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수학 공식 - 조디 피고(Jodi Picoult)는

 여자 행복= 현실기대 라고 하였다.

 

“19이란 책에서...

분모는 기대이고 분자는 현실이다.

행복해지려면 2가지 방법이다.

 

현실을 키우던지, 기대를 줄이던지....

분수의 값을 크게 하려면 분자를 키우는 것보다

분모를 줄이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99에서 4로 나눈다면 하나를 키워

100에서 4를 나눈다면 25이다.

 

분모를 하나 줄이면 99에서 3분으로 하고

나누면 값이 33이 된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기대치를 줄이고 살아야 한다.

너무 기대를 크게 하면

실망하여 행복이 적어진다는 결과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동성애자 잡지의 표지모델이 됐다. 성적소수자(LGBT) 매거진 아웃(www.out.com)은 10일(현지시간) ‘우리 대통령-협력자(ally), 영웅(hero), 우상(icon)’이라는 제목과 함께 오바마 대통령의 흑백 사진을 최신호의 커버사진으로 실었다.

잡지는 “44번째 미국 대통령은 올해 우리의 협력자였다”라며 “성적소수자(LGBT) 잡지 모델로 대통령이 나선건 이번이 처음으로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성적소수자 매거진 아웃의 최신호 표지모델로 등장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 [아웃 홈페이지 캡처]

 

성적소수자 매거진 아웃의 최신호 표지모델로 등장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 [아웃 홈페이지 캡처]
성적소수자 매거진 아웃의 최신호 표지모델로 등장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 [아웃 홈페이지 캡처]

 

 

성적소수자 매거진 아웃의 최신호 표지모델로 등장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 [아웃 홈페이지 캡처]

잡지에는 오바마 대통령의 인터뷰와 함께 다른 사진도 실렸다. 한 사진은 서재에서 환하게 웃고있는 오바마 대통령의 사진이었고, 다른 한장은 옆을 바라보는 오바마의 모습이었다. 아웃은 “2012년 5월 9일 동성애를 지지하는 대통령의 대중 연설에 미국이 움직였고 결국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허용까지 이끌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내가 만난 첫번째 게이가 누군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나온 대학의 로렌스 골딘 교수가 기억난다”며 “대학 신입생 때(1978년)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어릴 적 나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가진 흑인이었지만 어머니가 늘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는 신념을 심어줬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

 

차별에 대한 반대가 정치를 시작한 이유라는 이야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는 모두 동등하게 태어났고 누구도 아메리칸 드림에서 배제되어서는 안된다”며 “내가 정치를 시작하고 동성결혼을 지지한 것도 같은 이유”라고 강조했다. 또 “딸 말리아와 사샤 그리고 애들의 친구들은 차별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다음 세대 뿐 아니라 우리 세대 부터 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LGBT에 부정적인 국가에 대해 미국이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시키는 것은 우리 정부 외교정책의 근본적인 부분”이라며 “보편적 가치인 인권에 대한 강조는 미국과 가까운 나라를 포함해 전세계를 향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은 나라마다 다를 수 있지만, 미국은 계속해서 보편적 인권을 위한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밝혔다.

 

정원엽 기자 wannabe@joongang.co.kr

목회자 청빙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는 사람의 뜻으로 세운 기관이 아니고 사람이 세워가는 것도 아니지만 사람에게 맡겨졌고 또한 사람에 의해 세워져 갑니다. 교회는 무엇인지, 어떻게 세워졌는지, 어떻게 세워가야 하는지 그 모든 원리와 가르침은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를 세워가는 모든 원리와 가르침을 성경에서 찾고 배워야 한다는 것은 구체적 방법까지를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 계시이지만 자연과 역사도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민주주의도 수용하고 자본주의 원리도 인정합니다.

 

교회는 민주주의를 수용하기 때문에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해야 하지만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자본주의 원리를 인정하지만 자본주의 원리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도 않습니다. 교회는 어떤 면에서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보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념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이기 때문에 소수보다는 다수, 다수보다는 진리를 따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일반론에서 이야기 할 때 소수보다 다수, 다수보다 진리이지, 경우에 따라서는 다수보다 소수가 옳을 수 있고, 진리도 순수한 진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진리 즉 참 진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인식과 판단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성령님께 의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성령님께 의존하여 따르는 것은 신비로운 어떤 환상이나 음성을 통해 원리와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따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는 점진적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계시의 이와 같은 특성은 계시의 역사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시를 역사적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밝히 드러내시기 때문에 성령님께서도 하나님의 이 계시의 역사성을 존중하십니다. 인간의 역사는 불완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불완전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당신의 완전한 계시를 점차 밝히 드러내십니다. 인간이 불완전한 역사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크게 보면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행위이지만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와 법과 질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는 기능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지만 인간의 모든 제도와 법과 사상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제도와 사상이 완전하지 못해도 그 나름의 질서가 유질될 때 하나님의 뜻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완전하지 못해도 민주주의 질서가 잘 지켜질 때 하나님의 뜻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역사와 전통도 완전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유지되고 질서가운데서 개혁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제도와 법이 완전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합리적인 질서를 통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기 전까지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쉽게 바꿀 수 있다면 혼란은 감당할 수 없이 심화 될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그런 류의 혼란으로 인하여 많은 아픔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는 성경적 원리 위에 세워졌지만, 교파마다 제도와 법과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장로교의 제도와 원리를 성경적으로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장로교회의 특징은 장로주의 또는 장로회제도(Presbyterianism)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장로교는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교회정치의 한 유형을 뜻합니다. 이 제도는 어느 시대에 고안된 혁신적 제도가 아니라 초대교회들에서 사도들에 의한 교회운영의 모델을 회복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 정치를 대의정치 즉 대의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라고 합니다. 사실 오늘날 민주정치의 대명사처럼 된 대의제도는 장로교회 창시자 존 칼빈(John Calvin)이 1500년대 중반 스위스 제네바에서 대의제도에 입각한 신정정치(神政政治)를 펴면서, 공동체 의사결정을 위한 하나의 모델적 질서로서 도입한 것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개신교도 처형에 대한 저항논리로 칼빈은 대의제적 인민주권(Representative Popular Sovereignty)의 개념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는 그의 저서를 통해 고대로마와 아테네 등에서 활용됐던 호민관제, 즉 인민들에 의해 선출된 통치관원인 호민관이 왕의 폭정으로부터 인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아 활동했던 전통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호민관들은 비록 인민들에 의해 선출되었지만,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호민관은 장로 직을 연상케 하는데, 회중들에 의해 선출된 평신도 대표인 장로는 목사와 함께 당회에서 동일한 통치권을 행사하도록 위임하는 것이 장로교회의 치리 제도입니다. 그 대표들인 장로들의 결정이 비록 인간들에 의해 선출된 인간에 의한 결정일지라도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이 담긴 결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장로교회 정치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장로교회에서 처음 선보인 대의제도는 그 후 현실 정치에서 대의민주주의, 즉 의회정치 형태가 발전해 나가는 데 시금석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가 봉착하고 있는 위기현상에서 그 제도의 원형을 짚어보는 것이 필요하리라 여겨집니다.

 

장로회 정치는 회중이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출한 대표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것인데, 대표자들은 그들을 선출한 회중의 이름으로 정책을 결정할 권한을 부여 받고 있는 것입니다. 대의제도 아래서도 회중의 정치참여는 여전히 중요한 숙제로 남아 있긴 하지만, 그것은 대표자로서의 책임과 권한을 행사할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선출하는 것, 즉 선거참여나 또는 대표자들에게 여론형태 등을 통해 때때로 어떤 의사를 전달하는 것에 국한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의제도가 갖고 있는 문제 점 중의 하나이지만 회중의 지나친 정치참여의 욕구가 얼마나 큰 혼란을 야기시키는가를 미국 건국자들은 뼈저리게 경험하였기에 미국의 헌법은 대중의 직접 정치 참여를 제도적으로 막아 놓았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대통령이나 의회나 대중들에 의해 혁명적으로 바뀌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부분을 개혁하려고 해도 너무나 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획기적 개혁이 어렵고 혁명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그나마 안전하게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장로교의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실 교회의 목회자 청빙 때의 청빙위원회의 역할을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로교의 대의정치 원리에서 생각할 때 지금의 청빙위원회는 장로교 대의정치원리를 한 참 벗어나고 있습니다. 현실 교회들의 목회자 청빙을 위한 청빙위원회는 대의정치의 원리를 따른 것이기 보다 단순히 민주주의의 원칙을 따른 것입니다. 교회가 분별없이 민주주의 원칙을 좇아갈 경우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의 역할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장로교 대의정치 원리에서 생각할 때 청빙위원회는 장로로 구성되거나 당회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또한 청빙위원이 청빙 할 목회자를 심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청빙위원이 장로들이라고 하여도 일반적 차원에서 현실적으로 볼 때 장로는 교회와 교회 제도에 대한 비전문가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수준에서 목회자의 능력과 신학과 은사를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교회들이 이에서 비롯된 아픔과 갈등과 분쟁을 실제로 겪고 있습니다. 현실 교회의 문제들이 목회자의 상식을 무시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고, 교회의 비전문가 수준의 장로들이 교회 정치에 지나치게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의 분쟁과 갈등의 상당한 요인이 교회 제도와 법에 대한 남용에서 비롯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제도와 법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사회에서도 시민들이 모든 것을 거리에서 해결하려는 지나친 욕구가 혼란을 야기하는데 교회는 그 경우가 더욱 심각합니다. 목회자 청빙에서 가장 우선 고려되어야 할 점은 목사의 소속이 노회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목사는 노회의 허락 없이 개교회의 청빙이 불가능함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에 세워진 제도입니다.

청빙위원회는 노회에 목회자 선택을 의뢰하는 것이 지혜롭게 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의 역기능이 적지 않지만 더 나은 제도를 도입하기 전까지는 이 제도의 본래의 의도와 순기능을 극대화 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몇몇 가지의 역기능을 문제 삼아 장로교의 대의정치의 근간을 무시하는 청빙위원회나 운영위원회나 안수집사회나 권사회의 역할이 극대화 되면 교회 문제는 결코 진정국면으로 갈 수 없습니다. 분쟁과 갈등이 있는 장로교회가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가려면 공동의회와 당회와 제직회를 제외한 모든 모임을 해체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기존의 합법적 회의를 통해 질서 가운데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부정하거나 법과 윤리를 노골적으로 해치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와 입장과 의견이 달라도 회의 결과에 승복해야 합니다. 현실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개인과 몇몇 사람들이 집단으로 교회회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러한 이들에게 물리적으로 제제를 가할 강제력이 없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난장판이 되고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는 맛 잃은 소금이 되고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진리는 역사와 전통을 통해 드러나고 세워집니다. 어떤 개인도 역사와 전통을 능가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목회자 청빙위원회의 역할만 장로교 대의정치원리를 제대로 따라가도 많은 문제가 진정 국면으로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역사와 전통의 역기능은 지나치게 역사와 전통을 강조하려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는 것이지만, 교회는 계시의 역사와 사도들의 전통을 이어가야 합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살후 3;6 -

USA 아멘넷/황상하 목사

현실과 믿음을 조화시키려면? / 박신 목사

 

 

[질문]

취직 준비생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장소 안에서 최선을 다해 그 준비를 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말씀과 기도와 신앙서적을 읽는 일 등에만 온전히 정신을 쏟고 있습니다. 시간 관리를 제대로 못하고 허송세월만 하는 것 같아 제 자신을 바라 볼 때마다 안타깝습니다. 범사를 주님이 선한 계획으로 인도하실 것은 믿지만 나이도 29살이라 집에 걱정시키는 것도 싫고 결혼도 해야 합니다. 이런 세상적인 걱정이 드는 것도 믿음에 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대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과정을 헤쳐 나가야 할까요?

 

 

[답변]

많은 믿음의 청년들이 형제님과 비슷한 고충을 호소합니다. 믿음과 현실의 조화와 균형을 어떻게 하면 잘 이루느냐는 것입니다. 대부분 말씀과 기도에 더욱 집중하면서 살고 싶은데 살아가는 문제로 방해 받는 것 같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현실과 믿음생활 둘 중에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지 정해져 있지 않고 또 정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이는 신자의 소명과 소명을 이루는 방안에 대해 정확히 분별하지 못해 생기는 의문입니다. 또 그동안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무조건 믿음이 현실보다 우선한다고 잘못 가르쳐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신자들이 현실 삶에 매달리는 것이 하나님과 영적교제에 정진하는 일보다 열등하다고, 심지어 신자가 해선 안 되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모든 신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이 주신 세 가지 소명이 있습니다. 첫째는 신자 자신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서 자신이 속한 모든 공동체에 예수님의 거룩한 빛이 비취게 해서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셋째는 아직도 십자가 구원의 길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자기 주변에서부터 시작하여 땅 끝까지 이르도록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세 소명은 목회자, 선교사만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가 자기 현재의 위치와 신분에서 최선을 다해 실현해야 합니다. 다만 그 소명을 실현하는 방안에서 크게 둘로 나뉠 뿐입니다. 첫째 풀타임을 투자해 전문적 구체적 종교 활동을 하는 방안과 둘째 세속적 직업을 통해 그 소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전자는 목회자, 선교사, 신학자, 기독교 관련전문기관 종사자등이며 후자는 일반 신자입니다.

 

반드시 주지해야 할 사항은 이 두 방안 사이에는 절대로 영적 우열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지위, 권능, 자격, 신분 등에 결코 차별이 없습니다. 현실의 직업도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일반 신자가 행하는 현실의 일은 불신 세상을 직접 상대하며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해야하므로 오히려 하나님 나라 확장의 첨병이자 실제 전투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엔 더더욱 소중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풀타임 사역자들은 그 십자가 군병을 교육 훈련시키거나 후원해주는 것이 주된 역할입니다.

 

요컨대 현실의 직업은 하나님이 주신 성직입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의 실제적인 도구이자 통로입니다. 대학 공부하고, 직장 얻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열심히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일은 정말로 고귀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방식으로 하면 목회자가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불신 세상은 일반신자의 삶을 보고 예수님과 그 십자가에 관해 관심을 갖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님을 비롯해 모든 신자는 가장 먼저 풀타임 사역자가 될 것인지, 일반 신자로 세속 직업을 가질 것인지 부터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풀타임 사역자가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구체적, 개인적, 인격적, 직접적, 확정적인 대면과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부르심이 없으면 아무나 섣불리 하겠다고 나설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됩니다.

 

바꿔 말해 그런 부르심이 없는 신자는 세속 직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현실 삶에 장애가 될 만큼 종교생활에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주일 성수나 성경읽기 기도를 등한시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아침마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는 정도는 현실생활에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더욱 충만해져서 자기 일을 더 잘 할 수 있게 만듭니다.

 

제 뜻은 일반 신자에겐 현실의 삶이 하나님의 일이자 더 소중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공부만 하라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만 모여도 됩니다. 성경적 참 복음이 선포되고 진리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현실과 동떨어진 수도원에서 성숙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수도원에서 말씀과 기도에 전무할 자는 신학자뿐입니다. 전문 사역자라도 종교적 일이 아니라 현실의 삶에 충실해야 하며 어떤 면에선 그 올바른 삶이 더 감동적이고도 영적인 설교가 됩니다.

 

교회는 십자가 군병을 훈련시켜 세상으로 파송시키는 곳입니다. 모든 신자는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세상에 나가, 그것도 죄악이 더 많은 곳으로 뛰어 들어가 하나님의 파수군 역할에 충성해야 합니다. 일주일 내내 교회에 붙들어 놓고 목사와 교회에 충성시키는 작금의 상황은 아주 큰 잘못입니다. 주일에 예배와 성경공부로 모였으면 평일에는 세상에 나가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신자는 세상에 떨어져 썩어 죽음으로써 다른 이의 생명이 수십 배의 결실을 맺게 하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현실의 직업에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가능한 많이 끼쳐야 합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직업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전문가가 되어서 그 일을 통해 인류의 복지가 증진되는데 보탬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회와 단체에서 꼭 필요한 사람, 다른 사람으로 영육 간에 강건케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바로 그것이 아주 거룩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신자로서 복음전파를 하기 이전에 의사로서 생명을 살리고, 경찰로서 시민을 보호하고, 공무원으로서 순리대로 법을 운용하고, 선생으로서 학생들의 지성과 인성을 함양하고, 과학자로서 질병치료나 공해방지 등의 일을 성실히 행해야 합니다. 신자는 더더욱 세상에서 전문적 실력은 물론 정직과 겸손과 섬김과 사랑으로 신자답게 행함으로써 사람들로 신자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쉽게 간과하는 영적 원리가 또 하나 있습니다. 믿음과 영성이 말씀과 기도에 집중만 한다고 쉽게 자라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깨우침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지적 종교적 배움과 훈련이 아니라 실제 삶의 모든 부분에서 평생토록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는 끈질기고도 고달프고 외로운 씨름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구체적으로는 현실의 고난과 문제들을 믿음으로 갈등, 고민, 기도, 인내, 소망, 맞서 싸움으로써 신자의 성품과 믿음과 영성이 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이나 다윗과 사도 바울, 베드로 등등 성경의 믿음의 선진들이 다 그렇습니다.

 

혼자서 말씀 보고 기도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그것에 시간을 빼앗기는 일, 특별히 젊었을 때에 열정적으로 믿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질문자에게 이미 현실을 등한시 한다는 우려가 생겼다면 사실은 조금 과한 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어쩌면 죄악으로 추해가는 세상과는 담을 쌓고 혼자만 경건하고 싶은 영적교만 내지는 질문자가 우려하는 대로 현실을 외면 도피하려는 게으름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시기를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조만간 스스로 분명한 결단을 해야 한다는 의미임, 전임사역자의 길로 갈 것인지 세속 직업을 택할 것인지 여부를 정하십시오. 전자의 경우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어떤 방식이든 그 본인은 알 수 있음, 부르심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 직업을 어떻게 하면 잘 수행할지를 연구하고 그 준비에 시간과 노력을 우선적으로 투자하십시오.

 

삶에서 영성이 자란다는 것은 현실과 부딪혀서 겪는 갈등을 통해서는 물론이고, 그런 문제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하고 오묘한 인도와 간섭을 말씀과 기도를 통해 반추하여 발견하고 누린다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현실을 잘 준비하는 것보다, 그 반대로 삶의 문제를 말씀과 기도로 해결할 때에 그 믿음이 훨씬 더 크게 자란다는 뜻입니다. 또 그런 작은 진보들이 매일매일 모여서 결국은 노년의 아브라함과 모세처럼 믿음의 거인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에선 이런 삶으로 믿음을 실현해 보여주는 진정으로 경건한 신자들이 절실합니다. 전문사역자는 공급과잉입니다.

 

6/29/2015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