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답변에서는  달라스 윌라드나 리처드 포스터와 같이 모두에게 너무나 친숙하지만,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그들의 신학적 경향성과 해악성에 대해 몇 말씀드리겠습니다.

 

1. 과연 그들은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인가?

 

달라스 윌라드와 리처드 포스터를 비롯해서 헨리 나우웬, 필립 얀시, 브루스 윌킨스, 유진 피터슨, 릭 워렌,

 데이빗 제레마여, 브라이언 매클러렌...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복음주의의 아이콘이라는 것과 이들의 이름으로 출간된 책은 여지없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의 관심사가 매우 유사하다는 것과,

 마치 한 사람의 생각인양 내용적으로 강한 결속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한 가지가 더 있군요.

교파, 교단, 신학, 심지어 목회자, 일반성도를 구별하지 않고 엄청나게 인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인들로부터 개신교 성도들에게까지, 장로교회에서 오순절교회에까지,

복음주의에서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이들의 활동과 영향은 전방위적이며,

 이들의 책을 접하는 모든 사람들의 신학적, 교파적, 교리적 차이를 단번에 무장해제 시키는

참으로 놀랍고도 대단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의든, 타의든 누구에게나 복음주의자 혹은 영성주의자라고 불립니다.

 복음과 영성의 조화... 말로만 들어도 뭔가 완벽한 조합처럼 느껴지는 표현입니다.

이들의 책을 접한 사람들은 저마다 이들로 인해 복음없는 영성과 영성없는 복음으로 편향되었던

기존 신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한국 대형 기독교 서점들의 치열한 보급 정신과 대형 교회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적극적인 추천과

 보다 새로운 복음에 목말라하는 성도들의 강렬한 욕구가 맞아 떨어져,

 이들의 책들은 어느새 복음주의의 신학의 준거점이 되었고,

수준있는 신앙생활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듣기에는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하는 신학교에서도 교과서로 채택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한국 교회에 소개된 시점이 불과 수년 전의 일임을 감안한다면, 가히 폭발적인관심과 결과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덕분에 님처럼 저도 한때 이들의 책이라면 아무 의심없이 탐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일이 무의미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책을 통해서, 그동안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접할 수 없었던 어떤 고상함과 심오함과 명료함과 건전함이

두루 갖추어진, 마치 명품으로 영혼을 치장하는 듯 한 부티끄한 느낌이 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느낌은 그야말로 느낌뿐이었지, 결코 복음의 진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고상하듯 하지만 음험한 속임이었던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의 신학은 ‘참된 복음주의를 말살(훼파)하는 명목뿐인 복음주의’에 불과하였습니다.

결코 그들은 진정한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아닙니다.

 

2. 왜 우리는 그들을 복음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는가?

 

문제는 그들의 사고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신학 때문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윌라드 달라스나 리처드 포스터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이 시대의 가장 탁월한 복음주의 영성신학자라고 평가받는데,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들의 관심은 복음을 영성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말하는 영성의 뿌리가 전혀 복음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전형적인 퀘이커 교도의 후예로, 퀘이커적 영성 운동을 주도하는

 ‘레노바레’(The Renovare, 일명 ‘친구들’(Friends))라는 단체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윌라드 달라스는 이 단체의 설립부터 정신적인 멘토로서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추구하는 영성은 퀘이커교의 창시자인 조지 폭스(George Fox, 1624-91)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지 폭스에 의해 조직된 퀘이커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형식적과 무교회적 관념 가운데

하나님과 직접적인 내적 교제(경험, 만남, 합일)가 가능하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퀘이커 교도들은 기존 교회의 형식적 기재들을 반대하면서,

성도 개인의 묵상과 명상가운데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신앙을 고집하였습니다.

 물론 이들 역시 개신교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고,

만인제상장설과 같은 종교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적인 하나님 체험을 명분으로

 종교개혁의 가장 좋은 선물(예를 들어, 신학, 교리, 예배 모범, 교회 정치 등등..)들을 포기하였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에 있어서 성경은 객관적인 (계시)진리의 기준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신앙적 감상과 각성을 위한 전형적인 도구에 불과합니다.

성경 해석의 주관화와 신령주의화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리처드 포스터와 달라스 윌라드는 조지 폭스의 퀘이커교적 신앙을 좀 더 세련되고 현대화된 정서에 맞도록 재해석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또는 Centering Prayer, Breath prayer)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L 목사와 K목사등을 통해

한국 교회에 급속도로 붐을 일으키고 있지만,

사실 관상기도는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타종교에서는 오래전부터 행하던 기도 방식이었습니다.

적어도 조지 폭스는 성경의 범주 안에서 하나님과의 실제적 경험을 꿈꿨지만,

리처드 포스터와 달라스 윌라드는 성경 밖으로의 영역으로까지 외연을 확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칼 융과 같은 사람의 심리학적 방법론을 기초로 성경을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습니다.

 다시 말해, 보편구원론적 개념에서 신을 찾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하나님과의 내통하는 방법을

 ‘기독교적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풀이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최근 한국 교회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미국의 대형교회들(윌로우 크릭 커뮤니티교회, 새들백 교회등)이 이들의 ‘영성’운동을 포스트 대안으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참조, http://www.lighthousetrailsresearch.com/willowcreek.htm).

얼마 전에 윌로우 크릭의 빌 하이블 목사의 참회 소식이 한국 교회에 큰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참조,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406).

그러나 빌 하이블 목사의 참회는 ‘방법론적인 목회’에서 ‘보편구원론적 영성 목회’로의 전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새들백의 릭 워렌 목사도 전적으로 동감으로 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 이들 교회는 교회의 체질을 관상기도 중심의 영성운동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윌로우 크릭 교회의 경우,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 콘퍼런스의 주제가 최근 몇 년동안 거의 이 부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회 비젼을 이루기 위해 이들 교회들은 성도들에게 공개적으로 관상기도와 관련된 서적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달라스 윌라드와 리처드 포스터의 서적도 예외 없이 끼어 있습니다.

 

이왕 여기까지 설명하였으니,

독자들이 잘 알만한 두 사람만 더 언급하겠습니다.

달라스 윌라드와 리처드 포스터가 직접적으로 영적 스승으로 생각하는 인물이, 바로 헨리 나우웬입니다.

 어쩌면 한국 교회에 ‘복음주의 영성주의’ 바람을 일으킨 최초의, 최고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책만 수십 권에 달할 만큼 헨리 나우웬의 명성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헨리 나우웬은 절대로 복음주의자가 아닙니다.

그의 책을 조금만 신중하게 읽어 본 사람이라면 몇 문장에 대해서는 고개를 그떡이다가도

전체 문맥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가장 성경적인 사상을

가장 비성경적으로 가장 자연스럽게 풀어내는데 있어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그가 가톨릭 사제였고, 종교다원주의자였으며,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모르더라도,

 우리는 그의 책 속에 숨겨진 그의 비신앙적 본성을 발견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헨리 나우웬이 스스로 자신의 영적 아버지라고 존경해마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토마스 멀튼(Thomas Merton)입니다.

그는 가톨릭 수사로 20세기 관상기도 운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영성’이라는 촉매를 통해 복음을 초월한 모든 종교와의 영성과 만날 수 있음을 몸으로 보여 준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수도원에서 살면서 기독교의 영성과 모든 종교의 영성과의 조화와 일치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런 공로로 달라이 라마를 비롯하여 수많은 세계 종교 지도자들이

그의 무덤을 찾아와 멀튼의 방식대로 미사 참배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우웬과 윌라드와 포스터의 저서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인물이 멀튼입니다.

그중에서도 포스터의 경우, 그의 모든 책에는 반드시 멀튼의 어록을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풀어내는 방식과 표현을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생각의 소유자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하지만,

오직 성경,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의 복음은 혐오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을 부르짖지만, 그리스도의 공의와 심판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지만,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집중된 삶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상호 소통을 위한 인격적 영성을 언급하지만,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내적 자아를 찾아가는 침묵과 묵상에 대해서는 열려있지만,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미 죽어 있는 자아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불확실한 종교적 신비를 종교적 확신의 계기로 삼지만,

유일무이한 하나님 말씀으로 인한 계시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종교적 편견으로 몰아붙입니다.

 성경의 일부(구절)를 인용하거나 강조한다고해서 복음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 말씀만을 가리키며, 그 말씀의 전체를 가리키며, 그 전체를 가감없이 정직하게 증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증거하는 내용을 복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과연 이들을 진정한 복음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어느 시대보다도 진리 안에서 명확한 지혜와 사려 깊은 분별이 요청되는 때입니다.

두 가지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지혜와 분별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6-8)

 

가져온 곳 : 
블로그 >영적 분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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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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