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창조자이자 주관자이시므로
이 세상 모든 것의 운행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해가 지고 뜨는 것,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의 운행,
사람의 탄생과 활동과 죽음 등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뜻 안에서 움직인다.
이것을 하나님의 작정 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성경에 의하면,
땅의 온 세계, 땅의 모든 거민,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처리되며
이를 금하거나 돌이킬 자가 없다(사 14:26, 27; 단 4:35; 엡 1:11).
즉 하나님의 도모는 영영히 서며(시 33:11).
그 경영은 반드시 이루어진다(사 46;11).
이는 또한 생명의 길이나(욥 14;5), 죽음의 양식(요 21:19) 및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의 배후에도 작용한다(창 50:20; 사 44:28; 엡 2:10).
이것을 하나님의 작정
또는 하나님의 뜻, 도모, 지혜, 경영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이에 대한 이해가 확실할 때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가져서
“나의 결정”에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주권적인 뜻과 소원적인 뜻

(1)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사람이 거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의 종말과 마지막 심판과 같은 것은
반드시 일어날 일들이다.
우리의 순종이나 불순종과는 상관이 없다(계 2;1 참조).
또한 피조물을 섭리하는 자연 법칙을
우리는 거스릴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중력의 법칙을 부정하더라도
높은 데서 떨어지면 다치거나 죽기 마련이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은
도덕적인 뜻을 초월하는 경우도 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사건이나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물론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당사자인 아브라함은 실제로 받아들였다-등이다.
이런 것은 예외에 속하지만
하나님은 기쁘신 뜻대로 주권적인 뜻을 행하신다.



(2)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
또는 사람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조건적인 뜻은 사람이 거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복 받기를 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것이지만
강제하시지 않고
사람의 자발적인 순종에 맡기시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전임 사역자로의 소명에 대한 뜻은
강제하시는 경우가 많지만
개인이나 단체의 축복과 관련된 것은
순종하면 이루어지고
불순종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많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이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이며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그들은 불순종으로 인해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물론
그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자신을 정화시키고 신앙적으로 성숙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 성숙은 모든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드러난 뜻과 숨겨진 뜻

1. 드러난 뜻, 계시된 뜻

성경 기록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고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
성경의 명령과 금지,
분명한 가르침은
모든 신자들을 향해
분명하게 드러나고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들은 윤리, 도덕과 상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덕적인 뜻’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성경은 신자에게
전도하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거룩하고,
말씀을 잃고 묵상하라고 기록한다.
모든 신자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신앙 성장을 이루어가야 한다.
이것은 모든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다.

또한
불신자와 결혼해서는 안 되며,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해서도 안 되고,
-동업이나 동역을 하지 말라는 뜻-
악하고 더러운 일은 하지 말라고 기록한다
-직업 선택의 범위.

그러므로 성경에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이냐 불순종이냐의 문제일 뿐이다.


(2) 숨겨진 뜻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통해
부모와 형제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비전을 주셨지만
노예로 팔리고 감옥에 갇히는 사실은
미리 말씀해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무런 사전 통고 없이
욥에게 끔찍한 고난을 허락하셨다.
일어나거나 당하고 난 후에야 아는 것,
이것을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라고 한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왜 하나님은 고난과 어려움을 미리 알려주시지 않을까?

첫째 겁을 먹을까봐 미리 알려주시지 않은 경우이다.
실제로 이런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요셉에게
“요셉아, 비록 내가 너에게 큰 비전을 주었지만
너는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리고 감옥살이도할 것이다”라고 말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요셉은 큰 비전보다는
노예가 되고 감옥에 갇히는 것을 염려하고 걱정하느라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미리 아시면서도 알려주시지 않고
실제로 시험이나 고난을 당할 때
감당할 힘을 주시거나
피할 길을 주셔서
고난을 이기게 하시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원하시는 그릇으로 빗어가신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앞날의 모든 것을
시시콜콜하게 다 알려주시지는 않는다.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모른 체 정든 고향을 떠났다.
특히 전임 목회자로 부르실 경우,
“철수야, 너 내 일 좀 해라.
너는 어느 신학교에 갈 것이고,
네가 공부하는 동안
재정 지원을 얼마 해주겠다”면서 부르시는 것은 아니다

소명자의 마음 속에
“나는 네가 내일 하기를 원한다”는 강한 확신만 주신다.
나머지는 믿음으로 따라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렇게 볼 때
결국 우리가 발견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의 범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주권적인 뜻은 알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고
숨겨진 뜻은 미리 알 수가 없다.
계시된 뜻은 신자 모두가 지키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 범위 안에서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결정하고 선택하는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란 것은 없고,
신자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사람의 이성을 사용하고,
본인의 능력과 환경을 감안하고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바탕으로
본인이 자유롭게 결정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결혼, 직장, 진학 및 사역에 관한 결정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저촉되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두 가지 이상의 선 중에서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비판을 면치 못한다.

첫째 이런 주장은 우리의 결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을 경시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도덕적인 뜻이라는 범위를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그 범위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결정해도 좋다는 주장은
우리의 결정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것이다.


둘째 이런 주장은 초자연적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인도를 부인한다.

음성이나 환상과 같은 초자연적 계시를 통한 인도는
성경의 인물에 국한된 것이고
오늘날의 우리는 기대하거나 구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카페 회원의 대부분은
초자연적 계시를 믿는 사람들이므로
이에 대한 변증은 생략한다).


셋째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나를 지으시고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내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도
나의 주인이 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주장하신다.
도덕적인 범위만 정해 놓고
나머지는 나의 결정에 맡긴다는 주장은,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하신 후
자연의 운행을 섭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운행은 자연 법칙에 맡기셨다는
소위 말하는 이신론(理神論, Deism)과 다를 바가 없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말하는 ‘지혜’는 결국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데
하나님의 지혜가 어떤 방법으로 오는가?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성적인 생각의 형태로 온다고 한다.
지극히 이성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성적인 생각은 물론
음성, 환상과 같은 초자연적 계시로도 온다.
자기들이 체험이 없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온전하신 뜻과 허용하신 뜻

그러나 개인적인 뜻 중에도
온전하신 뜻과 허용하신 뜻이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것은 온전하신 뜻이지만
이쉬마엘을 낳은 것은 아브라함의 자의에 의한 것이다.
전자를 온전하신 뜻, 후자를 허용적인 뜻이라고 한다.

원래 허용적인 뜻은 사람의 죄에 대해 사용된 용어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짓도록 방관적으로 허용은 하셨지만
적극적으로 개입하시지는 않으셨기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의 죄값을 치러야 한다.


아브라함이 이쉬마엘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는 상관 없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므로 그 열매는 자기가 먹어야 한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우리가 불순종하거나
연약하여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여 다른 선택을 할 때
그 결과는 선택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단히 신앙 정진에 매진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행하도록 해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구속적인 뜻과 일반적인 뜻

내가 주의 종이 되기 위해 신학교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외지 선교사로 갈 것인가, 내지 목회자가 될 것인가는
하나님의 사역과 직접 관련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구속적인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공을 법학으로 할까 경제학으로 할까?
공대에 갈까 상대에 갈까 의 문제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물론 특별하게 인도하시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본인의 재능과 적성,
마음의 소원,
주변 여건에 맡기시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여러 종류의 사람을
골고루 들어쓰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속적인 뜻의 경우는 간섭을 많이 하시지만
일반적인 뜻의 경우는 계시된 뜻의 범위 내에서
당사자의 자유 결정에 맡기시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전혀 간섭하시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구속적인 뜻의 경우보다
간섭하시는 강도나 빈도가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결정과 사소한 결정

우리가 내리는 선택이나 결정에는
결혼이냐 독신이냐,
대학 진학이냐 아니냐,
어떤 직장을 얻을 것인가,
어디서 어떤 사역을 할 것인가 와 같은 기본적이고 중요한 결정과,
기본적이고 중요한 결정에 부수하는 결정이나
별로 중요하지 않는 사소한 결정이 있다.

예를 들어,
오늘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내가 어떤 색, 어떤 종류의 자동차를 살 것인가와 같은 결정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결정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상식과 습관,
여건과 능력,
기호와 환경을 고려하여 결정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런 사소한 결정에도
때로는 하나님이 간섭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개방적이 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필자는 이런 경우에는
그날의 전체적인 기도를 통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보호, 지혜, 인도를 구한다.
“하나님
오늘 하루도 주님께 맡깁니다.
저를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매사에 지혜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실례로,
내가 사는 지역에서 뉴욕 시로 가는 것은
강북 지역에서 한강을 통과하여 강남 지역으로 가는 것과 같다.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교통 체증에 걸리느냐 아니냐가 결정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주님,
교통 체증에 걸리지 않게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 후 출발하면
편하게 통과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편하게 통과하면 기도해서 그랬는지
마치 그 시간에는 다른 통로도
뚫려 있었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깜박 잊고 기도하지 않고 갔다가는
교통 체증에 밀려 몇 시간을 허비하거나
아는 길도 헷갈려서 헤맬 때가 있다.


또한 교인들을 전화로 심방할 때
이전에는 내가 편한 시간에 전화를 한 결과
그들이 좋지 않은 시간에 전화하여
별 효과를 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전화하기 전에
하나님께 문의하여 허락을 받고 하면
그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받는 경우가 많은데,
허락하지 않음에도 불고하고 내 생각으로
전화를 한 경우
좋지 않은 시간에 전화하여 별 효과가 없거나,
괜히 전화한 결과
긁어 부스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비록 이런 것들은 사소한 결정의 범주에 속하지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면
형통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요약하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결정인
결혼, 진학, 사역 등에 관한 결정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 안에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자신의 은사나 능력과 기호,
-마음의 소원,
-주변의 환경,
-여러 사람의 조언을 감안하여
-결국은 자기가 결정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아무리 눈을 닦고 봐도
너는 어느 학교에 진학하고,
너는 어떤 직장을 갖고,
너는 언제 누구와 결혼하라는 말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진학, 결혼, 직장 및 사역에 대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궁금해 하고 조바심을 낸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일까?
이런 일은 그저 본인이 알아서 하는 일일까?
아니다.
우리가 복중에 있을 때부터 아시고,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아시고
앉고 서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드는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멋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버려두시지 않으셨다.
하나님께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며,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마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뜻을 갖고 계신다.


그렇다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필자는 여러분과 함께
이 여정을 걸어가고자 한다.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가질까?


그러면 먼저 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가지는지를 살펴봅시다.


첫째 미래에 대한 호기심이나 궁금증 때문이다.

특히 진학, 직장, 결혼 및 사역과 같은
중요한 결정을 한꺼번에 많이 내려야 하는
20대 청년들에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사실 신자가 아니라면
결정은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내 생각이나 능력,
주변의 환경,
여러 사람의 조언을 통해 결정하면 된다.
인간적 가치관에 의해 결정하면 되므로
심각한 갈등이나 따져야 할 것들이 적다.

그러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신자는
한 가지 중요한 결정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앞서 잠시 말겠지만
이런 것들을 결정하는 구체적인 지침들이 성경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뢰하고 느긋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심 반, 불안 반의 나날을 보내기도 한다.



둘째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 때문이다

만사가 순조롭게 형통하고 안정되어 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고통스럽고 힘들게 구하지 않은 경향이 짙다.
주어진 환경에 충실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이란 것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예측 가능한 일들보다
돌발적인 일이 자주 일어나고
내 생각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기대와 소망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낙심과 좌절로 인해
과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셋째 오늘날에는 결정할 일이 너무 많다

전통적인 사회에서
결혼은 부모가 짝지어 주는 것이다.
또한 부모의 가업을 물러 받으면 된다.
그러나 오늘날은 모든 것을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선택의 폭이 너무 넓어서
이것저것 비교하면서 사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정도로 종류가 많고 선택의 폭이 넓다.

공산 치하에서 민주 국가로 온 사람들이
제일 고심하는 것이 바로 이 분야라고 한다.
공산 치하에서는 국가가 모든 것을 결정해 주기 때문에 쉬웠는데
민주 국가에서는 무엇을 하든 수많은 것들 중에서
내게 맞는 것을 내가 선택하고 결정해야 되는데
이것이 말과 같이 쉽지 않다.
제대로 결정하여 선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어봐야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의견이란 것도
이 사람 다르고
저 사람 달라서
오히려 헷갈릴 때가 많다.
그러므로 결국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
이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혹시나 잘못 결정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두려움으로 인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는 사람도 있다.
혼자만의 부담을 줄이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다른 사람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매스컴에서 강조하거나
남들이 좋아하고 실제로 행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학자들은
현대 사회를 타인지향형의 사회라고 한다.
남들 따라 하면 최악은 면할 수 있고
마음의 안정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두려워 하는 사람도 있다.

혹시나 하나님이
내가 두려워 하는 최악의 것을 하라고 하시지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시지 않을까?
혹시나 나를 심하게 책망하시지나 않을까?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생각보다는 많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은 내버려 두고
자기 열심, 자기 좋아하는 일이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고 자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수고는 많이 했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수고를 할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모른 체
당장 내 손에 있는 ‘사탕’이 아까워서 발발 떨거나,
마치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가 고난 받고 고통 받는 것을 즐거워하시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다.
기억하라.
하나님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내 대신 죽게 하신 분이란 사실을.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풍성한 축복을 예비하고 있는 분이란 사실을.


또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이전부터 그렇게 해왔으니까,
남들도 그렇게 하니까,
성경적으로 옳으니까 라고 생각하여
자기 뜻대로 그럴 듯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
하나님의 뜻은 문의하지 않고
자기 열심을 내어 놓고
하나님 일 많이 한다고 뽐내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칭찬을 받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칭찬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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