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 받은 사역자의 의무(존 오웬)

 

어떤 교회가 복음의 순결을 지킬지 아니면 배도할지는 그 교회의 목사, 지도자, 교사 및 설교자들에게 많이 달려 있다. 마치 구약시대 때 교회의 순결 여부가 제사장들의 신실성에 달려 있었듯이 말이다(말 2:1-9 참조).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사역자가 거룩하고 겸손한 삶을 살면 열심을 다해 일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교회 안으로 인도되어 복음적인 순종을 해나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 정신, 모범, 삶, 기도, 설교 및 노고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는 더욱 더 창대해졌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설교하는 복음의 능력과 진리가 참되다는 사실도 뒷받침되고 증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뒤에 오는 세대들이 영적 퇴보를 거듭하게 됨에 따라 기독교의 주류는 타락한 교사들, 즉 불화, 분열, 야망 및 세상적 마음이라는 슬픈 본을 보여준 교사들에 의해 오염되었다.

구약시대 때는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두 가지 종류의 배도를 하게 했다.

첫째,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미신과 우상숭배로 인도했다(렘 23:9-15 참조). 이 배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거기서 그들은 자기들이 섬기던 모든 우상들을 시날 땅에 묻게 된다(슥 5:11 참조).

둘째,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 나태, 및 나쁜 본보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거룩한 것들을 경멸하게 만든다. 이것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말라기 시대 때 시작되어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교회와 나라가 다 망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 의해 거절당하셨을 때 백성으로 하여금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치게 만든 것은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회 내에서의 첫 번째 배도도 미신과 우상숭배에 의한 것이었다. 이 미신과 우상숭배가 성행하자 결국 모든 사람들의 생활은 점점 더 사악해졌다.

그런가하면 미신과 우상숭배를 피할 수 있었던 많은 교회들은 또 세상적이요 감각적이며 이교적인 행위들로 빠져 들어갔다. 왜냐하면 그 교회들 내에서 행해지는 사역이 세상적이요 감각적이며 이교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볼 때 임명받은 사역자가 교회를 순수하게 지키고 교회가 배도의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다.

 

교회의 순결과 복지는 그 교회 사역자들의 순결과 신실성에 달려있다(엡 4:11-15).

교회는 그 교회의 임명받은 사역자가 흥하느냐 망하느냐에 따라 흥하고 망하는 것이다. 만약 사역자들이 나태하고 부패되어 있다면 교인들 역시 복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이다. 목자가 게으른데 양떼들이 안전하게 보존 될리 없다. 만약 목자가 교회를 끊임없이 돌보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잡초와 가시덤불들로 무성하게 될 것이다.

사역자의 중요한 의무 몇 가지

임명된 사역자는 복음의 가르침, 특히 거룩에 관한 가르침을 순결하게 지킬 의무가 있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한다.”(말 2:7; 엡 4:11-15 참조) 이것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부탁한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행 20:28-30 참조). 바울은 또 디모데에게도 복음의 순전을 지키라고 당부했다(딤전 6:13,14,20; 딤후 2:14,15 참조). 그리고 이 복음의 가르침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충성된 자들에게 맡겨져야 한다고 했다(딤후 2:1,2).

성경, 신자들의 마음, 안수 받은 사역자, 이 셋이 함께 있어야 그 안에 거룩한 진리가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지옥과 세상의 모든 반대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안전하게 지켜진다.

신자들 마음에 있는 거룩한 진리는 그리스도의 영과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켜진다(요 14:16,17,26, 16:13; 요일 2:20,21; 요 6:45; 히 8:10,11 참조). 신자들의 마음에 진리를 보존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배도하던 시대에도 성령께서는 이 일을 하셨다. 마치 이스라엘이 배도하던 시절에도 성령께서 이 일을 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는 엘리야 혼자 참 종교를 위해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자 7,000명을 남겨 두셨다.(왕상 19:18 참조)

거룩한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모든 일이 임명받은 목사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교회는, 거룩한 진리는 전통이라는 수도원의 밀실에 보존되거나 그 순전함을 지키려는 어떤 보살핌이나 지혜 또는 정직함도 요구하지 않고, 단지 그 진리를 열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열쇠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 그런 비가시적이며 환상적인 보고(寶庫)에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생각 때문에 진리와 거룩이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된 것이다.

 

복음적 거룩은 복음의 진리라는 뿌리 위에서만 자랄 수 있다. 만약 그 뿌리가 부패하면 그 열매 역시 부패할 것이다. 복음의 경건은 복음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의 가르침이이 없거나 부패하거나 혹은 경시되는 곳에서는 경건의 능력을 유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편 사람들이 일단 거룩에 대해 싫증을 내기 시작하면 그들은 성실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갈구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오늘날 복음의 모든 가르침이 반대에 직면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거룩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가르치는 것이다. 무엇이 유용하고 유익한지 그리고 자기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현재의 영적 상태에 비추어 볼 때 어떤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볼 줄 모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가 될 자격이 없다.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파하는 것이 임명받은 목회자가 해야 할 의무이다(행 20:27 참조).

그들은 보살핌과 근면함과 충성됨을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파해야 한다(딤후 4:1,2 참조). 디모데에게 한 바울의 이 말은 자기 의무를 충성되이 수행하고자 하는 모든 목회자들에게도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서 세우고 보존해 주는 일을 하는 데에 지금이라고 해서 사도시대보다 노력을 덜 기울여서야 되겠는가?

목회자들은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파해야 한다(행 6:4; 딤전 5:17; 고전 16:16: 살전 5:12 참조).

그들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해야 한다(행 6:4). 기도의 뒷받침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면 그 위에 어떤 축복도 임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기도에 있어서 초특급 모본을 보여 준 사람이다(롬 1:9,10 참조). 만약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엡 6:18,19참조). 전파한 말씀이 열매를 맺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은 채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마음속에 무신론주의를 은밀히 품고 있는 자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 거룩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도 별로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목사의 의무는, 사역과 삶을 통해 자기가 설교하는 그 크고 거룩한 가르침의 능력과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임명된 목회자들은 삶을 통해 온유와 겸손,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은 중용 및 자기부인 그리고 언제든지 십자가를 짊어질 자세 등에 있어서 본을 보여야 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의 부패한 소욕들을 극복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세상을 경멸하고 그 마음을 하늘나라에 두며 누구에게나 오래 참고 친절함으로써 복음의 사역자다운 표징을 나타내야 한다.

만약 사역자들의 삶 속에서 어떤 악덕이나 부패상이 드러날 경우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 사역자 안에 아직도 거하고 있는 타락한 옛 본성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 대신 복음을 비난할 것이다. 따라서 사역자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선행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딛 2:7참조). 그들은 자신들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살후 3:9; 딤전 4:12참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영예의 표지이다.

임명받은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의 순결과 거룩 및 순종을 보존하기 위해 지정해 주신 거룩한 훈련 및 규율을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 복음의 가르침 그리고 복음의 비밀을 타락하지 않도록 순전하게 지키는 데 있어서도 신실하지 못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그 비밀들을 조사해 볼 의욕도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성경을 충성되이 연구하는 노고를 경멸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지하게 되고 이 지식의 결여로 말미암아 패망해 간다. 그들은 물론 그들 죄로 죽어야 하고 또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피 값을 이런 충성되지 못한 사역자들에게서 찾으실 것이다(겔 3:16-21참조).

 

로마 가톨릭 교회에 있는 신부들의 대다수가 얼마나 무지한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무지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것을 전해 문제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무지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방 정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그것들을 신봉하는 많은 나라들이 스스로 기독교인들이라 자처는 하고 있지만 실상은 무식하여 어리석기 짝이 없고,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거룩한 일들을 우습게 여기고 경멸할 뿐 아니라, 혐오스러울 만큼 부도덕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실정이라 그 도가 지나쳐 이방인들보다 더 심할 정도이다.

만약 복음을 전파하는 것만이 인간의 본성을 중생시켜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지정하신 유일하고 효과적인 방편이라면(이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 자체를 부인하는 것임). 그 두 종료를 믿는 나라 사람들을 가르칠 유능한 목회자가 없는 한 그것들이 세상에서 기독교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회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는 것은 헛된 일일 것이다.

충성되지 못한 타락한 사역자, 가령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사역자를 통해 그동안 복음의 진리는 그 품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타락하여 부패했다. 우리 시대만 해도 부패되지 않은, 아주 복음적인 순종을 증진시킬 만한 가르침이 하나도 없다. 진리가 순전히 지켜지려면 하나님에 대한 기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만 사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부패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많은 사역자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에 대해 게으르고 냉담하며 무관심하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심과 인간 영혼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부지런히 자기 사역을 수행하는 자는 아주 드물다.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들이 하는 매일의 일과-가령 말씀과 복음의 가르침에 대한 연구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으면서 성무일도(聖務日禱) 시간에 성무일과를 말해 주고 고해성사를 듣고 죄를 사해 주는 것 등-가 곧 하나님께서 기독교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방편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들이 하는 일이란 고작해야 인류를 죄와 무사안일 속에 효과적으로 가두어 놓는 것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또 그것을 좋아한다.

많은 사역자들이 아주 공공연하게 야망적이며, 한없이 탐욕스럽고 교만하며 감각적일 뿐 아니라 최악의 인간(부패한 마음이 고질화된 사람)을 사랑하고 동정하는 선한 자들까지 증오한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사도들이나 복음을 처음에 전파했던 사람들과 견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시여, 다시 한 번 더 “하나님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저희에게 주시어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저희를 양육하게”(렘 3:15참조) 하소서.

능력 있는 복음의 사역이 회복될 때에야 비로소 교회는 현재의 배도 상태로부터 영광스러운 상태로 변화되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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