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클의 안(案)에 있어서 비유가 풍유화된 또 하나의 부분은 기름이다: "기름 - 기름은 성령님과 연결된 심장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은밀한 생활을 양성하면,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생활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가...이는 당신의 심장을 하나님께로 내미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안에서 은밀한 이력(履歷)을 쌓고 있다 - 그것은 기름, 성령님과의 연결이다." 기름이,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나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생활"임을 의미한다는 증거가 마태복음 문장 어디에라도 있는가? 확실히 없다. 마태복음의 대조는 깨어 있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것이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5:13)." 그러나 마태의 뜻은 비클의 해석의 하나의 요인으로조차 포함되지 못한다. 왜 그랬어야 하는가? 이것은 그의 늦은 비의 종말론적 설계와 맞아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주께서 언제 재림하실 지 우리가 모른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문제에 대해서 그는 아마도 모르는 체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전 교회가 신랑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하나님의 적들을 물리치고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시도록 부르기 후까지 예수께서는 돌아 오시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돌아 오실 때, 이런 것들이 모두 일어나고 있었다면, 분명히 전 교회는 다섯 명의 슬기로운 처녀의 상태에 있을 것이고 재림의 타이밍 때문에 놀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비클의 해석은 마태복음의 내용으로 봐도 이치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스스로의 종말론적 설계를 바탕으로 본다고 해도 말이 안된다.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풍유적인 접근방식은 성경의 뜻이 성령에 감동된 저자에 의해 확정된다는 개념을 공격한다. 슬기로운 풍유가는 그 자신만의 뜻을 찾아낸다. 결국 풍유를 생각해 내는 독자가 성경의 뜻을 결정한다. 성경에 감동을 불어 넣으신 하나님이 결정하시지 않는다. 성경은, 문장 자체와 직접 관련없는 아이디어가 새로운 해석들을 일으키는 창조적 아이디에이션(관념화)을 위한 토대가 되며 접촉점이 된다.

깊은 내면의 경건주의

나는 이전의 CIC 기사에서, 두 종류의 크리스천이 있으며 분류별로 어떤 엘리트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여러 형태의 경건주의를 설명했다. 늦은 비와 마찬가지로 마이크 비클의 IHOP은 경건주의를 전혀 새로운 수준으로 데려 가며, 처녀들의 비유에 대한 그의 메시지는 이를 보여 준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더 좋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연결을 가진 크리스천이며 어리석은 처녀들은 하나님과의 더 나쁜, 또는 적은, 연결을 가진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는 경건주의를 증진시켜 왔다. 경건주의는 성경적이지 않으며, 비클은 비유에서 경건주의를 찾아내기 위해 처녀들의 비유를 오역하고 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하셨기 때문만 아니라, 바로 전 비유(종의 비유)와 바로 다음 비유(달란트의 비유)에서 충성되지 못한 자들을 비신자로 묘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째 경우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태복음 24:50,51)  논점은 같다: 주인은 예상치 못한 때에 오신다. 달란트의 비유는 이렇게 말한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마태복음 25:30) 처녀들의 비유는 비클의 크리스천의 모습의 이층안(二層案)을 가르치지 않는다.

비클은 좋은 종류의 크리스천과 덜 좋은 것과 사이를 나누는 여러가지의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연결된 상태"인지 "연결되지 않은 상태"인지이다. 비클은 말한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심장에 연결되어 있기를 원하신다. 이는 매일 하루 종일 하나님을 느낀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알려 준다. 신부의 패러다임으로 주님을 밀고 들어가서 그분께 연결되어 있으면 나의 심장이 부드러워지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그분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나오고, 예수의 피가 내 죄를 씼었음을 믿고, 믿음으로 은혜의 보좌로 "가까이 나아오고도" 아직도 내게는 마이크 비클 같은 어떤 엘리트 크리스천들에게만 계시를 통해서 얻어지는 무언가가 모자라다고 믿어야 하는가? 경건주의는 꽤 영적으로 들리지만, 이것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일과 종교개혁의 솔라스(solas, 다섯 개의 '오직')를 공격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분께 가까이 데려가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모든 참 크리스천들에게 똑같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에베소서 2:13)

출처: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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