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시리즈 계속됩니다. 이 시리즈에 실리는 글들은 모든 복음성가/CCM 을 죄악시 하는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배를 드릴때 무엇이 더 적합한지 독자들이 읽으시고 기도하시며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반대하시는 분들 저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로 읽지 마시고 기도하며 정말 내가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예배음악이 무엇일까 깊히 고민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보수,진보 관심없습니다. 하나님중심에 저는 관심이 있습니다.

저는 70년대부터 복음성가를 즐겨했고 CCM의 시초라고 할수있는 Calvary chapel 의 Maranatha 시리즈 그리고 거기서 파생한 Vineyard 음악, 그리고 Alter Boys, Resurrection Band, Undercover, Sweet Comfort Band, 후에 Steve Curtis Chapman, DC Talk  그리고 나중에 한국에 David Ross (오대원 목사) 의 찬양대등 나름대로 CCM 을 잘 알고있다고 생각하던중 지금 저희 목사님을 통해 찬송가의 아름다움, 깊이, 예배에 합당한 음악등을 알게되었습니다. 제 이야기는 이만하고 시간이 되시면 아래글을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이사야서의 이 구절은 마치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찬송 소리를 듣고 싶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창조하신 것처럼 해석하시는 분들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해석의 결과로, 요즈음 하나님은 찬송을 너무 너무 좋아 하시기 때문에 신자들은 하나님께 될수록 많은 찬송을 불러드려야 할 의무가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계속해서 똑같은 옛날 찬송가들을 불러드릴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아름다운 노래들을 많이 만들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신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런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전체의 내용과 동떨어진 자의적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앞뒤에 나오는 내용들이 음악과 관계된 내용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과 관계된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고 싶으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치 애굽 백성들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권세와 능력으로 당당하게 구원해 내심으로 세계만방에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셨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온 타락과 징계, 그리고 구원받는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신실하심, 선하심, 온유하심, 강력한 능력, 창조주이심과 유일한 구원자 되심을 세계만방에 확실하게 보여 주기 위함이라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사람을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시지 즐기시는 분은 아닙니다. 혹시라도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밥도 주고, 훈련도 시키고, 같이 놀고, 운동시키고, 항상 자식처럼 데리고 다니며 즐기고, 귀엽게 노는 모습을 감상하기 위해서 만드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착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애완용 같은 인간들을 위하여 독자 아들로 하여금 모진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시고 무지막지한 매를 맞도록 그냥 놔두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인류의 과거부터 미래까지의 모든 죄의 삯을 혼자 감당하게 하셨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데리고 놀고 싶어서 자녀를 가지려는 부모는 정말로 자식 키울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노래 부르는 것을 감상하고 싶어서 “노예”를 키울 수는 있지만, 노래 소리를 들을 목적으로 “자녀”를 키우는 정상적인 부모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자녀로 삼기 위해서 창조하시고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기대치는 예쁜 율동이나 소리를 내는 정도보다는 훨씬 높고 고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찬송을 불러야 할까요?

       신자들 중에는 찬송을 부르는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고 찬송을 부르는 분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막연히 갖고 있는 생각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찬송을 유난히 좋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찬송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찬송을 부른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찬송을 좋아하시고 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바라고 계시지만, 이런 것들이 찬송을 부르라고 명하시게 된 우선적 동기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것을 더 기뻐하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받을 때 좋아하고 자기 자신이 잘 될 때 좋아 하지만, 부모의 입장이 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줄 때, 또 자녀들이 부모보다 더 잘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부모의 기쁨이 아닙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찬양을 기뻐하시지만, 하나님 자신 때문은 아닙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물들을 바치면서 하나님이 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오해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답답하셨던 하나님께서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고 책망하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단순히 받고 싶으셔서 제물을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심령이 제물을 바치는 과정을 통하여 바로 고쳐지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입술을 통하여 듣기 원하시는 찬송도 하나님이 받으시기 위함이 아니라, 찬송의 가사와 곡을 통하여 부르는 우리들의 심령이 바로 고쳐지고, 믿음에 굳게 서고, 평화를 누리고, 지혜로워지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형성시켜줌으로 실질적인 삶과 심령이 온전히 변화되고 성숙해지도록 해 주시기 위하여 부르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치라고 하는 것은 전부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들을 위해서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헌금을 바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갖고 싶으셔서가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에게 더 주시고 싶으셔서 바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받고 싶은 마음이 많은 하나님이시라면,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정성을 다하여 지어 바치려고 했을 때, 좋아 하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하나님은 사실상 다윗의 제안을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생각하던 계획대로 마음껏 웅장하게 짓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설계도를 손수 만들어 보여주시면서 짓기는 솔로몬이 짓되 오직 설계도대로 짓도록 한정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정성껏 가장 멋지고 웅장하고 거대하고 화려하게 지으려는 다윗의 정성어린 마음을 물리치셨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라도 좋은 것을 주시려 하는 분이시지 받으려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받으시는 부분에서는 한계를 두셔서 지나치게 많이 바치고 불필요한 일을 하지 않도록 제한을 두셨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깊고 순수하고 선하신 의도를 모르고 불평을 늘어놓았던 사람이 가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바치라고 하신 것은 제물 자체를 받으시고 싶으셔서가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려 주시기 위해서 타락한 인간의 수치를 가려줄 가죽옷 때문에 희생당한 짐승을 제물로 받으신 것인데, 하나님이 받고 안 받으시는 것에만 신경을 썼던 가인은 자신이 나름대로 준비한 제물이 열납 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는 일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깊으신 뜻을 알지 못하면 이런 일들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CCM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받으려고 노래 부르라고 한다면 CCM의 취지, 방법, 방향이 다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가장 좋을 것들을 주시려고 찬양을 요구하신다면 대중적 음악에 기초를 둔 CCM은 신중하게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CCM과 같은 유행과 인기에 편승한 음악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려고 하시는 최고 최선의 음악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어서 노래 부른다면 CCM보다는 성령께서 신자들을 위해서 감동감화로 만들어 주신 전통적인 찬송가를 부르는 편이 더 합당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이런 노래는 부르고 저런 노래는 부르지 말라는 식의 명령을 주신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 음악의 장르는 아무 것이나 괜찮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아무 음악이나 교회로 끌고 들어와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에 해당하는 실수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음악을 중요하게 생각하든 안하든, 중요성을 인정하든 말든, 어쨌든 우리가 부르는 음악은 부르는 것과 동시에 당장 우리와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실질적이고도 확실한 영향력을 예외 없이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냐고요? 우리들의 자녀들을 적어도 교회에 끌어와 앉혀 놓을 수 있을 만큼, 또 마음에 드는 찬양을 부르는 교회를 따라서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겨 다니게 할 만큼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미미한 힘이 아니라,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음악을 쉽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음악은 부를 때는 내가 부르지만, 부르고 나면 음악이 나를 사로잡아 끌고 다니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노래든지 그 노래의 곡조와 가사는 나름대로의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노래의 쓸쓸한 곡조는 부르는 사람을 쓸쓸하게 만들고, 노래의 경쾌한 곡조는 사람을 경쾌한 기분을 갖게 만들고, 행진곡조는 힘을 줍니다. 노래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국가 가사는 나라를 생각하게 해 주고, 이별을 노래한 가사는 부르는 사람을 우울하고 쓸쓸하게 해 줍니다. 곡조와 가사가 우리에게 분명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음악을 선택할 수도 있고, 부를 수도 있고 안부를 수도 있지만, 일단 불러 놓은 음악의 곡조와 가사는 우리에게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자동차를 다루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차에 타서 발동을 걸고, 가속 페달을 밟고 브레이크를 밟음으로 육중한 자동차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게도 할 수 있고 멈추게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움직이고 있는 자동차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붙잡고 멈추게 만드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움직이기 시작한 차를 붙잡아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일단 불렀다 하면 그 다음은 자신이 부른 음악의 영향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들이 세상 유행가를 장난삼아 불러 보는 것에도 될수록 삼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를 때는 내 마음대로 부르는 것이지만, 일단 부르고 난 다음에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자신이 스스로 불렀던 노래의 영향을 노래 부른 사람 자신이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곡이 그 곡을 부른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좋은 영향만 준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될 수 있으면 자주 불러야 한다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음악을 주신 이유는 주신 음악을 사용함으로 신령한 양식을 공급받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악으로부터 보호받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성장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부르기 싫어도 찬송을 부르면 찬송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에게 일어났던 일을 참고해 보시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행을 일삼던 여호람왕이 자기 마음대로 모압을 치기 위해 떠난 후 절박한 위기를 맞게 되자 엘리사를 찾게 됩니다. 하지만 선지자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뜻을 물어봐 달라는 악인 여호람의 뻔뻔스러운 부탁을 받고는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아서 도저히 기도를 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했던 일이 거문고 타는 사람을 불러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호람 왕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도무지 입을 열고 싶지 않았지만, 거문고에 맞추어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고 성령의 감동이 임하여 예언의 말씀을 받아 선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르기 싫어서 안 부르고, 오직 부르고 싶은 곡들만 부르고, 더구나 아모스 선지자가 지적해 주신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악기를 만들어서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대로 마음대로 이 노래 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신실한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마음을 열게 해 주기 위해서, 성령의 감동을 덧입게 해 주기 위해서, 길을 인도해 주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찬송들을 혹시 부르기 싫을 때에라도 열심히 부르는 것이 우리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성도다운 태도이고 믿음이고 지혜인 것입니다.

       찬송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좀 헤아려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최고 최선의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부르라고 준비해 주신 찬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복음성가를 선호하시는 분들이 “CCM의 정당성 여부는 부르고 듣는 사람들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본질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찬송가와 같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앞선 것입니다. 차라리 CCM이 더 진보적이고 현대적이라서 더 크게 역사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지금 세상에서 헤매고 있는 세대들에게 친근감을 주어 설득력 있게 접근하기에 가장 적합한 복음전파의 도구이며, 앞으로 올 세대를 준비하는 것이고,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음악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에서 부르고 안 부르고를 결정하는 문제를 단순히 문화적인 이슈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준비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불러다 놓고 “이제부터 너희들이 다 알아서 하라! 나는 너희들이 드리는 예배를 즐기겠다!”라고 하시는 분이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잔치 장소와 음식과 예복까지 미리 준비하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고려한다면 자기 마음대로 준비해서 자기가 드리고 싶은 것을 자기식대로 드리는 것은 초대하신 분을 자기도 모르게 무시하는 것이 되고, 도리어 성령을 근심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을 키워보신 분들 중에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아무리 좋은 것으로 외식을 시켜 주고 싶어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무엇을 먹고 싶니?’ 하고 물었더니 무조건 햄버거를 사 달라는 거예요……. 아이들이 원하니까 사 주긴 했지만……. 조금 아쉽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좋은 것을 주려고 불렀는데 별로 주고 싶지 않은 것을 요청 받았을 때의 부모 마음을 솔직하게 말한 것입니다. 좋은 찬송을 준비해 놓으시고 부르라고 하는데 “저는 문화적 배경이 달라서 잘 맞지 않거든요! 그런 것보다는 제 나름대로 정성껏 준비한 좋은 것이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좋아하실 줄 믿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초대한 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고, 내 생각만 하는 것은 성숙된 신자들이 가질 태도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독생자 아들의 목숨까지도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깊은 사랑을 받아드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존중하고 따를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 (삼상 2:30) 라는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의사를 존중하고 따르는 자세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종이 아름다운 노래보다 낫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들은 노래 잘 부르거나 값진 제물을 많이 드리던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참고해 볼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노래 자체가 아니고, 노래에 의해서 만들어진 올바른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찬양도 좋고 경배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는 한,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께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으로 기쁘시게 해 드리겠다는 생각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생각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순종 없는 찬양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무겁고 더 불편하고 더 답답하게 만들 따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지 않으면 아무라도 예수님께 올 수 없다고 하신 말씀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기뻐하시고 이미 사랑하셔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겠다고 하는 것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찬송을 부르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성령께서 찬송작곡자와 작사자 개개인의 삶속에 주인으로 좌정하셔서 모든 일들을 이루어 가시면서 함께 땀 흘리시고, 함께 울고, 함께 피 흘리시며 만들어 주신 찬송을 부르면서, 그 찬송을 부를 때마다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권세와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겸손하게 순종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런 저런 찬양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애쓰기 보다는 하나님이 준비해 주셨다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인증 받은 전통적인 찬송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부르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_세  운  돌    7/3/2007_________________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잠 22:28)
Remove not the ancient landmark, which thy fathers have set.


출처: USA 아멘넷/ 공부합시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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