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대인 사상가 Martine Buber는 그의 책 「Ich und Du(나와 너)」에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피할 수 없는 3가지 관계 적시했습니다. ①나와 너(사랑해야할 관계) ②나와 그것(사용해야할 관계) ③나와 당신(믿고 섬겨야할 관계)입니다. 올바른 관계는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세상 사물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한 청지기로 관리하는 것입니다. 물질을 섬기고 하나님을 이용한다든지, 이웃을 이용하고 사랑하지 못할 때 관계는 파탄되며, 이것이 죄입니다.
바른 관계 형성된 건강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삶의 템포를 조절해야 합니다. 그래서 ①빠른(바쁜)삶은 병든 삶, ②느린 삶은 건강한 삶, ③조용한 삶은 거룩한 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삶을 위하여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 영성입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내 집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우정을 위한 것이고, 세 번째 것은 교제를 위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3가지를 홀로, 마주, 둘러앉음이라고 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순간, 하루하루가 모여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점(點)모여서 선(線)이 되고, 선이 모여 면(面)이 되고, 면이 모여 공간이 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점 하나를 바로 찍어야 하듯이 우리도 지금 이 순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누가 말했듯이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요,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요,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영원과 잇대어 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의 「우주」라는 시가 있습니다. "제대로 노는 뜻의 파동 / 점 모여 선 / 선 모여 면 / 면 모여 체(體) / 체 모여 하나. 한 체가 쪼개어 면이 있고 / 넓은 면 쪼개어 곧은 선 있고 / 긴 선 잘라서 묘한 점 있으니 / 전체를 나타내는 것은 일점이니라...."

오늘 이 순간이 바로 영원과 잇대어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 그리고 "이 일"이 가장 중요한대도 사람들은 행복이나 가치를 현재가 아니라 미래나 다른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Karl Busse의 시 「산 너머」가 있습니다.  "산 너머 / 저쪽 하늘 멀리 / 사람들이 말하지요 / 행복이 있다고... 아, 그래서 나는 / 남들 따라 떠나갔어요 / 그리고 눈물만 머금고 / 돌아왔어요. 산 너머 / 저쪽 하늘 멀리 / 사람들 말하지요 / 행복이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오늘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삶은 늘 저 건너편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행복은 지연되고 우리는 오늘의 반복적인 일상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2. 그러기 위해서 요청되는 삶의 자세가 홀로-마주-둘러앉음입니다. "일상(日常)에서 일생(一生)까지"라는 어떤 광고 문구처럼 우리는 일상 속에서 즉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는 일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이 주시는 복을 발견하고 누려야 합니다.

(1) 먼저 "홀로"입니다.

오늘 우리 삶은 분주하고 복잡하고 소란합니다. 조용히 혼자 있지 못합니다. 아니 혼자 있으면, 삶이 조용하고 한가로우면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고, 어딘가를 가게 됩니다. TV를 켜야 하고, 컴퓨터나 핸드폰을 조작해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은 달랐습니다. 막1:35절에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나아감과 물러남이 분명했습니다. 나아감과 물러남의 균형을 맞추었습니다. 나아감만 있고 물러남이 없다면 삶은 맹목이 됩니다. 물러남만 있고 나아감이 없다면 삶은 진부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쁜 일과를 시작하기 전이나, 고된 일과를 마치고 나서, 가장 고요한 시간 홀로 하나님을 찾아가 하늘 아버지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삼아 자신의 마음을 조율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했습니다. '외로움'은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된 데서 오는 '홀로 있음의 고통'입니다. 반면에 '고독'은 내 존재의 근원과 하나 됨의 기쁨을 누리는 '홀로 있음의 영광'입니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을 치료하는 길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 고요히 앉아 있는 고독입니다. 고독은 외로움의 치료제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소란한 세상에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현실이지만 하나님 앞에 홀로 있는 고독의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의 출발점이요 승리의 길입니다.

(2) "마주"입니다.

a. 먼저 하나님과 마주해야 합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을 일망타진한 엘리야는 그 때문에 목숨에 현상붙은 절체절명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까지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음식과 마실 것과 단잠을 준비해서 기력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산에까지 가도록 도우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마주하게 되고, 세미한 음성과 함께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하나님과 마주할 때 우리는 확신과 담대함을 얻게 되어 새롭게 삶과 사역에 임하게 됩니다. 사실 은퇴라는 말(retire)은 펑크난 타이어를 때우고 바람을 넣어 다시 운행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마주할 때 우리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납니다.

b.사람과 마주함이다.
마주 섬 즉 "對立"이라는 말은 싸움, 투쟁을 말합니다. 간음중의 여인을 끌고 온 한 무리가 예수님까지 해치려고 눈을 부라리고, 손에 돌을 들고 서 있는 모습입니다. 생과 사가 말 한마디에 좌우될 형국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허리를 굽히고 땅에 글씨를 쓰셨습니다. 이 간단한 동작이 대립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이 한 마디 말씀으로 대립은 끝났습니다. 아마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똑같은 처지에 "그 입 다물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대립은 지양됩니다.

이와 반대로 마주함 즉 "對坐"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마주 앉는 것입니다. 상대에 대한 편견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너와 나는 서로 꺾어야 할 적이 아니라 함께 보듬고 보완하고 함께 동행해야할 동료요 친구라는 뜻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주 앉음은 화해와 평화의 시작입니다.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직행로가 없고 그리스도를 거쳐야 하듯이 이웃에게 나아갈 때도 직행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거쳐야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은 서로의 결점이나 단점을 보지 않듯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우리가 마주 할 때 모든 담은 허물어지고, 모든 간극은 메워져서 마침내 사랑으로 서로의 손을 잡게 됩니다.

(3) 둘러앉음이다.
홀로한 사람이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둘러앉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란 홀로 그리고 마주한 사람들이 둘러앉은 곳입니다. 여기서는 "네가 꼭 나와 같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너는 나와 같지 않기 때문에 여기 들어올 수 없다."고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비록 서로 사이에 다른 점이 많고 차이가 있어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무한정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밥상 공동체가 그랬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핀잔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예수 공동체의 특징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어떤 잣대를 가지고 차별하고 배제했다면 오늘 내가 어떻게 이 예수공동체의 일원이 되었겠습니까? 예수 공동체에서 제외된 사람이 아무도 없었듯이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형제의 떡을 공평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결국 이쪽저쪽 떡을 다 먹어치웠다는 이야기처럼 이렇게 저렇게 따져서 정죄하고 배제한다면 우리 공동체는 와해되고 해체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는 사탄만이 역사합니다.

예수님의 밥상 공동체가 나중에 성찬성례전으로 발전한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아주 세속적인 먹고 마시는 그것이 성찬성례전이 되었습니다. 여기를 떠나서 하늘나라를 따로 찾는다면 엄청난 착각입니다. 여기서 부터가 아니라 어디 하늘에서 하늘나라가 뚝 떨어질 것으로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해입니다.

예수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엑스트라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모두 주인입니다. 차별이 없는 공동체, 제외하지 않는 공동체 그래서 새로운 세상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홀로 있음을 통해 하나님 현존 안에 머뭅시다. 마주 앉음으로 평화의 기쁨을 누립시다. 둘러앉음으로 하늘나라를 여기서부터 누리며 삽시다.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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