는 범위아래 있는 것일 뿐입니다.

3. 만약 당신이 죄에 대한 전쟁과 투쟁을 끊임없이 그리고 특별히 개인적인 기도와 중보기도라는 두 가지의 의무가운데서 계속해 나간다면, 영혼은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죄는 분명히 정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은혜가운데서도 이러한 갈등을 계속해 나간다면, 나는 그가 유혹을 받는 것 자체가 죄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제 언제 죄가 습성적으로 지배적인 것이 되는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참이라면 특별한 죄가 당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당신이 죄로 알고 있는 것들을 선택하거나 기꺼이 맞아들인다면 그것은 습성적인 죄입니다. 정직한 모든 크리스챤들은 어떤 경우의 일들이 우리 안에 죄를 자극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악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죄 자체를 위해 죄를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일들이 특별한 타락의 행위들을 휘젓고, 흥분시키고, 불러일으키는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꺼이 죄악된 일들로 둘러 쌓여 지는 것을 선택하게 될 때, 우리는 죄의 지배아래 놓여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모든 일들을 거절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죄의 세력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절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2. 당신이 특별한 죄에 대한 논쟁이 힘을 잃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면, 죄는 습성화된 것입니다. 특별한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크리스챤은 그런 타락 속에 계속 거함으로 인한 파멸과 두려움과 위험과 수치심으로부터, 생각 속에 떠오르게 되는 논쟁들을 처음에 발견하게 됩니다. 당신의 이런 논쟁이, 힘을 잃어가고 당신의 삶 가운데서 이전에 가졌던 만큼의 영양력을 행사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면, 죄가 이미 습성화된 것임을 두려워하십시오.

3. 당신이 유혹이나 죄에 빠질 수 있는 기회가 올 때마다 한번도 빼놓지 않고 죄 가운데 거하게 된다면 그 죄는 습성적인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업가가 할 수 있을 때마다 사기를 친다면, 그는 마음속에 탐욕을 갖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올 때마다 술을 마신다면, 그것은 습성적인 타락의 징표가 됩니다.

4. 당신의 행동의 동기가 새로워지는 은혜 안에 있기보다는 기껏해야 제한되거나 구속된 은혜에 의한 것이 전부라면, 그 죄는 습성적인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끔 유혹의 구렁텅이 아래로 미끄러질 때, 하나님은 은혜를 제한하시거나 구속하심으로, 죄에 대한 위험과 수치스러움과 겸손함을 가르치시고, 우리를 질서 안에서 지켜 나가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께서 마음속에 주시는 내적인 새로워짐보다는 외적인 상황들을 의지하여 자신을 죄에서 지켜나가려 합니다. 만약 당신이 특별한 죄로부터 당신을 지켜주는 유일한 것이, 하나님의 제한되고 구속된 은혜 때문에, 외적인 상황이나 조건들이 전부임을 발견하게 되거나, 날마다 새로워지는 은혜로 인하여 변화되고 거듭나고자하는 내적인 바램이 없다면, 그것은 죄가 당신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당신은 죄에 대한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죄의 위험과 죽음과 지옥에 대한 아무런 두려움 없이 당신 삶의 목적을 더럽힌 것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새로워지는 은혜 즉, 사랑을 통한 믿음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제한되고 구속된 은혜로 인하여 죄의 사슬에 묶이게 됩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의 삶에 대한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적인 지혜를 가진 자는 그 자신을 살피고 점검하며, 자신의 행동의 동기가 무엇인지 발견합니다. 그것이 새로워지는 은혜인지 아니면 제한되고 금지된 은혜인지 말입니다.

5. 우리의 의지가 주권적으로 죄와 관련되어 질 때, 그 죄는 습성적인 것입니다. 죄는 생각을 혼란시킬 수고 있고 감정의 무질서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지배력을 갖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의지를 노예화시킬 때, 죄는 우리의 주인이 됩니다.

질문 2 : 습성적인 죄, 탐욕, 타락이 어떻게 신앙인들의 삶 속에서 구원의 은혜의 능력과 양립할 수 있습니까?

답변 :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답변과 관련된 내용의 난해함 때문에 정확한 대답을 내놓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현재적이고 또한 영원적인 지위와 관련되어지는 그런 문제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매우 신중해야만 합니다.

1. 먼저 이런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모든 믿는 자들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습성적인 죄라는 짐을 덧붙이지 않고도,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한 지위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과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용서와 죄 씻음과 정결함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가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그러나 그는 특별히 우러나오는 양심에서 자신의 죄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 19:13) 같은 맥락에서, 사도바울 역시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히 12:15)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모든 죄 가운데는 쓴 뿌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형제들을 권하노니 여러분들의 영혼과 나의 영혼을 위해 이런 일들이 절대로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2. 구원과 습성적인 죄의 양립성에 대해 어떠한 논쟁이 오간다 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평화와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습성적인 죄를 따라 사는 누군가에게 존재하는 평화가 거짓된 평화인지 말하는 것은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의 지배가운데 살아가는 순간 내내 어느 날 한 순간에 하나님께 자신들을 받아주실 것이라는 멋진 기대와 함께 은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그 마지막 날은 자신들에게 유일할 것이며, 그 날은 적절한 시기나 혹 자신들이 편한 시기에 임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습성적인 죄악들을 경험하는 자는 믿음에서 되돌아섭니다. 누군가 크리스챤이 되겠다고 고백을 하고 자신의 삶 가운데서 끊임없이 신실한 삶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도, 그가 하나님 안에서 새로워지고 성숙하기 이전의 모습이나 자신의 타고난 체질이나 유혹 등으로 인하여 탐욕이 그를 지배하게 될 때, 그 모든 것은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니라"(히 10:38)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기쁘지 아니한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평화가 되겠습니까? 당신의 기쁨의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만약 당신이 습성적인 죄 아래 거할 때에도 평화를 누렸다고 하면, 그 평화안에서는 더 이상 믿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고난과 고통의 순간에 당신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3. 만약 습성적인 죄가 은혜의 진리와 모순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 은혜의 참된 역사(예배)와 모순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여전히 주님 앞에서 신성한 의무들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습성적인 죄는 그것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습성적인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한 이런 의무들 가운데는 은혜의 참 역사(예배)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습성적인 죄 가운데 빠진 사람들이 그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 보상하고자 혹 그들의 양심을 잠재우고자 여러 가지의 종교적인 의무들을 감당하는 것이 종종 발견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 만연한 죄악들의 가리개로써 사람들의 눈속임을 위해 이런 경건한 것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도 많이 할 것이며, 설교하는 곳마다 따라 다닐 것이며 다른 의무들에도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무들 가운데는 은혜의 참된 역사(예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죄가 우리 삶 속에서 습성화되고, 은혜는 언제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방법을 통해 우리를 실제적으로 새롭게 하도록 제한되고 구속되어 지는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습성적인 죄의 능력아래 있다면, 기도와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십시오. 왜냐하면 습성적인 죄안에서는 절대로 참된 은혜의 역사(예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어떤 사람의 영적 생활이 기절한 상태라면 그 영의 사람은 아직 죽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앙인들에게는 삶의 어떤 징표도 나타나지 않고 영적 착란상태가 닥칠 수도 있습니다. 그때도 아직 죽은 것은 아닙니다. 습성적인 죄를 통하여 영적인 삶이 기절한 상태에 있다는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을 때라도, 나는 그들의 영혼이 죽었다고 쉽사리 결론짓지 않습니다. 다윗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밧세바와 불륜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죄를 지을 때부터 나단 선지자의 따끔한 지적을 듣고 회개할 때가지 영적인 기절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죄에 빠짐으로 영적인 삶을 속여 그의 육신을 가로챈 것입니다.

나는 앞에 언급한 영적 삶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가 영적 삶의 모든 증거와 관련해서 기절한 상태에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 사람이 죽었다고 판단하면 당신은 그에 대해 소홀해질 것이며 분명 그를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가 기절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의 삶을 소생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5. 실제로 구원과 양립할 수 없는 죄의 습성적인 위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고백했던 사람들에게 닥칠 수 있다고 했던 일입니다. 계속해서 죄의 종노릇하는 것은 진짜 주인이 누구인가를 말해줍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질문 3 : 습성적이고 지배력을 지닌 타락과 죄와 유혹의 능력아래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답변 : 만연된 죄는 우리 삶에서 외적인 치욕과 수치심을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내적인 평화의 상실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혹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 가운데 정말로 참여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1. 죄의 위협이 당신의 생각 속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힘쓰십시오.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우리를 설득하는 죄가 얼마나 사소한 것들인지 깨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당신이 죄라는 것이 사망과 지옥과 저주 가운데로 이끄는 것임을 명심하고 모든 일에 임하라고 권면합니다. '모든 일이 마지막에는 다 잘 될거야'라는 자기 기만적인 합리화 속에서 안주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위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안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2. 죄로 인한 양심의 짐을 지십시오. 우리의 생각은 죄의 위험을 깨닫는 것에 느립니다. 우리의 양심은 아주 오랫동안 죄의 짐을 지는 것을 너무나도 꺼려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인 죄를 생각해보지도 않고 너무나 쉽게 자신의 상황을 변명하고 합리화시킵니다.

3. 일단 우리가 죄의 위험을 깨닫고, 죄의 짐을 짊어지기로 했다면, 우리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신음하고"(시 32:3) "부르짖어"(애 3:8)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십니다"(히 2:18) 우리가 "도우신다"라고 번역한 그리스 단어는 멸망해 가려고 하는 사람을 도우려고 달려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힘들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사단의 올무에서 우리 자신을 건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때, 이것은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4. 당신의 특별한 죄악들에 반하여 당신을 지도하는 성경의 모든 교훈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모든 죄의 위험에 관하여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단지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 같은 좋은 교훈을 주셨다면,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만 하며 그것을 기록하고 그것을 명심하여 절대로 잊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궁극적으로, 당신은 그것을 소중하게 여겨야만 합니다.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 29:1)

마지막으로, 도움을 주는 또 다른 두 가지의 규칙과 내가 하려고 하는 것들.

1. 죄와의 싸움이 아무리 힘들고 혼란스럽다 할지라도 절대로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당신은 죄의 능력으로 혼란스러워 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패배했다고, 이젠 모든 것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죄의 정복과 승리를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2. 모든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순간에 전력을 다하지도 않고 만연되어 있는 죄를 극복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익한 것입니다. 당신은 어떠한 장소에서도 순종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따라야만 합니다. 당신이 죄와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어떤 영역에서 불순종을 하게 된다면 현재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죄를 철저하게 다루려고 할 때에 너무나 힘겨운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규칙을 명심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성령님의 탄식하심으로 인하여 모든 죄악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면, 당신의 마음에 슬픔을 주는 어떠한 죄도 절대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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