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딜레마(The Dilemma of Life)

부활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일까요?
우리들 대부분은 이 새 생명을 기다리는 것 대신에,
우리의 유한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 생활, 즉 부활하신 주님과
교류하는 생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차차 죽음의 문을 지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려는 욕망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죽음을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이 욕망을 충족시키고픈 욕구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욕구를 강하게 경험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므로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수고의 열매를 뜻한다면
나는 생사간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하고
또 그것이 훨씬 더 좋지만 여러분을 위해
내가 이 세상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 더욱 필요합니다"
(빌립보서 1:21~24)

이런 딜레마를 가진 사람들은 드물지만,
이것은 영적 투쟁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우리의 생애, 씨앗을 뿌리는 시기
(Our Lives, Sowing Times)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짧은 생애는
씨앗을 뿌리는 시기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이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온 것은 모두 허사일 것입니다
 
우리 생애의 기쁨과 아픔이 모두 헛된 일이며
또 썩어질 우리의 육신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면,
어떻게 우리는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던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입으셨던 것과 똑같은 그 육신이,
그대로 멸망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서의 생애란 부활한 육신의 씨앗을 심는 시기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몸은 묻히면 썩지만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몸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며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고린도전서15:42~44)

우리가 이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놀라운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매순간을 영원의 씨앗으로 여기고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우리의 몸을 존중하고, 소중히 다루기 (Having Reverence and Respect for the Body)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몸을 사용하며, 또 잘못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그의 육신과 함께 들어올려지신 것을 통하여 우리의 몸과 다른 사람들의 몸 또한 존중하고 소중히 다룰 것을 우리들에게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의 몸을 신성한 장소로 만들고 그 곳을 거하시는 장소, 성령의 전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몸도 사랑으로 돌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상처를 감싸고 몸의 치유를 위하여 노력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인간의 몸의 존귀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우리의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 부활의 씨앗
(Our Mortal Bodies, Seeds for the Resurrection)


우리의 육신-살과 뼈-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짐승은 다 같은 곳으로 가게 되는데
모두 흙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돌아갑니다"(전도서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새 육신을 받을 때,
우리가 우리의 육신 안에서 산 것들은 모두 존중될 것입니다
 
부활할 때에 우리는 어떤 육신을 가질까요?
바울은 썩어질 우리의 육신을 부활의 씨앗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뿌리는 것은 형체를 갖춘 식물이 아니라 밀이나
그 밖의 다른 씨앗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 하나하나에게 본래의 형체를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5:36~38)
우리의 썩어 질 육신이 독특한 것처럼, 부활할 때에
우리 육신도 독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개성에 따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며, 또 우리와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가 우리들에게 찬란히 빛나는
육신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영광의 상처(Wounds Becoiming of Glory)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육신의 부활에 대한
우리 믿음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육신은 우리 영혼의 감옥이며
그리고 영적인 생활은 이 감옥으로부터 탈출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영적인 생활과
육적인 생활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육신은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성전" 이며(고린도전서 6:19),
따라서 그것은 신성한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부활은 우리가 육신 안으로 산 것들이
헛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들어 올려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한 몸에 그 고통의 자국이 있는 것처럼,
부활하는 우리의 몸에도 고통의 자국이 남을 것입니다
우리의 상처는 부활할 때, 영광의 표식이 될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숨은 부활(The Hidden Resurrection)


예수님의 부활은 숨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반대자들을 당황시키기 위하여,
승리의 성명서를 내기 위하여, 또는 그를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에게 그분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은
죽음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표식으로써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에게 자신들을 내어 맡긴 모든 제자들에게
그분의 사명이 완수되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사역한 제자들에게 그와 함께 하는
새 생명으로 모든 사람들을 불러들이라는
신성한 임무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이름을 부른 사람들, 그분과 함께 빵을 뗀 사람들,
그리고 그분이 평화의 말씀을 전한 사람들만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죽음의 족쇄에서
해방시킨 것은 바로 이 숨은 사건이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들어올려지기
(Waiting to be Lifted Up With Christ)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과 우리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은
하나요 같은 것입니다. 재림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 중에 우리의 죽은 육신을 그와 함께 일으켜
세우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우리 믿음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사랑받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사랑받고 계시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부활도 예수님의 부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점에 관하여 매우 확고부동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도와 여러분의 믿음은
헛되고 맙니다"(고린도전서 15:13~14)

참으로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과의 영원한 생명 안으로 우리를 들어올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과 우리의 부활이
같은 것이라고 할 때 그 완전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불쌍한 사람들입니다"(고린도전서 15:19)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세상에서의
짧고 제한된 인생의 범위를 넘어 먼 곳까지도 볼 수 있으며,
또 우리가 지금 육신으로 살고 있는 어떠한 것도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나이를 먹는 것의 도전
(The Challenge of Aging)

우리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기대 속에서
인내를 가지고 기다린다는 것이 더 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 방식에 안주하려고 하며, "응 그래, 그것은
내가 다 본 거야 해 아래 새 것이란 없는거야...
나는 그저 모든 것을 마음 편하게 생각하고
매일 매일 닥쳐오는 대로 살아갈거야"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살면, 우리의 생명은
창조적인 긴장을 잃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냉소적으로 되거나, 자기 만족에 빠지거나,
또는 단순히 지루해질 뿐입니다
나이를 먹는 일은 보다 큰 인내와
보다 강한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도록 도전합니다

그것은 열렬한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경험하게 되었고...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
가운데서 기뻐하고 있다"(로마서 5:2) 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기
    (Waiting in Expectation)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릴 때는 
    우리에게 기쁨에 찬 기대가 있습니다
    기대가 없으면 우리의 기다림은 현재에서 수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기대를 가지고 기다릴 때, 우리의 온 존재가 기쁨으로 놀라면서 열립니다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정신차리고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잠에서 깰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지나고 낮이 가까웠으니 이제는 악한 생활을 버리고 믿음으로 빛 된 생활을 하십시오"(로마서 1:11~12)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오시라는 것에 대한 기쁨에 넘치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에는 활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약속이 충족될 것이라는 데 대한 기대 때문에 우리는 지금 걷고 있는 여정에 대하여 모든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 들 샘印


 
      능동적인 기다림(Active Waiting) 기다리는 것은 영적 생활에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기다리는 것은

      헛된 기다림이 아닙니다

       

      이때의 기다림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기대를 우리의 마음속에

      가지고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강림절 기간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부활절이 지나면 우리는 성령이 오시는 것을 기다리고,

      예수님의 승천 후에는 영광 속에 올

      그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발자취를 보았다는

      확신 속에서의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능동적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리고 참으로 기쁨에 차서 기다리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기다릴 때, 우리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분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그분이 오실 때에 그분을 환영하기 위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신앙은 교류하는 삶의 열매

    (The Fruit of Our Communal Life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말하는 것,

    또는 우리가 행동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개인적인

    성공을 위한 것이라고 믿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개인적인 성공을 위하여

    자신의 주의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들과 교통하고 있는 우리들은

    영적인 가치를 가진 것은 개인적인 성공에서 오는 결과가 아니라

    신앙을 교류하는 삶의 열매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예수님, 즉 그분의 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교회와 교회의 사역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 낸 생각은 아닙니다

     

    이것들은 오랜 세월을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과 선지자들,

    예수님과 성도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형성하는 데

    각자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로부터 우리들에게 전해진 지식입니다

    참된 영적 지식은 성도들의 신앙 교류에 속하는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하나님의 사람들로 연결된 거대한 조직망 (The Large Network of God's People)

      성도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속한모든 사람들을 '거룩한 성도, 불러냄을 받은 자' 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함을 입어 성도가 된 사람들' 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고린도전서 1:2, 에배소서 1:1 참조)
      이 신성함이 예수님의 영이 하신 일입니다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듯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면 점점 더한 영광으로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가게 됩니다 그 영광은 영이신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3:18)
      우리는 성도로서 우주의 검은 하늘에 깔려 있는 수만 개의 별과 같이 빛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연결된 거대한 조직망에 속한 복된 사람들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짧게 살다 간  성도들(The Saints Who Live Short) 

       



      많은 사람들이 전쟁, 굶주림, 에이즈, 거리의 폭력, 신체적인 또는 정신적인 태만으로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흔히 그들의 짧은 생애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여러 목표들 중에서 어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 채, 많은 꿈 중에서 어느 하나도 실현하지 못한 채, 또는 많은 과업 중에서 어느 하나도 성취하지 못한 채, 그들의 인생 여정이 중단된 것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애가 짧았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면서 흰 옷을 입고 어린 양의 보좌 주위에 서 있는, 시공을 초월하는 성자들의 저 크나큰 신앙의 교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 7:9 참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헤롯 왕이 살해한 죄 없는 어린아이들에 관한 얘기는(마태복음 2:13~18 참조) 성도의 삶이란 반드시 오래 살고, 그리고 열심히 일하면서 산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줍니다
      이 아이들, 그리고 젊은 나이에 죽은 그 밖에 많은 다른 사람들은 영웅적인 업적을 성취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가 되기
    (Becoming the Church of the Poor)


    우리가 우리의 가난을 주장하고 우리의 가난을
    우리 형제 자매의 가난과 연결시킬 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 즉 예수님의 교회가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에서는 결속이 필수적입니다
    고통과 기쁨은 나누어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한 몸으로서 서로의 고통과 기쁨을 깊이 경험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합니다" (고린도전서 12:26)

    흔히 우리들은 몸의 한 부분이 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한 몸이 되는 것에 참여하면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고통스럽게 느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면,
    그들의 아픔 또한 깊이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기쁨은 아픔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아픔을 함께 나눌 때,
    우리는 또한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누가 가난한 사람입니까?(Who are the Poor)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중심부입니다
    그러나 누가 가난한 사람입니까?

    우선 우리들은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빈민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 영세민을 위한 식당에 가는 사람들,
    길거리에서 자는 사람들, 형무소나 정신 병원,
    혹은 요양소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와 매우 가까이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우리의 가족 중에, 교회 안에,
    또는 직장에 있을 수 있습니다
    더욱 가까이는, 사랑받지 못하며, 버려지고, 무시당하고,
    그리고 혹사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우리 자신이
    바로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가난이 멀리 떨어져 있든, 가까이에 있든
    또는 우리들 자신 안에 있든,
    우리가 그 가난을 보고 경험할 때,
    우리는 교회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그것은 우리가 형제 자매로서 손을 잡고,
    우리의 깨어짐과 필요를 고백하며,
    서로를 용서하며, 서로의 상처를 고쳐 주며,
    그리고 빵을 떼기 위하여 예수님의 식탁에
    둘러앉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가난한 사람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하여 가난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중심부에 있는 가장 약한 자들
    (The Weakest in the Center)

    우리의 몸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부분은
    머리도 아니고 손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름답지 못한 부분' 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입니다

    억압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된 우리는 우리 중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 즉 나이 든 사람들, 작은 아이들,
    불구자들, 정신 질환자들, 굶주린 자들,
    그리고 병 든 사람들이 참된 중심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몸 가운데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은 부분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또 별로 아름답지 못한 부분을
    더욱 아름답게 꾸밉니다"(고린도전서 12:23)
    가난한 자들이 교회의 가장 값진 중심부가 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교회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들 가운데에 진정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는 것이
    크리스천의 자선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의 본질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초점 맞추기(Focusing on the Poors)

    다른 모든 인간 조직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끊임없이 부패의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교회가 권력과 부를 갖기가 무섭게, 교회에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교묘하게 다루는 일,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일, 부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
    그리고 노골적인 부패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교회의 부패를 방지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초점을 맟춤으로써
    부패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교회로 하여금
    그 사명을 완성하게 만듭니다
    교회가 더 이상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가 되지 못할 때,
    교회는 영적인 동질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의견의 분분함, 질투, 파워 게임
    그리고 사소한 일들에 휘말립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찮은 부분을 더욱 귀하게 여겨
    몸의 조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몸 안에 분열이 없이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2:24~25)
    이것은 참된 비전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교회에 주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서로서로에 대한 관심,
    사랑 그리고 평화의 장소가 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장소로 계속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많은 지체들로 구성된 하나의 몸 (One Body with Many Parts)
      교회는 한 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13)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만일 모두 한 지체뿐이라면 몸은 어디입니까? 그래서 지체는 많아도 몸은 하나입니다"(고린도전서 12:19~20)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몸의 한 부분이 몸의 다른 부분에 속하는 기능을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손에게 보라고, 눈에게 들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 각자는 전체에서 담당할 역할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7 참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제한된 그러나 참된 역할을 가진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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