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15:21)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들도 나처럼 핍박을 받을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나만 믿으면 세상에서 잘되고 형통할것이다 하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인하여 너희들도 핍박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아마도 귀를 의심하지 않았을까요?

모든것을 버리고 따라온 제자들입니다. 주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하는 표현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사람으로서는 다 버린것과 같습니다.

가정을 돌봐야 하는 가장 베드로역시 고기잡이 하던 일을 버리고 주님을 쫒았습니다. 베드로는 장모도 있었기에 아내가 가장의 짐을 져야 한다는 추측입니다. 동네사람들은 집나간 베드로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좀 극단적인 생각이지만 아내와 가정을 나몰라라 하고 예수를 따라다니는 베드로는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했을것입니다.

아내역시 처음부터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다는 근거가 될만한 기록이 없는것으로 봐서 어떻게 남편을 생각했을까요? 그리고 남편을 빼앗아간 나사렛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좋게 생각할 수만 있을까요? 후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습니다. 혹시 속썩이는 사위 때문에 홧병이 생겨서 열병이 생긴것은 아닌지 모르지요. 베드로의 사정을 아시는 주님께서 친히 가셔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셨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온가족이 예수님을 믿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즉시 수종을 들었다는 누가의 기록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눅4:38,39)

세리 마태는 어떻습니까?

그도 역시 세금걷는 세관원으로서 동족들에게 욕을 먹었지만 가정을 지키는 가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도 돌봐야할 식구가 있었겠지요. 근무지에서 열심히 일하던 마태도 예수께서 "나를 쫒으라" 하신 부르심 한마디에 모든것을 포기하고 쫒아갔습니다.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눅5:27,28)

세상적으로 잘나가는 직장을 포기하고 예수를 쫒아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제정신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성경 기록자들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눅5:11)

모든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쫒았다는것은 더 이상 뒤돌아 보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생각하지 않고 미련을 버리고 오직 앞에 계신 예수만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쫒았던 제자들에게 어떤 보상이나 대우를 지금 약속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핍박을 받으리라 하십니다. 앞으로 출세가 보장되는것이 아니라 더 힘들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생각을 바꾸려면 돌이키라는 배려는 아닐까요?

예수님은 거짓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참이시며 공으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얻으려고 거짓으로 위로를 하시거나 편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모든것을 버리고 쫒아온 자들에게 결국 보여주심은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실패를 보여 주십니다. 세상에서의 조롱과 멸시와 천대받으심을 당하시고 그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 하셨습니다.

오죽 그런 말씀을 하셨으면 수제자 베드로가 강하게 화를 내면서 주님 절대로 그렇게 죽으시면 안된다고 강변하지 않습니까? 내가 결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도록 가만 있지 않겠다고 열변을 토로하지 않습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렀거라! 이렇게 강력한 꾸지람을 들으면서 까지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강단에서는 어떤 가르침이 난무할까요?

나를 믿으면 범사가 잘되고 형통한다는 번영복음과 성공의 복음과 기복적인 복음이 판을치고 있지 않습니까? 개척교회의 표어가 성도 삼천명이 목표고 그것을 위해 합심해서 기도하자고 하고 전도 특공대를 조직해서 열심을 동원합니다. 과연 한 영혼을 찾아서 주님앞에 인도하는 것이 목적인지 아니면 교인수 목표 3천명을 위한 열심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거기에는 당연히 고난의 십자가나 핍박이나 골고다로 가신 주님의 길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긍정의 힘이나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가 득세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여리고를 함락시키고 홍해를 가르는 기적만이 난무할 것입니다. 불의 종이니 능력의 종이니 귀신을 쫒아내는 능력과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면서 늘 더 크게 더 멀리 더 높이를 추구하며 주의 이름을 외칠 것입니다. 가난과 절망속에 있던 이들에게 얼마나 희망으로 다가올 기쁨의 좋은(?)소식이며 구원의 소리이며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돈이 없어서 병원한번 못가는 이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안수하면 고침 받는다는 소리와 간증들이 구원의 소리아닌가요? 한번 속지 두번 속냐하는 심정으로 벼랑끝에 서 있는 심정으로 교회에 온 사람들 있습니다. 그들에게 잘될것이다 복 받아라 무조건 충성하라 하나님께 물질 심으면 육십배 백배로 흔들어 누리도록 부어주시니 걱정말고 바쳐라 하는 복음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요?

안수집사 장로 임직 받으려면 수백만원을 기부해야 하는 현실속에서 과연 주님의 핍박과 십자가의 죽음이 어떻게 전해질 수 있겠습니까? 저같아도 십자가는 빼겠습니다. 승리의 간증 성공의 무용담만 전하지요.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희망을 심어주는 설교를 하면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성경에 보면 많습니다. 부자되고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추려서 당신들도 성공하고 부자될 수 있다라고 부추깁니다. 거기에는 꼭 조건이 들어 갑니다. 복 받을 짓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진정한 복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과연 대형교회 성도들이 모두가 골고루 부자이며 잘 사는지 궁금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수백억원씩 건축을 해서 건물은 대형화되고 시스탬은 첨단화 되고 땅은 많이 소유해서 부자가 되었겠지만 그것을 정작 누리는 이들이 과연 교회 성도들일까요? 정말 그렇습니까? 그러면 가난해서 월세도 못내고 전세자금 날리고 부도난 성도들을 교회에서 지원해서 다시 회생한 성도들도 많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전 아직까지 교회에서 그렇게 지원 받아서 회생한 사람 있다는 소식 못들었습니다.

교회 성도들가운데 솔직히 카드 연채로 신용불량인 사람들 많이 있을것입니다. 그들이 물론 잘못해서 실수해서 빛을 못 갚은 경우도 있습니다만 어쩔 수 없는 구조속에서 빛을 떠 안게 되어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들을 향한 구제의 손길은 혹시 있는지요? 성도 수만명을 자랑하는 교회안에서는 도대체 그 많은 헌금을 어떻게 운용하는 지요?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그거야 제가 참견할 일이 아니니까 할말도 없지만 말입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경청해야 하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하십니다. 너희도 핍박을 할 터이요 라고 하시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때문에 이러한 주님이 겪으신 모든 일과 핍박과 고난과 멸시를 똑같이 제자들에게 할거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들을 반드시 형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나처럼 핍박을 당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때에도 내가 함께 할 것이다고는 약속하셨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그 현장에서 주님도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주의 증인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주님께서 계셨습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 서서 스데반을 마중하셨습니다. 돌을 던지는 무리들을 막으신게 아니라 함께 스데반과 더불어 맞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깨달은 것이 이것이 아닙니까?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내가 그 자리에 못 박힘이며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도 내가 우리가 함께 죽으심이요 무덤에서 살아나시고 부활하심도 내가 살아나고 부활한 것이며 우리가 살아나고 부활한 것이라는 주님과의 동일함입니다. 성도의 최고의 복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삶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행한 일을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고난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는 말씀 입니다.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그런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 이름으로 욕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이유가 그들이 알지 못함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 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커다란 벽이 있으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을 아는자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이며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성도라면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으며 고난가운데 살아갈까요?

물론 우리의 무지함과 죄로 인한 고난을 똑같이 여겨서 받는 핍박이 아니라 의로운 길에서의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우리의 잘못과 죄로인하여 당하는 고난일찌라도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다루시고 회개의 길로 이끄시며 새 사람으로 인도하심이라면 그것또한 합력하여 선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알수 없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속에서는 우리의 실패와 허물과 죄까지도 다루셔서 결국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의 자리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고난을 약속하시며 핍박을 가르치심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할 수있는 은혜의 방편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나의 삶이 비록 초라하고 못난 인생일 찌라도 우리의 이러한 것까지도 넉넉하게 십자가로 품으시고 받아주시며 전심으로 돌이켜서 회개할 수 있도록 은혜의 자리로 이끄실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마치 제자들을 풍랑이는 바다로 재촉하신 주님처럼 말입니다.

밤 사경에 폭풍과 사투를 벌이는 제자들을 지나치지 아니하시고서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인생에 분명 광야의 고난이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고난속에서 주님이 함께 계심을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낮아질 때 바로 거기 함께 낮아짐으로 맞아주시는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믿음이며 신앙입니다. 아멘.

글/빈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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