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4장)
4 드고아 여인이 왕께 고할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가로되 왕이여 도우소서.
5 왕이 저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대답하되, 나는 참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6 아들 둘이 있더니, 저희가 들에서 싸우나 말려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저가 이를 쳐 죽인지라.
7 온 족속이 일어나서 왕의 계집종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 동생을 죽인 자를 내어 놓으라, 우리가 그 동생 죽인 죄를 갚아 저를 죽여 사자 될 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저희가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끼쳐두지 아니하겠나이다.
8 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관자,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왕이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자요, 치리하는 자요, 인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법을 집행해야 할 그 왕이 먼저 간음과 살인을 저지른 죄인입니다. 다윗은 암논의 일이나 압살롬의 일을 법대로 처리하지 못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어쩌다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단 말입니까? 다윗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 범죄가 하나님의 맡기신 왕의 책무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올무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버리시거나 바꾸지 아니하셨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원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인간 왕을 원했습니다. 사울이든 다윗이든 또 누구이든 인간 왕은 완전할 수 없고 인간 왕이 다스리는 나라도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인간 왕을 세우면 백성들이 어떤 고통을 받을 것인지를 말씀하시고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그술로 도망한지 삼년이 지났습니다. 오늘말씀 사무엘하 14장을 보니 요압이 계략을 꾸며 드고아의 한 슬기로운 여인을 상제로 꾸며 다윗왕에게 보냅니다. 드고아 여인이 다윗왕에게 말합니다. “남편은 죽고 아들 둘이 있었는데 서로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쳐 죽였습니다. 사람들이 살인자를 처단하겠다고 남은 아들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가 끊어지고 남편의 이름은 이 땅에서 영영 끊어질 것입니다.” 왕이 대답합니다. “생명을 위한 법이지, 법을 위한 생명이란 말인가? 그대의 아들은 죽임 당하지 않으리라.” 그러자 드고아 여인이 말합니다. “왕이시어, 그게 바로 왕이십니다. 어째서 아들을 돌아오지 못 하게 하십니까?”

법은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법대로 집행하면 살아날 자도 없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자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 그래서 생명을 위하여 법의 집행을 유예하는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살리시려고 죄인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용서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칩니다. 왜 우리가 남을 용서하는 것이 먼저이겠습니까? 그것은 먼저 남을 용서해야 나의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기 보다도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나 자신부터 용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행동으로 인정하는 고백이라 할 것입니다.

법대로 했다면 아담과 하와는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용서하셨습니다. 가죽옷을 해 입히셨습니다. 의의 옷의 예표입니다. 법대로 했다면 동생을 죽인 가인은 참살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을 용서하시고 표를 주셨습니다. 구원의 인치심의 예표입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께서 거저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자기 아들을 대신 처벌하시고, 그 피 값으로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교만한가요?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쉽게 잊습니다. 남을 쉽게 용서하지 못 합니다. 남을 정죄하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 하는 잘못을 쉽게 저지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러한 잘못을 계속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다윗은 의인이고 압살롬은 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압살롬은 마귀의 자식이고 다윗은 하나님의 자녀일까요?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은 다윗이나 압살롬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압살롬은 악인, 다윗은 의인으로 만들어놓고 다윗 편에 섭니다. 압살롬을 정죄하고 나를 다윗의 편에 속한 의인으로 간주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고 자신은 다윗 같은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교만해지는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삼하 14장)을 좀 더 읽어보면 다윗은 압살롬을 그술로부터 데려오게는 하였지만 완전히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 용서가 안 되어 그랬는지, 남의 이목이나 체면 때문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2년을 지냈습니다. 이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면서 아들에게는 용서를 베풀지 못 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베풀지 못 하고 자신은 의인의 편에 서고 압살롬은 악인의 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2년이 지나자 압살롬이 요압에게 ‘차라리 그술에 그냥 있는 게 나을 뻔 했다.’고 말합니다. 온전한 용서가 아닌 반쪽짜리 용서로 인하여 압살롬의 마음에 응어리와 한이 맺혔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제야 마지 못 해 다윗왕은 압살롬을 부르고 입을 맞춥니다. 그러나 마지못해 하는 용서 역시 참된 용서가 아닙니다. 이때부터 압살롬은 이를 악물고 절치부심, 와신상담, 반역의 준비를 진행합니다.

용서는 완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쌍해서 구원하여 지옥으로부터 건져내신 다음 어디 다른 곳에 놔두고 꼴 보기 싫다고 얼굴조차 안 보시는 반쪽짜리 용서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돌아온 탕자를 완전히 용서하고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시고 맞아들여 자녀로 삼으시고 기뻐 뺨을 부비고 입을 맞추며 끌어안으시는 완전한 용서를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시는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 사랑을 입은 자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교만이요 죄입니다.

만일 다윗이 압살롬을 완전히 용서하고 사랑하였더라면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할 수 있었을까요? 만일 그랬더라면 이스라엘 역사가, 성경의 기록이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당신은 혹시 누군가를 반쪽짜리 용서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완전한 용서를 하십시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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