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한국교회가 나이 마흔 넘은 부사역자를 기피하는 것이. 신학교 청빙 게시판에 30세 전후, 35세 전후, 37세 미만, 40세 미만…. 살뜰히도 나이 제한을 둔다. 청빙 게시판을 보아도 그렇고, 실제 목회 현장에도 젊으신 목사님들 일변도이다. 곧 오십을 바라보는 나로서는 지원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목양은 나이가 들수록 깊어진다는 생각에 나의 나이 듦을 기쁨으로 맞이하는데, 교회와 담임 목회자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보다. 40~50대의 아픔과 고통을 30대 사역자가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의 착각인가. 목양을 위한 사역자가 아닌 행정가와 기능인을 필요로 한다면 나 같은 사람은 참으로 쓸모없는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불교의 승려나 천주교의 사제와는 달리 개신교의 목회자는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며 지지고 볶고 사는 모습이 사랑하는 교우들과 동일하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함이 하나님나라 동지 같은 느낌에 눈물겹도록 감사했고, 말씀 역시 그들의 현실을 알기에 뜬구름 아닌 일상 속 영성을 추구하는 말씀을 전하도록 애써 왔다. 더욱이 일반 직장 생활도 10년 이상 해 왔고, 아이도 이미 대학생인지라 교우들의 삶이 얼마나 빡빡하고 고단한지를 알고 있는 터라 그들의 고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어 감사했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석·박사 학위를 가진 목회자들의 배움과 삶의 괴리를 보았고(물론 훌륭한 학자들도 많지만), 또 몇 개월 외국 왔다 갔다 하면 딸 수 있는 엉터리 학위가 있다는 것도 알기에 그저 책 많이 읽는 공부하는 목회자가 되기로 했다.

그런데 기성 교회는 공부고 나발이고 학위를 원했고, 경험이네 공감이네 다 필요 없고 그저 기능적인 일만 잘하는 사역자를 원한다. 그래서 학위가 있든가 아니면 컴퓨터를 잘하고, 찬양을 잘하는, 기능적인 일에 능한 사역자를 원했다. 선임보다 나이 어린 부목사를 찾는다며 나름대로의 명분을 대기도 하는데, 이 역시도 나이어린 사람을 섬길 줄 모르는 사역자들의 보편적 인격을 읽게 된 것에 씁쓸할 따름이다. 어쨌든 그러고 보니 난 아무 쓸모없는 목사였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어찌된 일인지 교우들은 자기네 젊은 목사님들과 대화하지 않고 자꾸 나를 찾아온다. 의논할 곳이 없어서, 위로받을 곳이 없어서, 나같이 볼품없는 사람을 찾아온다. 오죽 갈 곳이 없었으면 말이다. 아이 문제, 가정 문제, 직장에서의 갈등을 상의할 사역자가 자기들 교회에는 없단다. 다들 아기도 어리고, 경험도 없고, 그저 기도하라는 말밖에 해 주지 못한단다. 아니, 바빠서 만나지도 못한단다. 그래서 나이가 좀 들어 있는, 이미 이런저런 경험을 해 본 사람과 얘기하고 싶다고 한다.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 주는 나와 차를 마시자한다. 또 주변의 힘겨운 교우를 좀 만나 달란다. 자기네 목사님은 그런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단다. 그리고 성경 공부도 함께 하자고 한다. 자기들 교회에서는 행사는 많은데 성경 공부가 없단다.

그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면 할 일이 있음에 감사하지만, 이런 현실이 참 싫다. 목자 없는 양에게 잠시 물을 먹이고 몸을 집으로 향하게 하는 정도의 일, 그런 애매한 관계도 실은 불편하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가 조금 더 사람에게, 영혼에게 관심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교회 안에 가족이 저렇게 피투성이인데 사람 더 데려와 뭐 하겠노, 건물 좀 더 크게 지어 뭐 하겠노 싶다. 모순도 역설도 아닌 시트콤 같은 현실이다. 적(籍)을 둔 교회 따로 공급받는 곳 따로인 교우들에게도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교역자에게 있다고 늘 결론짓게 된다.

목회자는 기능인도 행정가도 아닌 세속의 영성가이다. 그래서 마흔이 넘어 인생이 조금씩 통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이제 겨우 영적인 생활이 시작되는 듯해 개인적 기쁨이 크다. 늙음을 통해 진정한 나를 찾아간다는 안셀름 그린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나이듦이 나를 더 지혜롭게 할 것을 알기에 나의 농익은 오십대를 흥미롭게 기대하는데, 교회는 나이든 사역자가 싫단다.

개인의 부족함과 사역에 대한 인도하심에 대해서는 엎드림의 시간을 통해 답을 찾는 나의 몫이지만 이는 비단 한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리라 여겨진다. 생기발랄하고 활동적인 젊은 부사역자는 그저 다루기 쉬운 기능인으로 전락하고 수년 후 탈진한 직장인의 모습이 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씁쓸한 현실이다. 어쩌면 동안을 추구하느라 성형 대국이 되고, 학벌을 추구하느라 학력을 위조하게 하는 사회, 그 병든 우리의 세상과 손잡고 가는 교회의 또 다른 단면은 아닌지. 성숙한 교회보다는 젊은 교회를, 안정과 평안함보다는 역동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목회 현장. 그래서 안정과 성숙을 늙음으로 이해하며 늙음을 무조건 퇴화라고 생각하는 단세포적 사고가 교회 안에도 흐르는 것은 아닌지. 이래저래 우리네 자화상이 많이 서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