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 (claude Monet 1840 ~ 1926)
색채가 조화를 이루면 데생의 정확해집니다. 색채가 완벽하면 형태도 안정되게 마련이다.

같은 풍경이라도 같은 순간은 한 번도 없다.

자연이야말로 빛과 색채의 변화를 표현하는 최상의 소재라 생각
풍부한 빛과 찬란한 색채의 대가
붓놀림이 매우 빠른 화가. 팔레트에서 색을 섞지 않고 캔버스에서 직접 색을 혼합. 풍부한 빛을 표현하기 위해 애씀

르아브르의 소부르주아였던 가족들은 그가 미술가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애를 썼다. 어린 시절 부댕의 격려를 받았고, 르누아르 등과 함께 글레르의 스튜디오에서 공부했다. 1870~1871년 런던에 머물렀으며 그 이후에는 파리 북부인 아르장퇴유와 베퇴유에서 살았다. 1883년 고향인 노르망디의 지베르니 쉬르엡트에 정착했다. 경제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잦았고, 뒤랑-뤼엘을 통해 1880년대에 가서야 그런대로 벌이를 하기 시작했다. 명성은 1889년 조르주 프티 화랑에서 열린 로댕과의 2인전 이후 찾아왔다. 그와 풍경과의 신비적인 교감(30대에 인물화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은 말기에 추상의 미개척지로 그를 이끌었다
모네는 마네에 의해 창조된 빛의 파악을 발전시켰고, 이것에 과학적인 기초를 둔 화가로, "물체에 그 자체의 고유한 색은 없다. 색채는 빛의 변화와 함께 변화한다."는 그의 인상파 이론은 그 자신에 의해 강조되고 실천되었다.

태양 아래에서 빠르게 그리다. : 인상파의 근본 이념의 실천. 보이는 모습은 표면의 시각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화가는 그 인상을 포착하여 시각적 충돌을 재현하는 것.

흰색으로 바탕칠을 한 캔버스 : 보색효과에 대해서도 신경을 씀. 색의 명쾌성을 위해 바탕을 흰색이나 크림색을 칠함.

인상, 해돋이1872 50×65cm파리 마르모탕 미술관
제1회 인상파 전람회에 출품된 이 작품은 인상파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계기를 만들었다. 빛과 자연의 공기는 마네에게 가장 중요한 회화 주제였으며, 교묘한 발광은 인상파 회화의 정통을 보여준다.

생 타드레스의 테라스1866 91.4×129.6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모네는 태양광 속의 풍경과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색채분할법을 사용하고 있다. 테라스, 바다, 하늘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눈 뒤 깃대를 이용해 합치되는 구도가 이색적이다. 꽃과 파도 등의 눈부신 묘사는 인상주의의 전통적인 기법을 대변한다

 

강 1868 81.7×100.3cm 시카고 미술관

모네의 실험적인 작품 제작 의식이 돋보인다. 물이라는 존재는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을 끊임없이 따라다녔던 과제였다. 모네는 물의 공허함을 표현하기 위해 물이 지닌 고유색의 관념을 해방시키고 빛에 의해 반사든되는 주위의 색감을 받아들였다

 

버드나무 밑의 모네 부인 1880 81×60cm 워싱턴 국립회화관

모네의 회화에서는 어떤 사물이든 고유의 색채를 지니지 못 한다. 빛으로 흡수된 흰 옷을 입은 부인의 모습마저도 확연하지 않다. 버드나무의 나뭇잎들은 엷은 잔 터치로 마치 연기처럼 날아오른다. 멀리 보이는 집들의 풍경도 단지 담홍색과 청회색의 반점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우리가 사물의 개체 하나 하나를 들여다보는 동안 모네는 전체를 꿰뚫어 보며 색채의 혼합을 추구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혼합되어 있는 색채의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들은 하나 둘씩 형체를 드러낸다. 풀숲에 감춰져 있던 부인의 모습이 나타나고, 버드나무의 잎사귀들은 가늘게 떨리며 소리를 낸다.

 

지베르니의 포플러 1888 74.5×93cm 뉴욕 근대미술관

포플러를 소재로 20여 장에 달하는 연작을 그렸던 모네는 포플러를 통해 수직과 수평이 만들어 내는 공간에 흥미를 느꼈다. 햇살을 듬뿍 받은 포플러는 화려하게 빛나고, 푸른 잎사귀들잰잿, 푸른 잎사귀들잰의 생생한 떨림은 생동감이 느껴진다.

 

루앙 대성당1  루앙2  루앙3

허공을 향해 장엄함을 과시하고 있는 성당. 성당을 감사고 있는 빛과 색채를 통해 정지되어 있는 듯한 이 건물은 새로운 호흡을 하고 있다. 모네는 하나의 대상물이 빛에 의해 어떻게 변화하는 지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수련의연못1  2
모네의 수련의 연작은 1898년부터 시작된다. 1883년 4월 말 지베르니의 농가를 빌어 이 곳에서 지내 오던 모네는 안정을 되찾게 되면서, 1891년에는 이 집으 ㄹ사서 자기의 소유로 하였다. 마치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 나가듯 그는 뜰에 화초를 심고, 연못을 파서 에프트강의 물을 끌어들여 버들을 심고, 수련을 심었다. 그리고 대밭을 가꾸고, 장미 울타리를 마련하고, 동양풍의 무지개다리를 가설하였다. 조원, 개축, 식수, 손질 등 이 모든 경영은 정원사 펠릭스 브루유의 힘을 빌어서 모네 자신의 모 티프를 자연 속에서 만들어 냈다.

개양귀비 꽃, 1873년, 50 x 65cm
광활한 초원에 핀 무수한 개양귀비의 빨간 색채의 향연을 그린,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서정이 감도는 그림이다. 모네의 초기작에 해당되는 34세 때의 작품으로, <해돋이, 인상>과 함께 1784년 제 1회 인상주의 전에 걸린 작품이다.
모네는 이 그림에서 선연한 빛을 집요하게 추구하면서, 색채의 독자적 주장을 회화적 차원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면을 상하로 양분시킨 늘어선 나무들의 검푸름과 경쾌한 터치로 처리된 개양귀비의 빨간 반점, 푸른 하늘과 솜털 구름, 그리고 화면 중앙의 멀리 보이는 건물, 포즈를 취한 여인의 옷과 양산의 수색이 빛을 담뿍 받았으면서도 독립된 색채를 띠고 있다. 장대한 공간감과 더불어 색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듯한 초여름의 향연이다.
후일 <양산을 든 여인> 연작을 예고하고 있기도 한 이 그림은 야외 사생화, 데생의 무시, 풍경의 우위성, 미완성으로 끝난 것 같은 터치 등으로 인상주의의 모든 특징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모네의 그림은 밝고 부드러운 색조 속에도 다른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없는 일종의 비극적인 울림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주제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화가의 생활이나 마음의 직접적인 반응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연에 대하여 비인간적일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을 의지하는 태도, 특히 흘러가는 시간의 지배에 대한 거의 절대적인 복종의 자세에서 오고 있다. 이 그림처럼 필촉의 분할이나 빛의 효과를 과도하게 의식하지 않고, 빠른 필촉으로 그린 작품에서는 특히 그런 느낌이 강하다.

점심식사, 1873년, 160 x 201cm
정원에 점심식사가 차려진 이 집은 모네가 아르장퇴유에 정착하여 살던 곳이다. 식탁 왼 편으로 블록 쌓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아이는 모네가 1867년 얻은 맏아들 장이다.
햇볕이 쏟아져 내리는 한 낮, 갖은 꽃들의 어울림으로 화사한 정원은 모네 가족의 행복한 순간을 느끼게 한다. 나무 그늘에 차려진 식탁에는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어른거리는 햇살과 나뭇잎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경쾌하게 대조를 이룬다. 이미 식사가 끝난 듯, 화면 중앙의 식탁에는 냅킨이 헝클어져 있고 점심식사의 주인공은 찾아 볼 수 없다. 나뭇가지에 걸린 밀집 모자와 벤치에 남겨진 양산은 중심 인물이 빠진 공간의 미묘하고 신비한 분위기에 가세하고 있다.
모네는 식탁보와 헝클어진 냅킨, 찬 잔과 포트, 과일과 투명한 유리잔 등 일상의 식탁에서 볼 수 있는 세세한 정물들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그려 넣었다. 하늘도 보이지 않고 수평선이나, 길이 끝나는 곳도 보이지 않는 답답한 공간은 관람자의 시선을 저택 정면에 붙들어 두는데, 이러한 공간과 구도는 화면에 묘사된 일상생활의 내밀한 정경을 부각시키고 있다.

아르장퇴이유 철교, 1873년, 54 x 71cm
1860년대 이후 파리는 급속도로 근대화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도로와 철도가 활발하게 건설되었다. 철도가 등장하자 센느 강 유역의 아르장퇴이유와 파리는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1872년부터 아르장퇴유에서 작업한 모네 역시 주변에 보이는 다리와 철도 등을 종종 화폭에 담았다. 마치 카메라의 렌즈에 잡힌 순간처럼, 화면에는 철교를 지나는 기차가 비스듬하게 가로질러 배치되었다. 기차가 뿜고 가는 증기는 대기 속에 아스라이 스며들고, 철도의 교각 아래에는 물에 비친 다리의 이미지가 흔들리고 있다. 실재의 다리는 육중하고 견고하지만, 수면에 비친 다리는 물의 반사광 속에서 추상적인 이미지로 변화하였다.
모네는 근대성의 새로운 상징으로 떠오른 철도 그 자체에 매료된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구름과 그 속에 흩어지는 증기, 그리고 일렁이는 수면과 반사된 이미지들에 매료된 것이다. 시시각각 변해 가는 물의 일렁임, 대기의 떨림, 수면에 반사하는 햇볕의 미묘한 변화 등 그 순간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는 모네를 인상주의의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5∼66년,248 x 217cm
이 작품은 1863년 마네로 하여금 세간의 비난의 대상이 되도록 만든 <풀밭 위의 점심>과 비슷한 주제를 재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모네 역시 마네의 사실주의를 이어받아 야외의 밝은 빛 아래에서 인물에 접근하고 있다.
처음부터 1866년 살롱전의 출품을 계획하고 구상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인지, 이 작품의 인물들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는 달리 한결같이 산뜻하고 우아하게 차려입었다. 이 작품을 위해 친구인 바질과 화가인 쿠르베가 모델을 서주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오른편에 앉아 있는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쿠르베인 듯 보인다. 스케치 작업은 야외에서 이루어졌으나, 채색 작업과 많은 섬세한 부분들이 화실에서 이루어진 이 작품에는 여전히 어두운 색조와 그림자가 눈에 띈다. 밝은 빛과 그 속에 어우러진 풍경에 관심을 가지긴 하였지만, 넓은 색면으로 견고하게 잡은 형태감, 개략적인 붓질과 강한 콘트라스트 등에서 아직까지 모네의 초기 화풍이 돋보인다.
살롱에 출품하기 전, 쿠르베의 비평을 들은 모네는 이 작품을 살롱에 출품하지 않았다. 이 후 이 그림은 밀린 집세 대신에 집주인에게 맡겨지고, 지하실의 열악한 보관 상태는 그림을 손상시켰다. 결국 파손된 그림의 오른쪽과 왼쪽 일부가 잘려져 나갔고,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는 이 중앙 패널과 왼쪽 부분화만이 소장되어 있다. 모스크바 미술관에 푸슈킨 박물관에 소장된 이 작품의 습작으로 잘려나가기 전의 본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몽토르게유가, 1878년 6월 30일의 축제,1878년,81x50cm
이 작품은 1878년 6월 30일 파리 만국박람회의 개최된 날, 파리 거리의 축제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당시 파리는 보불전쟁 이후, 처음 맞는 국경일에 기쁨과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1920년 모네는 그 날을 기억하면서, 인파로 가득 찬 거리를 걷다가 그림을 그릴 만한 발코니를 발견하고 바로 그 곳을 빌렸다고 회상하였다. 모네는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는 이 걸작에서 장중한 구성이나 돋보이는 영웅을 내세우지 않았다. 근대사회의 새로운 주인공인 시민들의 모습으로 근대적인 역사화를 만들어냈다. 거리에 펄럭이는 삼색기는 모네가 꾸준하게 추구하였던 순간적인 움직임, 그 끊임없는 약동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소재였다. 푸른색, 흰색, 붉은색의 경쾌한 병치, 짧게 끊어진 붓질들은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의 순간적인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다.

런던 국회 의사당, 1904년, 81 x 92cm
1870년 안개 낀 템즈 강의 모습을 여러 개의 화폭에 담았던 모네는 1899년부터 1901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겨울을 런던에 체류하면서, 템즈 강을 중심으로 워털루 다리, 차링크로스 다리, 국회 의사당을 주제로 100여 점에 가까운 그림을 제작했다. 모네는 상당히 빨리 변하는 안개의 인상을 포착하기 위해, 100여 점의 그림을 동시에 그렸다. 그러나 야외에서만 작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모네는 대부분의 작품들을 런던에 머물며 완성한 것이 아니라, 지베르니에 가지고 돌아와서 완성시켰다.
이 작품은 성 토마스 병원의 발코니에서 템즈 강 너머의 국회 의사당을 그린 것이다. 붉은색과 연한 자주색, 금색 소용돌이의 미묘한 분위기가 화면 주변의 불꽃 모양의 회오리 안에 자리잡고 있다. 캔버스 전체가 깊은 안개 속에 침잠 되어, 희미하게 빛나는 붉은색의 태양은 수면에 반사되고, 고딕풍의 건축을 마치 환각처럼 푸르스름하게 떠올려 놓고 있다. 가로, 수직, 대각의 방향으로 희미한 물감의 흔적이 만들어 낸 템즈 강은 굴절감과 동시에 흐르는 안개의 인상을 주고 있다.

자화상,1917년, 70 x 55cm
이 자화상은 모네의 나이 77세 때에 그린 것으로, 불편한 시력으로 홀로 은둔한 채 <수련> 연작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모네는 1911년 두 번째 부인인 알리스를 잃었으며, 이어서 1914년에는 카미유와의 사이에 두었던 장남 장마져 앞세웠다.
1910년 이후, 프랑스 내의 비평가들로부터 격찬이 쏟아졌으며, 국외에서 역시 화상, 뒤랑 뤼엘과 포터 파머와 같은 수집가의 도움으로 모네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많은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이제 생의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노화가의 풍모에는 어딘지 서글픔이 베어 있다.
모네는 이 자화상을 가깝게 지내던 지인, 클레망소에게 선물하였다. 1927년 모네가 사망한 지 1년 후, 이 작품은 클레망소의 기증으로 루브르에 소장되었다. 현재는 오르세 미술관에 옮겨져 있다.

과일이있는정물
모네의 모티프에는 정물이 별로 없다. 1879년, 아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실의와 고독을 달래기 위함인지 그 때 그려진 작품이다.
 
건초더미(여름) 건초더비(겨울) 아르장퇴이유 유역  아르장퇴이유의 산책 정원
아르장튀르다리 파라솔여인  일본의상의 여자  라그루누이에르
 
( http://namgane.cafe24.com/detail174_2.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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