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파에 있는 형제들의 구원에 대한 열정은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전달 방식과 복음전파를 위한 말씀암송 등의 열정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필히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종종 그러한 열심이 지나쳐 문제점을 낳기도 합니다. 구원파에 관한 마지막 연재글인 이 글에서는 그 문제점을 다음 세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구원의 공식화

2. 구원 노이로제(강박증)

3. 자기폐쇄성과 인간지도자에 대한 맹신


 

구원의 공식화

 

구원파에는 크게 네 그룹으로 나뉘는데 그들의 복음전도집회 방식은 대동소이합니다. 대략 일주일간에 걸쳐 이뤄집니다. 이요한목사측은 자체 교회당이나 대학캠퍼스에서 일주일기간의 "성경강연회"라는 이름으로 집회를 엽니다. 그리고 이요한측에서 나온 구영석목사(새생명선교회)측 또한 일주일에 걸쳐 복음전도집회를 엽니다. 이 두 단체의 전도 집회 방법은 거의 비슷합니다.


일주일에 걸쳐...

창조과학과 성경의 과학성  -> 성경의 예언과 그 예언의 성취 -> 이스라엘의 역사 -> 율법의 요구와 인간의 죄성을 말씀에 조명함 -> 구약의 속죄하는 제사 소개 -> 인간에게 (자력) 구원의 희망이 없음 -> 십자가의 어린양의 속죄제사 소개

...등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유병언 목사의 경우 잘 모르겠고, 박옥수 목사의 기쁜소식선교회의 경우에는 창조과학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성경만으로 죄사함을 전한다"는 것이 나름대로의 자부심입니다.


그들의 복음집회에는 참으로 배울점이 많습니다. 구원파에 다니시는 분들 중 많은 열성파들은 복음전도시에 필요한 성구들을 줄줄줄 암송하는 편이고,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든지... 죄를 사하시기 위해 이땅에 몸을 입고 오신 어린양의 대속을 설명할 자세가 되어있더군요. 이러한 점은 마땅히 본받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았는지도 모르고, 죄 있는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율법의 요구가 무언지도 모르고, 그냥 복받고 잘되고 직분받아서 그냥 살아가야 겠다는 관념에 찌든 세속화된 기독교인들과는 차별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구원파 구성원들 간에는 구원이 공식화되어 어떤 일련의 과정을 거쳐 구원받는 것 마냥 인식됩니다. 그래서 본인들이 받았던 구원의 방식대로 그런 간증이 나오지 않거나, 조금 이질적인 생각이 들면 "당신 구원받은 거 맞아?"라고 의심하기 일수입니다.  "율법" -> "죄" -> "구약의 제사" -> "어린양의 십자가" 라는 천편일률적인 공식만이 적용됩니다. 위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나름대로 판단됩니다.


구원파 구성원들은 대부분, 기성교회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강단에서도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많은 목회자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스스로도 모르고, 그러기에 가르칠 수 도 없는 환경가운데서, 고민하던 자들이 복음전도집회에 가서 처음으로 "네 죄가 나의 피로 말끔해졌다"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물론 그런 말을 전에도 수도 없이 들었겠지요. 그러한 교리가 아직도 우리 주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십자가 사역의 죄사함의 단회성과 영속성의 문제를 철두철미하게 마치 법조문을 따져들듯이 성경을 들춰가며 확인해주는 이런 속시원한 복음 해설은 처음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탄하기도 합니다. 저 또한 그러한 느낌을 받았으니까요.


예전에 알고 있던 성경지식들이 하나하나 자리를 찾아가면서, 구약의 제사와 갈보리 십자가의 제사가 비교/대조되면서, 비로소 자신이 "이렇게 쉬운 구원을 몰랐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복음은 이렇게 전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구원을 공식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와 비슷하게 구원받지 않으면 구원으로 여겨주지를 않는 성향이 농후합니다. 그리고 모든 성경말씀을 속죄에 맞추려는 무리한 시도마저도 하게 됩니다. 저는 다행히도 (?) 비슷한 방식으로 죄사함을 확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서 저의 경우는 그들이 형제로 인정하더군요. ㅠㅠ


현대교회는 "죄와 하나님의 율법 그리고 준엄한 심판"에 대한 교리가 사라졌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사라져 희미해진 것은 당연한 결과이고요. 그래서 우리는 "죄와 율법의 요구, 그리고 내가 받을 심판, 그분이 대신하신 심판형틀"에 대한 교육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항목들과 그 교리적 틀이 너무 견고해져서 하나의 굳은 교리가 되고, 그 폐쇄적인 내부문화를 형성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기성교회 형제님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구원파의 복음전도 방식을 배우십시요. 그리고 그들처럼 전하십시요. 그러나 그 방식(know-how)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지는 마십시요." 그리고 구원파 형제님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리로 납득시키려는 자세를 포기하십시요. 그리고 구원의 교리가 아닌 예수님의 인격에로의 인도에 촛점을 맞추십시요."



구원 노이로제

 

구원파 구성원들의 구원에 대한 열정이 넘치다 못해 나타나는 또 하나의 부작용은 구원 강박증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형제님은 80년대에 고려대 법대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옥수 목사의 설교를 듣고는 자신의 죄문제가 해결받지 못함을 알고는 기쁜소식선교회측 교회당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 형제님은 나머지 구원파 그룹들은 물론이요, 죄사함과 거듭남에 대해서 전한다는 단체는 두루두루 섭렵하면서 이곳저곳 전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저에게 그러더군요. "형제, 나는 구원에 대한 교리를 잘 알아요. 그런데 아직도 그게 마음 속으로 안 믿어져요... "


그 형제님은 오래전에 박목사의 설교로 말미암에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돌아보게 되었지만, 또한 박목사 그룹의 문제(죄사함 만능주의 절대주의)로 인해 스스로의 혼란 가운데 갖힌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니던 학교마저도 관뒀었다고 하더군요. 거의 폐인이 되어있던 모습으로 기억됩니다. 깨달음과 이해를 중시하는 문화 그리고 구원파 그룹 안에 불어닥힌 "진짜구원 색출" 운동 등 등...의 문제점의 대표적 본보기가 그 형제님 같았습니다. 지금쯤은 구원을 확신하고 자애로우신 아버지의 품에서 쉴 수 있는 여유를 찾으셨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제가 알게 된 어떤 자매님(이요한 측)에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그 가정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기도목록에 제 이름도 써있고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것으로 보아 그분께 고마운 마음이 들더군요. 그런데, 그 딸아이가 와서... "엄마 이번에도 복음들었는데 안 깨달아져... 나 거듭나게 해달라고 기도할래..."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엄마가 되는 자매님이 "그래 너 꼭 기도하면서 복음 듣고 거듭나야 한다."


어린이들의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당하고 적극 장려되어야 할 일이지만, 그 내부문화의 틀 안에 갇혀서 마치 하나의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의 하나인양 구원과 거듭남이 언급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이러한 강박적인 관념이 훗날 아이가 커서... 구원에 대한 강박적인 관념으로 이어지지나 않을까... 그래서 자신의 교리적 이해를 진정한 구원으로 자칫 오해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더군요.


외부인으로서의 제가 느끼기에는 위의 두 사례를 보건데... 이는 구원에 대한 관심의 차원을 넘어 노이로제에 이르는 경우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구원파의 인도자급에 계신 분들이 이러한 것들을 의도하거나 계획한 것은 아니리라 여겨집니다만....  부작용일 따름이죠.



폐쇄성 & 지도자의 절대권력


구원파 형제들에게는 우리가 배워야할 장점이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단점들의 거의 대부분은 구원파의 전매특허만은 아닙니다. 위의 구원의 공식화와 구원 노이로제는 기성교단의 약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누가 누구를 이단이네 아니네라고 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파의 폐쇄성과 지도자의 절대화는 한국교회의 습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시 언급합니다만,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의 말씀대로 "한국교회는 구원파적입니다."


구원파 형제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을 쉽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으며, 모든 문제를 (속죄의) 구원과 결부시킵니다. 무슨 문제가 있어서 서로 갈라져서 싸움질이라도 하게 되면 "구원받은 자가 맞아?"하는 말을 쉽게 내던집니다. 기성교회 교인들을 만나면 일단 구원 안 받은 사람일 가능성을 가장 위에 두고 대화를 하게 됩니다. 이러니 교제가 있을 수 없으며 그 폐쇄성이 스스로를 가두게 되어버렸지요.


그리고, 무슨 문제가 있거나 내부약점이 들춰지면 하는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에겐 복음이 있어! 목사님 설교를 듣고 구원받는 저 수 많은 사람들을 봐. 살아있는 교회는 구원받는 자의 수가 늘어나는 교회야 우리처럼..."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그 전해지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지, 하나님이 이요한 목사를 축복하고 박옥수 목사의 소행이 바르기때문이 아닙니다. 설사 전하는 자가 주님 앞에 엉망인 상태의 사람들이더라도.... 적어도 성경말씀이 인용/선포되고 듣는자가 갈급해 한다면 주님은 얼마든지 역사하십니다. 사탄의 전술전략이라는 책을 쓴 쿠르트 코흐의 말에 따르면, 그의 지인 중 한사람은 술주정뱅이 목사의 설교에 의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원파 형제들은 "그래도 우리에겐 복음이 있어"라는 말이 그 내부의 모든 불합리성과 부조리 그리고 비성경적 실행들을 무마하는데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이 자멸의 길로 가는 자기핑계임을 하루빨리 간파해야합니다.


한 단체가 폐쇄적이 되는 것은 주로, 내부적 구심점 구축과 동시에 일어납니다. 이는 주로 인간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절대적/맹목적 신임입니다.

예전에 유학시절, 시드니에 "P목사의 죄사함과 거듭남" 집회를 예고하는 포스터가 붙어있더군요. 집 근처라서 한번 그 교회당에 가보았습니다. 아직 P목사는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고, 거기에서 일하시는 목사님을 만났지요. 자신들의 구원과 비슷한 구원간증을 하니 저를 형제로 여겨주더군요. 그런데 바른 교회에 다녀야 한다면서 저를 다그치더군요.


암튼 그분이 잠시 후, 설교를 하시는데... 충청도 출신 P목사의 억양과 어조로 똑같이 말하는 겁니다. "내 말이이이~ 그렇다는 거예요오오~"

놀랐습니다. 의도한 것이 아니기에 그들은 잘 모를테지만, 외부인으로서의 제가 느끼는 것은 "P목사의 위치가 절대화 되었구나... P목사가 우상이 되었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기쁜소식선교회 내부에서 P목사가 차지하는 위치와 힘은 거의 절대적인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주의 종"이나 "종"이라는 단어는 P목사만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입니다. 그런 분위기 가운데 P목사의 모든 것이 무의식적으로 내부 목회자들의 흠모의 대상과 모방의 대상이 되었겠지요.


이와 비슷한 현상은 전에 Y측 순복음신학교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분들은 한 술 더떠서, 설교학 강의에서 어르신 목사님의 목소리를 모사하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CBS 라디오를 들으면 왜 그리 목소리가 비슷한 분이 많던지... "....그래쎠써... 그래쒸미다..." 그런데 나중에 설교자 이름은 어르신 목사님이 아니시더군요. 사실 이러한 현상은 다락방전도로 유명한 R목사측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 같았습니다.


한 단체가 외부적으로는 폐쇄성을 더해가면서, 내부적 결속력은 일인목회자를 중심으로 강해져갑니다. 그의 카리스마는 절대화되고 기타 내부 목회자들은 지고하신 어르신을 (의도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간에) 다들 흉내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공격을 받으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우리에겐 복음이 있다. 사람들이 몰려온다."



이 모든 문제들이 구원파와 Y순복음 그리고 다락방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이단이고 우리는 정통입니까?


출처: 양무리마을, 준비: grace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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