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이 노래를 늘 부르며 작은 불꽃처럼 살자고
다짐하고 다짐했었습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1.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
곧 주의 사람들 그 불에 몸 녹이듯이
주님의 사랑 이같이 한번 경험하면
그의 사랑 모두에게 전하고 싶으리.
2.
새싹이 돋아나면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 화창한 봄날이라네.
주님의 사랑 놀라와 한번 경험하면
봄과 같은 새 희망을 전하고 싶으리.
3.
친구여 당신께 이 기쁨 전하고 싶소!
내 주는 당신의 의지할 구세주라오
(후렴)
산 위에 올라가서 세상에 외치리.
내게 임한 주의 사랑 전하기 원하네.

미국에서 음악가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 Kurt Kaiser 의 빈야드 음악이고
이 곡과 같이 CCC 을 통하여 배웠던
“알았네 나는 알았네“ 도 그의 노래이고
힘들 때 늘 불렀던 spirit song “오 나의 자비로운 주여”는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현상을 추고하던 빈야드 운도의 대표적인 지도자
윔버(John wimber)의 곡입니다.
한 때 빈야드 운동에 참여했던 굿윈 목사(Pastor John Goodwin)는
윔버가 과격한 에큐메니즘 추종자임을 밝히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성경 이외의 것에 손을 대면서 윔버는 교회가 수세기 동안 비성경적인 것이기에
거부해 온 관행들, 예를 들어 죽은 사람의 뼈나 그들이 만졌던 물품을 사용하는 것
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교회 양육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1200년이 넘도록 카톨릭 교회 내에서는 죽은 성인들의 유품을 만진 결과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았다.
사실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런 관행에 대해 주저하지만,
우리 병 고치는 사람들은 전혀 주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관행은 전혀 신학적으로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윔버는 로마 카톨릭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가 하나가 될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빈야드 목사 집회에서 그는 심지어 프로테스탄트들을 대신해서
카톨릭 교회에게 사과를 했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거듭난 복음 전도자로서 오순절 은사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로마의 교황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복음을 확실하게 전하고 있다."

빈야드의 Worship Song 을 알고 상심한 적이 있습니다.
경배와 찬양’의 많은 노래도 그렇지만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이 빈야드의 그들의 음악에 열광하여
모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답답했었는데
그들의 다른 복음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린 결과인지(영향을 받았으리라)
무분별한 복음성가에 믿음 보다 감성을 앞세워
감성이 믿음을 이끄는 한국의 예배 형태를 컴퓨터 시청하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분별없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받아드린 수많은 복음성가
신학적인 책과 간증, 부흥 프로그램 등이 얼마나 복음에 합당할 까요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출애굽기24:12]

오늘날 교회에서도 안타깝게 잊혀가는 십계명에 대하여
바울의 한탄 같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로마서7:7]

1. 너는 나 이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2. 저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3.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말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지니라
7. 간음하지 말지니라
8.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구약의 율법 특히 십계명은
하나님의 공의는 언약에 근거한 율법이라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포하고
백성으로 지켜야 할 신앙의 생활
즉 신앙의 윤리라
율법은 하나님의 불순종한 죄에 대하여 증거하며
동시에 언약에 대한 썩어지지 아니할 돌에 새겨진
하나님의 성문법이다 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잊혀 가는 십계명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가 십계명을 지키려는 노력을 조금만 더 했더라면 교회가 변했을 텐데...
아쉽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불안전한 인간이 행한 모든 일이 불완전하기에
어찌 보면 이 세상에 완벽하고 완전한 사상이나 더욱이 행위는 없습니다.
종교개혁도 완전한 개혁이 아니듯이 그렇고 완벽한 교인 교회도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믿음이란 완벽하신 하나님의 선(복음)을 향하는 우리는
부정적 보단 긍정적 인 사고 ‘ ...하라’ 의 유혹과
십계명의 ‘ ...말라 ’ 는 죄에 대한 분별은
구별되어야 하듯이
진리는 긍정에도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인 신앙을 초월하고
긍정이란 희망은
세상은 문명의 이기로 더 편하고 희망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마치 눈에 비친 굴절된 잠시적인 안개와 같은 현상이라
결국은 절망적으로 변한 전쟁과 기아 등 이 인간의 역사인걸 보면
희망이란 신기루를 팔아먹는
정치와 종교의 위정자들의 왜곡으로 점철된 인간의 욕망의 역사에
우리 삶의 현상이 거짓된 믿음으로 왜곡되어
일그러진 희망을 소망이라 우깁니다.

단지 진리는 진리라 진리일 뿐입니다.

공의는
그 의 사랑이 말씀이 되어
세대와 세대를 이어준
생명으로 쓰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잠시 사라질 불꽃같은 생명으로
불꽃처럼 꺼지지 않는 복된 소식을
생명으로 생명을 목숨 바쳐 이어지는 하나님의 공의의 역사에
우리는 그의 사랑에 화답한 합당한 공의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위하여
이 땅위에 영혼의 닻 을 내리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성령의 자각케 하시는 인도하심으로
오늘날을 바라보면 우리의 변절이 보입니다.

저의 오늘날의 변절이 보입니다.
(내가는 길이
주의 길이라면
주가 가신 십자가의 길이 라면
내가 나를 죽여 서도
그 길로 가야 했건만
내가 주와 함께 죽었다 했건만
내가 죽지 못한 구실로
내 침륜의 변명이 되었네)

이제는 주께로 가자
사랑하는 이여
주께로 가자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아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듯이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 하듯이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니
이제는 부분적으로 알고 예언하나
그때는 주께서 우리를 아신 것 같이
우리가 온전히 알리니
사랑하는 이여
이제는 주께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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