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은 칭의와 다릅니다 / 스테판 차녹

 

 

이 둘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고, 거듭남으로는 하나님과 동화되고 닮게 됩니다. 이 둘은 언제나 함께합니다. 구세주의 부활은, 주님께서 스스로 취하신 그 죄책들로부터 의롭다고 여김 받은 것이며, 주님께서 의로우신 종임을 공적으로 선언하신 것인데, 그 부활을 새로운 출생(a new begetting)이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을 보십시오.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이 말씀은, 그분이 이전에는 인생의 연약함으로 감춰져 있어서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드러나지 않았지만, 부활하심으로 그렇게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책으로부터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 새롭게 출생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은, 모두 한꺼번에, 그리고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5:1).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시는 것은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엡2:5,6 참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을 받는 '아브라함의 복'(갈3:14)을 받게 되고, 믿음에 의해서 그 약속을 받게 되는 것은, 모두 함께 일어나는 일입니다. 

 

1) 변화의 본질에 있어서 거듭남과 칭의는 다릅니다

칭의는 관계적(relative)인 변화입니다. 칭의로 인해서 사람이 죄책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 옮겨집니다. 노예의 상태에서 자유의 상태로, 행위언약의 의무를 진 상태에서 은혜언약의 특권을 누리는 상태로, 진노의 자식에서 약속의 상속자로 옮겨집니다.

 

반면, 거듭남은 실제적인(physical) 변화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과 같은 실제의 변화입니다. 또한 그것은 영혼을 새로운 본성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이 구절을 번역한 사람은 뒤에 나오는 5절을 참고하여 '살리셨도다'라는 말을 1절에 삽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로는,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한 '충만케 하시는 것'과 관련하여,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도 영적 생명으로 충만케 하였도'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즉, 사도가 그리스도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언급한 뒤에, 우리를 일으키시는 그 능력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거듭남의 변화는 본성(nature)의 변화입니다. 바로 우리를 진노의 자식이 되게 하는 본성, 곧 첫 번째 범죄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매일의 행동으로 죄를 짓게 하는 그 본성이 변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적인 삶에 빠져들기 쉬운 본성, 그리고 육체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급급한 그 본성에 변화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칭의가 상태(state)의 변화라면, 거듭남은 기질(disposition)의 변화입니다. 종이나 노예가 자유인이 되면 그 사람의 상태에 있어서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 자체가 그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원리들을 채워 넣거나 그의 본성에 새로운 뼈대를 세워주는 것은 아닙니다. 관계와 본성은 서로 다른 것들입니다. 창조 세계에는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피조물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말미암습니다. 그러나 또한 존재의 위계상 피조물의 본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 위에 첨가된 것입니다.

 

본문의 뒤에 따라 오는 구절들에서 사도 바울은 화목, 곧 우리의 범죄함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변화와는 구별된다고 말합니다. 칭의는 우리가 죄책으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생명을 누릴 권리가 주어진 것이라면, 거듭남은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우리 속에서 부분적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의 순수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 칭의와 거듭남은 그 원인과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직접적인 열매입니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5:9). 반면, 거듭남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3:5)이라고 부릅니다. 칭의의 질료(matter)는 우리들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이지만, 거듭남의 질료는 우리들 내부에 있는 은혜로 말미암은 습관입니다. 칭의의 형상(form)은 ‘전가하는(imputing)’ 것이고, 거듭남의 형상은 ‘주입하는(infusing)’ 것, 혹은 우리들 안에 ‘들여 넣어지는(putting into)’ 것입니다.

 

결국 이 둘은 서로 다른데, 칭의는 ‘저주받음(condemnation)’에서 ‘무죄언도(absolution)’로의 변화이며, 거듭남은 ‘오염(pollution)’에서 ‘친교(communion)’로의 변화인 것입니다. 즉각적인 효과를 보자면 칭의는 우리에게 ‘자격(right)’을 주는 것이고, 거듭남은 ‘적절함(fitness)’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분 안에서 ‘완전한(perfect)’ 것이고 그 완전한 것이 ‘우리에게(to)’ 전가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in)” 활동하는 것이며, 완전함에 이르기 위한 열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스테판 차녹의 '거듭남의 본질' 46~50p 에서..

가져온 곳 : 
카페 >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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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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