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18:31)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압살롬을 피하여 다윗 왕과 그 신하들은 황급히 도망하였고 슬픔과 두려움과 고통 속에 기진맥진 하였습니다. 만일 쉴 틈을 주지 않고 그 뒤를 추격하자는 아히도벨의 계략대로 되었다면 다윗은 압살롬의 손에 거의 틀림없이 잡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셨습니다. 압살롬이 후새의 거짓계략을 택한 것입니다. 후새는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통하여, 그리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요나단(동명이인)과 아히마아스를 보내어 다윗에게 빨리 피하라고 기별을 합니다. 다윗에게로 가던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압살롬측에 발각되어 바후림의 어떤 사람 집에 들어가 우물 속에 숨었을 때 그 집 여인이 우물을 덮고 그 위에 곡식을 널어 두 사람이 들키지 않게 합니다. 그리하여 다윗 왕에게 후새의 전갈이 전달되고 다윗왕 일행은 급히 요단강을 건너 도망합니다. 그야말로 아슬아슬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숨 막히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그리고 다윗일행이 마하나임에 도착하였을 때 거기에서는 암몬족속 사람들이 먹을 것을 풍성하게 가지고 와서 다윗과 그 일행으로 하여금 기운을 차리게 해 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윗을 위기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력을 회복하고 전열을 정비한 다윗과 백성들은 뒤쫓아 온 압살롬 군대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윗을 성에 머물게 하고 군사들을 인솔하여 전장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다윗이 출전하는 그들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하여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아니, 지금 다윗이 압살롬 생각할 때입니까? 쥐가 고양이 생각하는 꼴입니다. 전쟁에 나가는 부하들과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든지 격려를 해 주어야 할 텐데 다윗은 오히려 왕권을 찬탈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반역자요 원수가 된 아들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접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에브라임 수풀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다윗 군대는 압살롬 군대를 패배시킵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도망하다가 그의 자랑인 긴 머리가 걸리는 바람에 대롱대롱 상수리나무에 매달리고 맙니다. 요압의 부하는 다윗의 부탁대로 압살롬을 죽이지 않고 요압에게 가서 보고합니다. 그런데 요압은 작은 창 세 개를 들고 가서 나무에 매달린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고 그 부하들은 에워싸고 압살롬을 쳐 죽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압살롬의 시체를 구덩이에 던지고 그 위에 큰 돌무더기를 쌓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 왕은 대성통곡을 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승전을 한 다윗의 군사들은 다윗의 통곡 때문에 풀이 죽고 마음이 슬퍼서 슬금슬금 죄지은 사람들 같이 성으로 도망하여 들어갑니다. 다윗은 얼굴을 감싸 안고 계속 슬피 웁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이 모양을 보다 못 한 요압이 다윗에게 따집니다. “왕이시어, 우리가 몽땅 죽고 압살롬이 이겼어야 하는 겁니까? 백성들 앞에 이 무슨 망발이십니까?” 그제야 다윗은 마음을 추스르고 백성들 앞에 나섭니다.

죽어 마땅한 원수 된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왕의 통곡....., 우리는 성경의 이 대목을 읽으며 참 슬프고도 착잡한 복잡한 심정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다윗은 패역한 아들, 아버지인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압살롬마져 사랑하여 그 죽음 앞에 통곡하였는데, 이 모습을 어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아픔을 생각합니다. 하필이면 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려 창에 가슴을 찔려 죽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그 참혹한 십자가에 아들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나타낸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우리에게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고통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원수 된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품안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내어주셔야 했던 그 아픔과 그 고통이 하나님이라고 왜 없었겠습니까? 죽어 마땅한 원수 된 죄인들이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하나님의 눈에서 어찌 피눈물이 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그 순간 독생자를 내어주신 그 고통과 죄인 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그 사랑과 기쁨이 범벅이 되어 또한 하나님의 가슴을 얼마나 헤집었겠습니까?

다윗 왕의 통곡을 들으며 백성들은 민망하여 마치 죄지은 사람들처럼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주시고 죄인들을 부르시며 통곡하는 음성을 듣는다면 어찌 더욱 민망하고 죄송하지 아니 하겠습니까? 압살롬을 위하여 우는 다윗왕의 통곡을 들으며 독생자를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세상의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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