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불륜,그리고 거기서 잉태된 불의한 성도> 누가복음 16장 '불의한 청지기비유'

김성수 목사 설교에 대한 소감문.

 

1.김성수 목사가 주장하듯이 눅 16:8의 ‘칭찬’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줄곧 하나님을 찬양 하는 데만 사용되어진 단어일까? 성경에서 ‘칭찬’의 원어로 쓰인 용례를 찾아보았다.

고전11:2,11:22에서 사용된 ‘칭찬’의 원어가 눅16:8에 사용된 “칭찬‘과 같은 원어이지만

고린도 전서에 사용된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다.

 

2. 김성수 목사가 주장하듯이 눅16:8 에 사용된 ‘지혜’ 가 예수님을 함의하는 것일까 생각 해 보았다.

   보통 성경에서 지혜라고 하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사용된 모든 ‘지혜’가 다 예수님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두뇌회전에서 비롯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좋은 생각도 지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굳이 원어를 동원해가면서 까지 눅16:8절의 지혜를 예수님에 비견하는 것은 견강부회적인 성격이 강하다 하겠다.

   오히려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는 세상적인 삶에서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된 약삭빠른 처세술에 가까운 것이다.

 

3.김성수목사의 설교처럼 불의한 청지기가 자기부인을 해서 주인의 은혜만을 바라는 동기로 장부조작을 하면서 죄를

뒤집어 쓴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 살 궁리를 한 끝에 주인에게 해고당한 뒤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횡령과 뇌물의 성격으로서의 장부조작을 한 것이다. 이러한 범죄적인 행위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비유라고 하는 것은 정말 넌센스의 극치다.

불의한 청지기는 삶의 기조가 범죄인 사람이 마지막까지 범죄로 발악을 한 경우이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 대신 죄를 짊어지신 것인데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라니

가도 너무 멀리 갔다.

 

4.‘하나님의 불륜’ 이라는 단어 사용에 대하여.

김성수목사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발적 불륜의 자리이며,자발적 불의의 자리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잉태되었고 출산되었습니다.“ 라고 설파한다. 그래서 설교제목도 <하나님의 불륜, 그리고 거기서 잉태된 불의한 성도>다.

굉장히 독특하고 멋있지만 한편으로 자극적이고 현란하게 튀는 어휘들이 난무한다.

그러나 불의한 청지기는 죄를 스스로 뒤집어 쓴 것이 아니라 끝까지 죄를 범한 것이고, 예수님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 책임지시고 죽은 것이다. 예수님에게 불의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는 이유다.

 

또한 “하나님의 자발적 불륜”이라는 표현을 정당화하기 위헤서 다말의 예를 들고 있다.

그런데 다말이 창녀는 아니고, 또한 불륜을 행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말은 단지 하나님의 씨에 의한 그리스도의 언약성취를 위해 ‘씨의 연속’이라는 측면에서 1회적으로 시아버지의 씨를 받는 행위로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어졌을 뿐이다.

다말은 창녀도 아니고 유다에게 씨를 받기 위해 1회적으로 창녀로 변장했을 뿐이고 그후로도 창녀짓을 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 행위가 세상적으로는 근친상간으로 보일 뿐이지만 유다와 다말이 그후로도 계속 근친상간을 하지는 않았고

둘다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인정하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다말의 사건을 ‘하나님의 자발적 불륜’으로 몰아가는 논리는 참으로 현혹적이고 억지스러운 견강부회로 보인다.

 

결국 김성수 목사는 <모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대전제에 모든 성경을 억지로 꿰어 맞추고 있는 것이다.

대전제가 틀린 것은 아니고 진리라고 해도 성경의 모든 말씀을 <예수그리스도의 예표>로 해석하는 것은 상당히 자의적이고 억지스럽다.

 

그래서 ‘칭찬’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에게만 쓰였다거나, 지혜가 예수를 상징하니 불의한 청지기 속에 있는 것도 예수의 지혜라거나, 불의한 청지기는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장부조작을 한것이라거나,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불륜과 불의의 자리로 내려갔다거나 하는 멋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닌 잘못된 해석을 하고 말았다.

 

김성수목사는 현대교회를 향하여 <양복입은 무당>이라는 포효로 등장하여 부패한 작금의 교회에서 유리방황하고 있는 많은 성도들에게 정통적인 진리의 말씀을 소개하는 중대한 역할을 하였지만 그 자신은 개혁주의를 넘어서서 최고의 진리를 전하는 목사가 되겠다는 목적에 과도하게 사로잡혀 스스로는 현대목사제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함정에 깊숙이 빠져드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여진다. 참으로 안타깝고 착잡한 심정이다.

 

출처: 개혁주의마을/Faith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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