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다시 사심의 목적은 우리의 거듭남 / 스테판 차녹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호후5:17)

 

1. 본문은 놀라운 교리를 제시한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은 것이라면, 그 한 사람이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그가 대신한 그 모든 사람은 다 죽은 것이다. 법적으로, 그리고 의무적으로 그들 자신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분의 능력을 따라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그 죄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 이상 근심해서는 안 된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그분은 보혈의 값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것은 우리를 그분의 소유물로서, 그분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더 이상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칼빈).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서 살지 않고 자신을 구속하신 분의 영광과 그 뜻에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2. ‘우리를 위하여’가 그 목적이다.

 

1) 거듭난 자와 자연인은 삶의 목적이 다르다. 자아는 모든 자연인의 최상의 목적이다. 자연인에게는 자아가 그 목적이고, 거듭난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그 목적이다. 자신을 의존하고 하나님에게서 독립하고자 하는 것이 아담의 큰 죄악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아담은 자기 자신을 주된 목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들의 피 속에도 그러한 욕망이 흐르게 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곤경과 고뇌의 열매를 맺게 하는 쓴 뿌리인 것이다.

 

2) 우리의 목적을 바꾸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적이다. 우리 구주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목적은 피조물들의 타락한 목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일찍 죽음을 당하사--우리들을 피로 구속해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9). 즉, 우리를 더러운 욕망의 노예 상태에서 구속하셔서 우리의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3) ‘나에게서 주께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끝장을 보아야 할 것’은 자아이고, ‘최종적인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되었다(벧전1:18,19). 그저 가까운 선조들의 잘못된 길에서뿐만 아니라, 첫 조상 아담의 망령된 행실에서도 구속되었다. 자기 앞에 다른 신들을 두어서 흉악한 우상숭배, 곧 자기숭배에 빠져 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말이다.

 

4) ‘우리를 위하여’ 였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위하여’가 옳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또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면,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을 우리의 모든 행위와 모든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은 너무나 정당하다. 그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통치권을 얻으셨다. 또한 부활하심으로써 그 통치권이 확증되었고, 그것으로 우리의 사랑과 봉사의 의무가 늘어났다. 그분이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는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일어나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일에 성장해 갈 때, 그것은 영적 성장의 위대한 증표가 될 것이다.

 

5) 부활하심도 ‘위하여 죽은 자들’을 위함이다. 그분의 즉으심과 같이 우리의 죄의 몸이 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분의 부활과 같이 생명을 주는 은혜로 인하여 새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6) ‘이제부터는’ 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아니하노라”(고후5:16). ‘안다’라는 말은 성경에서 하나님이나 사람이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외적 치장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분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 그분께서 전하신 뛰어난 은혜들, 그분께서 실행하신 놀라운 직분들을 보면서 그분을 알게 된다.

 

3. 거듭난 자에게는 증거가 드러난다.

 

1) 거듭나지 않은 자의 관심은 세속적이다.

2) 거룩을 기준으로 평가한다.

3)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킨다.

4) 그리스도가 중심에 놓인다.

 

4. 새로운 피조물이 가지는 본질은 ‘믿음과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있는 자는,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예하게 되고, 누구나 그분에게로 접목되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아담의 옛 감정, 옛 기질들은 지나갔다. 대신에 하나님께 지명하신 새로운 머리 아래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해야 한다. 그렇게 지명되신 분을 우리의 최상의 선이요, 최고의 목적이며, 죄적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불리며, 또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아담이 가장 실패했던 것은 불신앙과 자기 사랑이었다. 믿음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고정시키는 은혜이다. 사랑은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곧 믿음과 사랑이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 스테판 차녹, 『거듭남의 본질』, pp 21-36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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