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독교 강요

 

1) Inst 1536.

 

칼빈의 초기 작품인 1536년판 강요에서부터 성령의 은사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매우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칼빈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3위1체중에서 ‘성령론’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잘 정리해야 성령의 은사 부분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본 논고에서는 칼빈이 제시한 성령의 은사를 중심으로 분석하지만, 중간 중간에 성령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에 대해서 함께 서술하는 형식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먼저 1536년판의 헌사 부분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칼빈의 입장이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즉 “3. 대적자들의 비난에 대한 논박 -- 새로운 것, 불확실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 과 기적들의 가치”란 제목에 당시 로마 카톨릭이나 재세례파의 입장과 다른 개신교의 독특한 입장을 변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기적을 요구함으로써 부정직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새로운 복음을 날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확정해 주고 있는 진리의 복음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비교할 때 그들은 이상한 능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기적에 의해 자기들의 신앙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평온했을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는 기적을 끝까지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우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그것들이 경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호는 기적에 의해서 든지 혹은 사물들의 자연적 질서에 의해서 든지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탄도 자기의 기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그것이 진정한 권능이라기 보다는 사기에 불과하지만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미혹하기에는 안성마춤의 것입니다. 마술사와 요술쟁이들은 항상 기적으로 유명했습니다. 우상숭배도 놀라운 기적들 때문에 더욱 조장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들에게 마술사들이나 요술쟁이들의 미신을 재가해 주시는 않습니다. 옛날의 도나투스주의자들은 ---- 그들도 기적에는 능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 어거스틴이 그때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우리 대적들에게 대답합니다. 거짓 표적과 기사를 가진 거짓 선지자들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하러 올 것임을 주께서 예언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기적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이 기적들은 우상이나 마술사나 혹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성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 사탄의 궤계임을 모르기나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 “유혹을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하는 것이 지금까지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아주 공정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 외에 우리가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 그런데 우리에게도 기적이 전혀 없지는 않은데 그것은 아주 확실하고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대적들이 자신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리키는 기적들은 순전한 사탄의 미혹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로부터 허망한 데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칼빈은 어거스틴의 역사를 들어 변증하면서 기적의 은사를 연속적으로 주장하는 자들의 성격은 처음부터 非기독교적 분파에 속한 성격이었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그리고 특이한 부분은 기적의 연속적인 성격을 하나님의 진노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과거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고 확증해 주는 도구로 쓰였으나 이제는 계시의 종결성과 함께 오히려 하나님께서 진노의 심판을 행하시는 수단으로 변화되었음을 성경의 증거를 통해서 역설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초판 전체 중에서 가장 명확하게 제시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렇지만 주께서 당분간만 나타나게 하셨던 다른 이적들처럼, 신유의 은사는 새로운 복음 전파가 계속적으로 놀라운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사라졌다”

 

2) Inst 1559.

 

Inst1559판에서도 성령의 은사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아주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는 4권 19장에서 로마 카톨릭의 다섯가지 잘못된 성례를 논하면서 이 성령의 은사에 대한 부분을 언급해 주고 잇다. 여기서 그는 초대 교회와 같은 성령의 은사는 이제 중단된 것임을 명확한 말로 증언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초대 교회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오직 복음의 존귀성과 또한 권위를 확증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이 완성된 지금은 그런 초자연적인 은사들이 더 이상 필요없음을 강조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복음의 완성을 통해서 초자연적인 은사가 중단되었음에도 로마 카톨릭이 계속해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계속적인 은사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밝혀주고 있다.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성령은 확실히 계신다. -- 그러나 사도 시대에 안수함으로써 주시던 기적적인 권능과 나타난 역사는 이미 중단 되었다. 그런 일들이 한때만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복음의 새로운 선포와 그리스도의 새로운 나라는 일찍이 들은 일이 없는 비상한 기적들에 의해서 조명을 받고 확대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주께서 기적을 그치셨을 때, 교회를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과 하나님 말씀의 존귀성이 이미 충분히 나타났다고 선언하셨다.

 

이 외에도 칼빈의 전체적인 신학적 구조 가운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먼저는 성경에 대한 논증 부분에서 성령과의 사역을 설명하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입장을 제시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 또한 1장에서 성령에 대한 광신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더욱이 성경을 떠나서도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달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오도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광란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최근에 경솔한 사람들이 더러 생겨서, 아주 거만하게 마치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는 것처럼 자랑하면서 성경 읽는 것을 전적으로 멸시하는 한편, 그들의 표현대로 죽은 그리고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교리를 감히 유치하고 천한 것이라고 멸시할 만큼 그들을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그 영이란 도대체 어떤 영인가라고 나는 묻고 싶다”.

 

위에서 칼빈이 지적했던 방식은 오늘날도 제시되는 신비주의의 전형적인 방식인 것이다. 즉 성령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인도를 더욱 중요시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것을 칼빈은 분명히 거절 했던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방식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역사의 경륜 가운데 예비되었던 방식임을 지적하면서 그것은 성령이 단독적으로 역사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실로 그 영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 영으로서 예수님께서 친히 과거에 말씀하신 것들을 저들의 마음속에 넣어 주시며 암시해 주시는 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무는 아직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용인된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의 마음에 인쳐 주는 데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여 주신 자신의 진리와 아주 굳게 결속하여 계시므로 그 말씀이 당연한 존경과 위엄을 받을 때에만 비로소 성령이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 자체가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확증되지 않는 한 우리에 대하여 큰 확실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내가 앞서 주장한 것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일종의 상호 결속 관계를 통하여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결합시키셨다.”

 

칼빈은 계속해서 이러한 방식은 성령이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상대로 인식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처럼 칼빈의 성령의 사역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보면 당연히 성경의 종결성과 함께 과거의 성경의 권위를 확증하기 위하여 사용하셨던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도 동일하게 더 이상 사용될 필요가 없기에 종결되었음을 주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성령의 은사를 연속성으로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성경의 권위성을 성령께서 완성시키지 못했다는 성경 계시의 종결성에 치명적인 도전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2. 주석

 

1) 마가복음16:17-18

 

마가복음에서의 표현은 오늘날 은사 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구절이다. 그러나 칼빈의 주석을 살펴보면 은사의 종결성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더욱 명백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즉 여기서 주님의 약속은 당시의 복음의 확장과 권위를 위해서 주어졌던 것이지 계속적인 사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도 이것은 신자들 개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매우 소수의 특정인에게만 주어졌던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나서 이 은사는 분명히 단절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이 임시적인 은사인가, 아니면 그의 교회 안에서 영원히 지속될 은사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당시 새롭고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던 복음을 밝히 드러내는 뜻에서 그 당시만을 위해서 기적이 약속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 물론 이 세상은 배은망덕 때문에 이 특권을 상실한 것이지만 이 기적의 진정한 목적은 출발점에 있는 복음의 교훈에 충분한 보장을 주려는 것이었다고 보겠다. 물론 이러한 기적의 용법이 그 후에 있어서 중지되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아니 그러한 실례가 아주 희귀하게 되어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공통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을 내리게 된다.

 

2) 사도행전2:1-4

 

마가복음에서처럼 사도행전 중에서도 은사 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문제시되는 부분이 있다. 즉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에 대한 연속성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칼빈은 당시의 성령의 은사는 마가복음에서 처럼 하나님의 경륜적 사역속에서의 사건임을 지적하고 있다. 즉 성경 계시의 종결성에 대한 의미를 늘 인식하고 각 구절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분명히 성경 계시의 종결과 함께 사라진 단회적인 사건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2절의 해석에서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불의 혀가 나타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보다도 차라리 우리들과 전체 교회를 위해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그들의 이익에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 그들이 그처럼 갑자기 변화를 받은 것은 우연히 된 것도 아니요, 자기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서 된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표적은 오늘 우리가 그것은 우리의 유익이 된다고 느끼는 것처럼 모든 시대에 유익이 되도록 결정지어져 있는 것이다. ----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해 주기 위하여 특수한 언어를 사도들에게 주심으로써 북음을 위한 전진의 길을 갖추어 주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하심이 반영되고 있다. ---- 이 일이 우리를 위해 된 것인데, 복음이란 것이 우연하게 우리에게 비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하심으로 되었음을 우리가 알게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맡겨 주신 가르침에 참여하지 못하는 국민이 하나도 없도록 여러 가지 언어를 사도들에게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을 부르신 부르심이 확인된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가르침에 권위를 더해 주는 일도 된다.

 

위의 칼빈의 표현을 살펴보면 철저히 이 사건이 하나님의 경륜의 역사에 준비된 복음을 확증하기 위한 사건임을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동일한 체험을 하는 방식이 아닌 역사 가운데 확증되어진 복음, 즉 성경계시가 우리에게 확증된 것이 우리의 유익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고리도전서12:1-31

 

본 장의 내용은 성경 가운데서 성령의 은사를 다루게 될 때 특히 많이 언급되는 장이다. 따라서 본 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며 적용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학적 입장이 나누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칼빈이 본 장을 다루는 방식은 그의 전반적인 신학적 입장을 잘 고려하면서 접근해야만 그의 입장을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 장의 주석 부분이 자칫 칼빈 자신의 입장을 불분명하게 표현한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전체와 또한 기독교강요의 내용을 비추어 보면 여기에서도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이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본 논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칼빈의 성령 은사에 대한 독특한 면을 여기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먼저는 칼빈의 은사에 대한 개념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칼빈이 사용하고 있는 은사의 개념이 오늘날 은사 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은사의 개념과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칼빈은 은사를 폭넓게 사용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성질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즉 어떤 것만 특별히 ‘은사’라는 명칭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 그 자체가 이미 성령의 행하심을 통하여 주어진 은사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에게 있어서는 은사가 연속되는가? 아니면 종결되었는가?라고 묻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칼빈은 하나님의 은사(은혜)는 결코 이 세상에서 끊이지 않고 영원히 계속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은혜가 없으면 인간은 존재 자체를 위협받기 때문인 것이다. 이 개념을 기초로 하면서 칼빈은 이 은혜의 역사속에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역사의 경륜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에게 있어서는 “은사의 종결” 개념이 아니라 역사의 경륜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스스로 단절 시키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임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래서 본 장에서도 표면상으로는 여러 가지 은사들이 소개되고 있으나 이중에서도 연속성과 단절성이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全 경륜적 방식에 따라서 차등이 생기는 것이다. 특히 여러 가지 은사들이 성경 계시의 종결성과 단절되는 것이 많으며 또한 연결되는 것들의 특징은 여전히 이 성경 계시와 연결해서 그 기능으로서 남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서 본 장과 또한 다음 장들을 살펴보면 칼빈이 무엇을 제시하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여기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징들은 당시의 교회의 기초를 세우며 또한 복음의 권위를 확증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진 것들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바울이 전체의 문맥과 흐름을 통해서 제시하고자 했던 것은 복음을 통한 성경 계시의 확립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는 이미 앞부분인 2장에서 그 기초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2장에와 다른 성령의 사역을 뒤에 가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여전히 동일하신 성령의 사역 방식으로서 12장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4) 기타

 

다음에는 주석 가운데서 성령의 은사와 관련된 칼빈의 주요한 표현들을 통해서 칼빈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① “여기서 우리는 기적에 대한 올바른 용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이 기적을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날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 독특한 관계를 깨뜨리지 말아야겠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도들이 말씀을 기적과 분리시키는 것은 잘못이요 하나님의 일에 대한 형편없는 오용이다.”

②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부여하셨던 병 고치는 은사가 그들의 자손들에게 물려 줄 유산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경우에 있어서 전도를 위한 보증이었다”.

③ (요10:41-2)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④ (눅16: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⑤ (요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⑦ (롐23:2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⑧ (신13:1-4)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3. Article.

 

1) 칼빈의 성유물에 대한 비판

 

칼빈의 성유물에 대한 비판 논고는 성령의 은사와는 주제에 있어서는 거리가 있지만 그 원리적 방식에 있어서는 칼빈의 성령론에 대한 이해를 갖게 해준다. 칼빈은 당시 로마 카톨릭을 통해서 미신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성유물 숭배 사상을 매우 강하게 비판했는데 그것은 이러한 방식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가르치고자 했던 방식을 깨뜨리는 행위로 보았던 것이다. 즉 신자들을 더욱 무지함과 우상 숭배로 이끄는 방식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은사주의 운동에 있어서도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접근하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성도들을 성경으로부터 단절시키며 무지와 미신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성유물이 단지 기념적인 것으로만 사용되지 않고 이것을 통해서 수많은 이적들을 함께 조장했기 때문에 오늘날 은사주의운동과 많은 부분을 같이하고 있다. 그리고 칼빈 자신은 성유물 숭배에 대한 비판의 성경적 근거 구절을 ‘살후2:11-12’에서 찾고 있는데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이견을 비판하는데 전형적인 구절이었던 것이다. 즉 이러한 형태들이 무수히 일어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멀어진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과 진노로 보았던 것이다.

칼빈은 더 나아가 오히려 구약에서조차도 이러한 미신적 행위들은 금지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구약에서도 일시적으로 사용된 여러 가지 방식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계시의 명령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더욱 드러내는 목적으로만 사용된 것이지 인간의 무지와 미신을 조장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형태들은 구약에서도 철저히 우상 숭배의 형태로 나아갔음을 성경은 명백히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진리와 연결되지 않은 형태의 은사적 방식들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거짓된 형태로 교회에 다가왔음을 칼빈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거짓된 형태를 어떠한 방식으로 대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칼빈의 말에서 그의 단호한 입장을 알 수 있다.

 

기독교 군주라면 그것을 조금은 생각해 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그들의 의무는 그들의 불쌍한 백성들을 혼미한 것에 그대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그것들을 보고 침묵을 지킨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못본체 한 것이 될 것이며, 또 그것을 막을 수 있음에도, 하나님이 조롱 당하고 있음을 허락해 두는 것은 매우 무거운 죄가 되기 때문이다.

 

2) 칼빈의 점성술에 대한 경고

 

점성술에 대한 것도 성유물의 논고와 매우 비슷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살후2:11-12에서 그 근거 구절을 찾아오며 또한 이러한 방식도 동일한 하나님의 진노의 방식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오늘날 ‘예언’의 형태에서 같은 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주로 점성술이 개인과 인류역사에 대한 미래의 일에 대해서 점을 쳐주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했던 것처럼 오늘날 소위 ‘예언’이라는 형태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이러한 거짓된 예언적 활동이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대 교회에도 늘 도전하는 형태로 있었음을 지적하고 또한 이 역사의 기초는 바벨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의 계시와 분리된 예언적 활동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서 온 것임을 분명히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로부터 오늘날 수많은 광란적인 환상들이 생겨나고, 게다가 그것들을 마치 하늘로부터 내려온 계시인 것처럼 받아 드려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이단과 어처구니없는 망상, 잘못되고 유해한 생각의 직접적인 원인은 교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리에 복종시키기 위해 마련하신 정확한 규범을 온전히 지키지 않는자들을 각종 바보 같은 행위에 내어버려두심을 이상한 일이 아니다.

 

 

4. 결론

지금까지 칼빈의 성령 은사론에 대한 입장을 살펴본 것처럼 칼빈은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불명확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전체적인 신학적 구조 가운데서 접근해서 이해할 때는 비록 어떤 부분에서는 조금은 불명확하게 보일지라도 결코의 그의 입장은 불명확하지 않고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크게 3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위의 고리도전서의 설명에서 제시되었던 것처럼 칼빈은 은사의 개념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연속성이냐 단절성이냐로 보지 않고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이끌어가는데 있어서 본질은 같지만 역사적인 경륜 가운데 처리 방식이 다른 하나님의 사역 방식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이 의식법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신약과 오늘날은 성경 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어떤 것이 단회적으로 쓰였고 또는 교회의 통치를 위해서 어떤 것이 영속적으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지를 바로 여기서 찾고 있는 것이다. 즉 성경의 계시가 완결되었기에 이것과 연결된 은사들은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과제는 오늘도 계속적으로 연결되는 것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세밀히 살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둘째로는 이러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역사 가운데서 성경과 성령의 관계를 분리 시키고자 했던 방식은 철저히 마귀적이며 비기독교적인 방식임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은사주의 방식을 주장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지류에 있었는지를 바로 살피게 되면 엄청난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 가운데 이러한 방식은 끊임없이 이단으로 정죄되어 왔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은 성경과 성령이 하나로 연결된 형태인 것을 지적하고 있다. 즉 성령의 수많은 은사들은 또한 성령께서 오늘날도 수많은 은혜의 형태를 부으시는 목적은 인간들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로 다가가서 그곳에 머물도록 하시기 위함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오순절의 잘못된 성령론에 대한 개혁주의의 바른 성령론과 구원과 관련하여 가장 주된 사역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역사적으로 개혁주의에서는 위에서도 밝힌 것처럼 철저히 삼위일체 가운데서의 성령의 자리를 먼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즉 성령의 독립적인 자리를 주장하는 것은 늘 이단의 형태로 제시되었으며 성경에서 제시하는 바른 성령관은 자체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으시고 성부와 성자의 관계 가운데서 성령의 의미가 설명되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의논과 결정 가운데서 사역하시기로 정해지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와의 사역에서 벗어난 성령의 독특한 사역은 인정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 가운데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한 수단으로 결정한 말씀과 연결되어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사역하시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성령의 바른 사역에 대한 자리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우리는 다시 이해하게 된다. 칼빈은 교회론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들이 무지해서 주의 입에서 듣고 배운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진리의 영을 그들에게 약속하시며 모든 일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그들을 인도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입으로 가르치신 것을 제자들에게 생각나게 하는 일을 성령에게 맡기셨으니 우리는 이 한계에 깊이 주의해야 한다” “이 영은 오류와 무지와 허위와 암흑의 영이 아니라 확실한 계시와 지혜와 진리와 광명의 영이시며, 이 영에게서 그들은 그 받은 것에 대한 진상을 배우게 된다” 또한 칼빈은 4권 8장 13항에서 “말씀과 성령은 분리될 수 없다”라고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그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기억할 것이다. ---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그의 영에게서 기대할 것은 그가 가르치는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춰주시는 것뿐이라고 언급하신다. 따라서 크리소스톰의 다음의 말은 가장 적합하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자랑하지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 성령을 운운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예언자를 따라 말씀하시기 때문에 자의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복음과 관계없이 성령의 이름만으로 제시되는 것은 일체 믿지 말아야 한다. --- 성령은 복음의 완성이시다. 이제 우리는 논적들이 성령을 자랑하는 것이 잘못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이상한 교리를 추천하기 위해서 성령의 이름을 사용할 뿐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끊을 수 없는 유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결합되기를 원하시며, 그리스도께서도 교회에 성령을 약속하실 때에 이 점을 확언하셨다. 주께서는 교회에 근신할 것을 명령하셨고, 교회가 항상 이 신중한 태도를 계속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무엇을 가감하는 것은 금하셨다. 하나님과 성령이 주신 이 신성 불가침의 명령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의 원수들은 말씀과는 별도로 성령이 교회를 지배하시는 것같이 말한다.”

이처럼 개혁주의 안에서 성령의 구원적 사역은 말씀과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역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여기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자리는 바로 이 사역을 위해서 끊임없이 일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택자의 전 삶의 과정 속에서 성령의 자리는 말씀과 함께 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어떤 것을 할 때라도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때에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 “우리의 사상과 우리의 언어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하겠다.” 이러한 정신이 골로새서에 명확히 증거 되고 있다. (골3:16-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또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도 주기도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설명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전능하심, 지혜, 인자, 의, 자비와 진리가 빛나는 하나님의 모든 일 가운데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인하여 모독함을 받지 않고 존경되고 찬양되도록 우리 전 삶과 생각과 말과 행동을 올바르게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바른 사역은 신자의 전 삶속에서 그가 말씀을 통하여 올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 수 있도록 그를 이끄시고 다스리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령의 사역을 개혁주의에서는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고백가운데 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바른 성령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위와 같은 의미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마감하면서 발체자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증거하신 진리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고 싶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여전히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진리를 유혹에 타협하지 아니하고 순수한 그대로 간직하고 섬길 자신의 백성을 세우시기를 원하시고 계심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즉 참된 진리를 빛내기 위해서 거짓된 것들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