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본 사람들 이야기 좀 해야겠다. 대학에 다니는 내 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아빠, 인터넷 MP3로 일본 꺼 듣다가 나 졸라 열나서 죽는 줄 알았어.”
“그게 무슨 소리야?”
“응, 일본가수 둘이서 부른 노랜데, 한국 사람과 한국을 욕하는 가산데, 너희 한국놈들이 우리 일본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미개인 생활할 텐데, 고마운 줄 모르고 우리를 욕한다느니, 군인, 징용으로 남양군도에서 죽여주고 탄광에 끌어가서 죽여주고, 정신대 끌고 가서 죽여주고 그래서 인구를 조절해 줬는데 은혜도 모른다느니, 너희 한국놈들은 더럽고 치사하고 영원히 욕을 보고 죽어 없어져야 할 족속이라느니 그런 가사야. 어떻게 그런 가사의 노래를 만들어 국제적으로 유포시키는지 알 수가 없어.”
"그러게 말이다. 정말 나쁜 사람들이네. 그런데, 너 '졸라'가 뭐냐? 아가씨가."
그런데 딸에게서 그 소리 듣고 나니 나도 '졸라' 열난다.

일본....,
하늘에서 천신(天神)이 내려와 태평양가에서 모래장난을 하고 놀다가 물과 모래를 손에 잡고 주루룩 흘려놓은 것이 일본열도란다.
자기네 왕은 천신이 내려준 천황이고 자기네들은 황국신민이란다.
신공황후란 여자, 바람을 부르고 파도를 일으키는 능력을 지닌 이 여자가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정벌했더니 신라왕이 신공황후의 그림자만 보고도 놀라 기절을 했단다.
그들은 가야땅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部)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다스렸고 백제왕은 충성을 서약하여 칠지도를 바쳤단다.

그들에게 조센징은 더러운 인간의 대명사이다.
골프를 치면서도 세컨샷에 온그린 못 시키고 그린 주변에서 칩샷으로 핀에 가까이 붙여 파(Par)를 잡는 걸 지저분하다고 조센징Par라고 부른다.
그들은 고대 일본왕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백제유물에서 대경실색하면서 한사코 그들의 문명이 한반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기네들은 더러운 조센징의 피나 문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게 아니라 남쪽에서 올라온 남방민족이라는 것이다.
아니 무슨 뼈다귀 같은 걸 묻어놓았다가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다고 조작을 해서 글쎄 70만년전부터 일본에 고대인류가 살았단다.

그들은 경복궁을 포위하고 대신회의에서 을사보호조약을 강제체결, 대한제국을 강제합병하였다. 그리고 만주국을 강제 편입하였다.
그리고 일본열도, 한반도, 만주를 포함한 그 광활한 지도를 그려서 기념전단과 기념우표를 발행하였다.
대동아공영(大東亞共營),
그들은 조선과 만주가 다함께 황국신민이 되었다고 떠들었지만, 자기네들은 일등국민, 조선은 이등국민, 만주는 삼등국민으로 차별하였다.
그리고 강제수탈과 언어의 말살, 수백만의 인명을 희생시키고, 20만에 달하는 이 땅의 딸들을 끌어가 놈들의 정액받이로 더럽혔다.
 
을사보호조약, 이 조약이 효력이 있는 것인가?
일본은 이 조약이 효력 있다고 주장하지만 고종황제의 수결(手決:손에다 인주를 발라 찍는)이 없다는 점에서 무효라는 것이 한일합방을 추적해온 분이 밝혀낸 사실이다. 고종황제가 한사코 조약체결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미리 계획한대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면 축하연을 벌리기로 하였는데, 한성에서의 조약체결이 지체되는 바람에 이완용 등 대신들이 서명하기 1시간 전에 일본에서는 벌써 한일합방축하의 팡파레가 울려퍼졌다나.....
무력시위와 이완용의 매수, 황제의 동의 없이 어인(御印)을 훔쳐 찍은 조약.... 이것이 어떻게 효력이 있다는 것일까?
그러나 이 을사보호조약이, 비록 무력으로 협박을 하고 이완용이를 매수하고 대신들을 을러대어서 체결한 것이라 하더라도 형식과 절차라도 제대로 갖추었다면 일본은 이런 점에서는 큰소리를 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목숨을 걸고 수결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고종황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일본 군인들에게 아내(일본이 민비로 낮춰 부르는 명성황후)를 살해당하고 나라의 주권까지 빼앗기고 끝내 독살 당한 불쌍한 군주(君主).
그러나 이 고종황제가 일찍이 서양문물에 눈을 돌리고 나름대로 신지식을 갖추고 일본의 침략에 저항한 선구자적 인물이었다면?
헤이그에 이준 밀사를 보내고 런던에 이한응 공사를 파견하여 한일합방의 불법성을 만방에 알리려 애썼던 고종황제,
일본에 100여명의 선발된 인재를 보내어 서양문물을 공부하고 오도록 하고 서양에도 끊임없이 사신을 보내고 세계정세를 읽어냈던 고종.
그 고종황제의 선구자적 모습은 궁궐에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등을 켜고 미국인과 합작하여 한성전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동양에서는 가장 먼저 전차를 도입, 운행하고 가로등을 켠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일본은 한반도를 강점하고 그들이 한반도를 개발하고 문명화했다고 강변한다.
새빨간 거짓말이요 억지다.
일본의 강점으로 인한 암흑기와 수난의 시대가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훨씬 일찍 문명국, 선진국으로 올라섰을 것이 확실하다,
적어도 우리나라의 전력사(電力史)를 보면 분명히 그렇다.
 
에디슨이 탄소필라멘트 전구를 발명한 것이 1882년이다.
그런데 7년 뒤인 1887년 3월 6일 경복궁의 향원정 연못가에 발전기가 설치되고 건천궁에 전깃불이 처음 켜졌으니 이는 일본의 궁중 보다 2년이 앞선다.
고종황제는 1872년부터 건청궁에서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였는데,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계기로 미국 초대 전권공사로 임명된 푸트(Lucius H. Foot)의 요청에 따라 1883년 유길준(兪吉濬)을 대표로 하는 10명의 사절단을 미국으로 파견한다.
유길준은 이 때 뉴져지에 있는 에디슨전기회사를 방문하고 전기시설을 둘러본 다음 뉴욕헤럴드 신문사와 인터뷰를 하였는데,
“우리는 일본에서 전기용품을 관람한 일이 있다. 그러나 전기불이 어떻게 켜지는지는 몰랐다.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마귀의 힘으로 불이 켜지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곳에 와서 비로소 전기가 어떻게 켜지는지 알게 됐다. 또 지금까지 사용하던 석유등 보다 값싸고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조선에도 전기를 사용하고 싶다.”
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있다(1883년 10월 15일자 뉴욕헤럴드 신문에 보도).

그리고 조선정부는 1884년 9월 4일 에디슨전기회사의 전기시설을 왕궁에 설치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고 1885년 6월 4일, 에디슨사의 설립자요 사장이던 에디슨은 전기시설 설치책임자로 프레이자(Everett Frazar)를 임명하였으며, 2년 가까운 공사 끝에 위에서 말한대로 1887년 3월 16일 최초의 전등이 켜졌고, 이는 동양최초의 전기시설 설치사업이자, 이 땅을 암흑으로부터 일깨우려는 개화사업(開化事業)의 상징적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당시 조선왕실은 한반도의 이권을 독점하려는 러시아의 감시를 받고 고종이 감금되기도 하였으며(유명한 영화배우 율 부리너의 할아버지는 함경도 지역의 산림채취권과 광산채굴권을 독점, 수많은 조선사람을 혹사하고 자원을 수탈해가서 치부한 사람이다), 또한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 등 열강의 세력각축장이었다.
고종황제는 이들 열강의 세력에 맞서기 위하여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등의 감시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사업을 추진, 미국인 콜브란(Collbran)의 자문을 받고 이근배, 김두승, 두 사람을 대표로 하고 고종이 단독출자하여 1898년 1월 26일, 이 땅 최초의 전기회사인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였으니 이것이 최초의 전기사업인 셈이다.

한성전기회사는 종로에 전기철도와 전차를 설치하고 1900년 4월 10일, 민간최초의 가로등을 설치하였으며 청량리에서 서대문까지 노선을 확장하여 운행하였다.
요금은 5전이었으며, 정거장이 아니라 아무 곳에서나 손을 번쩍 들면 태워주는 식이었다고 한다.
전차와 정거장, 주변의 밝은 가로등, 그리고 진고개 거리를 밝힌 600개의 가로등,
당시 한성(漢城)에 도착한 여행자들은 동양최초의 현대적 교통시설과 전등을 갖춘 이 도시를 보고 놀라워했던 것이다.
또한 뒤를 이어 1901년부터는 한반도 방방곡곡, 특히 항구에는 민간에 의하여 발전기가 도입되고 전기사업이 추진되었으니, 고종은 백성들의 기업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었던 셈이다.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개발된 내연기관 발전기를 국내에 들여와 사업을 펼치는 전기회사가 한 때는 60여개나 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또한 한성전기회사는 1903년에 용산구 청암동 한강변에 250 KW짜리 발전기 2 대를 설치하여 민간에 대한 전기판매를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전차는 1968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서울시내에서 사라졌다. 내가 한국전력에 입사하기 위해 면접시험과 신체검사를 받으러 을지로 입구의 한국전력 본사에 갔을 때가 1968년 10월이었는데 그 때까지도 전차들이 지지직거리며 스파크불이 번쩍거리는 전선 아래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의 전차요금은 일반 5원이었다. 5전과 5원이라....)
 
그러나 고종황제의 이 전기사업은 미국인 콜브란이 150만원에 달하는 공사비용 등, 채무변제를 요구하고 채무변제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한성전기회사를 콜브란의 개인소유로 바꾸어 타인에게 양도하겠다고 경고하고, 사옥에 게양된 태극기를 내려버리고 성조기를 게양하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전차타기 거부운동까지 일으키는 사태로 발전하는 바람에 난관에 봉착한다.
이에 외부대신 조병식은 이 부당한 콜브란의 요구를 조목조목 반박하였고, 대로한 고종황제는 전기사업 면허취소를 하교하기까지 하고 나선다.
그러나 고종은 러시아나 일본 등 한반도를 집어삼키려는 열강으로부터 국권을 지켜내기 위하여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콜브란과 협상을 벌여 70만원의 부채상환에 동의하고 이 사태를 마무리한다.
 
고종황제는 미국으로부터 개화사업의 동반자가 아니라 열강으로부터 한반도를 구해줄 동맹국의 역할을 기대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하였건만...,
끝내 한반도는 최종의 승자가 된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그리고 일본 강점시기에도 전기사업은 계속되고 수많은 민간전기회사들이(일본인들의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생겨나긴 했지만.......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감격의 해방을 맞았고 상해임시정부가 돌아왔으며,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공화국이 탄생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진다면 이 공화국 정부는 건국의 절차를 제대로 밟은 것일까?
국가는 국민의 합의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그 때 국민들은 국민의 합의를 거쳐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을 수립하였던가?
백성들끼리 공화국을 세우고 대통령을 뽑기로 언제 합의하였던가?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는 과연 고종황제나 대한제국으로부터 주권을 위임, 또는 인계 받은 정부였는가?
혹은 온 겨레의 합치된 위임에 의하여 후일 공화국을 수립할 주체로 인정되었던가?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어떤 절차로 그랬단 말인가? 국민투표라도 하였던가?
그것은 명백한 반란이었다.
적어도 절차상으로 엉터리로 세워진 것이 대한민국이다.
우리는 이 점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왕실에서 쫓겨 나오고, 흩어지고, 이방자라는 일본계집과 반강제로 혼인하고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일본의 작위를 받고....
그렇게 일본의 대한제국황실 말살음모로 풍지박산된 대한제국의 황실은 이 땅의 백성들에 내팽개쳐졌고, 그렇게 잊혀져 갔던 것이다.
그렇게 저들의 '천황'은 우리의 '황제'를 말살시켰던 것이다.
우리의 나라와 국호는 그렇게 사라져갔던 것이다.  

오직 일본의 압제로부터의 해방, 그 기쁨과 감격 뿐, 누구하나 주권의 회복과 정권의 인계인수절차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정식대로 하자면 먼저 대한제국과 일본 당사자에 의해 이 한일합방 조약의 문제가 종결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다음에 대한제국으로부터 공화국 수립을 위한 주권인수 절차가 황실과 국민 사이에 이루어져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대한제국은 사라져 버리고 을사보호조약의 당사자도 아닌 상해임시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위임받는다는 것이 어디 올바른 절차였더란 말인가?
 
그러나 이제 어찌하랴?
혹시 그 때 누가 그런 소리라도 했다면 미친 놈 취급을 받거나 돌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그래도 생각해 보자.
설사 대한제국이 무능력하고 줏대 없고 한심스러운 국가였다고 치자.
그래도 엄연히 우리나라 아닌가?
설사 대한제국의 황실이 그 무능력 때문에 주권을 빼앗기고 그래서 겨레를 비참한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케 한 일본의 폭정으로부터 회복시키는데 아무런 역할도 못 하고, 그래서 백성에게 염치도 없고, 그래서 백성에게서 버림받고 또 그 버림이 대한제국의 황실에 의하여 달갑게 받아들여졌다 하더라도, 적어도 백성끼리는 새로운 정부의 바탕과 주권의 인수인계 형식에 대한 합의가 있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하다 못 해 대한제국의 황실로부터 그 주권이 백성에게, 아니 국민에게 귀속되었음을 선언하는 절차라도 있었어야 할 게 아닌가?
이러한 절차가 없었으니 지금 우리가 일본에 대하여 한일합방이 무효라고 주장하면 일본이 “이 봐, 너희와는 상관없어, 조약체결 당사자 오라고 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랬더라면 과연 서울과 평양에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질 수 있었을까?
만일 어느 한 쪽이라도 대한제국으로부터 주권을 위양 받는 절차라도 취했더라면 서로가 정통성을 주장하는 일이 가능했겠는가?
나는 대한제국의 복권이나 왕실의 재건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민족이 생각도 없이 내팽개친 주권과 역사에 대한 인식이 안쓰러워 몇 자 적어 본 것이다.
 
그 잔혹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많은 삶을 살았던 비운의 황제 고종...
그가 지하에서 오늘을 바라본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
.
.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10년도 더 지난 2,000년도 무렵이다.

얼마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런던올림픽 축구 3,4위전에서 승리한 다음 박종우 선수가 태극기와 "독도는 우리 땅" 플래카드를 들고 그라운드를 뛰어 일본의 심기를 건드리고 IOC는 올림픽에서 정치적 세레머니를 했다고 나서고.......
그런 판에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 왕은 '통석의 념' 따위의 언어를 가지고 방한할 생각 말라. 일본 왕이 한국을 방문하려면 한국의 희생자들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하는 바람에 일본땅이 들썩거린단다.

이웃나라에 저지른 악행에 대하여 죽어도 사과하지 않는 일본, 영토에 대한 집착, 또다시 그 악행을 저지르겠다는 듯이 군국주의의 부활을 외치는 일본을 보면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일각에서는 대통령으로서, 외교작으로 옳지 못 한 언행이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내뱉은(?) 말이 왜 그리 시원하게 느껴지는지?
우리 모두가 하고 싶은, 그리고 고종황제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던가?

저들이 지금 우리의 발꿈치를 물지만 우리가 저들의 머리를 뭉갤 날이 언젠가 아니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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