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그리스의 이름으로 기도하라]-1)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14).

이 구절은 기도 응답에 관한 약속들 가운데서 가장 친밀하며 가장 놀라운 성경 구절인 동시에 또한 일반적으로 가장 오해를 받는 구절이다.

여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방법으로 기도하면 그들이 기도한 바로 그것을 시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본문을 조심스럽게 읽어 보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이 성경 구절은 평범하고 단순하며 적극적이면서도 매우 귀중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생기를 돋게 하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통해서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기도한 바로 그것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오늘날 기도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교리들이 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유익하고 좋은 일을 한다. 우리가 기도한 것을 응답받지 못할지라도 우리가 기도한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응답받을 수 있다. 혹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가 기도한 것만큼 좋은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기도에 대한 교리에 어떤 진리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 사실 종종 우리가 기도한 것을 응답받지 못하는 때가 있는데, 그것 자체가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너무 부주의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성급하고 더 나아가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의 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한 바로 그것은 응답받지 못하지만 또 어떤 때에는 그것이 더 유익할 때가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응답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물론 전술한 바와 같이 우리가 기도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는 어떤 의미에서 진리이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기도에 관한 교리가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기도에 관한 교훈은 바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방법으로 기도할 때, 그들이 기도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응답받고 때로는 그들이 기도한 것과는 다르게 응답받을 수 있지만, 그것보다도 바로 '그들이 기도한 그것을 응답받는다는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그것을'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바로 그것을' 내가 시행하리라."

이 기도에 대한 약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첫째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기도한 바로 그것을 응답받는다고 했는데 그것이 '누구에게' 해당되는 약속인가에 대한 사실이고 둘째로, 사람들이 기도한 바로 그것을 응답받기 위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실이다.


1. 이 약속은 누구에게 해당되는가

우선 첫째로 과연 기도에 대한 약속은 누구에게 해당되는 것인가? 성경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잘못 해석되고 있는 구절 가운데 하나는, 성경이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약속을, 성경이 결코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고 성경이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기도의 약속을 그들에게 적용시켜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다. 세상에는 하나님이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현재 공부하고 있는 이 구절을 보면서 이 구절의 앞과 뒤의 문맥을 깊이 상고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응답하시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너희가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는가? 기도의 응답을 받는 사람들은 바로 본문의 앞절과 뒷절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1. 요한복음 14:12을 주의 깊게 읽어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주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런데 이 본문에서 "너희가"라는 말은 주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첫째로 기도에 대한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대해서 완전히 혼동하고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이 아무리 훌륭하고 정통적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는 사람들의 기도를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기도를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완전하면서도 정확하게 믿을 수 있으나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전혀 그를 믿는 것이 아니다. 마귀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의심없이, 완전히, 올바르게 믿고 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존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귀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는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완전히 정통하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전혀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인격적으로 확실히 믿는 것이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그를 모셔들이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 죄를 몸으로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그로 인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며, 우리가 그분에게 우리의 삶을 완전히 통치하도록 위임하게 하기 위해 그를 우리의 주인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요한복음 1:12에서 찾을 수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성경 어느 곳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들의 삶의 주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으며 그와 연합되지 않은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한 곳이 없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않으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하나님이 가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믿는다. 그분은 내가 성경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나의 기도를 몇 가지 들으셨지만 시행하리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것을 옛 신학자들은 "계약되지 않은 하나님의 자비"라고 묘하게 말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다고 가장 확실히, 가장 적극적으로 약속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다고는 결코 약속하시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리라는 기대를 가질 권리가 없으며,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이라고 불평할 이유와 자격이 없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여러 번 시도해 보았는데도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불평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는다. 그들이 아무리 기도하고 또 기도할지라도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치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좋은 결과 중의 하나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의 기도의 기초가 되며, 우리가 필요한 모든 시간에 언제든지 하나님께 가서 우리의 필요를 기도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응답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관계가 되는 것이다. 나는 백만장자 록펠러의 엄청난 재산을 갖는 것보다 기도의 기초 위에 서 있기를 바라며, 내가 기도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응답 받을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기를 원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때 이 세상의 친구들이 우리를 도울 수 없을 때가 올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거대한 재물로 우리를 돕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구원하시고 도우실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 중대한 질문이 우리에게, 아니 당신에게 닥쳐 왔다. "나는 과연 정말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당신은 혹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불신하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은 정말로 그를 믿고 거듭났는가? 만일 당신이 그를 믿지 않고 거듭나지 않았다면 거듭날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정보를 제공하겠다. 예수를 지식적으로만 알고 머리로만 믿는 사람에게도 가장 중요한 정보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라는 것이다.

바로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당신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놓은 사실을 믿고 그를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로 영접하라. 그리고 당신의 삶 전체를 지금 주님께 드리고 그로 하여금 당신의 생각과 행동과 삶을 지배하도록 허락하라.

2. 그러나 이 말만 가지고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행복한 사람들의 자격에 대한 진술이 본문 다음 구절인 15 절에 나와 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이 기도의 응답에 대한 약속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그 계명들을 잘 알아야 하며, 또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을 계시해 놓은 그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날마다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그들의 행위와 언어와 생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그것을 항상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이미 요한일서 3:22을 통해서 배웠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약속은 없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기대한다면 우선 그분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항상 그분의 말씀에 충족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날마다 진지하게 읽고 공부하여 그분의 뜻을 발견하고 항상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도의 기초가 된다.

이 모든 것을 다시 한번 요약해 보겠다. "성경이 요구하는 어떤 특정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이 살아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를 사랑하며 순종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아 있는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으로 순종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우리의 기도생활에 중요한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이것은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이 두 가지가 다 요구된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아있는 믿음을 갖고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6에서 이에 대해 분명히 말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한편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믿지 않는다면 결코 그를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시작하고 그를 사랑함으로 끝난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4:19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의무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그분이 우리 사랑의 무한한 가치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무한하신 분이며,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만 그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선이 아니다.

췌닝(Channing)과 그 당시 거대한 지적인 지도자들의 인도를 받고 있었던 유니테리언(Unitarians)들은 이러한 오류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하나의 의무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하나님을 사랑해서는 안 되며 또 결코 사랑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악하고 무가치한 죄인들을 놀랍도록 사랑하신 것을 진심으로 믿을 때 우리는 그러한 노력 없이도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신뢰의 필연적인 결과다.

영국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 마크 거이(Mark Guy)가 어느 날 런던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어떤 소녀가 호기심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크 거이 목사에게 와서 말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저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원했지만 사랑하게 되지 않아요. 목사님, 제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유명한 복음 전도자는 열심으로 간청하는 소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얘야, 네가 오늘 집에 돌아가거든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말을 계속해서 네 자신에게 말해 봐라. 그런 후 다음 토요일 밤이 되면 '나는 예수님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일요일 소녀는 그에게와 다시 왔다. 소녀는 행복한 눈과 빛나는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목사님 저는 정말 예수님을 사랑해요. 저는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어요. 지난 주일날 제가 집으로 돌아가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말을 계속해서 저 자신에게 했어요. 그 뒤 저는 그분의 사랑과 그분이 어떻게 저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저의 차디찬 마음은 뜨거워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저의 사랑이 충만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우리 같은 사악한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으셨는가, 그리고 그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마음속 깊이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상함을 입었는가, 그가 어떻게 징계를 받아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는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어떻게 나음을 입었는가"를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진정으로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신앙 생활을 시작한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의 위대한 사랑을 믿음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사랑하므로 믿음의 끝을 맺는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구체적인 행위는 그의 말씀을 날마다 열심히 읽고 공부하며, 우리 삶에 대한 그의 뜻을 발견하며, 그것을 우리의 일상생활에 직접 적용시키고 순종하며 행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기도할 수 있는 기초 위에 서 있게 된다.

몇 년 전, 스코틀랜드에 어떤 유명한 성경교사가 노스휠드(Northfirld)에서 사랑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중요하느냐 아니면 믿음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가에 대해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사랑이 없는 믿음보다 믿음이 없는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의 설교가 아무리 위대한 것일지라도 그런 결론은 잘못된 가정과 오해 위에서 내려진 것이다. 그는 우리가 믿음 없이도 사랑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결과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는 뿌리가 되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믿음을 갖는 것이 더 좋으냐, 아니면 믿음이 없는 사랑을 갖는 것이 더 좋으냐에 대한 토의는 마치 뿌리는 좋지만 열매가 없는 사과나무가 좋으냐, 아니면 뿌리는 없지만 좋은 열매를 맺는 사과나무가 좋으냐에 대한 토의와 같다. 이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말할 것도 없이 뿌리가 없는 나무는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믿음의 뿌리를 박지 않으면 사랑의 열매를 절대로 맺을 수 없고 그 사랑의 결과로 오는 순종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깊이 상고하고 있는 약속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아 있는 믿음을 갖고 순종하는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R.A. 토레이의 '기도와 영력' 중에서(131-140p)

/출처: 생명나무 쉼터 :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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