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로버트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 1813-1843)



『하나님께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는 내게 가르쳐 주소서. 내가 죄악을 행하였다면 다시는 행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라고 말씀드림이 마땅하니라』(욥 34:31-32).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날 수가 적고 고통으로 가득 찼도다』(욥 14:1).

『좀 앞에서도 부서져 버리는 먼지에 기초를 둔 진흙집에 사는 자들은 얼마나 덜 신뢰하시겠느냐?』(욥 4:19).

이 세상은 예부터 눈물의 골짜기로 일컬어집니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고난이 함께하기 마련이고, 이는 그리스도인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과 시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시키려는 불 같은 시련에 관하여 너희에게 어떤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벧전 4:12).

이것이 정말 그러하다면, 우리는 이 시험을 맞이한 마음의 준비를 늘 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커먼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는 것도 한때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는 내게 가르쳐 주소서. 내가 죄악을 행하였다면 다시는 행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씀드림이 마땅하니라.』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얻어야 할 것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Ⅰ. 고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Ⅱ. 고난이 겪을 때 잊지 말아야 할 것



Ⅰ. 고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1. 고난이 가져오는 첫 번째 열매는 하나님께 부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일에 있어 의로우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열매입니다.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는 내게 가르쳐 주소서...』

이것은 다니엘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져올 환란을 보여주셨을 때 느낀 감정과도 비슷합니다. 다니엘 9장 7절과 8절을 읽어보십시오.

『오 주여, 의는 주께 돌아가도 얼굴의 수치는 오늘과 같이 우리에게 돌아오나니, 즉 유다 사람들에게와, 예루살렘의 거민들에게와,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이스라엘 모두에게, 즉 주를 거슬러 범죄한 그들의 허물로 인하여 주께서 쫓아내신 모든 나라에 있는 자들에게니이다. 오 주여, 얼굴의 수치는 우리들과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고관들과 우리의 조상들에게 돌아오나니, 이는 우리가 주를 거슬러 죄를 지었기 때문이니이다』(단 9:7-8).

14절도 같이 읽어볼까요?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 재앙을 지켜보셨고 그것을 우리에게로 가져오셨으니, 이는 주 우리 하나님께서는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 의로우시나, 우리는 주의 음성에 복종하지 않았음이니이다.』

다니엘은 자신의 죄로 인한 징계를 달게 받아들입니다. 이와 똑 같은 상황이 느헤미야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 9:33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에게 미친 모든 일에 공의로우시니, 이는 주께서는 옳게 행하셨으나 우리는 악하게 행하였으며』(느 9:33).

레위기 26:40도 고난에 관련된 구절입니다.

『만일 그들이 나를 거역하여 잘못한 그들의 허물과, 또 그들이 나에게 반대하여 행하였던 그들의 죄악과, 그들 조상들의 죄악을 함께 자백하면,』

그리고, 41절 중간부터 42절 끝까지 한 번 읽어보십시오.

『만일 그때에 그들의 할례를 받지 아니한 마음이 겸손하게 되어 그들이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받아들이면, 그때는 내가 야곱과의 내 언약을 기억하며 또 이삭과의 내 언약과 아브라함과의 내 언약도 기억할 것이며 내가 그 땅도 기억하리라.』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받아들이는 자들을 기억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고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열매는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징계를 온전히 받아들이십니까? 혹시 마음속의 생각이나 완악한 말을 통해 하나님께 대거리를 늘어놓진 않으십니까?
고난의 때가 되면 으레 인간은 하나님을 모독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폭군임에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 아이를 데리고 가버릴 수가 있어?"

이는 네 번째 호리병과 다섯 번째 호리병이 쏟아질 때 튀어나올 하나님을 향한 모독의 말들과 유사하고, 지옥에서 들리는 음성과도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진노를 쏟으실 때, 인간들은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그리고, 생각과 말 뿐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이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할지라도, 그러한 불평들을 - 하나님을 향한 분노를 -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말이 틀리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불평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에 감히 도전하고 반항할 권리가 여러분에게 있다고 생각합니까? 만일 조그만 어린아이가 의회의 결정이 불평을 늘어놓고 도전을 하려 든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정부에 도전할 권리를 가진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욥과 같은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시요 빼앗아 가신 분도 주시니, 주의 이름을 송축하나이다』(욥 1:21).


2. 고통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더욱 살피게 됩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는 내게 가르쳐 주소서』(욥 34:32).

우리는 고통을 통해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에 다다라야 합니다. 이는 욥이 자신의 고난을 받아들인 방식입니다. 욥기 10:2을 읽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께 말씀드리오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주께서 나와 논쟁하시는지 내게 보여 주소서.』

23:3-7에도 같은 뜻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어찌해야 그 분을 찾을 곳을 알까! 그리하여 그의 자리로 나아갈까!
내가 그 분 앞에 나의 송사를 고하고 항변으로 내 입을 채우기 원하노라.
그 분께서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기 원하며, 그 분께서 내게 말씀하신 것을 깨닫기 원하노라.
그 분이 그의 위대한 권세로 나를 대적하여 항변하시겠느냐? 아니라. 오히려 그 분은 내게 힘을 돋우어 주시리라.
거기서 혹 의인이 그 분과 더불어 쟁론하여 내가 나의 심판자로부터 영원히 구제받게 되리라』(욥 23:3-7).

욥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그렇게 다루시는지 알게 됩니다. 여호수아 7:7-9에도 같은 의미를 지닌 말씀이 등장합니다.

『여호수아가 자기 옷을 찢고 그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주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쓰고 저녁 무렵까지 있더라.
여호수아가 말하기를 "슬프도소이다. 오 주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주께서는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인의 손에 넘겨 주어 멸망시키려 하시나이까? 우리가 만족하고 요단 건너편에 거하였다면 하나님께 좋을 뻔하였나이다!
오 주여, 이스라엘이 그들의 원수 앞에 등을 돌렸으니 내가 무엇을 말하리이까?
카나안인과 그 땅의 모든 거민이 그것을 듣고 우리를 둘러싸서 우리의 이름을 땅으로부터 끊으리니 주께서는 주의 크신 이름을 어찌하시려나이까?" 하였더라』(욥 7:7-9).

고난이 찾아왔을 때 여호수아는 그 이유를 알고싶어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여,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물은 적이 있는데(행 9:6), 그도 아마 여호수아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믿지 않는 가족에게 고난이 닥치거나 하나님께서 아이를 데리고 가는 일이 발생해도, 그들은 좀체 주님께 그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고난의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노크입니다. - 마지막일 수도 있는 노크 말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일이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도 종종 일어납니다. 믿는 자들의 마음에 우상이 있거나, 비밀스러운 죄, 혹은 탐욕이 존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고난이 올 때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물으십니까?

이 같은 일은 교회에도 일어납니다. 성도들이 미지근한 신앙을 유지할 경우, 하나님께서는 라오디케아 교회에게 경고하신 내용에 따라 그들에게 고난을 주실 것입니다. 고난이 임할 때 그분의 뜻을 물으십니까?

우리는 그분께 고난의 이유를 물어야 합니다.


3. 고난으로 인해 얻는 유익들, 그 세 번째는 죄를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는 내게 가르쳐 주소서. 내가 죄악을 행하였다면 다시는 행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죄를 저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자기 죄들을 숨기는 자는 번성하지 못할 것이나, 죄를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누구나 자비를 얻으리라』(잠 28:13).

이는 하나님께서 므낫세를 다루신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 대부분의 이유가 바로 저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괴롭게 하시면, 그는 죄악을 던져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분의 자비로운 음성에 귀기울이고, 사랑의 말씀을 다시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들을 그렇게 만들기 위하여 우선 그분의 막대기를 들고 언약의 말씀에 부복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납니다. 저는 술주정꾼이 고난을 당해서는 고만 더 큰 죄악으로 빠져들어가고 만 경우도 보았습니다. -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리 달아나버린 것입니다.

『에프라임은 뒤집지 않은 과자로다』(호 7:8).

여러분 중에도 벼락을 맞아 이파리가 다 떨어져 그저 비석 같은 모양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고목과 같은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들 중에도 역시 그런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베푸신 자비와 심판이 여러분을 회개시키지 못했다면, 그분은 화살통에서 새로운 화살을 꺼내실 것입니다.



Ⅱ. 고난이 임하면 그 고난의 이유를 깊이 숙고해봐야 합니다

1. 고난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다루시는 방법이므로 마땅히 그 이유를 숙고해봐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직접 임하는 고통이든, 여러분의 가족에게 임하는 고통이든, 고난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잠 28:14).


2. 여러분 고난이 임하면 숙고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믿지 않는 자를 회심시키고, 그분의 자녀된 자들을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저는 때때로 여러분의 거처를 비추는 햇살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미시는 손길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은 그분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자신에게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들이 마음속의 우상들을 저 멀리 치워버리고 하나님께로 온전히 나아오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3. 믿지 않는 자들이여, 특히 숙고하십시오.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결국 포기해 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가슴에 뜨거운 불길이 일게 하신 그 손길이, 또한 지옥의 불길도 지피실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가져온 곳 : 
카페 >주님의 뜰-행원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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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xi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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