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요15:27)





요즘 신사도 운동이다 무슨 무슨 부흥이다 이빨이 변했다는등 각가지 현상들이 곳곳에서 번지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개인적인 단상으로 이러한 현상에 관하여 졸고를 올린적이 있습니다. 저는 유행처럼 번진다는 것으로 묘사를 했습니다만 혹시 못 보신분들이 계시다면 이쪽으로 이동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무명이라서 여러 카페나 게시판에 올려서 익히 보신 분들도 있을줄 압니다만 오늘 묵상 글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것 같습니다. http://cafe.naver.com/pray153/332



오늘은 '증거'라는 테마로 정리를 해야 할것 같습니다.

먼저 최근 불거지는 현상들이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면 저마다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집회 동영상이나 현장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라고 그들은 한결같이 목소리를 내고 있고 동의하는 자들역시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검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만 문제는 너나할 것 없이 그런 현상들에 대하여 소수의 경계하자는 주장보다는 포괄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침묵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국내외적으로 내노라하는 교회와 교단에서도 뚜렷한 지침이나 어떤 근거를 공식적으로 천명해서 성도들이 바르게 판단할수 있도록 입장을 정하지 않아서 더 혼란스러운 것은 아닌가 우려가 됩니다. 아니라면 제가 그 부분을 아직 확인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만 주류적인 교회와 교단에서 이부분을 깊숙하게 터치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습니다.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저같이 아무것에도 소속되지 않은 입장이니까 나중에 혹시라도 잃을것이 없으니까 함부로 말을 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뛰어난 신학자도 아닐뿐더러 단독 목회를 하는 것도 아니자만 성경을 조금만 관심있게 읽는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이 분별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신학자나 목회자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성경은 모든 성도들에게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충분합니다.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강조한바 있습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3:15~17)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의 양식이며 주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위한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보고인 성경을 우리가 가까이 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왜 오늘날 기적과 현상에 사람들이 몰려들까요? 성도안에 성경이 함께 말씀이 함께 살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최 우선적으로 해야하고 쉬지 않아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물론 기도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기도하는 자체가 성도를 온전하게 이끌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에 의아해 하시거나 반문을 하실 분들이 계실줄 압니다.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냐고 하실줄 압니다. 기도없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하실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 올리자면 저는 지금 기도가 필요 없다고 하는게 아닙니다. 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바르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뜻을 알 수 있고 알아야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도할 때 말씀을 인용해서 유창하게 하는것을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우리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실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아무리 중요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모른채 하는 기도는 결국 이방인들이 중언부언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본성적으로 부패한 우리의 육신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한 기도로 밖에는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러므로 말씀을 먼저 사랑하고 끊임없이 양식으로 알고 규칙적으로 섭취를 해야 합니다. 기도 만능으로만 치우치게 되면 말씀보다는 능력위주로 가는 것입니다. 이단 사이비 집단들치고 능력빼면 뭐가 있습니까? 전부가 불의 종이니 능력의 종이니 하면서 계시를 혼자만 받은양 스스로 포장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기도해서 불 받아서 직통계시 받았으니 와 보라! 하는 것이지요?



능력의 종 기도의 종이 한번 안수 하고 기도만 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만병이 치유되고 귀신이 쫒겨나고 그러지 않습니까? 집안일이 형통하게 된다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잘된다는 식으로 말씀과는 전혀 다른길로 가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고달프고 지친 이들에게는 정말 솔깃한 소식일 것입니다. 이도 저도 안되니까 까짓 굿은 못하더라도 능력받은 종에게 가서 안수나 한번 받아보자 라는 심정으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또 보면 집회 홍보성 글이나 신문에 보면 치유받고 고침 받았다는 간증들로 빼곡하니 안믿을 수가 없겠지요. 아침마다 현관에 끼어 있는 그러한 홍보자료들을 꾸기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성경을 통해 신앙이 자라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게되니까 자꾸만 기도회나 열심을 내고 그래도 안되니까 무슨 집회나 부흥회에 갈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도 부흥사를 동원해서 성도들을 모으려는 계산때문에 서로 품앗이 하는 현상들을 접하면서 씁쓸함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짧은 제 생각이지만 목사님들 가운데 설교로 성도들을 확실하게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려는 과도한 꿈을 대부분 갖고 있다고 봅니다. 저도 한때는 그런 환상에 젖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희망 사항일뿐입니다. 물론 탁월한 설교가 회중들을 변화로 이끄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로 변화된 성도들을 자세히 보시면 설교 이전에 이미 성도 스스로가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감동으로 먼저 변해진 후에 목사님의 설교가 들려지고 그것의 결과가 마치 특정 목사님의 설교때문에 변화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경험이라서 반드시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좀 비약적인 예를 들어 볼까요?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수 많은 무리들이 변했을까요? 겨우 열두제자 인데 그나마도 한 제자는 배반을 해버렸습니다. 그 제자들 역시 후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변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능력의 설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느 분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한번 설교하니까 삼천명이 믿었다고 말입니다. 지금도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변화한다고 말입니다. 성령을 의심하거나 재한하지는 않지만 과연 오늘날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설교하는자가 있어서 한번 설교에 수천명이 변화되는 일이 있을까요? 글쌔요....



과거에 세계적인 부흥사하면 빌리 그래함 목사님을 기억합니다. 연일 초 만원 인파를 기록했다고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엄청난 사람들이 결신을 했습니다. 한국에도 엄청났었고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결실을 맺었다고 보도 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세계단일 교회 단일 교단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룬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교회도 있습니다. 거의 불가사의할 만한 대 부흥을 이룬 곳에서도 연일 목사님의 불같은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수백 수 십만명의 신도들이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지교회를 통해 매 주일 위성으로 은혜로운 설교를 경청합니다. 동시 다발적으로 아멘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놀라운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분명 변화되었지요?



그러나 그 변화된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설교에 변화되었는데 어째서 한국 교회는 성도들은 연일 성장하거나 변화의 모습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왜 지역사회에서는 아직도 욕을 먹는일이 칭찬 듣는 일보다 더 많을까요? 왜 신문 지상에서 비리나 부정 부패에 연관된 인사들속에는 기독교인들이 부지기수란 말입니까? 저는 지금 부정적인 부분만을 확대 해석한 것입니다. 물론 보이지 않게 왼손 오른손조차도 모르게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 귀한 성도들 많습니다. 선교사로 목사로 혹은 문화 속에서 사회 구석 구석에서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느라 애쓰고 수고하신 분들 많습니다.



설교는 본인이 먼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들어야 하고 그것을 성도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가감없이 말씀대로만 증거하면 나머지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도들에게 깊이 들어가서 변화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설교가 변화를 주는 능력이 있는게 아니라 말씀을 통해 성도들을 이끌어 가시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비록 내 설교가 모자라다 해도 빈틈도 많고 세련되지 않더라도 성령의 감동으로 증거한다면 그 속에서 살아계신 말씀이 예리한 검이 되어서 성도들의 영혼을 찌르며 마음과 생각을 살피셔서 새롭게 변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성도 각자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성령안에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성경이며 말씀 사모함이라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길어 졌는가 하면 성령에 대하여 대부분 오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하면 자꾸만 불같은 어떤 능력으로만 인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꾸만 엘리야의 능력을 기대합니다. 귀신 쫒고 방언하고 병고치는 능력으로만 중요함을 인식하기에 진정한 의미로서의 성령을 혼동하지 않나 싶습니다. 성령을 우리가 온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동일하게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는 것과 동일하지요. 예수님을 온전하게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신중하게 살피게 된다면 성령의 참 능력의 실재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맘대로 움직이거나 조종 할 대상이 아닙니다. 간절하게 부르고 외친다고 임하시는 성령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언제나 말씀과 함께 임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은 서로 하나로 연합되셨기에 그렇습니다. 따로 따로 움직이시거나 여기 저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하시되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을 증거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다른 의미로 성령을 찾거나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번짓수가 틀렸습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시니까 성령님은 저족에 계신줄 알고 부르짖어 오시옵소서 하는 모양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실때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욥에게 질문하실때도 함께 계셨습니다. 따로 따로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유기적인 연합이며 신비로운 연합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자꾸만 각각의 하나님으로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인식 하는가 하면  하나님 아버지 따로 믿고 예수님 따로 믿고 성령님 따로 영접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한때 유행한적이 있는 성령님에 대한 책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성령님을 무시하지말고 따로 영접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말은 성령님을 대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어도 성령을 구합니다. 금식하며 뜨겁게 철야기도회를 하면서 성령충만을 간구합니다. 그런식의 기도회에서는 인간적인 감정의 흥분과 심리작용이 어울어져서 무엇인가 기분을 좋게할 수는 있습니다. 열린 음악회라든가 유명 가수의 공연 현장에서도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습니다. 이미 믿는 순간에 우리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따로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식으로 성령을 구하지 마십시오.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하여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며 여리고성을 무너지게 하시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는 말씀을 벗어나서는 일하시지 않습니다. 은사나 방언이 끊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하심과 능력이란 우리가 소망하고 기대하는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에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고 우리의 기도의 방향을 교정하시며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연단하시며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어떤식으로는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령에 대하여 미리 알려주시지 않습니까?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5:26)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 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기에 성령님과 함께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의 모든 능력을 성령님께서 함께 주심입니다. 성령의 엄청난 역사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오늘 주님은 분명하게 나를 증거할 것이라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을 간구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삶속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의 삶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말씀을 사모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구하면서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그런 의미를 내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명백하게 성경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밝히 알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부지런히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늘 새로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른것들은 전혀 새로울게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뒤로한채 아무리 기도에 열을 올리고 세미나 가고 부흥회 가고 신비한 현상들을 따라 가봤자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령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야의 경험을 소개 합니다.

바알과 아새라의 850명 이방 제사장들과 한판 승부를 겨뤄서 승리한 엘리야가 이세벨의 위협 한마디에 간담이 녹아서 로뎀나무 아래 엎드러져서 이제 그만 족하오니 생명을 거둬 가주십사 한탄합니다. 그렇게 능력을 경험했던 엘리야는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서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회복시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위대한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아합 왕의 병거 앞에서 비를 뚫고 달려서 승리를 기뻐했습니다. 사기가 오를대로 올랐던 엘리야 앞에는 온전히 맥이 빠진 악녀 이세벨이 무릎꿇고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할 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똑똑히 현장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물에 흠벅 젖은 엘리야의 제단을 태운것을 본것입니다. 정말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오늘날 말하는 그런 무슨무슨 부흥의 현장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가 기대했던 변화의 조짐은 아무곳에서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세벨은 꿈쩍도 하지않은체로 오히려 이세벨이 섬기는 신들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죽이겠다는 선포를 합니다. 그 서슬퍼런 이세벨의 경고를 듣고 엘리야는 다 틀렸구나 하고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 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왕상18:9-18)



좀 길지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대와 조건속에서 현상속에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큰 소리로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속에서 주님은 매일 새롭게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우리 생각을 내려놓고 늘 그렇게 그 자리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만 한다면 그 세미한 음성을 성령을 통해 각자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볼수 있을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우리의 현장에는 성경과 말씀이 언제나 열려 있습니까? 그 자리가 사실은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 자리보다 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복된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장소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가 성경 말씀앞에 열려있지 않게 된다면 결국은 특별한 것을 원하게 되고 말씀과 동떨어진 곳에서 무엇인가를 원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동하거나 좌우로 치우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우리안에 함께 하십니다. 자꾸만 다른곳에 쫒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디에 어떤 조건과 신분속에 있다해도 우리안에 성령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증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도 예수님을 증거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의 표징은 그런 것입니다. 증인으로 사는 삶입니다. 아멘.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글/빈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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