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H. 스펄젼의 회심 간증

- C. H. 스펄젼 -

 

내 나이 겨우 20세 안팎이었지만 내가 겪었던 그 무서운 심적 고민과 고통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 고민 가운데서 오년을 헤맸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공포를 직접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 있다면 나야말로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죤 번연이 쓴‘넘치는 은혜’속에 묘사된 그 실상이야말로 바로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번연이 빠져들어간 그 구렁속으로 내가 들어가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더라도 내가 허우적거렸던 그 깊이 속에 번연 역시 들어가보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나의 세계는 태양 없는 하늘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죄가 너무 중하여 다시는 소망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기도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기도했는지 하나님만은 아십니다. 그러나 응답은 희미한 별빛만큼도 새어나지 않았습니다.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약속은 성경의 모든 무서운 경고보다 더욱 더 내 마음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복락이었고, 뺐都� 전혀 관계없는 사실임을 나는 확신했던 것입니다.‘나는 아무리 재어 보아도 죄인이다. 그런 약속은 죄인 아닌 사람들,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것이 아닌가!’이래서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사연 속으로만 곤두박질해 들어갔었습니다.

나의 이 고통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얘기해준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게 하나님을 가르쳐주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려주었고, 영생과 영멸을 깨닫게 했고, 내가 죄인인 것을 알려 주었으나, 내게 복음을 말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소위 기독교 국가에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비록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고 누구든지 값없이 받을 수 있는 복음의 단순성을 충분히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내가 살던 도시의 곳곳에 있는 교회를 다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말이지만 복음 그대로를 설교한 설교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자들을 원망하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설파했습니다. 나는 그 설교에 공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구원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죄인에게 그런 것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입니까? 또 한분 훌륭한 목사님은 늘상 율법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 밭을 갈아놓고 씨뿌리기만 기다리고 있는 내 심령에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나는 죄인인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을 확신하고 구원 받을 길만 일심으로 애쓰고 있는 터였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분은 아주 실제적인 내용의 설교가였습니다. 마치 임전태세인 군인들 앞에 이것 저것 마지막으로 명령하는 사령관과 같았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나같은 자에겐 그런 좋은 권고와 격려도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는 말씀이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대관절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만 없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여전히 그와 같은 미궁 속을 헤매고 다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날 일요일 아침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큰 눈바람을 보내주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날도 그 어둠과 실망속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날 아침도 나는 또다시 나의 영적 해결을 위하여 어떤 교회로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나빠 가던 중도에서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걸어갈 수 없었던 나는 좁은 골목길을 꺽어 부근의 작은 예배실로 들어갔습니다. 초기 감리회의 보잘것 없는 예배실로써 모인 사람들이라야 고작 열서너명 되었습니다. 설교자는 그날 아침 일기 관계로 오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눈보라때문에 길이 차단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가난한 직공 차림의 한 남자가 대신 설교하러 강단으로 나가는 참이었습니다. 재봉공인지 또 구두장이인지 하여튼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설교자라면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아야 좋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런 표준에서 볼 때는 아주 얼뜨기란 평을 들을만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택한 본문 외엔 무슨 말을 엮을지 통 모르는 이였습니다. 그것 빼놓고는 지식이라곤 전혀 들어있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그가 선택한 본문은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Look unto me, and be ye saved, all the ends of the earth: for I am God, and there is none else. (Isaiah [KJV] 이사야 45:22)’ 이었습니다. 그는 발음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한 줄기의 서광을 던져주는 듯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게도 희망이 비쳐진 듯 한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모로 보나 이 말씀 참으로 간단하지 않습니까,‘보라!’(이사야 45:22의 국역‘앙망하라’는 영역으로는 눈을 들어 단순히‘보라’는 뜻으로 되어 있음. 원어인 히브리어‘파나’도‘얼굴을 돌린다’, ‘얼굴을 대한다’등이 주요 뜻으로 되어 있음)‘보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보는’데 단돈 십원도 들지 않습니다. 세상 고금 없는 바보라도 다‘볼’수는 있습니다. ‘보기’위하여 대학교 공부하는 사람 없습니다. 여러분들이나 또는 누구든지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말씀하시기를‘나를 보라’하십니다.”

 

그가 너무 열중한 나머지 영국 남동부 지방 사투리가 튀어 나왔습니다.

 

“거참, 당신네들은 대개 모두 당신네들 자신을 본다말이여. 거기 볼 필요 없당께. 아, 아무리 당신네들 자신을 봐두 신기한 꼴 못본다말이여! 어떤 사람은 또 하나님 아부지를 보네그랴. 아부지 하나님은 차츰 보란 말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나를 보라’그 말이여. 당신네들 중 어떤 사람은 또 이런 말을 하네그랴,‘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보지.’이런 재변이 있나, 지금 당장은 그 일허구 상관이 없단 말이여. 그리스도를 봐요. 여기 있지 않나배,‘나르르 보라’구.”

 

그리고 이 고마운 사람은 본문 귀절을 양 팔을 벌려 제스쳐를 써가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나를 보라. 십자가에 달여 있는 나를 보라. 보라! 죽어 묻힌 나를 보라, 나를 보라, 부활하는 나를 보라. 나를 보라, 승천하는 나를 보라, 아버지의 오른 쪽에 앉은 나를 보라, 나를 보라! 나를 보라! 나를 보라!”

 

이 정도로 이어나간 후, 그리고 또 여남은번 되풀이한 후, 그 사람은 이제 밑천이 딸렸습니다. 그럴 때 그는 복도 쪽에 웅크리고 앉은 나를 발견했습니다. 사람이 워낙 적게 모였던지라 그는 단번에 낯선 사람을 가려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다시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내게 대한 직접적인 것이었습니다.“젊은이, 자네 대단히 풀이 죽어 보이는군.” 딴은 사실이었지요. 그러나 강단으로 부터 내 몰골을 지적당하기란 과거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겐 실로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을 이었습니다.“자넨 언제나 그 모양인걸세, 살아도 그렇고 죽어도 그렇지, 여기 이 본문을 순종하지 않으면 말일세. 그러나 자네가 이 말씀을 순종하면, 이 순간 구원받을 수 있네.”

 

그리고 그는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젊은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보소!”나는‘보았’습니다. 그 자리, 그 시간에 나의 구름은 걷혔습니다. 흑암은 사라졌어요. 그 순간 나는 태양을 보았단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단순한 믿음을 그 자리의 그 어느 구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감격과 희열로 찬송 또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아아, 이전부터 그 이야기를 진작 내게 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그 지긋 지긋한 오 년을 허송세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원 얻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밖엔 없다는 이야기를!

 

챨스·스펄젼이 이생에서의 마지막 설교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오늘날까지 주님을 섬긴지 사십 년 하고 조금 더 됩니다. 단지 주님의 이름만 찬송할 뿐입니다. 그동안 나는 주님의 사랑만 받아왔습니다. 주님이 기쁘게 허락하신다면, 이곳 세상에서 다시 사십 년간을 기쁘게 계속하여 봉사할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나의 생활은 시종일관 생명의 약동과 평안과 기쁨의 충만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이라도 곧장 이 생활로 들어오시기를 나는 진심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오늘이라도 여러분이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모여들기를 기도하여 마지 않습니다.”

 

‘And this is the will of him that sent me, that every one which seeth the Son, and believeth on him, may have everlasting life: and I will raise him up at the last day.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John [KJV] 요한복음 6:40)


출처: 양무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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