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16장)
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급전직하(急轉直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올라가다가 갑자기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속된 말로 잘 나가다가 망하여 추락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다윗의 처지가 그렇습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왕궁을 빼앗기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며 도망치고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들이 다 압살롬에게 돌아가다니요. 백성들이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다윗 왕을 배반할 수 있단 말입니까? 못 믿을 게 인간들이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게 백성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잘잘못을 따지고 누구를 탓하고 원망할 겨를도 없습니다. 다윗은 황급히 도망치고 있습니다.

위기를 당하고 상황이 바뀔 때 사람들의 본색이 다 드러납니다. 참된 친구는 어려울 때 나타납니다. 가드사람 잇대가 죽어도 함께 죽겠노라고 다윗 왕의 앞장을 섭니다. 사독과 아비아달이 법궤를 메고 다윗 왕을 따라나섭니다. 아렉사람 후새는 다윗의 변함없는 친구로 예루살렘성에 남습니다.

기회주의자들과 간교한 자들도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모사가 되어 일거에 일등공신과 권력자가 되려고 획책합니다. 므비보셋의 종 시바는 이 기회를 이용, 므비보셋이 다윗 왕을 배반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주인의 재산을 가로챕니다. 더욱 악한 것은 바후림에서 등장하는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은 이제 다윗왕은 끝났다고 다윗 왕을 욕하고 저주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 왕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한 자여, 네가 잘 될 줄 알았더냐.” 다윗에게 갖은 악담과 저주를 퍼부으며 돌을 던지고 티끌을 던집니다. 견딜 수 없는 모욕입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가 나섭니다. “제가 가서 감히 우리 왕을 저주하는 저 개 같은 자의 머리를 베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비새를 만류합니다. “아니다. 그냥 두어라.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요 명하신 것이라, 나는 달게 받겠노라.” 기세가 오른 시므이는 계속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립니다. 그 수모를 당하며 도망하는 왕과 신하들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욕과 수모를 감수하며 참아내는 다윗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닥친 이 수모와 환난이 밧세바와의 범죄로 인한 징벌이며, 그래서 다윗이 이 수모를 달게 받고 있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욱 깊은 다윗의 신앙과 이 일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저 다윗의 죄를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원래 왕은 누구의 자리였습니까? 하나님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셨지만 다윗에게 왕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이 질문을 우리에게 바꾸어 해 봅시다.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는 누구 것이며 천국은 누구 것이었습니까? 우리가 그 이름 믿는 것 하나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약속을 받았지만 우리에게 그런 자격이 있었더란 말입니까?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그 영광의 자리에 앉혀질 자격이 도대체 티끌만치라도 있습니까?

잠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부자가 매일 동네를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10달러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니, 왜 돈을 주십니까?” “그냥 드리는 겁니다. 받아 두십시오.” 사람들이 처음에는 미안하고 계면쩍어 쭈뼛거렸지만 날이 가자 자연스럽게 돈을 받게 되었고 드디어는 당연하다는 듯이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는 돈 주기를 중단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아니 왜 돈을 안 주시는 거죠?” 지금까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텐데 안 주는 것을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나 찬란한 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우리의 목숨을 거두어 가신다 해도, 지금까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지으신 아름다운 세계를 보게 하시고 누리게 하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만으로도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구원을 받을 공로가 티끌만치라도 있었단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느새 벌레 같은 날 위해, 이 추악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주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 보혈의 공로를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라고 고백한 욥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설사 지금 나의 생명을 지금 거두어 가신다 해도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와 지금까지 허락하신 생명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이 시므이의 저주를 달게 받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신 것이요 하나님이 거두어 가신다 해도 순종해야 할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단순히 다윗에게 밧세바 사건으로 인하여 벌을 주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나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하여 그 값이 치러지(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시므이의 저주를 달게 받으며 다윗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다윗의 진정한 축복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징벌과 고난이 없이 평안하게 왕의 지위와 부귀영화를 누렸다면 다윗은 어떤 사람이 되었을 것 같습니까? 주어진 것을 당연한 것으로 누리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 복된 자이겠습니까,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다윗이 복 된 자이겠습니까?
당신은 어떤 다윗이기를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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