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외치는 자
세례요한의 서원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를 전파하니
마가복음 1:4]

서원의 시초는
야곱이 벧엘에서 꿈에 하나님을 뵙고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고 천국의 문이  임을 알고
옛 이름인 루스(Luz)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벧엘(bethel)이 되어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And Jacob vowed a vow, saying,
If God will be with me, and will keep me in this way that I go,
and will give me bread to eat, and raiment to put on,
창세기 28:20]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시고
돌베개가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기둥이 되고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
서원했고 그 후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어
이스라엘의 민족의 이름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언약의 확인이 되었다.
야곱에게 꿈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And he dreamed, and behold a ladder set up on the earth,
and the top of it reached to heaven :12]
야곱이 잠을 잤던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고 천국의 문이 되었듯
우리가 찾은 봐 되신 하나님이 아니시라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이셨고
우리가 꿈을 꾸었던 소망이 있는 이 자리가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집이고
천국의 문으로 향하는
양의 문(Gate for the sheep)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천국 문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복음10:7]
진실로 진실로(verily)
참으로 확실하게 말하노니,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시고 선한 목자시니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고
너희가 양이라면 음성을 들으라,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라 하심은
오늘날 현대판 장로의 유전에서 떠나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기 때문에 그 멍에를 메고 배우시라 하셨고
멍에(Yoke)는
나귀나 소의 등에 쟁기나 수레를 끌기 위하여 두 마리의 동물의 목에 얹는 막대를 말하며
성도의 사랑, 서로 사랑하라는 공동체의 공의를 의미하였고
현대의 하늘나라의 상징적인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공동체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고
서로 멍에를 메는 교제가 사라진 허울만 남은 교회로 이마져 건물만 남고
성도가 사라지는 슬럼화가 이미 시작 되었는데
가라지 삯꾼과 함께 멘 멍에는 그 시대나 다름없다.
이를 바울은 불신자와 명에를 같이 하지 말라 경고했고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Be ye not unequally yoked together with unbelievers:
for what fellowship hath righteousness with unrighteousness?
and what communion hath light with darkness?
and what concord hath Christ with Belial?
or what part hath he that believeth with an infidel?
고린도후서 6:14-15]
공의(righteousness)와 불법(unrighteousness)이 교제(fellowship)할 수 없으며
친구가 될 수 없으며,
친교 할 수 없으며,
공동체를 이룰 수 없으며
빛과 어둠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infidel), 이교도가,
그리스도와 벨리알(Belial)이 조화(concord), 일치할 수 없다 단언(斷言)한다.
이를 사무엘서는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Now the sons of Eli were sons of Belial; they knew not the LORD
사무엘상 2:12]
엘리의 아들들이 행실이 나쁨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 기록되어 있다.
엘리는 실로의 대제사장으로 사사로 사무엘을 교육시킨 인물이라
그를 아비로 둔 아들들이 이를 보고 배웠을 텐데
아들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회막 문에서 수종 두는 여인들과 동침하였다.
회막 문(the door of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목제로 드리는 희생제물을 잡는 곳 으로,
회막 문은 예수님의 ‘양의 문’ 과 같은 의미로
[이스라엘 집의 모든 사람이 소나 여린 양이나 염소를 진영 안에서 잡든지
진영 밖에서 잡든지 먼저 회막 문으로 끌고 가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러 즉 이스라엘 자손이 들에서 잡던 그들의 제물을 회막 문 여호와께로 끌고 가서
제사장에게 주어 화목제로 여호와께 드려야 할 것이요 레위기 17:3-5]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장이며 사사인 아버지를 둔 자식들로
태어나서부터 불레셋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할 때 까지 이스라엘의 족속으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알 수 없어
엘리의 자식에서 벨리알의 자식(sons of Eli were sons of Belial)이 되었다.

전통적인 혈육적인 가치로부터 신앙의 정통성을 찾는 이들에게
바울은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로마서 2:2]
주님께서는 서나머 교회에 보내는 말씀에서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요한계시록 2:9]
주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하신다.
들을 귀가 있는 자가 복이 있는 자고, 들을 귀가 없는 자는 성도가 아니고
성령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자는 주여, 주여 부루 짓더라도 성도가 아니고
종교인 이거나 삯꾼 이라는 말씀이고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발람의 교훈’ 이고
베드로 후서의 ‘발람의 길’ 이라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 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베드로후서 2:15]
유다서의 ‘발람의 어그러진 길’ 이라
[화 있을 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유다서 1:11]
발람이 누구인가
발람은 모압 왕의 요청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했지만
하나님의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하셨고
그가 여러 번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할 때 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셨기에
발람은 다른 길을 택하여
발락에게 모압 여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유혹하고 음행과
우상숭배에 빠지도록 하였기에
발람은 돈을 위해 은혜를 팔아버린 자의 상징이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제외 버리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뜻(공의)에서 멀어지게
기복신앙의 심어주고 하나님의 중재자로 중보자로 나서는 자들
이들이 교회를 변절시키고 관행과 전통에 의하여 개혁(회복)을 방해하는 자들,
이것이 니골라당의 교훈이기도 하다.
성령님의 말씀을 듣는 귀는
신학으로 지식으로 얻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갖게 되는 선물이라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심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음은
그 시대의 종교적인 사상이 경향이 신학이 대중(大衆)을 선동하여
이를 따르는 자가 많지만 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반하였고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무리들이다.
이들이 신앙을 가장한 종교적 세력임은
좁은 문,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순수한 신앙을 지키려는 자들을 막아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이라
오늘날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함은
오늘날, 유전과 전통과 관습으로 외식하는 교만과 자랑과 위선에서 떠나
회개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연단된 신앙인이 되지못함은
성경으로 그 시대와 이 시대의 실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허황으로 도배된 진리로 가장한,
사치한 종교적인 무희(舞姬)에 놀아나는
신의 대리자로 자처하는 사제자인 무당으로 복채를 받고 복을 빌어주는
기복종교의 무당의 굿이 됨을.

사두개인처럼 제사장과 산헤드린의 자리를 차지하고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는 집단과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지키려다 도리어 그 율법으로 외적인 규칙에 얽매여
변절된 율법학자 들과 지도자들의 집단과
이를 따르는 무지한 종교적인 군상들과
성전에서 제사장들은 수입의 십일조를 성전세로 내게 하고 이를 못 내면
토지를 뺏어버리거나 채무로 문서화 하여 채권자가 된 제사장,
로마제국의 세금징수와 이를 집행하는 세리들을 향한 불만으로
세리를 죄인 취급을 했음은
열심당원의 지지가 되었을 것이다.
성전에서 회당에서 사회에서 피지배계층으로 소외된 억압받는 백성들은
그들은 선지자(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루살렘의 성전이 아닌, 회당이 아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었다.
[그 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In those days came John the Baptist, preaching in the wilderness of Judaea,
And saying, Repent ye: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마태복음 3:12]
그리고 그 후에 예수님은 같은 복음의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From that time Jesus began to preach, and to say,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마태복음 4:17]

서원(Vow)은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로 한 약속이다.
서원은 하던 하지 않던 선택이나 서원하면 지켜야 했다.
만약에 서원을 지키지 못했을 경우에는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속죄제(Sin offering)의 번제는
모든 내장 기름을 번제위에 불사르고 가죽을 포함한 나머지 부분은 진 밖에서 불살라야 했는데 진 밖에 불사른 것은 저주받은 자라 버려진다는 의미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저주받은 희생 제물로 성문 밖 갈보리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저주를 대신 속죄한 희생제물이 되셨다.
서원을 이루었을 때는 서원 제를 드렸다.
서원 제는
흠이 없는 수컷으로 소나 양 염소로 흠이 없어야 했고
하나님께서 택하실 한 지파 중에 번제를 드리고
제물은 다음날 끼지 먹을 수 있었고 삼일까지 남아 있으면 불살라야 했고
자녀와 노비와 함께 여호와 앞에 즐거워 할 것을 요구하셨음은
화목제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상징적 의미가 있다.

구약의 서원은 제사제도와 함께 유효하지 못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인정한 후의 고백이며 감사라
자발적인 결심이지 하나님과 흥정(dealing)도 아니고 더구나 단판이 아니다.
이 서원적인 고백을 결심을 감사를 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뒤돌아보면 밥 먹듯이 결심했고 잠시 지나면  소홀 한 적도 많다.
궁핍에 처했을 땐 풍족한 물질을 주시면 가나한 형제자매를 돕겠다고 했고
어려움에 처하여 이 사건을 해결해 주시면 뭐하겠다 수없이 기도를 했고
그런 기도가 본의 아닌 일종의 서원적인 기도였고
아니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하나님과의 교만한 담판이라
거래(deal)였고 지키지 못한 기만이 되었지만 딴에는 하소연 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서원이 필요한가?
신약의 서원은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 과작별하고 배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사도행전18:18]
이를 구약의 나실인으로서 서원이 끝나 머리를 깍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복음을 위하여 율법을 행하였듯 복음을 위한 덕을 위한 행위였을 것이다.
사도행전21:23절의 서원은 결례(Purification 부정한 것을 제거하는 정결예식)와 더불어
행한 율법이었다.
따라서 구약의 나실인은 신약의 결신(潔身)자 성도로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공의를 배우고 간직한 삶을 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한 자로, 기쁜 소식 복음을 간직한 소망을 가진 자로
복음에 녹아있는 공의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과 능력으로
공의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도록
빛으로 오신 분으로 말미암아 빛의 자녀로 세상의 소금이 되어
정의로우시고 공평하시고 평등하신 의로우신 하나님의 공의를
선하신 분의 경륜을 이어받으려는
성도의 자발적인 결단이 서원이 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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