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죽음을 가져가 버리다
(Jesus Takes Away Fatality)

성육신의 큰 신비는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인간이 되었으므로 모든 인간의 육체도
신성한 생명의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의 생명은 부서지기 쉬우며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의 부서지기 쉽고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 속에 함께 계시므로,
죽음은 더 이상 최후의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몸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54~55)

예수님은 우리의 존재에서 죽음을 가져 가 버리셨으며
우리의 생명에 영원한 가치를 주셨습니다

- 옮긴 글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들어올려지다
(All people Lifted Up with Jesus)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하겠다" (요한복음 12:32)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들어올려져서 부활의 새 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인류를 위한 죽음이며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인류를 위한 부활입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하여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이 걸어오신 위대한 길, 즉 노예에서 해방으로,
속박의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그리고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에서 쫓겨나지 않았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죽음이 임박했늘 때 예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태복음 27:46) 라고
울부짖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 속에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다는 진리를 믿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누가복음 23: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외로움이 예수님을 부활로 인도했습니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 갈수록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그를 따라 그가 당했던 외로움 속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외로움 속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와 너무나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제한된 가슴과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당하셨던 외로움을 경험할 때,
우리도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이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내맡길 수 있는
축복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높은뜻 정의교회 시온찬양대 홈페이지]

 
 
 

                                    

 

 

 

 

 

 

 

 

 

 


 

미국의 기본 노동시간은 주 40시간, 멕시코는 48시간입니다
아침 7시에 근무를 시작하여 5시 까지가 정규 근무시간이며
그 후에는 과외 수당을 지급하여야 합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5시에 퇴근하고 밀린 공정이나
조금이라도 더 벌려는 일꾼들은 남아서 일을 계속합니다

 

오늘도 대부분의 직원들이 퇴근한 후에 몇몇이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공장 분위기가 어수선해 집니다

일꾼 중의 하나가 졸도를 해서 테이블에 누였더군요
이마를 짚어보니 온기가 없고...식은 땀을 흘리는데...
잠시 후에 정신이 드는지 손으로 의사 표시를 합니다

 

구급차를 부르려고 하면 손을 흔들고,....
그러더니 글을 쓰는 시늉을 합니다
펜을 손에 쥐어주니...'PASTOR' 라고 씁니다
(들은 적은 있으나 실제로 누워서 글을 쓰는 것은
오늘 처음 목격했습니다)

 

목사님을 불러 달라는 뜻이겠죠
일단 구급차를 부르고...응급처치를 해서 고비를 넘겼습니다
집, 교회가 멀고, 연락처를 알지 못해서
모셔오지는 못했습니다만...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Pastor' 를 쓸 수 있었을까?
과연 나는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누구를 찾을 것인가?
당신은 누구를 찾으시겠습니까?

 

글/김만니 




우리의 기질을 하나님을 위한 봉사에 사용하기

(Putting Our Temperaments in the Srvice of God)

 

우리의 기질은ㅡ 그것이 불길과 같이 급하든,

무기력하든, 내향적이든 또는 외향적이든ㅡ

우리의 성품에 영원히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우리가 이 기질을

'사용' 하는 방법은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우리의 기질을 덕망있는 생활을 위한

봉사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될 것입니다

 

불 같은 성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성으로 변하고, 무기력한 성질은 위기에 닥쳤을 때

안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며,

내향적인 기질은 명상적인 측면을 깊게 하며,

그리고 외향적인 성질은 창조적인 사역을 북돋아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질을 우리의 영적 생활을 깊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선물로 생각하고 그 기질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오늘 새벽 바닷가에는 짙은 안개가 끼었습니다
가시거리 불과 3~5미터 정도...
어디가 물이고 어디가 땅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늘은 물론, 멀리 보이던 도시의 불빛도 전혀 보이지 않더군요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우리들인데...
누구나 할 것없이 다 아는 체를 하며 삽니다
 
첨부한 사진은 고아원인데 장애 어린이들만 돌보는 곳입니다
35명 정도의 어린이를 30여 명의 봉사자들이 돌보고 있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이 Diaper(기저귀)라고 합니다
하루 필요한 숫자가 대략 200여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 외에 먹을 것...어린이 보다는 자원 봉사자들에게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Diaper 를 구할 수 있는 분들은 관심을 가지시고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벌써 10월도 중순 입니다
찬서리와 비바람, 이슬을 맞은 과일,
채소들이 더 알차고 탐스럽고 풍성하다고 합니다
'견딤'이 있어야  '쓰임'이 있고....승리가 있습니다
오늘도 승리하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승리!!!
 

멕시코에서 김만니 드림

 


 

영적 생활을 위한 창문  
(A Window on Our Spiritual Lives) 
                  
비록 감정적인 생활과 영적인 생활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이 둘은 서로에게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느낌은
우리의 영적인 여행을 들여다보는
창문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질투의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라고 소리치고 있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과 접촉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의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우 평화로우며
'중심이 잡혀 있다' 고 느낄 때,
우리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깊이 깨닫고 있다는 표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임재에 대하여 충실하게 응답하는
삶을 사는 우리의 기도 생활도 우리의 감정, 느낌,
그리고 열정을 보는 창문을 열어 줍니다

그리고 이 기도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느낌, 그리고 열정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향한 우리의 긴 여정에서
어떻게 유용하게 쓸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영적 생활의 원동력
우리의 감정적인 생활과 영적인 생활의 원동력은 서로 다릅니다 감정적인 생활의 기복은 우리의 과거 또는 현재의 주위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과거 오래 전에 일어났던 일 때문에 또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때문에 우리는 행복하고, 슬프고, 화내고, 지루해 하고, 흥분하고, 우울하고, 사랑하고, 돌보고, 미워하고, 또는 복수심에 불타기도 합니다 영적인 생활의 기복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움직임에 대한 우리의 복종, 즉 성령의 움직임을 우리가 주의 깊게 경청하느냐 경청하지 않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이러한 경청이 없이는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결국 바람에 휩쓸려가는 우리 감정의 파도에 굴복하게 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우리의 영적 자원 파고들기
(Digging into Our Spiritual Resources)

 

어떤 사람이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

우리를 성나게 하며, 우리를 무시하고

우리를 거부할 때, 우리 마음속에는

거센 항의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분노일 수도, 우울함일 수도,

복수심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자해하려는 충동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낄 수 있으며,

또는 자살처럼 자기를 극복하고 싶은

기분에 빠져 들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반응은 예외적인 것이라

할 수도 있으나, 결코 우리 마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나긴 밤 동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행동한 것들에 대응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했으며 어떤 행동을 취했나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바로 이 때에 우리는 우리의 영적 자원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가 우리 내부에 있는 중심부,

즉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해칠 필요가 없는

또한 우리가 자유롭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중심부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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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동요를 극복하기

(Overcoming Our Mood Swings)

 

 

우리는 감정의 피동적인 희생물이라는

저주를 받은 것일까요?


우리는 "오늘은 너무 기분이 좋아" 또는

 "오늘은 영 기분이 아니야" 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기분에 맞추어 살도록

요구해야만 할까요?


감정을 통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잘 훈련된 영적인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감정을

점차적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극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감정으로

행동하는 일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 가치가 없다고 '느끼'거나,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느끼'거나, 또는 일이 지겹다고 '느끼'기 때문에,

우리는 아침에 일어날 기분이 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아침에 일어나서

복음서를 읽고 시편을 읊고 기도하며,

그리고 새날을 주신 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우리를 사로잡는 우리의 감정은 그 힘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목양연가

 

 

              나의 이웃이 누구일까요(Who is My Neighbor)?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복음서는 말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2:38)

그러나 나의 이웃은 누구일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나의 이웃은 이 세상에서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 특히 병 든 사람들,
배 고픈 사람들, 죽어 가는 사람들,
그리고 도움을 필요한 사람들" 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 대답은 예수님의 대답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나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선한 사마리아인(누가복음 10:29~37)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면서 "그러니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얘기에서 참된 이웃은
옷이 벗겨지고 얻어맞아, 반쯤 죽은 상태로
길가에 누워 있는 가련한 사람이 아니라,

"길을 건너 이 사람에게로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까지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 사람" 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나의 이웃은 나를 돕기 위하여 길을 건너
내게로 다가오는 사람을 말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사진: 아름다운 엔세네다의 아침바다


 용기 있는 생활(A courageus Life)

 "용기를 내십시오" 하고 흔히 우리는
서로에게 얘기합니다 용기는 영적인 덕입니다
용기라는 말의 courage 는 라틴어의 cor 에서 왔는데
그것은 '마음' 이라는 뜻입니다

용기있는 행동은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용기있는 말도 마음에서 솟아나옵니다

그러나 마음은 단순히 우리의 감정이 있는 곳은 아닙니다
마음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며, 우리의 모든 생각, 느낌,
열정 그리고 결정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용기있는 삶이란 중심으로부터 사는 삶을 뜻합니다
그것은 깊이 뿌리를 내린 삶이며, 피상적인 삶과는 반대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십시오" 라는 말은
"당신의 중심이 말하게 하십시오" 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고통받는 공동체 속에서 예수님을 알아보기
Reconizing Christ in Suffering Communites)

개인은 물론이고 공동체도 고통을 받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박해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학대당하고,
그리고 끔찍한 범죄의 희생자가 되고 있습니다

 

고통받는 가족, 고통받는 친구들, 고통받는 종교 단체,
고통받는 소수 민족, 그리고 고통받는 국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고통받는 사람들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고통받는 사람들도 선택되어, 축복받고,
부서지고 깨어지고 그리고 세상에 주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서로를 독려하여
이 고통받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응답하게 하고,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함께 노력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높은뜻 정의교회 시온찬양대 홈페이지]

 
 
 

                                    

 

 

 

 

 

 

 

 

 

공동체의 몸(The Body of Community)

 

우리가 식탁에 함께 둘러앉아 빵을 뗄 때
우리는 한 개인으로서 변화할 뿐만 아니라,
또한 공동체로서도 변화합니다

나이도 다르고, 종족도 다르며,
각각 그 배경과 역사가 다른
우리 인간들은 한 몸이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빵은 하나인데 우리가 다 그 빵을 함께
나눠 먹음으로 우리 많은 사람들은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7)

한 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로서 우리는 들어올려지고,
축복받고, 부서지고 그리고 세상에 주어진
살아 계신 예수님, 하나님의 자녀들,
그분의 지체, 그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한 몸으로서 우리는 만백성과 만국가가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뭉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커다란 소망에 대한 산 증인이 됩니다

-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주어지다(Being Given) 예수님은 세상에 주어지셨습니다 그는 주어지기 위하여 선택되고, 축복받고, 그리고 부서지고 짓밟히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죽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생명과 죽음이었습니다 영원으로부터 선택받으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인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부서지고 깨어지셨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그의 생명이 번식하여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사람들을 위한 양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선택되고 축복받은 자녀로서의 삶을 살 때, 우리의 작은 생명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기 위하여 부서지고 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세상을 위한 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으며 우리의 부서지고 깨어진 삶을 살 때, 우리 생명은 자자손손 계속하여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에 관한 얘기가 바로 이러한 얘기입니다 그들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후손들의 가슴속에 계속 살아 있습니다 이러한 얘기는 또한 우리 자신의 얘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
    Charlie Landsborough/My Forever Friend (나의 영원한 친구)




 

 

부서지고 깨어지다(Being Broken)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부서지고 깨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과 죽음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고통과 죽음의 삶을,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지 않으면 안되는

악으로 생각하고 사신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끌어안으려는 사명감으로 생각하고 사셨습니다

 

우리들도 모두 부서지고 깨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부서지고 깨어진 육체를 가지고,

부서지고 깨어진 가슴을 가지고,

부서지고 깨어진 마음을 가지고,

부서지고 깨어진 영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부서지고 깨어진 인간 관계로 인하여 고통받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부서지고 깨어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가 십자가를 끌어안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부서지고 깨어진 삶을 끌어안고

그것을 우리 사명의 하나로 생각하고 살아갈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서진 삶을 우리의 죄 많음을 상기시켜주는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하여 이것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여 우리의 순수함과 죄의 정화를 위한

하나님의 축복에 예속시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부서지고 깨어진 삶은

새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축복받다(Being Blessed)

    예수님은 축복받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이런 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 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고 기뻐하는 내 아들이다"
    (마가복음 1:11)
    이 소리는 예수님의 전생애를 통하여
    그를 떠받친 축복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찬양을 받든, 비난을 받든,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이 축복의 말씀이
    큰 힘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축복을 우리들과 나누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이고 딸이다" 라는
    당신의 말씀에 우리의 귀를
    열리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가 특별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그리고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받은 자녀로서
    우리의 생을 살 수 있으며,
    또한 이 축복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선택되다(Being Chosen)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하여 붙잡히셨습니다 아니 선택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택된 분이십니다 영원으로부터 하나님은 그의 가장 귀한 아들을 세상의 구세주가 되도록 선택하셨습니다 선택된다는 것은 특별한 관계, 즉 독특한 방법으로 알려지고 사랑받으며 또 발탁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가 선택된다는 것이 곧 다른 사람들은 선택되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되었음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경쟁도 적대 관계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가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되신 것을 우리와 함께 공유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하고 독특하며,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그렇게 선택되었음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함께 기뻐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 중에서



       

      세상을 위한 양식이 되기 

      (Becoming Food For The World)

       

      예수님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쪼개어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행동을 통해

      자신의 생애를 요약하여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셨으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축복을 받으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어

      이 세상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택되시고, 축복받으시고, 돌아가시고,

      그리고 양식이 되신 과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바로 그 신성한 여행 길입니다

       

      우리가 빵을 들어 축복하고 떼어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주는 것은 우리가 평생에

      그리스도의 생애를 좇아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도 또한 예수님과 같이 선택되고, 축복받고,

      깨어진 사람으로서의 생을 살아서

      세상의 양식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받아야 할 때와 주어야 할 때
(A Time to Receive and A Time to Give)

언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또 언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주의를 
필요로 하느냐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흔히 우리는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주려고, 주려고, 그저 주려고만 합니다

우리는 주는 것이 관대함의 표시이며 
또는 심지어 영웅주의의 표시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없어. 
다만 주기만을 원해" 라고 말할 때, 
그것은 뽐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받지 않고 주기만을 계속하면 
우리는 곧 다 타 버리고 맙니다

우리 자신의 육체적인, 감정적인,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인 필요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우리가 깊은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서 
기쁜 마음으로 주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어야 할 때와 받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한 생활을 원한다면 우리는 주는 것과 
받는 것에 대하여 똑같은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


 



 

 




     

     

    우리의 상처와 더불어 듣기

    (Listening With Our Wounds)

     

    고통속에 있는 사람과 유대감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과 우리의 고통에 대하여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고통에 관하여 얘기하는 것은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상처받은 치유자란 자기 자신의 상처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고통스러울 정도의 우울한 생활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그 아픈 경험을 얘기하기보다는

    우울에 빠진 친구의 얘기에 주의력을 기울여,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통받고 있는 사람의 주의력을

    우리 자신에게로 돌리게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반창고가 붙여진 우리의 상처는 우리가 혼신을 다하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치유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

    

     

     


     
        먼저 우리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기 (Tending Our Own Wounds First) 외로움, 우울함 그리고 두려움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경험은 다른 사람을 위한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이러한 상처에 대하여 좋은 간호를 받았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의 상처가 드러나 피를 흘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겁을 주어 그들을 쫓아 버립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간호한 후에는, 우리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상처 때문에 겁을 먹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치유를 경험할 때,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의 치유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상처로 인하여 상처받은 우리의 형제 자매들과 깊은 유대감을 갖게 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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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s)

     

    누구도 상처입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육체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또는 영적으로든,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상처를 숨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난처한 입장에 빠지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받은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데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상처가 부끄러움의 원천이 아니고

    치유의 원천이 될 때 우리는 상처를 받았지만

    치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상처받은 치유자이십니다
    그의 상처를 통하여 우리는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들에게 기쁨과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이 받은 굴욕은 우리들에게 영광을,

    그리고 그가 당한 거부는 우리들에게

    사랑의 공동체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도 우리의 상처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데 사용될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세월이 약이다(How Time Heals)

       

      "세월이 약이다" 라고 흔히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결국 우리에게 가해진 상처를

      우리는 잊게 될 것이고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가 살 수 있을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치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현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다" 라는 표현이

      어려운 인간 관계 안에서 신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 주었던 행동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음을 의미할 때,

       

      이 말에는 많은 진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약이다" 라는 말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질투를 넘어서(Beyond Jealousy) 우리는 쉽게 질투합니다
        방탕한 아들의 얘기에 나오는 큰아들은 자기의 동생과

        그의 단정치 못한 부인이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는데도

        돌아와서는 칙사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질투가 났습니다

        (누가복음 15:30 참조)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 하루 종일 일한 일꾼들은

        오후 다섯 시에 와서 일한 일꾼들이

        그들과 같은 임금을 받는 것을 보고 질투했습니다

        (마태복음 20:1~16 참조)

         

        그러나 방탕한 아들의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네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누가복음 15:31)

         

        그리고 포도원 주인은 "내 너그러움이

        네 비위에 거슬리느냐?" 라고 말했습니다(마태복음 20:15)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한 관대함을 참으로 즐길 때

        우리는 우리의 형제 자매가 받는 것에 대하여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질투가 우리 마음에 자리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A Fahter's As Well As a Mother's)

     

    탕자의 얘기에 나오는 아버지는 또한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달려가서 아들을 환영하고 포옹하고 입을 맞추며,

    제일 좋은 옷과 반지, 그리고 신을 주고 파티를 열어 주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시골의 촌장이 취하는 전형적인 행동은 아닙니다
    이러한 행동에서 우리는 깊은 애정과 자비로운 배려,

    그리고 드러내지 않는 용서가 내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이런 행동 속에는 아버지로서 뿐 아니라

    또한 어머니로서의 사랑이 꽉 차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를 위하여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포함하는 것이며, 또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 손은 아버지의 손처럼 그리고 다른 한 손은

    어머니의 손처럼 우리를 껴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손은 우리를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그리고 편안하게 만들며,

    다른 손은 우리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그리고 권능을 줍니다

    집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도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탕자의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는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겪게 될 실망과 

    거부감 그리고 학대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이 화를 내고 무정한 사람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아들에게 애정도 도움도 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생의 대부분을 기다림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작은 아들을 강제로 집으로 돌아오게 할 수도 없었으며 큰아들의 노함을 풀어 줄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두 아들 스스로 돌아오는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길고도 긴 기다림의 세월 동안 아버지는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여러번 죽기도 했습니다 그는 고통으로 눈물을 흘렸으며 공허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아들이 돌아올 때가 되었을 때 바로 그 공허함이 아들을 환영하는 장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와 같은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 옮긴 글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우리는 어떻게 잃어버렸던

    형제 자매의 귀향을 환영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로 뛰어 달려가서,

    끌어안고 키스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일 좋은 옷으로 그들을 입히고,

    그들을 우리의 주빈으로 모심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고 그들을 위한 파티에

    가족과 친구들을 초청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변명이나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오직 우리와 다시 함께 있는 데 대한 한량없는 기쁨을

    그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15:20~24 참조)

     

    이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완전하신 사랑과 같이

    우리도 완전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이란 자기만 옳다는 독선과 책망

    또는 호기심을 조금도 보이지 않고

    마음속으로부터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과거는 모두 지워져 버립니다
    자금 그리고 바로 이곳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바로 이곳에서

    우리의 가슴을 꽉 채워 주는 것은

    우리의 형제 자매가

    집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감사일 뿐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집으로 돌아오다(Coming Home)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11~32)에는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집을 떠나 이국으로 가 버린 작은 아들과 
    집에 남아 자기의 의무를 다 한 큰아들입니다
    
    작은아들은 술과 여자에 빠져 재산을 모두 탕진하였습니다
    큰아들은 열심히 일하고 자신이 맡은 모든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느라 소외된 삶을 살았습니다
    
    두 아들은 잃어버린 아들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에 대하여 슬퍼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서 자신이 원했던 
    친밀감을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내키지 않는 복종은 둘 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작은아들을 닮았던지, 혹은 큰아들을 닮았던지,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품안에서 
    쉴 수 있는 집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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