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려나 봐요/최송연 

봄이 오려나 봐요
버들개지 사이로 흐르는
새하얀 안개 이슬을 타고 

봄이 오면
내 사랑
그분도 오시려나
가슴이 마냥 콩닥이네요

하지만
기나긴 겨우살이
너무 찌들어버린 내 옷

행여,     
내 사랑 그분께서 
날 몰라보시면 나는 어찌할까

세마포 옷 빨리 꺼내
그 피로 씻고 닦아 정결케 하고
꽃단장 분단장도 곱게 해야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 20 )

 
 

                              

봄이 오려나 봐요/최송연

봄이 오려나 봐요
버들개지 사이로 흐르는
새하얀 안개 이슬을 타고

봄이 오면
내 사랑
그분도 오시려나
가슴이 마냥 콩닥이네요

하지만
기나긴 겨우살이
너무 찌들어버린 내 옷

행여,    
내 사랑 그분께서
날 몰라보시면 나는 어찌할까

세마포 옷 빨리 꺼내
그 피로 씻고 닦아 정결케 하고
꽃단장 분단장도 곱게 해야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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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그리스도인' / 재임스 패커

 

 

이미 말한 대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신약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성령의 사역 전반을 해석하는 실마리이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너무나 자주 우리의 결핍과 필요에만 결부시키고,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진리, 곧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려고 이곳에 와 계시며, 그분의 변함없는 주 임무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임재를 전달하는 일이며, 예수님을 온전히 알려 주어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는 신뢰를 가지게 만든는 진리의 관점에서 충분히 숙고하지 못했다. 그 결과 성령의 사역을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기독교 중심으로 보게 되었으니, 다시 말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견해가 되어 버린 셈이다.

 

이와 같이 성령의 사역을 인간 중심으로 보게 된 이유 중 한 가지는 분명하다. 개인에 대한 성령의 사역을 가장 많이 다룬 곳이 서신서이지만, 기기에는 주 예수님과의 사랑이나 예수님과 성도가 누리는 교제에 대해서는 거의 말이 없다. 반면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반응이 무엇인지 가장 많이 설명하고 예증한 곳이 복음서이지만, 거기에는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을 제외하고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우선 복음서는 이미 서신서의 교리들을 상당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저술되었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서신서의 수신자들은 복음서의 이야기들에 이미 친숙한 사람들이었기에,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간략하게만 언급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 수 있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참으로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전달하는 일이야말로 성령께서 새 언약 아래 수행하시는 변함없는 주 임무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다음 몇 단락을 통해 보기로 하자.

 

새로운 출생

 

우선, 그리스도인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만드는 큰 변화, 즉 예수님이 '새로운 출생' 또는 '거듭남'(요3:3-8; 벧전1:23; 약1:18)이라고 비유하신 이 변화는 '성령으로 말미암았다'(요3:6). 요한복음 3장 5절의 "물"은 어떤 사람들의 생각처럼, 세례 요한의 세례나 기독교식 세례, 자연 출산 때의 양수처럼 성령의 내적 사역을 보완하는 외적인 다른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에스겔 36장 25절부터 27절 말씀에서 묘사했듯이, 내적인 갱생(更生) 자체가 갖는 깨끗하게 하는 측면을 가리킨다(5절의 물이 성령의 소생시키는 활동의 한 측면만을 보여 준다면 6절에 물에 대한 언급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울이 이 과정을 "중생"(딛3:5)과 '새 창조'(고후5:17; 갈6:17)라 부르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할 때, 중생한 자의 삶이 변화한다고 설명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입장이다(롬6:3-11; 골2:12-15).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믿음을 통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한다. 또 그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의 흘린 피와 그 피가 보증하는 사죄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롬4:16-25, 10:8-13; 골2:12; 요3:15-21, 5:24, 6:47, 53-58). 덧붙여서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예수님에게 신뢰와 순종을 직접 표현하게 하시고(고전12:3), 우리를 당신의 몸인 교회의 지체(손발, 장기)로 삼으시는 이유는, 우리가 믿음으로 당신의 능력 안에서 초자연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해 준다. 이 모든 사실은 정확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에 가깝다.

 

하지만 새로운 출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지나치게 주관적이다. 여기서 주관적이라는 뜻은 지나치게 인격적이라는 말이 아니라(그럴 수가 없다) 지나치게 안으로 굽어 있어, 우리의 모든 관심의 초점이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믿는 개인에게 쏠려 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두 가지 유감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첫째는, 회심할 때 특정한 감정체험(죄에 대한 엄청난 애통, 해답을 찾기 위한 엄청난 고뇌, 넘쳐나는 기쁨)을 해야 한다는 기대에 집착하게 만든다. 이런 기대는 바울, 어거스틴, 루터, 버니언, 웨슬리 같은 사람들의 잘 알려진 회심 이야기나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 기대를 잣대로 삼아 우리와 동시대의 사람들이 중생을 했는지 그 여부를 판단한다. 이것은 서글프고 어리석은 일이다.

 

체험이 어느 한순간에 일어나서(우리 가운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날짜를 기억할 수 있다 해도,  회심의 체험은 하도 가지각색이라 어떠한 표준기대치에도 끼워 맞출 수가 없다. ?문에 그런 기대를 잣대로 사용하면, 종종 결과적으로 지금 거듭난 상태라는 충분한 표시가 있는 많은 사람들은 회심하지 못했다고 제쳐 놓는 반면, 오히려 한때 간증하던 회심시의 체험이 이제는 완전히 닳아 없어진 사람들은 계속해서 중생한 사람으로 대접받게 된다. 청교도들과 청교도들과 조너선 에드워즈의 말처럼, 그 어떠한 감정 상태나 결과 혹은 개별 체험이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중생했음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가 될 수 없다. 이런 입장과 다르게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실수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진실이다. 중생했음을 보여 주는 현재의 삶만이 그 사람이 과거 어떤 시점에 회심했다는 확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

 

두번째 유감스러운 결과는,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그리스도께서 인생의 의미를 여는 열쇠가 되시는 분으로 집중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고, 단순히 우리 자신이 현재 안고 있는 몇 가지 자기중심적인 질문(어떻게 하면 내가 양심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압박받을 때 마음과 정신의 평화는? 행복은? 기쁨은? 삶에 필요한 능력은?)에 답하기 위해 불러 들이는 인물 정도로 치부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에 따르는 요구사항들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심지어 원칙적으로 그것들을 강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드는 비용은 계산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서 수확한 작물은, 예수님께 우드하우스(P.G. Wodehouse)의 소설에 등장하는 만능 지브즈(Jeeves) 같은 역할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필요할 때 호출해서 구세주와 보혜사로만 써먹고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여전히 중생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반쪽짜리 메시지에 오도(誤導)되어,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을 큰 어려움으로부터 막아 주신다고 지레짐작하여 모여들었다. 첫번째 집단은 완전히 믿음에서 떠나가지는 않지만,  교회 안에서 고목(枯木)이 되어 버린다. 두번째 집단은 큰 상처가 남는 좌절을 겪게 된다. 그들은 좋은 일만 생기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불행이 닥칠 때 더욱 큰 상처를 받게 마련이다.

 

다음의 증언은 모 기독교 신문에서 임의로 인용한 내용이다. "남편과 저는 교회에서 주일학교 부장으로 섬기로 있었는데 2살 6개월 된 아들이 사고로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주님을 위해 살아왔고, 한 영혼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저는 4년을 멍하게 지내며 제 속의 분노를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계속 강해지려고 노렸했습니다. 저는 제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정말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여기서 고백한 것과 같은 헛된 기대를 품게 하고 어려움이 닥치면 이를 악무는 일 외에는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양육은, 결함이 있다기보다 잔인하다고 해야 옳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대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그 기대들은 다만 희망적인 생각에 불과한가. 아니면 외부요인들로부터 생겨났는가? 어쨌든 반드시 지적해야 할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많은 경우 인간 중심이 되어 무슨 영업사원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이 갖는 혜택은 부풀리고 져야 할 부담은 최소화시켜서 결국 새신자들이 딴 생각을 할 수 없도록 사고 자체를 고정시켜 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이처럼 지나친 나머지 해롭기 그지없는 주관적인 생각들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성령의 새 언약 사역과 보조를 맞추는 법을 배우고, 구원자 하나님이시며 인류의 모범이요 앞으로 오실 심판자이시고, 약하고 가난하며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들의 연인이시며, 친히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우면 된다. 그러면 본질적인 것은 감정이 아니라 한 분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헌신이라고 강조함으로, 중생 때에 전형적인 체험을 겪는다는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과거의 회심에 대한 유일한 증거가 현재의 회심한 상태 뿐이라고 강조함으로, 중생의 체험만을 따로 떼어서 진정한 기독교인의 표시라고 여기는 습관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육신한 하나님께서 찬양과 섬김을 통해 온전히 경배받으셔야 한다고 강조함으로, 주 예수를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도록 대기시킨다 불경한 생각을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리차드 백스터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안내하셔서 통과하게 하시는 어두운 방들은 그분께서 친히 통과하셨던 방들보다 결코 어둡지 않다"라고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길은 죽음을 경험한 뒤에 부활을 체험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친히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따라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리라고 기대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징밋빛 환상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경 전체를 읽되, 특별히 사복음서를 끊임없이 묵상해야 한다. 이 일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안일한 견해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복음서를 연구하면서 우리 주님을 계속해서 선명하게 바라보고, 우리 머릿속에 '예수님에 대한 제자도'라는 관계의 틀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제자도에 대한 교리가 제일 잘 설명된 곳은 서신서이지만, 제자도의 본질이 가장 생생하게 그려진 곳은 복음서이다.

 

그런데 복음서보다 서신서를 더 좋아하고, 복음서를 졸업하고 서신서로 입문하는 것이 무슨 영적 성장의 표시라도 되는 양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듯한데, 이러한 행태는 우리가 주 예수님과 나누는 인격적인 교제보다 신학적인 개념에 더 관심이 많다는 뜻이 아닐까. 무엇보다 우리는 서신서의 신학이야말로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제자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준비시켜 준다고 생각해야 한다. 종종 지적했듯이, 복음서는 지상에서 가장 놀라운 책들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위에서 말한 잘못된 생각들을 모두 바로잡는다면 틀림없이 대단한 소득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어떤 진리들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상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믿는 자는 모두 성령을 '받는다'(행2:38; 갈3:2)는 진리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기본이다. 이렇게 받은 성령은 "보증" 즉, 신자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소유권을 나타내는 표시이다(고후1:22; 엡1:13). 그 이후로 성령은 신자 안에 '내주하신다'(롬8:11). 다시 말하면 성령은 유숙객과 같아서, 성령이 거하시는 신자의 마음속과 그의 삶에서 생기는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갖고 개입하신다. 성령께서는 '은혜롭고 주도적인 손님'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변화의 주도자로 활동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를 변화시켜 도덕적으로 예수님을 더욱 닮아 '점점 더 큰 영광에'(고후3:18) 이르게 하신다. 여기서 독창적인 주장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 통상적인 가르침일 뿐이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가리키는 데 일반적으로 쓰이는 단어가 바로 성화(聖化)이다. 성화의 길은,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성령을 좇아 행하"(갈5:16)는 길이다. 성화의 길을 간다는 것은 육체의 욕망(몸과 마음의 악한 욕심)을 거부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본 받는 아홉 가지 목록인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허용해 드린다는 뜻이다(22,23). 성화의 삶을 또 다르게 표현하면 겸손, 사랑 그리고 죄를 피하고 의를 실천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본받는 것(요13:12-15,34,35, 15:12,13; 엡5:1,2; 빌2:5-8; 벧전2:21-25; 히12:1-4)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성화란 당신이 말씀한 대로 행하는 일이라고 계속 정의하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요약하신다(막12:29-31; 눅10:25-37). 어쨌든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입장을 잘 정리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의 삶이 갖는 체험적 측면(지적.의지적.규율적 측면과 별개로)이 주제가 되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히 생소한 영역으로 옮겨 가게 되는데, 이곳에서 대부분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직접 지각',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 하나님의 영원성과 무한성,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영광 등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도 관련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지각은, 오늘날보다 과거에 훨씬 더 잘 이해하던 영역이다. 이 분야에서 우리는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러한 지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면 무방하리라. 성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직접 지각'은 생겨날 수 없으며, 성경적 기준이 없으면 그러한 지각을 식별할 수가 없고, 성경적 신학이 없으면 그것을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지각 자체는 돌발적이고 주권적이다.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어서 요구하거나 예측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대로 생겨난다. 통상(여기서는 모든 것이 개인별 맞춤이기 때문에, 이 단어가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지각을 주시며, 그것은 그러한 신자에게 성부와 성자가 찾아와 함께 거하고 자신들을 나타내 보이시리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요14:18,20-23)이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지각('체험'보다는 이렇게 부르는 편이 낫다. 물론 우리가 '체험'이라고 할 때 바로 이러한 직접 지각을 뜻하는 것은 사실이다)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전해 주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큰 기쁨이 된다.

 

 

제임스 패커의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발췌(93-101p)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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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휴거의 시점 & 곧 일어날 일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51-53)


이 천년 전에는 이 비밀이 풀려지지 않았고,

지금 현재도 다 풀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성경은 정말 최고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적은 사람들에게만 읽혀지고 있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교회의 80%가

성도들의 ‘자가양육’ 프로그램이 없다고 합니다.


또 아쉬운 부분은

오직 3%의 성도들만 성경통독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비밀이 비밀인 것 입니다.


여기서 ‘잠’은 죽음을 돌려서 애기한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 나팔’ 이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여기에서 마지막 나팔(Trump)이라고 해서

도널트 트럼프를 얘기한 게 아니고,

저는 트럼프 당선 전에 그가 당선될 것이라 말했습니다.


방송에서는 트럼프의 당선이 놀라움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들이 잘못된 곳에 있어서 놀라움이였고,

저희는 그전에 그의 당선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아는 저희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당선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휴거가 그 마지막 나팔(Trump)에,

도널드 트럼프의 때에 일어나는 부분도

그리 놀라운 소식이 아닐 것입니다.


트럼프의 때에

반드시 휴거가 일어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일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 휴거가 내년에 일어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트럼프의 공직시기는 몇 년이 더 있고,

그의 딸이 다음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슨 얘기를 들으면

그대로 해석하는데,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얘기를 듣고, 말씀을 보고,

상황적인 이해가 100% 갖쳐져야

올바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말씀의 예언 그 자체가 이루어질 것 입니다. 아멘!


그리고 여러분이 탈모가 있거나,

수술을 해서 무릎연골이나 치아가 없다면,

변화될 때 그 부분도 변화되고 회복될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말세에 대한 걱정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안경 쓰시는 분들은 아마 시력이 다른 행성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양쪽 다 변화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저희 기독교의 독특성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 전부가 아니고,

그냥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영혼만의 삶이 아니고,

우리의 삶은 실제 실질적, 육체적인 현실일 것 입니다.

(변화된 몸)


그리고 이 부분은 기독교 밖에는 없습니다.

다른 종교는 막연한 죽음 이후 삶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혼 불멸성 정도만 믿고 있지만, 기독교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영혼 구원 뿐만 아니라,

우리 몸을 포함한 잘못된 모든 것을 다 고치실 것입니다.


좋은 소식은 모두가 몸과 함께 변화된다는 것이고,

안 좋은 소식도 모두가 몸과 함께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 뜻은 주님과 천국에서 다스리지 못하고,

지옥의 불에서 영원히 슬퍼하며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도

몸과 함께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슬프죠?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스스로의 선택입니다.


휴거는 무엇입니까?

죽음을 보지 않고 몸과 함께 변화되는 것입니다.


만약 죽은 사람이면,

성경말씀에 따라 새로운 몸과 함께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살아있는 상태에서의 휴거된다면,

현재의 몸과 함께 하늘로 승천하여 주님을 만날 것이고,

그 일이 눈 깜짝할 사이, 순식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히브리어 표현상으로는

해가 짐과(여전히 약한 빛은 있음),

어둠의 경계같은 형태의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성경에 근거하고,

성경에 나와있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 4:16~18)


여기서도 트럼프가 나옵니다.

휴거로 서로 위로하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휴거는 서로 위로를 줄 수 있는 역할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주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고난을 통과해야 한다고 합니다.


네 맞습니다.

주님과 함께있는 모든 사람들은 고난을 통과합니다.

불신자들을 보는 모든 신자들은 고난을 경험합니다.


그렇다고 고난을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그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과 위로가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환란이 올 때,

적그리스도에 의한 환란시에,

우리에게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모든 사람을 말하는게 아니고,

일부의 사람들에게 그렇습니다.


휴거입니다!

그리고 오늘 중요하게 다룰 사항은

'누구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즉 누가 휴거를 얻을 것인가 입니다.


관련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만,

그 '누구'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휴거의 순서 및 구조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등장(his appearing) 입니다.

하늘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시고,

그 다음에는 바울 사도가 얘기한대로,

우리가 다 모입니다.


순서는 주님을 믿었고, 휴거 전에 죽었다면

그 분들이 먼저 모입니다.


어떤 분들은 질문을 합니다.

몸이 산산히 부서졌거나,

상어에게 먹힌 분들은 어떡합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몸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단 번에 우리 몸의 세포들을 모으실꺼고,

단숨에 영화로운 육체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살아있는 우리가 올라갈 것 입니다.


휴거의 기간 동안

이땅에는 말세의 징조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하늘에서의 징조가 있을 것입니다.

천국과 천상의 징조들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분노가 임할 것입니다.


환난 중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임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최소 1회(아마 다수)의 핵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그 환란 중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고,

평화와 안전을 약속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이 많이 하는 얘기를 할 것입니다.

‘평화, 안전’을 약속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올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성경에 근거하면 적그리스도는 중동에서 나올 것으로 보이고,

범중동 리더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 적그리스도에게 사람들은 속을 것이고,

그에게 죽임당해,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백마 탄 자가 나올 것입니다. (계 19장)



- 디스커버 미니스트리 ‘스티브’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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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섭리의 은혜를 기억하여 주를 영화롭게 하라


- 존 플라벨 -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에 경험했던 축복이나 은혜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과거의 경험을 올바로 기억하고 평가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면, 참으로 큰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겸손한 태도로 섭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크고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섭리의 경험을 신앙일지에 기록하는 것도 그러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모든 신자가 시간을 내어 신앙일지를 기록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신앙일지는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많은 유익을 끼친다.


신자들이 서로 성경을 읽는 가운데 앞으로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는 섭리의 말씀들을 모아서 기록해두고, 또 직접 경험한 섭리까지 더해둔다면 참으로 보물과 같은 귀한 자산이 될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섭리는 매순간 우리의 삶과 자유와 관심사에 영향을 미친다. 일용할 양식도, 필요한 물질도, 안전한 삶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섭리를 통해 받은 은혜를 기록하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수없이 경험해왔다. 이러한 경험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우리의 형편없는 기억력을 의지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경험이 찾아오면 이전의 경험은 쉽게 파묻히는 것이 보통이다.


문자화된 기억력은 이런 위험에서우리를 보호할 뿐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친다. 세상에 사는 동안 경험했던 하나님의 섭리의 추억을 잃는 것에 비하면, 금은이나 토지나 가재도구를 잃는 것은 그다지 큰 손실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 귀한 보물을 신앙일지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잘 간수하라. 그리고 새로운 문제나 두려움이나 어려움이나 시련이 닥칠 때마다 “전에도 이런 고통을 겪어본 적이 있나? 이것이 처음 있는 시련인가? 아삽이 그랬던 것처럼(시77:5) 옛날 일들을 떠올려보자”라고 생각하며 다시 신앙일지를 들춰보라.


현재의 시련과 위험만 크게 보고, 과거의 시련과 위험을 경시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항상 다음에 닥치는 시련이 가장 크게 보이는 법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에 경험했던 축복이나 은혜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에게 육지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오래된 경험일수록 그런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의 위험이나 두려움도 현재의 그것들만큼 심각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과거의 경험을 올바로 기억하고 평가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 참으로 큰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 존 플라벨, 『하나님의 섭리』, pp 372-375

출처: 안산회복 교회/안상범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연약한 인간, 연약한 교회

 

황대우 교수

(고신대 개혁주의학술원)

인간은 연약한 존재다. 피조물이므로 창조주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다. 마지막 피조물이므로 이전의 피조물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다. 타락한 죄인이므로 죄 짓지 않고 사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연약한 존재다.  

이처럼 연약한 인간은 분수를 모르고 강함과 위대함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연약한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잊어버리는 순간 타락하고 만다. 하와가 그랬고, 아담이 뒤를 따랐다. 그리고 지금 이 땅에서 온갖 종류의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이 그러하다.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무엇인가 욕망한다.  

그 욕망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고 싶어 한다. 그 욕망은 황금만능주의와 외모지상주의와 성공제일주의를 조장한다. 또한 그 욕망은 어느새 가장 중요한 삶의 이유와 원동력이 되고 만다. 그래서 욕망의 추악한 본성은 사라지고 실리적인 당위성만 남게 된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인간 삶의 일상이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이 이 세상을 죄인답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이처럼 타락한 세상과 타락한 인간에게 연약함이란 수치요 악이다. 타락한 인간들의 타락한 세상에서는 강함과 위대함만이 최고최상이다. 강한 자, 위대한 자는 박수갈채를 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반면, 연약한 자는 무시되고 소외되며 부끄러움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래서 타락한 세상 속의 타락한 군상들은 강함과 위대함을 욕망한다. 아니, 세상뿐만 아니라, 세상 속의 교회도 강함과 위대함을 추구한다. 마치 그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 양! 이런 교회에는 세상과의 공간적 구분만 존재할 뿐,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영적 구별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교회의 세속화이다.

 교회는 연약한 존재다.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없이도 존재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연약한 인간의 태생적 연약함뿐만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영적 연약함까지도 공유하는 공동체다. 자신의 연약함을 모르는 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 자신이 흉악한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는 자는 결코 구성원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는 자다. 강한 자가 되어 당당하게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태생적이든 영적이든 연약한 모습 그대로, 부족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겸손히 열망하면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의원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를 부르신다.  

하나님 없이도, 구원자 없이도 살아 갈 수 있는 자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자를 찾으시고 부르신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자에게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될 자격이 주어진다.

 주님만을 간절히 찾고 주님을 주인과 머리로 모시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연약한 자와 연약한 교회만을 우리 주님께서는 찾고 부르신다. 연약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통로다. 연약함은 빈 손 들고 하나님께 나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영혼의 가난함이다. 연약함은 가장 큰 영적 선물이다.

 

이런 영적 연약함과 가난함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속절없이 세상의 강함과 부요함에 매몰되어 버릴 것이다.

 

 

http://reformedjr.com/board05_02/4845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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