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의 잘못

관용에 관하여

토저(A. W. Tozer)는 '관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오늘날 유행은 우리가 도량이 좁다는 평판을 얻지 않으려고 무엇이든지 관용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명령하셨던 아말렉의 왕] 아각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참아 볼 수 없으며(삼상 15장),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오류와 악을 용납함으로써 오는 시대를 위해 교회의 건강을 희생하는 길을 택하며, 이것을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이름으로 행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악의 자리들을 소란시킬 의무가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한 신실한 사랑에서 행해지는 곳에 큰 유익이 따를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일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하는 심사(審査) 때문에 손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을 가장한 소심함 때문에, 많은 교회에서 쓸데 없는 형식들과 비성경적 행위들이 계속되도록 허용되었고, 그것들은 마침내 점점 교회의 생명을 질식시켰고 교회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으로 [교회 문제들을] 심사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결점을 찾는 자가 되지 않고서는 결점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악한 시대에 하나님의 일이 순수하게 보존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A. W. Tozer, Berean Call, July 1998;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8.)

여러 가지 문제들로 혼란한 오늘날 교계의 현실에 사랑과 관용만을 부르짖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원수들을 이롭게 하는 것뿐이다! 교회 내의 오류들은 지적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잘못된 관용

G. 캠벨 몰간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배신 행위인 관용이 있습니다. 마비 상태를 낳는 화평이 있습니다. 교회가 일을 할 때 타협에 근거한 교제를 요청하는 자들에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떨어져 서 있는 것은 추방과 핍박을 낳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능력과 영향력을 유지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타협에 의하여 그 자신의 영향력을 파괴시켰습니다"(Calvary Contender, 15 August 1998).

오늘날처럼 교회들이 신학적, 윤리적으로 혼란하고, '잘못된 관용과 타협'이 많은 시대가 있었을까? 참으로 성도들에게 분별력과 신실함이 요구된다.

오류와의 연합--희미한 빛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중적 의무가 있다. 즉 '땅의 소금'이 되는 것과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많은 신복음주의자들은 낙태, 동성애, 음란물, 그리고 다른 악들과의 싸움에서 우리로 하여금 천주교인들과 힘을 합치기를 원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다른 이들과 함께 연합할 수 있지만,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종교적 방식으로 함께 행진하고 사역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불신자들과 멍에를 같이함으로써 우리의 '빛'의 역할을 절충하고 혼란케 하는 댓가를 치루면서 '소금'의 역할을 강화시키려는 위험을 본다. 하나님의 일은, 그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의 일이 아니다.

스펄젼은 말하기를, "오류에 연루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로부터 그 오류에 대한 어떤 성공적 저항을 할 능력을 취하여 갈 것이다"라고 했다. '신학적 차이점들을 제쳐놓고' 거짓 복음을 조장하는 천주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일하고 예배할 때, 우리가 어떻게 그들에게 구원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행위는 '빛을 말 아래 감추는' 격이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분리를 명령하신다(고후 6:14-17).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고, 소금을 강화시키기 위해 빛을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Calvary Contender, 15 September 1998.)

순결을 희생한 평화

참된 기독교적 일치는 공통적으로 믿는 고정된 성경 진리들을 믿고 주의하는 것을 포함한다. 오늘날 에큐메니컬[교회연합] 운동의 거짓된 일치는 '다양성 속의 일치', 다원주의, 그리고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섞는 것이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다'(약 3:17). "외적 일치와 복음 진리 사이에 양자 선택을 해야 한다면, 진리를 위해 일치를 양보해야 한다. 오류 안에서 연합하는 것보다 진리에 의해 나뉘는 것이 더 낫다." 그러한 분열의 책임은 진리를 떠난 자들에게 있다. A. W. 토저는 말하기를, "타협은 압박을 제거할 것이다. 사탄은 싸우기를 중지한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지의 댓가는 평화로운 침체의 삶일 것이다"라고 했다. (Calvary Contender, 1 April 1999.)

관용이 타협이 될 때

테리 아놀드(Terry Arnold)는 다음과 같이 쓴다: "오늘날 '관용'이라는 말은 새로운 사고 방식으로 찬미를 받고 있다. 기독교 세계에서와 기독교 교리에서 관용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요구가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의미한 바와 성취된 바는 흔히 관용이라기보다 타협이다. . . . 하나님의 율법과 그의 말씀을 타협하는 것은 죄이다! 중요한 교리들과 타협하는 것도 또한 죄이다! 거짓 교사들과, 사람들을 건전한 교리로부터 떠나게 하는 자들과 타협하는 것은 죄이다. 성경은 때때로 일치보다 분리에 관해 말한다.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해 관용하셨지만 결코 타협하지는 않으셨다. 사실 그는 흔히 논쟁에 휘말리셨다! 나는, 그들이 뒤에 더 큰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금 작은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소위 '화평케 하는 자들'을 주의한다. 많은 목사들은 사람들이나 그들 자신의 지위나 인기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어떤 문제들에 대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희생하는 관용은 타협에 이른다. 타협은 항상 본래의 표준을 낮춘다. 진리는 경계선을 가지고 있지만, 오류는 그것이 없다. 불행하게도 타협은 이제 덕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는 감정 상하는 일이 되었다"(Diakrisis, via Cheryl Dee e-mail, March 1999; Calvary Contender, 15 April 1999.)

불관용(不寬容)은 관용되지 않는다

오늘날 불관용의 사람은 관용될 수 없는 유일한 종류이다. 즉 만일 그가 '우익'(右翼)이라면. 그러한 사람들은 너무 정신적으로 병적이어서) 발언이나 종교의 자유와 같은 권리들이 주어질 수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미국의 공중 위생국 장관인 데이빗 샛처(David Satcher)는 미국인 전체 중 22퍼센트가 어떤 특정한 때에 '진단할 수 있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으며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그들의 생애 중 어느 때에 정신적 질병을 앓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야구 선수는 그의 정치적으로 부정확한 견해들 때문에 상담을 받아야 하지만, 브레이브즈(the Braves)의 소유주(좌익파 테드 터너)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증오의 발언'을 사용하며, '관용' 경찰의 감수성 훈련 상담을 피할 수 있다. (New American, 14 February 2000; Calvary Contender, 15 March 2000.) 기이해지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관용은 이제 중립성을 의미한다

다원주의는 강요된 중립성이 되었다. 거기에서는 아무도 다른 이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어떠한 생각도 표현해서는 안된다. 어떤 목사는 예배하는 이들에게 구도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성경들을 교회에 가져오지 말라고 요청하였다. 이것은 전도를 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도'는 많은 죄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선교 청년'을 포함하여) 많은 선교단체들은 새로운 접근방식을 시험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회심자들이 그들의 문화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옛날의 종교적 신념들과 행위들을 지니도록 허용된다. 와이 더블유 에이 엠(YWAM)은 이런 관념을 '메시아를 믿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실험하고 있다(Baptist Banner, May 2000; Foundation, June 2000; Calvary Contender, 15 June 2000).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관용해야 하는가?

"경찰이 범죄를 관용해야 하는가, 의사들이 질병을 관용해야 하는가, 법관들이 거짓 증언을 관용해야 하는가? 그러나 기타 다른 맥락에서는 미치광이짓일 관용이 영적 문제들에서는 명령된다"(Dave Hunt, The Berean Call, May 2000; Calvary Contender, 1 January 2002.)

극단적 중립

우리는 극단적 오른편과 극단적 왼편에 관해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극단적으로 거짓되고 극단적으로 불순종적이며 극단적으로 위험하다고 폭로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극단적 중립이다. 예전에 W. B. 라일리 박사는 말하기를, "중도적 사람은 20세기의 신학적 위협이다"고 하였다. 진리와 오류[선과 악]간의 싸움에서 중립성은 덕이 아니다"고 했다(Calvary Contender, May 2002.)

오류는 지적되어야

묵의 죄

스스로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정통적 기독교의 역사적 성경적 교리들로부터 심각하게 떠날 때, 우리는 게으르게 침묵함으로 서 있어서는 안된다(딤 1:9-11). 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것이며 그 오류의 전파자들과 그것을 듣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침묵하는 파수꾼은 없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파수군이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안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의 목자들을 '눈 먼 파수꾼들'이라고 부르셨고 그들을 '벙어리 개요 능히 짖지 못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사 56:10). 그는 그들의 그릇된 교리를 비난하지 않으셨고, 오직 그들이 경고했어야 할 때 잠자고 있었음을 비난하셨다. (Vantage Point, July 1998; Calvary Contender, 1 September 1995.)

현대 교회 문제들은 지적되어야 함

미국의 한 보수적 교단(GARBC)이 인준한 침례교 성경 대학 및 신학교의 교장인 밀로 톰슨 박사가 그 교단의 최근 연례 대회에서 캘버리 컨텐더 같은 현대 교회 문제들을 지적하는 소식지들을 '(남들을 중상이나 하는) 문제의 종이들'(scandal sheets)이라고 표현하고 그것들을 목욕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거기에 대하여, 캘버리 컨텐더 편집자 제리 허프만(Jerry Huffman) 씨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우리는 보도되고 있는 '타협'이 그것을 보도하는 것보다 '목욕'시킬 필요가 더 있다고 느껴야 한다. 보기를 원치 않는 자들처럼 눈 먼 자들은 없다! 그렇다. 캘버리 컨텐더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속임을 피하기 위하여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문제들'을 보도하거나 폭로한다는 의미에서 '문제의 종이'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수치스런 문제들 중의 하나는 '근본주의자들'[보수주의자들]이 신복음주의의 궤도 안으로 집단적으로 변절하는 것이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에큐메니칼 자유주의자들이나 포용주의자들과 교제하고 강단 교류를 한다. 이런 류의 타협이야말로 20세기 말의 가장 큰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힘주시는 대로, 우리는 심지어 개인적 조롱을 직면할지라도 계속 진리를 위해 서서 이러한 '문제들'의 나타남들을 보도할 것이다." (Calvary Contender, 1 August 1998.)

출처: USA 아멘넷/ 침묵의죄 님

댓글:

지나친 허용(extreme tolerance)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오래된 시대사조(in the spirit of the age)에 붙잡혀서 크리스찬은 어떤 강경한 입장을 취하여서는 안되고, 아무 것도 논쟁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논쟁도 하지(engage in polemics)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왜 진리의 긍정적인 면만 말하고 당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의견은 버리지 않느냐? "고 따지며, " 부정적인 것은 잊어버리고 모든것을 긍적적으로 생각하라, 왜 맑은 물에 돌을 던져 흙탕물로 만드느냐?(why not steer clear of controversy)"고 말합니다.

이런 풍조로 인하여 더 이상 성경적인 이슈들을 직접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방법으로 다루지 않게 되었습니다. 명확한 방법으로 진리를 선포하는 자는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최악의 경우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잘못되었다고 하면 불평분자로 낙인이 찍힙니다. 타협(compromise)하는 것이 미덕이 되었고 진리에 대한 전념(devotion to truth)은 남을 공격하는 것이다(offensive)고 말합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운동의 많은 이슈들이 타협되어가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명백하게 동성연애(homosexuality)를 거절합니다. 간음(adultery)에 대한 크리스찬의 입장은 전혀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할 것인가란 질문은 명백히 설명되었습니다. 성경은 어느 크리스찬이 다른 크리스찬을 세상의 법정에 서게하는 것을 아주 명료하게 금하였습니다. 이기심(selfishness)과 자만(pride)은 명백히 죄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것은 회색의 영역이 아닙니다. 타협할 틈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슈들까지도 크리스찬 방송, 크리스찬 텔레비젼, 그리고 크리스찬 서적에서 회색 영역으로 다루는 것을 계속적으로 듣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협상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많은 크리스찬 지도자들이 기꺼이 호의를 보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명확한 일들도 권위있게 말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진리와 오류, 지혜와 우둔,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는 선이 이런 방법에 의하여 제도적으로 말살되었습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크리스찬은 오히려 세상과 대조적인 견해(antithetical worldview)를 받들고, 진리와 윤리에 대하여 흑백의 명확함으로 대답할 수 있는 성경적인 올바른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이고 부동적인 진리가 없으면 구원(salvation)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협하고, 변하고, 허용하는 여론(tolerant opinion)은 Carrasco가 날마다 겪게되는 " 미치고 혼동이 되고 괴로운" 이슈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진리만이 구원(save)하고 죄를 씻어주고(sanctifies) 희망(hope)을 줍니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성경적인 진리를 옹호하는 이 세대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두려워 하고,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그리고 지나친 허용의 세대에 주님의 진리를 높이 들 수 있도록 주님께로 부터 오는 능력과 용기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By: JuNick 님의 댓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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