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란 삶의 전부입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다면 신앙한다는것을 어떤 특정한 장소로 한정지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적용하는것을 장소적이거나 어떤 법을 적용하는 것들입니다. 형식이라는 틀을 세워 놓고 그 틀안에서 잘 적응하면 성공한 것이고 그 틀 밖에서는 아무리 선한일을 해도 인정하지 않게 되는 기현상 말입니다.

상당히 조심스러운 글이기는 합니다만 신앙의 전부는 성도의 인격과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합니다만 우리는 마치 교회와 관계되는 것에만 초점을 두기 때문에 헷갈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잘 정리되고 제도화되고 짜임세 있는 형식을 수행하기만 하면 그는 훌륭하고 믿음있는 성도가 되는 것이고 그 형식과 제도에 녹아들어 가지 못하면 믿음이 시원찮거나 심지어는 구원의 확신 운운하는 따위의 범주에서조차 밀려나는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 현실입니다.

쉽게 말해서 [구원=교회=신자=천국] 이런식의 공식이 성립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정말로 교회를 약화 시키거나 부정해서 이런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만 안티적인 글로 튀기때문에 저 자신도 정말 괴롭습니다만 지난번 퇴근을 하면서 주일 예배를 위하여 집으로 가는중에 많은 상념들이 교차하더군요.



교회는 죽어야 한다

정말 어이없는 생각입니다만 저는 요즘들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무슨 망언이냐고 하겠지만 제가 말하는 교회란 제도화되고 인본 주의화되고 맘몬화되고 자본주의화 되고 개인주의화되고 기업화 되고 백화점식화 되고 세속화된 교회들을 싸잡아서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건전하고 성경적인 교회는 당연히 예외가 될줄 압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위에서 열거한 내용에 적용되지 않는 교회가 거의 없을줄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제도화되고 교단산하에 속한 교회에 대하여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안전한것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견고한 힘을 원하는것과 동일합니다.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보장해주는 어떤 힘을 간절하게 원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종교의 발생이 바로 이러한 불안한 인간들의 상태에서 부터 기인한것은 아닐까요?  노아시대 홍수사건 이후의 바벨탑 사건 역시도 그런 맥락으로 생각합니다. 나를 지켜줄 든든한 보호막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전에는 하나님이 완전한 방패요 보호자 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들의 보호자가 되시며 방패가 되시며 능력이 되시는 분은 하나님 입니다. 그것을 신앙하는 삶의 모습이 성도요 교회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제가 교회가 죽어야 한다는 내용의 저변에는 이런 부분을 절대화 하는 것에서의 경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만족이나 평안하고자 하는 것을 교회로 한정을 두는 것입니다. 왜 개척 교회보다는 대형교회와 유명 목회자가 있는 교단 교회가 성장할까요? 이것은 사람들의 심리가 평안함과 안전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미자립교회나 개척교회가 고전하는 이유는 성도들에게 안정감보다는 수고와 헌신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것들때문입니다.

중대형 교회는 모든 조건에서 흠잡을데 없이 풍요롭습니다. 사회적으로 비교해도 그 수준이 결코 부족하거나 뒤떨어 지지 않았습니다. 구제와 봉사하는 시스탬이 잘 설치되고 운영이 되어서 통계적으로도 개신교회와 모든 교회의 참여율이 압도적인것도 사실입니다.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제가 왜 경계에 경계를 해야 한다고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는지요.



교회안에서 만족하는 사람들

예전에 성가대와 오후 찬양예배시 인도를 조금은 한 경험에서 보면 아마도 저역시 그런 부류중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교회가 어느정도 안정적이 되면(이것은 규모의 크기를 의미하기보다는 비록 적어도 기본족인 프로그램이 활성화 된것을 예로 들은것입니다.) 주일 아침이면 여러 가지 풍경들이 들어 옵니다. 한것 시간을 늦지 않으려고 서둘러서 교회로 향합니다. 요즘은 자동차의 수가 급증함으로 자가 운전자들이 많기는 합니다만 대형 교회에서 운행하는 교회버스들의 움직임도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시간 시간에 맟추어서 돌아 다니면서 성도들을 운송합니다. 차량 봉사를 하시는 분들이나 주차 정리를 하시는 분들이나 뿌듯함이 역력합니다. 여러가지로 맡은 부서에서 잘 짜여진 톱니바퀴처럼 열심히 움직이는 분들은 주일만큼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행복한 분들입니다. 교사들도 그렇고 성가 대원들도 그렇고 모두들 기쁨과 감사함으로 희열을 느끼는 모습들입니다. 또한 목사님들은 더할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전할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준비하면서 은혜를 나눌 생각에 잠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반주자들도 그렇고 감사함과 은혜 가운데 이미 준비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림이 얼마나 좋은지를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정도로 모두들 교회때문에 기쁨으로 충만함을 맞이합니다. 비록 주일 모든 순서를 마치고 다음날 부터 각자 세상에서 또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지언정 기독교인들에게 주일은 정말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한번 뒤집어서 비틀어 본다면 이렇게 은혜로 뒤범벅이된 믿음이 좋은 성도들 혹은 장로요 목사요 집사님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교회 때문에 만족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어떤 삶이든 신분이든 형편이든 상관 없이 교회때문에 행복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시설과 환경이 최적화되고 세련된 교회일 수록 만족도는 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바로 교회가 든든한 방패요 보호자요 자랑이요 자존심이며 자부심일 수도 있다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교회에 철저하게 적응하는 성도와 및 교역자들에게는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도 그 교회는 존재해야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고 사회법적으로 실형을 받거나 해도 어지간해서는 교회가 와해되는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명백히 범죄한 사실이 있더라도 대부분은 용서라는 성경으 가르침에 충실하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의 교리중에 용서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용서 못할 죄가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보면 사랑하고 허물을 용서해 주라는 근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교회의 질서와 순결과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한 징계와 치리도 있다는 것은 언제 부터인지 거론되지 않는것이 현실입니다.



교회제일주의



이스라엘은 성전을 최고의 거룩한 장소로 믿는 민족입니다. 지금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성전이 없으면 하나님도 안계실거라고 믿는 민족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보면 무너진 성전을 새롭게 증건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인것이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성전안에만 계시는 분으로 가둬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로 참 성전된 자기몸을 그리스도의 보혈안에 들어온 자들에게 나눠 주셨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은 아무런 필요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미 우리안에 성령으로 함께 하시므로 믿는 성도가 성전이며 교회인 것입니다. 성전된 몸으로서의 교회인 성도들은 그러므로 이제 세상에서 온전하게 성전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성도의 기준과 목적은 교회(오늘날의 제도화된 교회와 건물과 담임목사와 교단과 노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인 인식이 정립이 안된 상태에서 그동안 교회 중심으로만 한정 지어놓고 교회 프로그램과 형식을 만들어서 성도들로 하여금 충실하게 실천하도록 가르쳐 왔기 때문에 성도들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성령의 이끄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나아가는 길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마치 과거 구약시대의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식으로 율법 의식화가 된 지금의 교회구조는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 구원얻은 성도가 되었다는 표징이 교회의 법과 전통과 의식에 최선을 다하여 동참하는것이 하나의 모범 답안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에서 빛이며 소금으로 살아가야할 성도의 신분과 소명 의식이 세상에서는 전혀 동원되지도 않으면서 교회 안에서만 적용이 되어지는 현실을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 교회안에서 은혜로 만족하시는 분들을 깎아 내리고 흠집을 내자고 쓴소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감사하며 만족하며 신앙하시는 분들 계십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여지는 모습이 절대화 되어질 때 우리는 종교적인 행위로만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증거할수 밖에 없는 단점을 알고 계시는지요? 이스라엘이 그토록 제사와 율법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섬겨왔지만 들려오는 선지자의 탄식은 무엇입니까? 이 백성들이 나를 섬기는 것이아니라 마귀에게 제사한것이라고 증언하지 않습니까? 이사야 1장의 하나님의 탄식이 그런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더욱 더 율법에 충성했고 제사에 열중했으며 종교적인 열심으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누군가 성전 문을 좀 닫아 버렸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오늘 우리는 심각하게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처럼 잘 번성하고 우리의 만족감이나 우월감이나 지켜줄 보호자로 충분해져버린 교회안에서의 모든 행위와 의식들을 걷어내지 않는다면 자기부인은 말뿐인 공염불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목사가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설교하라는 조건이라면 오늘날 처럼 목회자로 헌신하겠다는 사명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아미쉬 공동체를 견문하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만 특히 그 공동체에서의 목사의 역할과 자질을 보고서 어지러울 정도였습니다.(참고: http://blog.naver.com/amishstory/100017289157)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절대적으로 알고 있는 그 보호막을 재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조건들입니다. 만족할수 있도록 하게 해 주는 전통과 관습과 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죄성과 무능함을 보게 되며 진정으로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솔직 해져야합니다. 물론 교회의 제도와 장치는 우리로 하여금 평안함을 주기는 합니다. 만족감도 줍니다.



우리가 좌절하고 낙심하였을 때 교회에서 주는 위로와 격려와 앞에서 말한 틀속에서의 행위에 충성하기만 하면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스스로도 만족감에 힘을 얻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중독이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실제의 사귐에서는 어쩌면 위선과 가면과 포장으로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은 종교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종교인으로 만족하며 사는것도 사실 입니다.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고 신앙적으로도 교회에서 인정을 받는 삶이란 정말 달콤한 것입니다. 아무나 누릴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탈교회를 꿈꾸며



앞에서 저는 인간의 본성이 절대적인 평안함과 안식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끊임없이 그런 삶을 원했습니다. 애굽에서 430 여년을 노예 생활을 해왔던 이들은 모세를 통해 해방시켜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러한 보호자요 안락을 주며 평안을 제공해줄 것을 기대 하였습니다. 광야 생활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도록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소망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유랑생활을 해야만 한 것입니다. 지치고 힘들었던 이스라엘은 순간 순간 우상들을 만들어서 기대를 얻고자 하였고 그것 때문에 심각한 징계를 받아야 했었습니다만 여전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들이 힘을 키워서 혹은 하나님 대신 이방의 신들을 끌어들여서 보호자가 되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도 만족하지 못하니까 하나님도 섬기도 이방의 신들도 섬기는 혼합주의로 변질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택한 원 가지들이 그렇게 타락해 갑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들인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성전중심으로 철저하게 하나님을 가둬놓고 신앙하던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교회중심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둬놓고서 교회밖에서는 도무지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부인하는 것이 어쩌면 유대인들의 의식과 닮았을까요?



지금의 교회 현실에서 안일함과 평안함과 만족에만 집착 한다면 정말 주님과의 관계가 다른길에서 평행선을 달릴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개척을 준비하시는 목사님들과 현재 개척교회를 섬기시는 분들역시 기존의 통념을 전면 재고하지 않고서 그동안의 관행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똑같은 전철을 밟을 수 밖에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자기를 부인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솔직하게 아멘으로 고백하셨다면 다시 새롭게 계획을 바꾸셔야 합니다.



교회 부흥 세미나에서 들은 것들부터 버리셔야 합니다. 성공하는 목회자의 책을 버리셔야 합니다. 나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임하셔야 합니다. 오직 예수 때문에 살고 예수 때문에 죽는 것을 결심 하셔야 합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원리와 교회 행정과 경영에 대한 것을 전부 지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십시오. 사도들의 삶을 추적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 가기 위해서는 매일 매 순간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필요 합니다.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 포기 입니다. 그 자기 포기에는 어쩌면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관계도 포함 될 수 있습니다. 나의 달란트나 재능을 포기해야 합니다. 내 지혜를 포기 해야 합니다. 또한 안주 하고자 하려는 육신의 본성을 거슬러야 합니다.



광야를 행진하던 이스라엘이 왜 구름이 멈추면 행진을 멈추고 장막을 펴서 기다리다가 구름이 움직이면 다시 장막을 철거하고는 앞으로 향해 걸어 갔을까요? 이제 어느정도 안정적이고 적응할 만 하니까 구름 기둥이 앞으로 떠서 인도합니다. 다시 힘든 여정을 하면서 익숙해지니까 멈추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기준이 말씀입니다. 성막은 말씀이 함께 함을 의미합니다. 모세나 여호수아가 아니라 말씀이신 하나님 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안에 함께 거하십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던 무엇을 하던 예수님의 뜻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성도입니다. 교회 건물만이 우리의 최종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공동쳬가 왜 흩어졌을까요? 그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부흥하면서 안정화 되니까 돌연 흩으셨습니다. 흩어 버리시자 곳곳에 도망가면서 복음의 소식이 전파 되었습니다. 생명의 물이 고여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물은 흘러 넘쳐야 합니다.



교회가 지금의 모습들을 은혜라는 명분으로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개혁과 변화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희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쉬운일이 아닙니다. 기존의 틀을 벗어 던진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인데 그것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우리의 본성들이 두려움속에서 안주하기만을 원할 것입니다. 교회를 벗어나는 것을 마치 구원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집착하는한 더 이상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목회자들부터 의식에서 새롭게 전환 하고 모험을 하지 않고 안전한 길을 원하게 되는 한 생명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반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의 검으로 빛으로 우리 스스로를 진단해야할 때입니다.



유대인들을 향하여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병자가 았었지만 고침을 받은 사람은 나아만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기근으로  고통 당할 때 오직 엘리야와 사렙다 과부한 사람이 기근을 면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저는 이글을 작성하면서 정말 두렵고 떨리는 심정입니다. 저도 은혜스럽게 말하고 싶습니다.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정말 싫습니다. 그래봐야 저 자신에게 유익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말은 불신자들에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이제는 어떻게 주님을 섬기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고민하며 반성하며 새로운 길을 찾아야하는 시점입니다. 그저 이대로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초막을 짖고 살자는 베드로처럼 꿈속에서만 살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재는 자다가 깰때가 되었다는 사도의 가르침에 귀를 열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 우리가 잡고 있는 것을 놓지 않는다면 새로운 약속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 이기만을 소망해 봅니다.



2008-11-04.

글/빈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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